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3. 나는 무엇을 위해서 살까 / 빌립보서 1:20-21
사람마다 살아가는 목적은 다릅니다. 어떤 이는 나라를 위해, 어떤 이는 특정 사상이나 윤리를 위해 살아갑니다. 문학에 헌신하는 사람은 문학가이고, 종교에 헌신하는 사람은 종교가입니다.
나는 종교에 헌신했지만, 그보다는 주님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의 가르침처럼 살든 죽든 내 몸으로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고자 합니다. 살아도 그리스도요, 죽어도 그리스도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무엇이 나를 이토록 강하게 붙들고 내 몸까지 바치게 했을까요? 나의 취미와 의무, 모든 것이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가진 돈이 있다면 그리스도를 위해, 학문이 있다면 그리스도를 위해 존재합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나 역시 인간적인 고민을 겪었습니다. 영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 사이에서 때때로 갈등했습니다. 청진에 있을 때 너무나 힘들고 핍박이 많아 아내는 이 사역을 포기하고 서울로 돌아가자고 권했습니다. 각지에 흩어진 교회들을 버려두고 떠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해 거절했습니다.
나는 점점 더 깊이 제단에 매여 있습니다. 사랑의 줄, 소망의 줄, 믿음의 줄로 단단히 묶여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무한합니다. 부족한 나 같은 사람을 택하여 복음의 사자로 삼으시고, 하나님의 부르심에서 단 한 번도 벗어나지 않고 성직을 지켜왔습니다. 이는 주님의 사랑의 줄에 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나이가 들어 이를 버리고 다른 길을 가려 한다면 아마도 헛된 망상에 불과할 것입니다. 나는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는 것처럼 단단히 붙어 있습니다. 악마는 이 붙어 있는 것을 떼어내려 시도합니다.
첫째는 가난으로, 둘째는 질병으로, 셋째는 비방으로 나를 떨어뜨리려 합니다. 그러나 나는 사랑의 줄을 끊을 수 없습니다. 부끄럽지만 사도 바울과 같은 간증을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소망의 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나는 이 세상에 아무런 소망이 없습니다. 정치도, 관직도, 돈도, 명예도 전혀 원하지 않습니다. 나의 소망은 오직 하늘에 있습니다. 어릴 때 내게 배웠던 사람들이 지금 머리가 희어지고 얼굴에 주름이 생긴 것을 보며, 내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웅변으로 증명하고 있지만, 그것에 흔들리지 않고 나의 소망인 새로운 나라를 눈앞에 그립니다.
과거의 옳고 그름을 따지던 변론은 새로운 나라에서는 무의미합니다. 이것 역시 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의 소망과 같습니다. 가지의 소망은 바로 열매입니다. 열매를 맺는 것은 가지 스스로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원 나무의 영양분을 가져와야 합니다. 단지 나무에 붙어 있기만 하면 저절로 영양분이 공급됩니다. 나의 소망인 열매가 이루어집니다. 이 붙어 있음이 바로 믿음이며, 이는 주님께 붙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악마가 이 붙어 있음을 방해하는 것은 곧 믿음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즉,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때로는 물질적으로, 때로는 정신적으로 뱀이 하와를 유혹했던 것처럼 유혹합니다. 믿음을 약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유물주의입니다.
요즘 독한 뱀은 나이 어린 청년들과 무지한 농민들에게 가장 빠르게 감염됩니다. 나 같은 늙은이에게도 오는데, 하물며 어리고 경험 없는 소년들에게는 더욱 쉽게 유혹이 들어옵니다. 처음 유혹이 들어오는 것은 마음에 확고한 주관이 없을 때입니다. 최근 교동학교 7세 유아 사건을 보더라도, 남의 과자와 과일을 쉽게 받아먹는 성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삶의 목적을 정하고 우리의 주님이 우리 마음에 주관을 세우면, 다른 유혹은 들어오지 않습니다.
나는 지금 인간에게 얽매여 살지도 않고, 유혹을 받아들일 필요도 없습니다. 이것으로 만족하고 이것이 위로가 됩니다. 보지 말라고 하시는 것은 볼 필요가 없고, 만지지 말라고 하는 것은 만질 필요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