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편. 다윗의 시, 영장으로 현악에 맞춘 노래.
1절-2절: 하나님이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며 내 기도에 유의하소서 내 마음이 눌릴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
이 시는 성령에 감동되어 나오는 노래인데, 성령에 감동된 노래는 어떻게 나오는 것일까? 성령에 감동이 되면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느냐? 성령에 감동이 되면 어떻게 되느냐? 몸이 벌벌 떨리느냐? 몸이 흔들리느냐? 몸에 열이 나느냐? 머리털이 삐쭉 서느냐? 정신이 말짱해지느냐? 아무렇지도 않느냐?
보통은 성령에 감동이 되면 몸에 어떤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으로 생각을 하지만 그게 아니다. 그런 것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거다. 성령에 감동이 되면 정신이 초롱초롱하면서 분별이 되고 깨달아지는 것인데, 안 믿는 사람들은 사람이 몸을 벌벌 떨고 몸을 흔들고 하면 무슨 신이 들려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을 하듯이 예수 믿는 사람도 같은 사고방식의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다.
성령에 감동이 된 노래는 어떻게 들리느냐? 몸이 떨리듯이 덜덜 떨리는 소리일까? 성령에 감동이 된 것을 외형적인 목소리나 행동으로 나타난다고 생각을 하면 안 된다. 성령에 감동이 된 노래는 영원을 바라보는 노래다. 그 마음이 영원을 향해져 있고 신령천국을 향해져 있다. 그러면서 신앙의 결심이 있다. 진리이치와 구원도리가 들어있다. 기도를 하건 노래를 하건 내용이 이렇게 들어있다면 무엇에 감동이 된 사람이냐? 성령에 감동이 된 사람이다. 그 정신과 마음이 성령에 감동된 사람이다.
성령에 감동이 되면 기쁨만 솟느냐, 눈물도 나오느냐? 눈물도 나온다. 눈물을 흘리는 것은 악령에 감동이 된 거고, 하늘을 보고 실실 웃고 지나가는 사람을 보고 실실 웃으면 성령에 감동이 된 것으로 알면 안 된다. 성령에 감동이 되면 기쁨이 솟구치기도 하고, 분별이 들어가기도 하고, 죄 지은 것이 후회스러워서 회개를 하기도 한다. 문제는 그 마음인데, 마음이 어디를 바라보고 있고, 어디로 결심이 되었느냐? 세상 쪽이냐, 천국 쪽이냐? 성경 안에는 진리이치와 구원도리가 들어있다. 그래서 읽는 우리로 하여금 신령세계를 알게 하고, 구원을 이뤄가게 하고,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은 찬송이 나오게 한다.
다윗이 이 노래를 부를 때 우리나라 식으로 말하면 시조타입으로 부른 것 같다. 이 시가 음률을 맞춘 형태가 아니라 소설처럼 문장으로 되어있으니까 시조를 하듯이 불렀을 것 같다. 우리도 성경을 곡을 붙여서 읽으면 노래가 되는 거다. 우리가 성경을 그냥 읽는 것보다 음률을 넣어서 읽으면 감동이 다르다. 감동도 들어가고, 감격도 들어가고, 눈물도 나온다.
노래를 한 번도 안 불러 본 사람이 있느냐? 사람은 노래가 있는 게 좋다. 사람이 노래를 안 부르기 시작하면 안 불러진다. 말을 안 하기 시작하면 안 하게 된다. 반대로 말을 하기 시작하면 자꾸 말이 나온다. 그게 버릇화 된다. 좋은 버릇은 기르는 게 좋다. 다른 사람을 향해 늘 원망이 들어있고, 자기 한탄, 세상원망을 하고 있다면 이 사람은 무슨 마음으로 살까?
어릴 때부터 꼼짝도 못하게 억누르는 집에서 자라게 되면 커서도 기를 못 편다. 그렇다고 해서 어릴 때부터 아이의 기를 죽이지 않겠다고 그냥 내버려 두면 커서 제 멋대로 나간다. 성경은 어릴 때는 매를 때려서라도 바로 잡으라고 한다. 사람이 어릴 때부터 억눌림을 받으면 커서도 희로애락의 맛이 없는 사람이 된다. 교회에서는 성도들을 주님 안에서 옳은 것으로 활활 피도록 적극적으로 풀어줘야 하고, 불건전하고 긍정적이지 못한 것은, ‘죄악적으로 흐르겠구나’ 하는 것은 차단을 하고 바로 잡아줘야 한다.
자기가 성인이 된 후에 어머니 아버지 형님 언니 오빠가 자기 보기에 정확하지 못하고 바르지 못한 것이 발견이 되면 자기에게도 그런 면이 없는지 살펴보고 스스로 고쳐 나가야 한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해서 고쳐나가는 거다.
교회 안에 성령의 감동이 아닌 노래도 많다. 타락적 기존적 지식에서 나온, 그 마음에서 감동이 된 종교적인 노래가 있다. 노래의 속도를 조절하여 사람의 정신을 뺏어서 몸짓으로 몰고 가는 노래도 있다. 일반노래는 말할 필요가 없는 거다. 일반노래가 성령에 감동된 노래냐? 아니다.
성령의 감화와 악령의 감화가 있는데, 성령의 감화와 악령의 감화에는 각각 일반 보편적 감화와 특수적 감화가 있다. 성령의 일반 보편적 감화는 자타의 구원을 위한 마음을 품은 상태에서 일반적인 좋은 마음으로 생활을 하는 것이고, 성령의 특수적 감화는 주님을 위해 순교를 당한다거나, 생명을 내대고 복음을 전하는 것이나,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결심 등등이다.
그리고 악령의 감화도 일반 보편적인 악령의 감화가 있고 특수적 악령의 감화가 있는데, 평소에 일반적인 마음으로 생활을 하는 것은 악령의 보편적 감화로 사는 거고, 어떤 사건이나 환경에 부딪힐 때 자기 속에서 성질이 팍 나거나 악한 마음이 솟구쳐 올라오거나 하는 등은 악령의 특수적 감화가 되는 거다. 앞에서 말한 교회에서 찬송을 빨리 불러서 사람의 마음을 부풀리고 흥분을 시키는 것은 악령의 특수적 감화다.
‘이 세상 험하고 나 비록 약하나’ 하는 찬송을 빨리 부를 수 있느냐? 찬송을 할 때 은혜가 되어서 빨리 부를 수도 있는 건데 이게 아니라 노래의 속도에 사람의 감정을 맞추게 되면 가사가 주는 은혜는 없이 사단의 장난에 휘말리게 된다. 사단 마귀의 역사가 조용히 있는 사람에게 쑥 들어가서 마음을 막 요동케 하는 게 아니다. 그 사람이 뭘 좋아하는지? 그 사람의 성격과 성질에 편승을 해서 역사를 한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의 감정을 조절을 할 수 있는 지능, 기능, 지식, 지혜, 도덕성이 중요하다. 사람의 흥분을 일으키는 노래, 원래 자기의 음성이 아니라 가음성으로 부르는 노래. 이런 것은 거짓된 영에 감동된 노래들이다.
1절: ‘하나님이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며 내 기도에 유의하소서.’ 우리 궁극교회 교인들은 이런 기도를 하고 있느냐? 하나님께 ‘내가 무슨 기도를 하는지 잘 들으셨다가 내 기도에 응답해 주소서’ 라고 기도를 하느냐? 다윗은 이런 기도를 했는데 여러분들은 이런 기도를 안 하느냐? 다윗이 왜 이렇게 표현을 할까? 우리에게 뭔가를 상기시키는 기도다. 그러면 이 기도가 나에게 뭘 상기시켜 주는 것 같으냐? 기도를 할 때 아무렇게나 하라는 거냐, 분별을 하라는 거냐? 분별을 하라는 거다.
부르짖음은 뭔가 중요하고 심각하고 급할 때 나온다. 이방세상은 인명과 재산에 손해가 나려고 할 때 마음이 급해지니 부르짖음이 나오고, 또 손해를 입은 것이 원통해서 부르짖음이 나온다. 예수 믿는 성도의 경우 영적인 면에서의 고상한 부르짖음이 있다. 자타의 신앙이 성장되고 주님처럼 속성이 입어지길 원하는 자타의 이룰구원에 관한 부르짖음의 기도는 고상한 기도다. 이게 아닌 육을 위해서, 세상살이를 위해서 하는 기도는 저질적인 기도다.
영적 이스라엘이 구원 면을 놓고 심각하게 부르짖는 기도는 참으로 값비싼 기도요, 귀한 기도요, 제일 좋은 기도요, 고차원적인 기도라서 금대접에 담겨서 올라가는 기도이고 성령에 감동이 된 기도다. 금대접에 담겨져 올라간다는 것은 귀한 기도라는 뜻이다.
거짓 종들이 판을 치는 말세의 교인들의 부르짖음이 무엇이냐? ‘말세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라고 했는데, 말세를 사는 믿음이 없는 교인들, 믿음이 없는 집사들, 믿음이 없는 장로들, 믿음이 없는 목사들, 이 거짓된 자들의 부르짖음이 무엇이냐? 기독교인만 기도를 하는 게 아니다. 이단자들도 기도를 한다. 이종교인들도 기도를 한다. 나무 밑에서 빌던, 바위 밑에서 빌던, 별을 보고 빌던, 달을 보고 빌던, 이런 게 다 기도다. 자기의 소원성을 놓고 비는 게 기도다. 그런데 어디에 가서 무엇을 놓고 누구에게 빌던 이단자들과 이방 종교인들은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을 가지기 위해 빈다. 그러면 거짓된 교인들이 기도를 하면 어떤 기도를 하겠느냐? 자타의 이룰구원에 관한 신앙 면에서의 기도인지, 아니면 육적인 세상생활, 경제 면의 기도인지? 어느 거냐?
다윗은 무엇을 놓고 기도를 하고 있느냐? 하나님께서 다윗을 사랑했다. 다윗을 높이 올렸다. 다윗이 세상적인 사람이고, 세상 것을 구하고, 맨 그런 소원 목적을 가지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왕이 되라고 하루아침에 다윗에게 기름을 붓는 거냐? 예수 믿는 사람치고 다윗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그래서 ‘나도 다윗처럼 되어야지’ 라고 한다면 ‘다윗이 누구의 마음을 가졌으며,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 이런 면을 생각을 하면서 다윗을 닮고 싶어 해야지 이건 없이 ‘김다윗이니, 박다윗이니, 조다윗이니’ 하고 자기 이름을 바꿔 부른다고 해서 다윗의 신앙이 되는 거냐?
자기가 다윗이 되려면 다윗의 마음을 가지면 된다. 그러면 겉모양만 다르다 뿐이지 다윗의 속마음을 가진 자가 된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들어서 자랑을 하는 것은 ‘너도 다윗과 같은 정신 소원 목적을 가져봐라. 그러면 너도 다윗처럼 올려주마’ 이게 들어있다. 그런데 마지막 시대의 교인들이 다윗을 닮고 싶다고 하면서 세상을 한아름 앉고 돌고 있다.
우리 기독자가 주님과 가까워지면 주님의 정신이 나에게 옮아져 오게 된다. 주님을 만나고 싶고 주님과 대화를 하고 싶으면 성경을 들어라. 그러면 주님께서 내 속에 들어오신다. 성경을 내버리고 자꾸 ‘주님, 주님’ 하고 부르면 주님 대신 마귀가 대답을 한다.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을 잔뜩 앉고 있으면 자기가 변화 부활을 할 때 자기가 앉고 있는 세상도 같이 들림을 받느냐? 세상성은 천국에 못 들어간다. 세상이라고 하는 것은 불에 타는 거다. 물질성은 불에 타진다. 불에 타는 물질은 신령세계에 못 들어간다.
계:에 보면 여자가 몇이 나오느냐? 해를 입은 여자가 나오는데,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여자요 생명의 말씀이 잉태된 여자다. 참 보기 좋다. 그런가 하면 치마 밑에 붉은 짐승을 타고 물을 깔고 앉아있는 여자가 있다. 이 여자를 우리의 신앙정신으로 보면 치마 밑에 돈이나 먹을 것을 잔뜩 숨겨서 천국에 들어가려고 하는 것과 같은 거다. 그런다고 해서 들어가지느냐? 못 들어간다. 또 어떤 여자는 산꼭대기에 턱 앉아있는데, 엄청나게 교만한 것을 말한다. 교만한 성격 성질을 말한다. 이게 다 교회의 성질을 말하는 건데, 교회는 교인이다. 알고 보면 이게 다 사람의 마음을 말해주는 거다. 그런데 이 여자들을 큰 성 바벨론이요 큰 음녀라고 했고, 결국은 불에 다 태워버린다. 이게 마지막 심판이다.
2절: ‘내 마음이 눌릴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 마음이 눌리는 것은 어떤 사건으로 인해 신경이 쓰이고 근심 걱정이 되어서 마음이 압박이 되기 때문인데, 이렇게 되면 잠도 안 온다. 자기가 가지고 있던 세상의 명예와 부귀와 영광이 다 없어지고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다면 잠이 오겠느냐? 그런데 진리성도 다윗에게는 이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고 이런 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다. 무슨 문제냐? 주 하나님께서 욕을 먹는 거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욕을 먹는 것은 누구 때문이냐? 이스라엘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이스라엘은 심판이다. 이래서 하나님의 자식이 얻어맞는다면 이방나라가 웃을 일이다. 이것은 영적 신앙 면에서 심각한 일이 벌어진 거다.
이 시를 쓸 때의 배경은 아들 압살롬이 자신을 배반했을 때인데, 압살롬이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어 백성들을 악한 길로 인도해서 도탄에 빠지게 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해서 멸망당할 것을 염려해서 쓴 시로서, 첫째는 하나님을 두고 하는 염려 걱정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는 거다. 아들은 어떻게 되던 말던 그게 아니라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면 부모고 형제고 다 날아가 버리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하나님이 사람들로부터 멸시를 당하게 될 것이니 이것을 염두에 두고 이런 일이 생기지 않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는 거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