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암서원은 정문부터 다른 서원과 다르다. 홍살문 뒤로 팔작지붕을 한 2층 건물인 확연루(廓然樓)가 400년 묵은 은행나무와 어울려 단정하고 위엄 있는 풍경을 보여준다. 확연루를 통해 안으로 들어가려면 고개를 숙여야 한다. 공경하는 마음과 숙연한 마음을 유도하려고 문을 낮게 설계한 것이다. 이어 청절당(淸節堂) 건물을 왼쪽으로 돌아들어 가면 서원의 마당이 나온다. 청절당은 학생들이 공부하던 강당이다.
하서 김인후는 19세인 1531년 과거에 응시해 장원이 된 후 성균관에 입학, 이황 등과 두터운 친분을 쌓으며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그 당시는 ‘기묘사화(1519년)’라는 광풍이 휩쓸고 지나간 후였다.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을 폐하고 왕위에 오른 중종은 신진 사림 출신의 조광조를 기용했고, 조광조는 훈구 세력을 철저히 배제한 급진적 도학정치를 실현했다. 이에 위기를 느낀 훈구 세력의 모함으로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 사대부들의 정치 개혁은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기묘사화가 일어난 지 20년 되던 해 동궁에 대화재가 났다. 이 일을 계기로 다시 사림이 탄압을 받자, 김인후가 나섰다. 그때까지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들의 명예회복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예로부터 선치(善治)를 하는 군주는 어진 인재를 가까이하며 선비의 풍습을 바르게 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습니다. 어진 인재를 가까이하면 임금을 도와 백성을 교화시킬 수 있을 것이고 선비의 풍습을 바르게 하면 사람이 지킬 떳떳한 윤리가 밝혀져 세상을 두터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난번의 기묘사화는 죄가 아니심을 밝히시고 날로 두려운 마음으로 수양하사 정의와 악을 잘 가려서 사회기강을 세우시옵소서.
하지만 중종은 김인후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이에 김인후는 부모의 연로함을 이유로 사직을 요청하니, 고향과 가까운 옥과 현감으로 제수되었다. 김인후는 1543년 세자를 가르치게 되는데, 이때 맺어진 세자와의 인연은 그의 인생행로에서 결정적인 작용을 하였다. 김인후는 세자의 높은 덕성을 알아보고 정성껏 가르쳤고, 세자 또한 김인후의 학문과 도덕을 알아보고 존경심을 표하였다. 1544년 중종이 승하하고 세자가 즉위하니, 그가 인종이다. 그러나 인종은 즉위한 그 해 7월에 승하하고 만다. 이 소식을 들은 김인후는 대성통곡을 터뜨리고, 곧바로 옥과 현감을 사직했다. 고향으로 돌아온 김인후는 여러 차례 조정의 부름에도 죽을 때까지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다. 매년 인종의 기일이 돌아오면 집 뒷산에 올라 술을 한잔 마시고 한번 곡하기를 반복하며 밤을 지새우고 돌아왔다고 한다. 이처럼 김인후는 인종에 대한 절의를 지켜 산림에 은둔한 채 시작(詩作)과 학문으로 평생을 보냈다.
16세기 누정문학을 꽃피우다
서원은 선비들이 학문을 닦고 성현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따라서 앞쪽에는 공부하는 공간, 뒤쪽에는 제사지내는 곳을 배치한 전학 후묘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필암서원도 예외는 아니어서 마당에서 보면 수업이 진행되는 청절당, 그 양편으로 학생들의 생활공간인 동재 진덕재(進德齋)와 서재 숭의재(崇義齋)가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북쪽 제사당은 문과 담을 이용 별도의 공간을 만들어 사당인 우동사(祐東祠)를 두고 김인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이러한 서원 구조에서 예외적인 건물이 우동사 옆에 있는 경장각(敬藏閣)이다. 이곳은 인종이 하사한 묵죽도를 보관하는 곳으로 건물 지붕 아래 네 귀퉁이 중 세 곳은 용, 한 곳은 봉황이 조각되어 있다. 인종은 스승이었던 김인후에게 직접 그린 묵죽도를 하사하며 그림에다 글을 쓰게 하였다. 이것은 대단히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무릇 대나무는 절의의 상징이다. 글을 쓰며 김인후는 묵죽도에 담긴 깊은 뜻을 가슴 깊이 새겼을 것이다.
필암서원에는 현판이 많다. 이것들을 둘러보며 서로 비교해 보는 것도 특별한 재미다. 확연루 현판은 우암 송시열, 청절당에 건 필암서원 현판은 병계 윤봉구, 숭의재와 진덕재는 동춘 송준길, 경장각은 정조임금이 직접 쓴 글씨다. 필암서원의 보물창고 격인 장판각(藏板閣)은 진덕재 뒤에 자리 잡았다. 이곳에는 김인후의 저작들과 고문서인 ‘하서전’, ‘주역관상편(周易觀象篇)’, ‘서명사천도(西銘事天圖)’, ‘백련초해(百聯抄解)’ 등 698개의 판각이 보관되어 있다.
김인후는 조선 성리학이 한참 무르익은 16세기 대표적 유학자로 이(理)와 기(氣)에 관한 논쟁의 중심에 있었으며, 태극(太極)에 관한 이론에도 깊어 천명도(天命圖)를 완성한 도학자였다. 아울러 16세기 누정문학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시인이었다. 그가 남긴 시문은 무려 1,500여 수에 이른다. 김인후는 호남가단의 핵심적 거점이었던 면앙정과 소쇄원 등을 찾아가 이곳을 드나들던 기대승, 고경명, 송인수, 임억령, 정철 등과 두터운 교분을 나누었다. 그의 시풍과 풍류는 제자인 정철에게 이어져 강호가도(江湖歌道)의 국문시가가 꽃피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