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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 뒤에 넘어진 사람 / 조상호 목사
전 세계 축구팬들을 흥분하게 만들게 될 2010 월드컵 축구대회가 이제 6개월 정도 남았습니다. 그런데 한국사람 입장에서 볼 때, 가장 흥분한 월드컵대회는 한국과 일본에서 거행되었던 2002 월드컵일 것입니다. 예선 통과를 목표로 했는데, 16강과 8강을 차례로 통과하고 4강에 진출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가장 흥분된 월드컵 대회가 2002년 월드컵이라면, 가장 안타까운 대회는 어떤 대회인 줄 아십니까? 한국사람 입장에서 볼 때, 가장 안타깝게 여기는 월드컵 축구대회는 1998년 프랑스 월드컵대회가 아닐까 합니다. 1998년 6월 13일 멕시코와 첫 경기에서 전반 27분 ‘왼발의 달인’이라고 불리 우는 하모 선수는 아시아 최초로 프리킥으로 선제골을 터뜨리며 영웅이 되었습니다. 이 골은 한국 월드컵사상 처음으로 뽑아낸 선취골이었습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잠간, 선취골을 뽑아낸 하모 선수가 불과 2분 후 미드필드 부근에서 멕시코의 라미레스 선수 뒤에서 백 태클하다가 퇴장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한국은 멕시코의 파상공세를 겨우 막으면서 전반을 마쳤지만, 후반에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끝내 1-3으로 패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외신들은 이렇게 보도했습니다. “1골의 영웅 하OO가 바보짓을 했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 월드컵 역사상 최초의 승리가 눈앞에서 날아가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리고 맥이 빠진 한국 팀은 이어서 네덜란드에게 0대5로 패하고, 벨기에와 1대1로 비겼지만, 44년 동안 목마르게 기다렸던 `사상 첫 16강 진출' 꿈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물론 당시 한국축구의 실력이 떨어졌던 것은 사실이지만, 전문가들은 하모선수가 퇴장을 당한 후 멕시코에게 연속으로 3골을 먹고 패한 것이 사상 첫 16강 진출의 꿈을 무너뜨린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고 하며, 지금도 매우 아쉬워하고 있습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골을 넣은 선수는 흥분을 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의욕이 지나쳐서 나중에는 불필요한 반칙을 범하게 되어 심하면 퇴장을 당하여 팀에 큰 어려움을 끼치기도 합니다. 이것은 축구 뿐 아니라, 야구도 마찬가지입니다. 홈런을 친 타자가 다음 타석에서 삼진 아웃 당할 확률이 높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전 타석에서 홈런을 친 선수는 다음 타석에서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주위에 보면, 큰 성공 뒤에 어려움에 빠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큰 승리를 거둔 뒤에 넘어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엘리야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그는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갈멜산에서 엄청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는 홀홀단신으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싸워 이겼습니다. 이러한 소식을 남편인 아합 왕으로부터 전해들은 왕비 이세벨은 분노했습니다.
그리고 한 사신을 통해 엘리야에게 협박 편지를 전해주었습니다.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2절) 이것은 무서운 협박입니다.
내일이 되면 떼죽음을 당한 850명처럼 자기를 죽인다는 것입니다. 무서운 협박과 공갈을 전해들은 엘리야는 하루 동안 달린 끝에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낙심과 절망 속에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 자신의 생명을 거두어달라고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850명의 거짓 선지자 앞에서도 조금도 굴하지 않고 당당했던 그의 모습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하늘을 향해 7번씩이나 끈기 있게 기도함으로 비를 내리게 했던 선지자 엘리야의 모습은 자취를 감추고 갑자기 겁쟁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무엇 때문에 그가 큰 승리를 거둔 후에 이처럼 넘어졌을까요?
그가 넘어진 이유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4가지 이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상황만을 의식했기 때문
그가 승리 뒤에 넘어진 이유는 눈앞에 보이는 상황만을 의식했기 때문입니다.
3절을 다같이 보겠습니다.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 곳에 머물게 하고”
여기에서 중요한 부분이 ‘그가 이 형편을 보고’입니다. 그는 문제만 보았을 뿐, 그 문제를 해결하시는 하나님은 보지 못했습니다. 이제 곧 이세벨에게 잡혀 죽게 될 것이라는 상황을 보았을 뿐, 자기와 함께 하시며 자기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문제였습니다.
그가 보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보기는 보았습니다.
그러나 잘못 보았습니다. 사실 엘리야가 지금 죽을 상황에 처한 것은 아닙니다. 갈멜산에서 850명의 선지자들은 거짓 선지자였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오늘 본문 앞에 있는 열왕기상 18장 39절을 보면,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야훼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훼 그는 하나님이시로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모든 백성들은 엘리야가 믿는 하나님이 참 신이라는 것을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850명의 거짓 선지자를 잡아서 기손 시내로 데려가서 죽였습니다. 백성들의 민심은 아합 왕으로부터 이미 엘리야로 넘어왔습니다.
요즘에도 민심에 따라 정책이 바뀌어지기도 하고, 정관들이 교체되기도 합니다만, 고대 시대에는 민심을 잃어버리면 반란이 일어나서 왕도 쉽게 교체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합과 이세벨은 엘리야를 쉽게 해칠 수 없었고, 오히려 상황은 엘리야에게 유리하게 진행되었습니다. 따라서 이세벨은 엘리야를 협박만 한 것입니다.
이세벨이 정말 엘리야를 죽이려고 했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몰래 테러리스트를 보내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세벨은 그렇게 하지 않고, 사신을 통해 공개적으로 협박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눈에 가시처럼 보이는 엘리야를 멀리 쫓아 보내기 위해서입니다. 그녀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는 엘리야를 자신들의 힘으로는 죽일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사신을 통해 협박함으로 엘리야가 멀리 떠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엘리야가 이러한 상황을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엘리야가 보기는 보았습니다. 그러나 잘못 보았습니다. 그는 문제만을 보았을 뿐, 자기와 함께 하시고 자기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엘리야는 그 동안 하나님의 역사를 많이 체험했습니다. 3년 동안이나 까마귀를 보내어 떡과 고기로 먹여주신 하나님, 사르밧 과부의 집에서 가루와 기름을 떨어지게 하지 않게 하셨던 하나님, 갈멜산 꼭대기에서 850명을 이기게 하셨던 하나님, 3년 6개월 만에 비를 내려주신 하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엘리야의 이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한 때는 태산도 옮길 것 같은 믿음의 사람처럼 보이다가도, 어느 날 갑자기 시험이 들어 낙심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치료해주셔서 병 고침을 받았을 때는 하나님만 바라보며 살겠다고 고백했음에도, 어떤 교우가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에 상처를 받고 주저 않아버릴 때가 있습니다. 시험을 잘 치르지 못해 고민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성적이 잘 나왔다고 감사했던 입술이, 아무 것도 아닌 일에 불평하는 입술로 바뀔 때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눈앞에 보이는 상황만을 의식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만 보고 문제를 해결하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엘리야처럼 문제를 해결하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문제만을 본다면, 넘어지지 않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아무리 신앙연륜이 오래되었다 할지라도, 엄청난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 할지라도, 목사 선교사로 오랫동안 사역했다 할지라도, 만약 엘리야처럼 상황만을 의식한다면 낙심하게 되고 넘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상황을 의식하기보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을 의식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 앞에 놓여있는 문제를 보기보다, 그 문제를 해결하시는 하나님을 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따라서 문제에 집중하기보다 문제의 해답이 되시는 하나님께 집중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의식함으로 말미암아 낙심을 낙심시키고, 믿음으로 승리하는 복된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피곤하여 탈진했기 때문
둘째로 그가 승리 뒤에 넘어진 이유는 피곤하여 탈진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아합 왕을 피해 오랫동안 떠돌아다녔습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까마귀를 통해 아침 저녁으로 떡과 고기를 공급해주시기는 했지만, 오랫동안 떠돌이 삶을 살다보니 매우 지쳐 있었습니다. 그런데다가 갈멜산 꼭대기에서 매우 긴장한 상태로 850명의 거짓 선지자들과 대결을 벌였습니다. 그리고 비를 내려달라고 땅에 무릎을 꿇고 일곱 번씩이나 간절히 기도하는 바람에 많은 힘을 소진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엘리야 선지자는 쉬지 않고 계속 일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래서 몸과 마음이 지쳐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850명과 당당하게 대결했고, 하늘 문을 열고 비를 내리게 했던 엘리야였지만, 그도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사실 인간의 몸과 마음은 생각보다 강하지 못합니다. 계속해서 긴장하고 끊임없이 스트레스를 받다보면 쓰러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현대인들은 정말 바쁩니다.
현대인들의 가장 큰 문제는 분주함입니다. 너무 많은 일에 매달려 지쳐 있다 보니 늘 분주하고 바쁘게 살아갑니다. 길을 가면서도 어떻게 하면 거래처 사람을 설득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합니다. 밥을 먹으면서도 끊임없이 Mobile Phone으로 통화를 하고 불법인 줄 알면서도 경찰 모르게 운전을 하면서도 통화를 합니다. 화장실에 갈 때도 그냥 가지 않고 서류 뭉치를 들고 들어가서 읽습니다. 하다못해 예배시간에도 머릿속에는 집에 가서 해야 할 일을 끊임없이 생각합니다. 항상 일을 하며 쉬지 않고 생각을 하며 늘 긴장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 날 갑자기 쓰러져 응급실에 실려 가서 오랫동안 병원 신세를 지는 사람들도 있고, 힘들게 번 돈이 병원비와 약값으로 다 들어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저도 가만히 쉬고 있는 것이 어색할 만큼 무척이나 일 욕심이 많은 사람인데, 이번 총회 기간 건강이 나빠진 목사님들과 사모님들이 많이 보았습니다.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총회장님도 건강문제로 3개월 정도 쉬셨다가 3주 전에 한국에서 돌아오셔서 사역을 재개하셨습니다. 어느 사모님은 암으로 오랫동안 투병하시다가 몸이 약간 좋아지셔서 어렵게 총회에 참석하셨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선교 가셨다가 비행기에서 쓰러지셔서 어려움을 겪었다는 말을 듣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엘리야처럼 너무 무리하다가 과로해서 생겨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몸이 피곤하면 마음과 영혼도 함께 피곤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몸이 피곤하면 기도에 집중하지 못합니다.
몸이 피곤하면 예배 시간에 시계만 자꾸 들여다보게 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대로 된 예배를 드리지 못합니다. 몸이 피곤하면 예배를 통해 은혜를 받기는커녕, 졸리기만 하고, 짜증만 납니다. 심하면 쓰러지고 맙니다.
엘리야가 그랬습니다. 엘리야는 피곤하여 탈진함으로 승리 뒤에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엘리야를 향해 “야, 네가 선지자냐? 꼴좋다. 한심한 놈 같구나!”라고 야단을 치셨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피곤하여 쓰러져 있는 엘리야에게 호통을 치거나 나무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천사를 보내주셔서 그를 어루만지며 위로하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맛있게 숯불에 구운 떡을 먹이고 시원한 물로 목을 축이도록 도와주셨습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그렇게 하셨습니다.
무엇을 교훈하고 있습니까?
주님은 피곤해하는 당신의 백성들을 이해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쉼이 필요한 자들에게 쉼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저는 음악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바이올리스트들은 연주를 마치고 나면 항상 바이올린 줄을 풀어놓는다고 합니다. 만약 줄을 풀어놓지 않고 계속 팽팽하게 해놓으면, 나중에는 바이올린에 금이 가든지 문제가 생겨 원래의 소리를 낼 수가 없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에게도 적당한 휴식이 필요합니다. 계속해서 일만 하면 결국 쓰러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강한 자도 쉬지 않으면 쓰러진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너무 쉬면서 게으름을 피우면 안 되겠지만, 적당한 휴식을 통해 재충전 받아 하나님의 일을 더 많이 감당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명을 망각했기 때문
셋째로 그가 승리 뒤에 넘어진 이유는 사명을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넘어져 있는 엘리야에게 천사를 보내어 위로해주시고, 세 힘을 공급해신 이후, 한 가지 사명을 주셨습니다.
15절과 16절을 보겠습니다.
“야훼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를 통하여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이 되게 하고,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여기 ‘돌이키라’는 말은 낙심을 하고 죽기를 구했던 자리에서 일어나 새로운 사명을 품고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감당해야 할 세 가지 사명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왜 세 가지 사명을 주셨는지 알 수 없지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저 앉아있는 엘리야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에게 사명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엘리야야, 너 아직 죽으면 안 된다. 너는 해야 할 일이 있단다.’
제인 애담스(Jane Adams, 1860-1935)는 시카고에서 부잣집 딸로 태어났습니다. 의사가 되고 싶어 의과대학에 입학하였습니다만, 그녀의 척추에 병이 생겼습니다. 고치기 힘든 병이었습니다. 의사의 권고로 휴양 차 유럽 여행을 떠났습니다.
런던 관광을 하던 중 우연히 빈민굴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가난한 아이들을 위하여 땀 흘리며 헌신 봉사하는 사람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하나님의 사명이 임하였습니다.
소위 calling이 임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나를 세상에 보내신 목적이다.’
그 후 그녀는 빈민굴에서 봉사하기로 결단하였습니다. 그리고 시가코로 돌아와서 빈민지역의 낡은 집을 하나 사서 탁아소로 개조하였습니다.
가출 소녀의 숙소도 만들었습니다. 글을 모르는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이 시카고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유명한 헐 하우스(Hull House)입니다.
그녀는 75세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을 때까지 척추병으로 고생하면서 봉사하였습니다. 쓰러지는 그 날까지 일하며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사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맡았기 때문이다.”
유대인 빅터 프랭클 박사는 그의 베스트 셀러 <그래도 나는 삶을 의미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에서 나치 수용소의 처절한 상황에서 불안과 공포를 이겨내기 위해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아름다운 일을 상상하고, 자연을 보면서 힘을 얻었던 경험을 소개합니다.
그는 그 경험을 통해서 한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왜 사는지를 아는 사람은 어떤 고난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또 카를 힐티는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라는 책에서,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발견하는 날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발견하는 삶이 행복의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삶을 행복하게 만드는 사명을 발견하셨습니까?
어떠한 고난과 역경도 이겨낼 수 있는 진정한 비전과 사명을 발견하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하늘로 승천하시기 전에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19~20)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을 복음증거자로, 세계선교의 주역들로 부르신 줄로 믿습니다. 우리를 주님의 몸인 교회의 청지기로, 또 사랑을 실천하는 사명자로 부르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생명을 허락하신 것은 아직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혼자라고 생각했기 때문
넷째로 그가 승리 뒤에 넘어진 이유는 자기 혼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그의 가족이나 친구들에 대한 언급하지 않고, 그냥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디셉 사람 엘리야’라고만 간단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의 곁에 가족이나 친척이나 친구들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항상 그는 혼자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했습니다.
다같이 10절을 보겠습니다.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야훼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여기 ‘나만’에 해당하는 원어 ‘바드’는 ‘분리되어 고립되다’는 의미로, 그의 고독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엘리야는 자기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주위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엘리야의 잘못된 생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항상 함께 하셨습니다. 그가 갈멜산에서 850명과 대결을 벌일 때도 그와 함께 하셨고, 그가 로뎀 나무 아래에 쓰러져 있었을 때도 하나님은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그를 위해 남겨 놓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18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이 말씀을 쉽게 정리하면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착각하지 마라. 내가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아니하고 신앙을 지키고 있는 7,000명을 남겨 놓았다, 그런데 왜 혼자인 것처럼 고독에 빠져 있느냐’ 엘리야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혼자가 아니라, 너를 위해 내가 준비해놓은 사람들이 있다, 착각하지 마라.’
어떤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대기업에서 승승장구하다 54세에 IMF를 맞아 해고 되었습니다. 그때 그는 가족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야 속이 후련하다. 내가 지금까지 오랫동안 회사에 매여 가족들과 좋은 시간도 못 가졌고 취미생활도 못했는데 이젠 가족과 함께 있는 시간도 많아지고 취미생활도 할 수 있어 잘 됐다.” 가족들은 정말 그런 줄 알았습니다. 실제로 그는 처음엔 여행도 가고, 가족과 함께 외식도 했습니다. 그러나 3개월쯤 후부터 완전히 말을 잃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3개월 내내 자살을 생각했습니다. 그때 쉽게 죽지 못한 이유는 가족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죽을 방법을 찾지 못한 것이 유일한 이유였습니다.
그의 54회 생일에 가족들은 아빠에게 힘을 주기로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날 네 식구가 조용한 찻집에 가서 아내가 먼저 말했습니다. “여보! 당신 54회 생일에 우리가 특별 선물을 준비했어요.” 그리고 봉투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습니다. 그 종이에는 그 동안 남편에게 고마웠던 일, 남편이 자랑스러웠던 일 54개가 적혀 있었습니다. 그 내용을 다 읽고 아내가 말했습니다. “당신은 내게 주신 하나님의 최고의 선물이었어요.” 곧 이어 대학생 딸이 아빠에게 고마웠던 54가지 일을 다 읽고 말했습니다. “저는 저를 이만큼 키워주신 아빠가 너무 자랑스러워요.” 아빠의 눈에 눈물이 맺혔습니다. 계속해서 고등학생 아들이 아빠에게 고마웠던 54가지 일을 다 읽고 말했습니다. “아빠는 우리 가정의 보석과 같은 분이예요.” 결국 그는 참았던 눈물을 쏟아내고 말았습니다. 다시 용기를 냈습니다. 자존심이 무너졌지만 자기에게는 아직 소중한 가족이 있음을 깨닫고, 다시 일어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든든한 남편과 아빠의 모습을 되찾아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혹시 이 자리에 엘리야처럼 아무도 나를 도와 줄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는 분이 계시지 않습니까?
나의 고민을 이해해줄 사람도 없고, 오직 나 혼자라고 생각하는 분이 계시지 않습니까?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세상 사람이 다 나를 버려도 하나님은 항상 나의 곁을 떠나지 않으시는 줄로 믿습니다. 아무도 나를 이해해주지 않아도, 하나님께서는 세상 끝날까지 나와 함께 하시며 나를 붙들어 주시고 나를 이해해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엘리야를 위해 7,000명을 남겨놓으신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을 위해 곳곳에 귀한 동역자들을 남겨 놓으신 줄로 믿습니다. 이 시간 옆 사람과 이렇게 고백하겠습니다.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라는 책 제 2권에 나오는 짧은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말씀을 맺겠습니다.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에 나는 집 근처 공원에 잠시 차를 세웠습니다. 그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동네 꼬마들의 야구경기를 구경하기 위해서였습니다. 1루쪽 벤치에 앉으면서 나는 1루 수비를 보고 있는 아이에게 점수가 어떻게 되느냐고 소리쳐 물었습니다. 아이는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우리가 14대 0으로 지고 있어요.” 내가 말했습니다. “그래? 그런데 넌 그다지 절망적이지 않아 보이는 구나.” 그러자 아이는 깜짝 놀란 표정을 하고 내게 말했습니다. “절망적이라구요? 왜 우리가 절망적이어야 하죠? 우린 아직 한 번도 공격을 하지 않았는데요?”
여러분, 실패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절망적인 생각이 듭니까?
아닙니다.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다시 일어나십시오.
전반전에 골을 넣고도 후반전에 잘못해서 패할 때가 있습니다. 반대로 전반전에서는 죽을 쑤었지만, 후반전에 열심을 내어 승리할 때도 있습니다.
사울과 솔로몬과 같은 사람들은 후반전 마무리를 잘 하지 못해 후반전에 실패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요셉과 모세와 여호수아와 갈렙은 마무리를 잘 해서 후반전에 성공한 사람들입니다.
이처럼 후반전이 중요합니다.
이제 우리는 한해의 마지막 달 둘째 주까지 마쳤습니다. 조금 있으면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됩니다. 이제 다시 힘을 내서 2,009년 마지막 마무리를 잘 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의 전반전도 중요하지만, 인생의 후반전은 더 중요한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문제에 집중하다가 주저앉지 말고, 문제의 해답이 되시는 하나님께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어떠한 고난과 역경도 이겨낼 수 있는 진정한 비전과 사명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과 사명을 발견했다면, 그것을 붙잡고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축복된 인생 후반전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