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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요한복음 16장 25-33절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께서는 얼마 있지 않으면 세상에서 떠나 아버지께로 가실 것을 아시고 미리 그 사실을 제자들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반복해서 그 사실을 제자들에게 말씀하고 계시지만, 누구도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자들 서로가 묻지만 물음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곡할 날이 올 것이고 그때 세상은 기뻐하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공관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을 세 번이나 말씀하신 내용이 있는데, 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곡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에는 기쁨이 되는데, 왜냐하면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적대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곡하는 날이 온다고 해서 계속해서 곡하는 것은 아닙니다. 비록 예수 그리스도가 잡혀 가게 되고 죽음에 이르게 되어 근심하게 되겠지만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은 근심할 수밖에 없지만 너희가 나를 다시 보는 그때는 기뻐할 수밖에 없고, 또한 그 기쁨을 누구도 빼앗을 수 없으리라는 것입니다.
이때 너희가 나를 다시 본다는 것은 죽음 이후 부활의 때나 승천 이후 재림의 때를 말하기보다는 전체적인 맥락에서 볼 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승천 이후 성령 하나님을 보내시는 사건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알맞은 해석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물론 죽음 이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다시금 보게 될 때 그것도 기쁨이긴 합니다. 그러나 그 기쁨은 진리에 합당한 그런 기쁨은 아니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자체만으로도 기쁜 일이지만,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정치적 메시아관을 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 하나님께서 오셔서 진리의 빛을 비춰주실 때는 정치적 메시아가 아니라 하늘에 소망을 두는 참된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지금 주님은 이러한 기쁨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겁니다.
성령 하나님을 보내시면서 도 그것이 곧 나를 본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그 모든 일의 주체가 성자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부활 이후 예수 그리스도는 승천하심으로 더 이상 지상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천상에서도 일하시는데, 누구를 통해 일하시는가? 승천하기에 앞서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20)고 말씀하신 대상, 즉 사도들을 통해 자신의 일을 하십니다. 그러나 그들 스스로 복음 사역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보내주실 것도 말씀하십니다. 사도들과 함께 성령을 통해 예수님은 자신의 복음 사역을 계속해서 주체로서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보내시는 그 일에 대하여 예수님은 나를 보게 된다는 것으로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이런 해석의 정당성은 이어지는 기도할 것을 말씀하시는 내용을 통해서 확증할 수 있습니다. 그 말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 이후 인성은 하늘로 올라가시게 되겠지만 성령 하나님께서 오실 때 지금 너희가 알지 못하는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이고, 그때는 그런 지식에 따라 자신의 이름으로 구하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너희 기쁨의 충만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오늘 본문으로 오시면 유월절 전 요한복음 13장에서부터 시작하신 말씀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25절을 보시면 “이것을 비유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는 비유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21절에 보면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 한 부분 때문에 비유로 말씀하셨다는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비유로 너희에게 일렀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때가 이르게 되면 다시는 비유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비유로 말씀하셨다는 것과 대조적으로 밝히 이르리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어느 한 부분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말씀하신 내용 가운데 비유처럼 말씀하신 것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비유로 말씀하셨다는 뜻은 밝히 이르리라고 하는 말씀과 대조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밝히 이르지 않은, 뭔가 희미한 것처럼 보이는 그런 말씀을 하셨다는 겁니다.
실제로 지난주에 있었던 제자들의 반응이 그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21절의 말씀을 하시기 전에 제자들은 서로가 물었습니다. 도대체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를 서로가 물은 것입니다(요16:17-18 참조). 그 말은 지금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말씀이 비유와 같기 때문입니다. 보통 우리는 ‘비유’하면 어떤 것을 좀 더 쉽게 하기 위한 방법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고 있는 비유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여러 가지를 비유로 설명하시는 부분이 있는데, 이때 왜 비유로 말씀하시는가를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마13:10-12)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자 왜 비유로 말씀하시는지 제자들이 먼저 묻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지만 모두에게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시고자 하시는 자에게 주시기 위해 비유로 말씀하신다는 겁니다. 모든 사람이 알아 듣기 쉽게 말한다는 의미에서의 비유가 아니라, 주고자 하시는 주에게만 주시기 위해서 비유로 말씀하신다는 겁니다.
물론 비유로 말씀하신다고 해서 주고자 하시는 자에게 다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제자들도 비유로 말씀하실 때 알아듣지 못해서 비유를 설명해 주시도록 부탁하기도 합니다. 지금 요한복음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말씀을 하고 계시지만, 그리고 그 말씀 안에서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과 같은 말씀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씀이지만, 비유와 같은 말씀도 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 성령 하나님의 오심과 같은 이런 내용은 반복적으로 말씀하고 계시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6장 17절에서는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며 또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하신 것이 무슨 말씀이냐 하고” 서로가 물은 것입니다.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요16:18). 그러나 때가 이르면 다시는 비유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때가 이르면’, 다시 말해 진리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께서 오셔서 깨닫게 하시면 지금 비유처럼 말씀하시는 모든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게 됨으로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정리하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는데, 왜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비유처럼 들리는 것이 있는가? 물론 성령의 깨닫게 해 주시는 바가 없기 때문이긴 합니다. 이것이 궁극적이 이유입니다. 성경의 조명하심이 있어야지만 깨달을 수 있기 때문에 조명이 없다면 결코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있는데, 우리의 죄성 때문에 깨닫지 못하는 일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빛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분의 길과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당연히 그분의 모든 말씀은 진리요 생명의 길로 이끄십니다. 그러나 세상은 어둠 가운데 있습니다. 얼마나 어둠이냐? 요한복음 1장에서 밝힌 것처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5)고 말씀하실 정도로 어둠입니다. 아무리 어두워도 빛이 비치면 어둠은 물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빛이 비취는데도 어둠이 물러가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말이 되지 않는 그 일이 세상에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비유로 하자면 세상은 맹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볼 수가 없습니다. 빛이 있어도 볼 수가 없습니다. 또 다른 비유로 하자면 영적으로 죽었다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죽은 자들은 반응조차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의 눈을 뜨게 하시면서 알리신 바가 무엇입니까? 지금 유대인들이 맹인과 같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만 그렇습니까? 복음 앞에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모든 사람이 이와 같습니다. 어둠이요, 맹인이요, 영적으로 죽은 자라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의 말씀이 비유와 같은가? 성령의 조명하심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인간이 어둠에 있기 때문이요 인간이 빛을 볼 수 없는 맹인과 같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죽은 자와 같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물론 지금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제자들은 어둠이 아니라 빛을 본 사람들입니다. 맹인이 아니라 맹인에서 눈을 뜬 자와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무지함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 지식이 주어졌고, 그래서 그 지식에 합당한 고백까지 했지만, 모든 지식이 주어졌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겸손해 구해야 합니다. 좀 더 분명한 신앙을 위하여 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저들은 구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여전히 무지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수준에 있었지만, 그렇게 여기지 않았고 있었던 겁니다.
이런 점에서 성령의 조명하심이 없기 때문에 알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은 핑계에 불과합니다. 불신자조차 일반계시를 통한 하나님 지식을 핑계할 수 없다면, 신자의 경우는 더더욱 핑계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무지에 대하여 하나님 탓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들 당시에는 구약 성경만 있었지만 지금은 구약과 함께 신약이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이 성경을 통해 하나님 지식을 연구할 수 있고, 또 성령의 조명하심을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 역사 안에서 건전한 해석의 결과물들은 얼마나 많습니까? 때문에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것을 성령의 조명이 없어서라고 핑계하는 것은 자신의 게으름을, 자신의 죄성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행위일 뿐입니다.
지금은 희미한 것처럼 보이지만 때가 이르면 밝히 보게 될 것인데, 특별히 25절에서 아버지에 대하여 그렇게 될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신앙의 모든 내용은 결국 복의 근원이시요, 생명 자체이신 하나님 지식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 지식에 있어 더욱 분명하게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지난주에 살핀 본문 마지막 부분에서 기도하는 것에 대해서도 말씀을 하셨는데, 하나님 지식에 있어 더욱 분명하게 알게 되는 만큼 너희가 내 이름으로 하나님께 구하는 것도 더욱 분명하게 될 것임을 말씀합니다. 26절입니다.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성령 하나님께서 가시적으로 오시게 되는 그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게 될 것이요, 그렇게 구하는 것에 대하여 이미 23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주신다는 겁니다. 하나님 지식에 있어 더욱 분명하게 될 것이고, 분명하게 되는 만큼 하나님 지식에 합당한 것을 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한다고 말씀합니다. 즉 하나님은 반드시 중보자 되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너희를 가까이 하시며, 그리스도를 통해 구하는 것만 너희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구약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가까이 하시며, 또한 저들이 구하는 것을 들어주시는 분으로 계셨습니다. 그 방식 자체에 있어서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형식이 다릅니다. 구약은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고, 신약은 오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은 구약에서부터 알리신바 된 하나님을 너희는 더욱 분명히 알게 되는데, 아버지 하나님은 반드시 중보자인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통해서만 너희에게 알려지기를 기뻐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덧붙이시는 말씀이 이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성령이 오시면 더 이상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서 8장 34절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천상에서도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는 분으로 계십니다. 히브리서 7장 25절도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계속해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일을 통하여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십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런 말씀과 상충되어 보이는데, 이런 말씀과 상충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그럼 오늘 본문의 말씀은 어떤 뜻으로 말씀하시는 것인가? 다시 26절을 보시면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그러니까 지금까지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였지만, 그리고 그 일은 로마서 8장과 히브리서 7장에 근거하자면 승천하고 난 이후에고 계속 되겠지만, 그 날에는, 진리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께서 오셔서 모든 것을 밝히 알게 하실 그 날에는 너희가 직접 내 이름으로 하나님께 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장 16절에 보면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는 말씀이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얼마든지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은 앞서도 말했지만 구약 시대라고 할지라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주어질 때입니다. 그것이 율법 안에서 여러 가지 제사 제도를 통해 나타났던 겁니다. 그러나 그때는 희미했습니다. 오늘 본문 식으로 하자면 비유가 같았습니다. 그 일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그리고 성령 하나님께서 내려오시기 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성령 하나님께서 내려와 진리의 빛을 비추시고 깨닫게 하시면 그런 모든 희미한 것들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27절을 말씀하십니다.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었으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 지금 너희는 나를 사랑하는 자로 있고, 그 사랑은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로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 믿음을 보시고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는 것이고, 사랑하시기에 너희를 용납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근원은 무엇입니까? 27절 말씀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었으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신다는 순서입니다. 마치 제자들이 먼저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 사랑 때문에 하나님이 제자들을 사랑하시는 것처럼 말씀합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16장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할 때(마16:16) 예수님께서는 이를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16:17). 믿음의 근원은 믿는 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주체이신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하나님께 구하는 모든 것을 받게 된다고 할 때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로 믿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은 그런 믿음조차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주셨다는 것이고, 그렇게 주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너희를 먼저 사랑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여 받게 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시작해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끝나는 거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이 먼저이고, 그래서 믿게 되고 사랑하게 되는 그것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더욱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결국 시작부터 끝까지 하나님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께 구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요한일서 4장에서 사도 요한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4:9-10)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참된 신앙고백이 있다고 할 때 이러한 신앙고백을 할 수 있는 이유가 하나님께서 먼저 그들에게 이러한 믿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하나님께서 사랑하기로 하신 자들에게 주시는데, 이런 점에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고 있기 때문이라는 말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니지만, 믿음과 사랑의 출처가 하나님이 아닌 우리에게 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시작으로 말미암아서라고 말하는 것은 주의를 해야 합니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우리로부터 시작하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하나님으로 말미암고 하나님으로 끝맺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사랑이 누구를 통해 나타났는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풍성하게 나타났습니다. 때문에 너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구하기만 하면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에게서 왔다는 사실과 함께 다시금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신다는 재차 말씀하시는데, 28절입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 엄밀하게 말하면 세상의 모든 것이 아버지로부터 왔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이라는 세상 시인의 말도 인용합니다(행17:28). 그러나 이것은 창조주와 피조물과 관계일 뿐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내가 아버지에게서 나왔다는 것은 이런 피조물과의 관계로 말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요한복음 1장 시작부터 가르치고 있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하신 분이십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1:1-3) 성부와 성자와의 관계는 분명 구별되시는 두 위격으로 계시지만, 동등하신 한 하나님이십니다. 한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고, 그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버지께서는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왔다고 하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다시금 세상을 떠나서야 합니다. 떠나서 아버지께로 가셔야 합니다. 가셔야지만 그의 모든 지상 사역이 헛되지 않다는 것을 보증 받습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그의 죽음, 그리고 그의 부활과 승천이라는 모든 내용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자기 백성이라고 일컫는 자들을 위해서입니다. 세상이라고 표현되기도 하지만 정확하게는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위해서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30절의 말씀으로 하자면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시기 위해 지상으로 오셨다가 다시금 천상으로 가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에 대하여 제자들의 반응이 29절, 30절에 기록됩니다. “제자들이 말하되 지금은 밝히 말씀하시고 아무 비유로도 하지 아니하시니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심을 우리가 믿사옵나이다” 25절에서 예수님은 이것을 비유로 너희에게 일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다시는 비유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가 언제냐? 26절 ‘그 날에’라고 말하는 그때입니다. 진리의 성령께서 오시는 때입니다. 따라서 아직까지는 비유로 들릴 뿐입니다. 아직까지는 온전히 다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약속하신 바가 헛되지 않고 반드시 성취되리라는 사실 만큼은 분명한 확신 가운데 있습니다. 그래서 고백하는 것이 지금은 밝히 말씀하시고 아무 비유로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직까지는 희미합니다. 밝히 알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어 고백하는 것처럼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알게 되었기 때문에, 그 사실에 대해서만큼은 믿음으로 고백할 수 있기 때문에 지금 밝히 말씀하시고 아무 비유로도 하지 아니하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주께서 진리의 성령을 통하여 깨닫게 하시는 때가 있다는 것 때문에 이렇게 반응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신다고 고백하고 있는 만큼 여기서 다시금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심을 믿음으로 고백하고 있는데, 그 말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아들인 만큼 하나님과 동등하신 하나님이심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가룟 유다를 제외한 11명의 제자들은 참된 고백을 한 바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6장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했습니다(마16:16). 그러나 이 고백을 할 때 가룟 유다도 거기에 있었지만 그의 고백만큼은 참된 고백이라고 할 수 없었습니다. 그의 고백은 거짓된 고백이었던 겁니다. 그리고 지금 예수님을 팔기 위해 나간 이 시점에서는 그의 고백이 거짓되다는 것이 얼마 있지 않으면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나 나머지 11명의 제자들의 고백은 결코 거짓되지 않다는 사실이 여기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는 겁니다. 그럼 이 고백의 출처는 누구입니까? 그들 자신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십니까? 당연히 하나님이십니다. 이를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라고 말씀하신만큼(마16:17) 여기서의 믿음 또한 하나님이 그들에게 더욱 분명한 고백으로 나타나게 하신 것입니다.
이런 저들의 믿음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31절로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이 말씀을 오해해서는 안 되는데,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지금까지는 믿지 않았다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참된 믿음이 있었지만 그 믿음은 너무나도 연약하여 쉽게 넘어질 수밖에 없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리고 이런 뜻이 지금 요한복음 13장에서 16장까지 말씀하시는 전체 맥락 속에서도 분명히 나타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6장을 시작하면서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참된 믿음이 있지만 참된 믿음이 있다고 해서 실족하여 넘어지지 않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참된 믿음이 있을지라도 우리는 얼마든지 넘어질 수 있습니다. 참된 믿음이 있을지라도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넘어지는 존재입니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말씀처럼(고전10:12)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믿음일지라도 그 믿음은 온전한 믿음의 형태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실제로 이어지는 32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잡힐 때가 바로 앞까지 왔다는 것을 말씀하시면서 너희가 다 도망할 것과, 그래서 나 홀로 남겨질 것에 대해 말씀합니다.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이제는 믿느냐고 말씀하신다고 해서 이때 믿음도 온전한 믿음으로 자리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전보다 믿음이 강화된 것은 맞지만, 강화된 믿음조차 얼마나 연약한지 예수님께서 잡히시게 되면 다 흩어질 것이라고 알리시는 것입니다. 이미 요한복음 13장에서는 어떤 말씀도 하십니까? 너희가 지금은 나를 따라 올 수 없을지라도 이후에는 따라 올 것이라고 말씀하시자 시몬 베드로가 목숨까지도 주를 위하여 버릴 것을 말합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네가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결단한다고 해서 결단대로 되는 게 아닙니다. 사람에게 의지가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의지가 있다고 해서 의지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항상 넘어질까 조심해야 합니다. 믿음에 있어 나는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은 금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범사에 하나님만을 의뢰해야 합니다. 범사에 하나님만을 의뢰해야 하기 때문에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명령을 받는 것입니다(살전5:17).
너희는 다 흩어지고 나만 홀로 남겠지만, 그때도 누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시는가? 내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인성을 취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은 실제 고난을 그대로 겪으시는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인성을 취하신 예수님을 붙들어 도우심으로 그 모든 고난을 감당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이런 말씀은 이후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겠다는 말씀을 얼마나 큰 위로의 말씀인지를 더욱 분명하게 해 주는데, 사람이 곁에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만 함께 하시면 결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33절의 말씀을 하십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지금까지 내가 너희에게 이른 모든 말씀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기 위함이란 것입니다. 주의 말씀이 너희로 하여금 평안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주의 말씀이 너희 안에 있다는 것은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있다는 것과 같습니다. 바로 거기에 평안이 있습니다.
이 평안이 무엇인지를 더욱 드러내시기 위해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는 형태로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데, 외적으로는 환난이지만 그런 환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평안은 누구도 빼앗을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환난 가운데서도 담대하라고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내가 이미 세상을 이기었다고도 말씀하시는데, 그 말은 환난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그 환난이 너희에게 보장된 승리를 빼앗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예수님께서 이기신 싸움을 싸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교회론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시고, 교회의 지체인 우리는 그의 몸이라고 설명합니다. 머리가 이겼는데 몸이 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머리가 이겼다는 것은 몸도 이길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떻습니까? 어떤 면에서 32절과 같습니다.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두는 모습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니까 다 도망하는 모습으로만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형편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러할지라도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진리로 인도하시면, 그래서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되고 그 믿음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참되게 믿게 되면 그때는 주를 위하여 죽을 수 있다고 말한 사도 베드로의 말이 거짓 없는 정직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일을 위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른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또한 주의 말씀을 주셔서 그 말씀이 우리 안에 있을 뿐만 아니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있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의 말씀 안에 거하는 것이고, 그분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그분의 말씀을 벗어나면 우리는 즉시 다시금 그분의 말씀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말씀을 떠난 승리는 없습니다. 주의 말씀 안에서만 승리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늘 주의 말씀 안에서만 거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말씀처럼 우리는 주의 말씀으로 경계를 받아야 하고, 또한 주의 말씀으로 교훈과 책망을 받아 믿음으로 굳게 서야 합니다. 거기에 평안이 있고 거기에 참된 승리가 있는 것입니다. 이 승리를 위하여 우리는 주의 말씀에 착염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