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등문고
(흐트러진 민심을 다잡아라)
개경으로 돌아온 태종이 태상전(太上殿)에 나아가 아버지 이성계에게 문안 인사를 올렸다.
“네 형은 한양에 환도하여 내 마음을 위로하고자 하였는데 네 애비가 도둑고양이처럼 어둠을 이용하여 개경에 드나들어서야 되겠느냐? 네가 능히 내 뜻을 받들겠느냐?”
“제가 어찌 감히 명령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한양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사랑하는 부인 신덕왕후가 잠들어 있고 막내아들 방석이 묻혀있는 한양으로 돌아가자는 뜻이다. 뿐만 아니라 태조 이성계는 개경인들의 눈이 부끄럽고 민망했다. 거동할 때면 개경인들이 지나는 행렬 뒷통수에 욕지거리를 해댈 것 같은 노파심에 눈에 띠지 않은 밤을 이용하여 드나드는 개경을 하루 빨리 떠나고 싶었다.
임금이 솔선수범해야 한다
새로운 왕이 등극하였지만 민심은 냉랭했다. 도처에서 흉사가 이어졌다. 수창궁이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로 불타버렸다.
태조 이성계와 부인 강씨가 잠저시절부터 지극한 불심으로 찾아다니던 연복사 우물이 끓었으며 연못에 물고기가 떼죽음을 당했다.
경상도 진양의 장탄에서는 집채 만 한 돌이 30여 미터나 옮겨지는 일이 벌어졌다. 급기야 연복사 불상이 땀을 뻘뻘 흘리자 민심이 흉흉해졌다.
방석의 부귀영화를 빌며 연복사에 5층 석탑을 시주하고 불공에 정성을 쏟았던 신덕왕후의 원혼이 구천을 헤매다 노기를 띤 것이라는 소문이 퍼져 나갔다.
흐트러진 민심을 잡기 위해서는 임금이 솔선수범해야 한다며 문하부(門下府) 낭사(郞舍) 맹사성이 상언(上言)으로 주청했다.
“임금의 마음은 다스림을 내는 근원입니다. 마음이 바르면 만사가 바르게 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 날마다 경연(經筵)에 납시어 성찰(省察)을 더하시면 전하의 마음이 광명하여져 태평의 정치를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인재(人才)는 다스림에 이르는 도구이니 벼슬을 제수할 때는 사람을 천거하게 하여 공천(公薦)하면 만사가 형통할 것입니다.”
인사가 만사라는 얘기다. 만고의 불문율이다. 인사가 만사라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또한 권좌에 등극했다고 주지육림(酒池肉林)에 빠지거나 사냥으로 소일하지 말고 공부하라는 얘기다.
태종시대의 설계사 하륜, 팔을 걷어 붙이고 나서다
태종시대의 설계사 하륜이 팔을 걷어 붙이고 나섰다. 우선 등을 돌린 민심을 돌리기 위하여 관제개혁에 착수했다.
문하부를 의정부로 확대 개편하고 6조(六曹)를 두어 업무를 분장토록 했다.
관리 임용에 기준이 되는 전선법(銓選法)을 만들어 잡음을 없앴고 고적출척법(考積黜陟法)으로 관리를 감독하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오늘날의 인사 고과제다.
고려가 패망하고 조선이 건국하는 과정에서 사회혼란을 틈타 노비들이 자아를 찾기 시작했다. 주인의 손아귀에서 평생 종노릇을 하던 노비들에게 사회변혁은 기회였다.
많은 노비들이 탈출하였고 스스로 해방을 선언했다. 이들을 받쳐주는 힘은 억척스런 노동력과 상업으로 벌어들인 재물이었다.
“저놈이 우리 집 종놈인데 도망가서 돈 좀 벌었다고 오리발을 내미니 흑백을 가려 주시오.”
“종 같은 소리하지 마슈, 노비문서 팔아먹을 적엔 언제고 이제 와서 종소리유.”
서로 자기주장이 옳다는 송사가 끊이지 않았다. 노비문서 천적(賤籍)을 팔아먹은 자가 있는가 하면 사들여 불태워 버린 자가 있었으니 누구 말이 옳은지 알 수 없었다.
이러한 다툼을 신속하게 처리하기 위하여 노비변정도감(奴婢辨定圖監)을 신설하여 신뢰성을 상실한 천적을 버리고 호적에 의해 판결했다. 일종의 노비전담 신속재판소다.
또한, 백성들의 지위를 증명하는 호패(號牌)를 만들어 모든 백성들로 하여금 소지케 하고 이동을 보장했다.
이는 곧 인구의 이동이 재화를 낳는다는 원시적인 경제정책이다. 반면 비생산적인 승려들에게는 도첩(度牒)을 발급하여 통행을 제한했다.
경제활성화를 위하여 종이돈을 발행하라
경제문제에 달통한 하륜은 백성들의 경제 활성화를 위하여 사섬서(司贍署)를 설치하고 저화(楮貨-종이돈)를 발행했다.
물물교환과 포화(布貨-삼베)가 화폐기능을 담담했던 당시에 획기적인 발상이다.
이 제도는 하륜과 대립각을 세우던 사헌부의 반대로 중도에 폐지되었지만 꽉 막힌 사대부들을 설득하여 계속 시행되었다면 조선의 경제는 달라졌을 것이다.
정도전이 조선개국을 설계한 정략가라면 하륜은 태종시대를 설계한 전술가다.
강력한 통치자에 유연한 행정가다. 도드라지게 튀지 않으며 내실을 기했다. 태종이 폭풍처럼 휘몰아치면 하륜은 부드럽게 다독였다.
하륜은 정치적인 변혁기를 겪으며 흐트러진 민심을 다잡으며 조선왕조의 문물제도와 기틀을 마련했다. 정도전이 조선왕국의 뼈대를 세웠다면 하륜은 거기에 근육을 만들고 살을 붙인 사람이다.
하륜이 야심차게 밀어붙인 것이 사간원이다. 문하부 낭사가 담당했던 간원(諫院) 기능을 사간원으로 독립시켜 사헌부와 동등한 반열에 올려놓았다.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 왕권을 제어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사간원(司諫院)은 임금에 대한 간쟁과 신료에 대한 탄핵은 물론 6조와 함께 법률제정 논의에 참여했다. 오늘날의 국회와 언론기관을 합해놓은 것과 비슷한 기관이다.
사헌부와 함께 했을 때는 대간(臺諫), 홍문관과 사헌부와 함께 했을 때는 삼사(三司), 형조와 사헌부와 함께 했을 때는 삼성(三省)이라 부른다.
사헌부(司憲府)는 백관(百官)을 규찰하고 기강과 풍속을 바로잡았다. 감찰을 각사(各司)나 지방에 파견하여 부정을 적발하고 그에 대한 법적 조치를 취하는 사법권을 가졌다.
관리들에게는 서릿발같이 무서운 기관이라 하여 상대(霜臺)라 불리기도 했다. 오늘날의 검찰과 흡사하다.
사헌부의 수장 대사헌은 임금이 임명한 관리를 심사 동의하는 서경권(署經權)이 있었으니 오늘날의 검찰총장보다 더 높은 지위다.
억울하면 북을 울려라
관제개편에 착수한 하륜은 임금이 백성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태종에게 주청하여 훗날 신문고로 개칭한 등문고(登聞鼓)를 설치했다.
궐밖에 커다란 북을 매달아 억울한 일이 있는 백성은 북을 치라 했지만 백성들은 자신이 잡혀갈까 봐 무서워 북을 치지 못했다.
최초로 북을 친 사람은 지금주사(知錦州事) 안속이었다. 검교참찬의정부사(檢校參贊議政府事) 조호가 자신의 노비를 빼앗아 갔다는 것이다. 등문고를 설치한 하륜은 배우지 못하고 힘없는 백성들의 하소연을 듣고 그들의 억울함을 풀어 주고 싶었는데 배우고 가진 자들이 이용한 것이다.
가진 자들이 더 탐욕을 부리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북소리가 울렸으니 접수가 된 셈이다. 사헌부에서 조사해 보니 조호가 잘못했다. 조호에게 불리한 판결이 나오자 사헌부가 안속을 두둔했다고 조호가 사헌부를 물고 들어갔다.
이에 대사헌 이원이 피혐했고 조호는 오결(誤決)이라고 길길이 날뛰었다. 결국 조호의 억지 주장이 거짓으로 드러나 조호는 괘씸죄가 추가돼 평주로 귀양 갔다. 등문고에 의한 처벌 1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