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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사랑의 실천(3) 자아도취의 극복과 신앙에로의 용기
이제 우리는 사랑의 능력 중에서 특히 중요한 성질을 검토할 것이다. 내가 앞에서 말한 사랑의 본성에 따르면, 사랑을 성취하는 중요한 조건은 '자아도취'를 극복하는 것이다. 자아도취적 방향은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것만을 현실로서 경험하는 방향이다. 반면 외부 세계의 현상은 그 자체로서는 현실성이 없고 오직 이러한 현상이 자아도취적 인간에게 유익한가 위험한가에 따라 경험된다. 자아도취의 반대 극은 객관성이다. 이것은 사람들과 사물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보는 능력이고, 이러한 객관적 대상을 자신의 욕망과 공포에 의해 형성된 상으로부터 분리시킬 수 있는 능력이다. 온갖 형태의 정신병은 객관적일 수 없다는 점에서 극단적인 무능을 보여준다.
발광한 사람에게 유일한 현실은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현실뿐이며 자신의 공포와 욕망의 실재뿐이다. 그는 외부 세계를 그의 내면적 세계의 상징으로, 그의 창조물로 본다. 꿈을 꿀 때는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깨어 있을 때 지각하는 현실과 마찬가지로 현실적이라고 확신한다. 발광한 사람이나 몽상가는 외부 세계에 대해 객관적 견해를 갖는데 '완전히' 실패한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다소간 정신이상이고 다소간 잠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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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기술의 실용이라는 관점에서 이 말은 다음과 같은 뜻이다. 곧 사랑은 자아도취의 상대적 결여에 의존하고 있으므로, 사랑은 겸손, 객관성, 이성의 발달을 요구한다. 우리는 이러한 목적에 전 생애를 바쳐야 한다. 겸손과 객관성은 사랑이 그런 것처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나는 이방인에게 객관적일 수 없는 한, 나의 가족에 대해서도 참으로 객관적일 수 없으며, 역(逆)도 진(眞)이다.
사랑의 기술을 배우려고 한다면, 나는 모든 상황에 객관적이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내가 객관성을 잃고 있는 상황에 대해 민감해야 한다. 나는 자아도취적으로 왜곡된 어떤 사람과 그의 행동에 대한 '나의‘ 상과, 나의 흥미, 욕구, 공포와는 관계없이 존재하는 나의 현실 사이의 차이점을 파악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객관성과 이성을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획득하면 사랑의 기술을 터득하기 위해 가는 길을 절반은 걸어온 셈이다. 우리는 접촉하는 모든 사람에 대해 객관성과 이성의 능력을 획득해야 한다. 어떤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객관성을 유보하려고 하고 그밖의 세계에 대해서도 객관성 없이도 지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어느 경우에나 실패했다는 것을 곧 알게 될 것이다.
사랑의 능력은 자아도취나 어머니나 가족에 대한 근친상간 애착으로부터 벗어나는 능력에 달려 있다. 사랑의 능력은 성장하는, 곧 세계와 자신에 대한 관계에서 생산적인 지향을 발달시킬 수 있는 능력에 달려 있다. 탈피, 탄생, 각성의 이러한 과정은 필수적 조건으로서 한 가지 성질, 곧 '신앙'을 요구한다. 사랑의 기술의 실용은 신앙의 실천을 요구한다.
신앙은 무엇인가? 신앙은 반드시 신에 대한 믿음이나 종교에 대한 믿음의 문제인가? 신앙은 반드시 이성 및 합리적 사고와 대립되거나 분리된 것인가? 신앙의 문제를 이해하게 되려면 우리는'합리적 신앙'과 '비합리적 신앙'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비합리적 신앙이라는 말을 나는 불합리한 권위에 대한 복종을 바탕으로 하는 (어떤 사람 또는 관념에 대한) 믿음이라고 이해한다. 반대로 합리적 신앙은 자기 자신의 사고나 감정상의 경험에 뿌리박고 있는 확신이다. 합리적 신앙은 근본적으로 어떤 것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우리의 확신이 갖고 있는 확실성과 견고성이다.
신앙은 특별한 믿음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퍼스낼리티 전체에 고루 퍼져 있는 성격상의 특징이다.
합리적 신앙은 생산적 지성과 정서적 활동에 근원이 있다. 신앙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고 생각되는 합리적 사고에 있어서 합리적 신앙은 중요한 요소다. 어떤 분야에서든 참으로 중요한 발견이 이러한 방식으로 이루어진 일은 드물다. 또한 사람들이 단순히 환상을 쫓을 때에는 중요한 결론에 도달하지 못한다. 인간이 노력을 기울이는 어떠한 분야에서나 창조적 사고의 과정은 대체로 이른바 '합리적 비전'에 의해 시작되고, '합리적 비전' 자체는 이전의 상당한 연구, 반성적 사고 및 관찰의 소산이다.
과학자가 충분한 자료를 수집하거나 그가 본래 가진 비전에 대한 매우 확실한 수학적 정식화를 완성하는 데 성공할 때, 그는 잠정적 가설에 도달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가설에 함축된 바를 가려내기 위한 세밀한 분석과 이 가설을 지지하는 자료를 축적함으로써 이 가설은 더욱 적합한 것이 되고, 마침내는 더욱 광범한 이론에 흡수되기도 할 것이다.
합리적 비전의 잉태로부터 이론의 형성에 이르는 모든 단계에서 '신앙'이 필요하다. 적어도 그 타당성에 대해 일반적 동의에 도달할 때까지는 추구해야 할 합리적이고 타당한 목표로서의 비전에 대한 신앙, 적당하고 그럴듯한 주장에 대한 신앙, 궁극적 이론에 대한 신앙이 필요하다. 이러한 신앙은 자기 자신의 경험과 자기 자신의 사고력, 관찰력, 판단력에 대한 확신에 뿌리박고 있다. 비합리적 신앙은 오직 어떤 권위자나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와 같이 말하기 때문에 어떤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지만, 합리적 사고는 대다수 사람들의 의견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의 생산적 관찰과 사고에 기초를 둔 독립된 확신에 뿌리박고 있다.
사고와 판단은 합리적 신앙이 나타나는 유일한 경험 영역은 아니다. 인간관계의 영역에서도 신앙은 의의 있는 우정이나 사랑에 불가결한 성질이다. 다른 사람에 대해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그의 기본적 태도의 불변성, 그의 퍼스낼리티 핵심의 불변성, 그가 가진 사랑의 불변성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어떤 사람이 의견을 바꿀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기본적 동기는 그대로 남아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예컨대 그의 생명과 인간의 존엄성 존중은 자기 자신의 일부로서 변화할 수 없는 것이다.
같은 의미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신앙을 갖고 있다. 우리는 변화할 수 없고 여러 가지 환경에도 불구하고, 또한 의견과 감정의 변화와 관계없이 생애를 통해서 지속하는 자아, 곧 우리의 퍼스낼리티의 핵심의 존재를 알고 있다. '나'라는 말의 배후에 있는 실재는 바로 이러한 핵심이며 우리 자신의 동일성에 대한 확신은 이러한 실재에 바탕을 두고 있다. 자아의 지속성에 대해 신앙을 갖지 못하면 동일성에 대한 우리의 감정을 위협받고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게 되며, 이때에는 다른 사람의 찬성이 동일성에 대한 우리 감정의 기초가 된다. 자기 자신에 대한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에게도 성실할 수 있다. 이러한 사람만이 미래에도 오늘과 같을 것이며, 따라서 그는 지금 기대하는 바와 같이 느끼고 행동할 것으로 확신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신앙은 약속할 줄 아는 능력의 조건이고, 니체가 말한 바와 같이 인간은 약속할 줄 아는 능력에 의해 규정될 수 있으므로, 신앙은 인간 실존의 한 조건이다. 사랑과 관련해서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의 사랑에 대한 믿음, 곧 다른 사람에게서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능력과 그 신뢰성에 대한 신앙이다.
사람에 대해 신앙을 갖는다는 것의 또 한 가지 의미는 다른 사람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과 관계된다. 이러한 신앙의 가장 기초적인 형태는 어머니가 갓난아이에 대해 갖는 신앙, 곧 이 아이가 생명을 유지하고 성장하고 걷고 이야기하게 되리라는 믿음이다.
그러나 이러한 면에서 아동의 발달은 매우 규칙적이므로 이러한 발달을 기대하는 데는 신앙이 필요하지 않을 것 같다. 이러한 발달은 발달하지 못할지도 모를 가능성, 곧 어린아이의 사랑하고 행복해지고 이성을 사용하게 될 가능성, 예술적 재능과 같은 더욱 특수한 가능성과는 다르다. 이러한 가능성은 발달에 적합한 조건이 주어진다면, 성장해서 나타나고, 이러한 조건이 없으면 질식될 수도 있다.
이러한 조건 중 가장 중요한 조건의 하나는 어린아이의 생활에 대해 중요한 인물이 이러한 가능성을 믿어주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교육과 조작이 갈라진다. 교육은 아동이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하도록 도와준다.
교육과 반대되는 것이 조작이며, 조작은 이러한 가능성의 성장에 대한 믿음의 결여, 그리고 어른이 어린아이에게 바람직하지 못한 것을 억압해야만 비로소 어린아이가 올바르게 되리라는 확신에 바탕을 두고 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신앙은 '인류'에 대한 신앙에서 절정에 이른다. 서양 세계에서 이러한 신앙은 유대 기독교의 종교적 용어로 표현되었고 세속적 언어에 의해서는 지난 150년 동안, 인본주의적인 정치 사회 사상에 강력히 표현되었다.
어린아이에 대한 신앙과 마찬가지로, 이 신앙의 바탕을 이루는 것은, 적절한 조건만 주어지면 인간에게는 평등, 정의, 사랑의 원칙에 의해 지배되는 사회 질서를 수립할 가능성이 있다는 사상이다.인 간은 아직도 이러한 질서를 수립하지 못했고 따라서 인간이 이러한 질서를 수립할 수 있다는 확신에는 신앙이 필요하다.
비합리적 신앙은 압도적으로 강하고 전지전능하다고 느껴지는 힘에 굴복하고, 또한 자기 자신의 능력과 힘을 포기하는 데 뿌리박고 있지만 합리적 신앙은 이와는 반대되는 경험에 바탕을 두고있다. 합리적 신앙은 우리 자신의 관찰과 사고의 소산이기 때문에 우리는 사상을 믿고 있다. 우리는 자신의 가능성의 성장, 자기 자신의 성장이라는 현실, 우리 자신의 이성과 사랑의 능력의 힘을 경험했기 때문에, 또한 어느 정도로 이러한 경험을 했는가에 따라, 다른 사람에 대해, 자기 자신에 대해, 그리고 인류에 대해 신앙을 갖게 된다.
합리적 신앙의 기반은 '생산성'이다. 곧 신앙에 의거해서 산다는 것은 생산적으로 산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지배라는 의미에서) 권력에 대한 신잉 이 권력의 행사는 신앙과 반대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현존하는 힘을 믿는 것은 아직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의 성장을 믿지 않는 것과 같다. 현존하는 힘을 믿는 것은 오직 명백한 현재에 바탕을 두고 미래를 예측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가능성과 인간의 성장을 간과했다는 점에서는 매우 불합리하고 중대한 오산임이 밝혀진다. 권력에는 합리적 신앙이 없다. 권력에 대한 굴복, 또는 권력을 가진 자가 권력을 유지하려는 소망이 있을 뿐이다. 많은 사람들에게는 권력이 모든 것 가운데서 가장 현실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인간의 역사는 인간의 성취 중에서 가장 불안정한 것이 권력임을 입증하고 있다. 신앙과 권력은 상호 배척한다는 사실 때문에, 본래 합리적 신앙을 바탕으로 수립되었던 모든 종교와 정치체제는, 권력에 의지하거나 권력과 결탁할 때 부패하고 마침내 이러한 종교와 정치체제가 갖고 있던 힘을 상실한다.
신앙을 가지려면, '용기', 곧 위험을 무릅쓰는 능력, 고통과 실망조차도 받아들이려는 준비가 필요하다. 생활의 일차적 조건으로서 안전과 안정을 추구하는 자는 신앙을 가질 수 없다. 격리와 소유를 자신의 안전책으로 삼는 방어 기구에 칩거하는 자는 누구든 자기 자신을 죄수로 만들게 된다. 사랑받고 사랑하려면 용기, 곧 어떤 가치를 궁극적 관심으로 판단하는 그리고 이러한 가치로 도약하고 이러한 가치에 모든 것을 거는 용기가 필요하다.
신앙과 용기에 대해서 연습이 필요한가? 사실상 신앙은 모든순간에 연습할 수 있다. 어린아이를 기르는 데도 신앙이 필요하고잠드는 데도 신앙이 필요하고 어떤 일을 시작하는 데도 신앙이 필요하다. 이러한 신앙을 갖지 못한 자는 어린아이에 대한 지나친근심 때문에, 불면증 때문에 어떤 종류의 생산적인 일도 할 수 없어서 괴로워한다. 또 그는 의심이 많아 누구와도 친밀해지지 못하거나 우울증을 일으키거나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지 못한다.
여론이나 예측하지 못한 몇 가지 사실이 자신의 판단을 무효화하더라도 타인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고수하는 것. 자신의 확신이 인기가 없더라도 자신의 확신을 고수하는 것 - 이러한 모든 일에는 신앙과 용기가 필요하다. 곤란과 좌절과 슬픔을 '우리'에게 일어나서는 안 될 부당한 처벌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우리를 강하게 만들기 위해 극복해야 할 도전으로써 받아들이려면 신앙과 용기가 필요하다.
신앙과 용기의 훈련은 일상생활의 사소한 일로부터 시작된다. 첫 단계는 어디서 언제 신앙을 상실하는가에 주목하고, 신앙의 상실을 은폐하는 데 이용되는 합리화를 간파하고, 어디서 우리가 비겁한 태도로 행동하는가. 또한 어떻게 비겁한 행동을 합리화하는가를 인식하는 것이다.
우리는 신앙을 배반하는 언제나 약해지며 우리가 약해지면 점점 더 새로운 배반을 하게 되고 이러한 악순환은 계속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또한 ‘사랑받지 못하는 것을 의식적으로 두려워하고 있을 때에도, 비록 대체로 무의식적이기는 하지만 진정한 공포는 사랑하는 것에 대한 공포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아무런 보증 없이 자기 자신을 맡기고 우리의 사랑이 사랑을 받는 사람에게서 사랑을 불러일으키리라는 희망에 완전히 몸을 맡기는 것을 뜻한다. 사랑은 신앙의 작용이며 따라서 신앙을 거의 갖지 못한 자는 거의 사랑하지 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