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번 글 한번 안올리고 회원님들 글만 읽다가 이렇게 마음먹고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저도 이전에 공부하면서 자유인님 카페의 도움을 많이 받았었는데 이제 저도 작은 도움을 드릴 수 있게 되서 기쁘게 생각합니다. 처음 고시를 준비할 때 자유인님의 합격기를 읽고서 도움이 많이 되었던 기억이 납니다. 특히 학교를 다니면서 어떻게 고시공부를 병행하는지 좋은 참고가 되었습니다.
이번에 자유인님의 권고도 있고 해서 저의 시험준비 과정을 3부작으로 적어보려고 합니다. 합격기의 특성상 글내용이 자화자찬의 성격이 강하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배제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만, 읽는 분께 어떻게 비칠지는 자신이 없네요. 그냥 편하게 읽어주시기 바랄 뿐입니다.
한가지, 제가 공부하는 과정에서 특이한 점이 있다면 군입대를 미루고 공부하여 재학중에 합격한 점일 것입니다. 이곳 게시판에 올라온 고민글들을 보면 재학중 합격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글이 많은데, 그분들께 특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다만, 이미 시험에 합격한 지 2년이나 지났기 때문에 저의 경험담은 말그대로 경험담일뿐 합격의 정도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최근에 시험제도가 바뀐 점을 감안하여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독백하는 것처럼 서술을 하다보니 경어체를 생략하게 된 점 양해바랍니다.
I. 외교관을 지망하게 된 동기
외교관을 지망하는 사람 중에 사리사욕을 채우고자 지원하는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 생각한다. 외교관이 되어 세속적 가치를 얻기는 힘들뿐더러 그런 것을 얻기를 바란다면 다른 길을 택했어야 할 것이다. 외교관을 지망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그렇듯이, 나또한 역사와 외국어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중학교시절부터 틈틈히 공부했던 외국어가 나중에 외시를 보겠다고 결심한 데 큰 영향을 준 것 같다.
외교관이라는 구체적인 개념을 접한 것은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그당시 독일어 선생님과 사는 동네가 가까워서 같이 귀가하곤 했었는데, 그 선생님께서 한때 외교관을 지망했었다는 말씀을 하셨다. 최근에 개봉한 "말죽거리 잔혹사"라는 영화에서 보듯, 아직까지 폭력적인 분위기가 지배적인 고등학교에서, 그 선생님은 비폭력적이었을뿐만 아니라, 학생 하나하나의 진로를 위해 진지하게 고민하셨기 때문에 학생들간에 신망이 투터웠다. 때문에 외교관을 고려해보라는 조언을 대충 듣고 흘리지 않았던 것 같다.
98년에 연세대학교 사회과학계열에 입학했다. 1학년시절은 누구나 그렇듯 앞날에 대한 준비보다는 현재에 충실했었던 것 같다. 덕분에 학점도 위험해졌고 외시와 나는 점차 멀어져만 갔다. 2학년 2학기가 되고 전공이 정치외교학으로 확정되면서 다시 외교관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군입대를 미뤄야한다는 부담 때문에 아무런 결정도 내릴 수 없었다. 다만 교양과목 대신에 경제학과목을 수강하고 국제정치학 관련 과목을 무작정 신청했다.
II. 초보 고시생 시절
2학년 2학기가 끝나고 겨울방학이 되면서 친구들이 하나둘 입영열차를 타기 시작했다. 같이 놀던 녀석들이 제 갈길을 위해서 하나둘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나도 무언가 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민끝에 군입대를 미루기로 했다.
해가 바뀌고 2000년이 되면서 외무고시 시험공고가 났다. 1차시험일은 3월초였다. 군입대를 미룬 이상, 시험이라도 한번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여기저기 정보를 알아봤다. 알아본 결과, 김학성 헌법책이 좋다고 해서 책만 달랑 샀다. 그리고 고시원에서 공부해야 된다고 해서 동네 고시원에 들어갔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참 귀여운 시험준비였다. 학원강의나 강의테이프없이 아무 책이나 사서 혼자 공부한다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고, 더구나 동네 고시원은 고시공부하는 곳이라기 보다는 여관 같은 곳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2달간 체류했던 그곳은 고시생은 눈씻고 찾아보려해도 찾아볼 수 없었다. 40대초중반으로 보이는 아저씨들이 많이 있었는데, 처음에는 순진하게도 늦게 사시를 준비하는 분이려니 했다.
바보같은 짓을 하기는 했지만, 고시에 합격하려면 황소같은 의지도 중요하지만 올바른 정보가 중요하다는 점을 몸소 체험하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그해 1차시험은 당연히 낮은 점수로 불합격했다. 슬플 것은 없었지만 고시시험장의 도살장 같은 분위기와 응시자들의 초췌한 얼굴들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나도 곧 이렇게 되겠구나라는 생각을 하니까 한편으로는 쓸쓸한 생각도 들었던 것 같다.
III. 차분히 초석을 놓았던 시절
3학년이 되면서 다시 캠퍼스로 돌아왔다. 어느 학교나 마찬가지겠지만, 연세대는 특히나 여기저기 꽃들을 많이 심어놔서 그런지, 봄에는 유원지로 변한다. 갓 입학한 00학번 새내기들과 이제 갓 선배가 된 기쁨에 마구 밥을 사고 다니는 99학번 후배들을 볼 수 있었다. 나도 한 때 저랬는데..라는 약한 마음이 들려고 할 때, 한무리의 초췌한 사람들을 발견했다. 뭔가 결연한 의지가 엿보이는..그리고 그중 몇몇은 대담하게도 츄리닝을 입고 있었다. 세련된 학생들 틈에서 묵묵히 츄리닝 차림으로 걸어가는 그들은 누굴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사람들은 학교 고시반 사람들이었다.
여기저기 알아본 끝에 4월에 이르러서는 화백실이라는 외시준비반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기숙사동 한켠에 지어놓은 고시생 기숙사에도 들어갈 수 있었다. 집이 서울이기는 했지만 고시를 준비한다는 증명이 있으면 서울출신 학생도 받아주었기 때문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제 숙식도 학교에서 해결하고 공부자리도 확보가 되었다. 돌이켜보면 그때 참 운이 좋았던 것 같다. 고시를 준비하다보면 숙식문제, 공부자리 문제 때문에 자꾸 이사를 하는 고시생들을 볼 수 있는데, 어떤 형태로든 잦은 이사는 공부의 안정성에 좋지 않다.
물론 매너리즘을 타파하기 위해서 환경을 바꾸는 것은 좋겠지만, 매너리즘은 환경탓이라기보다는 자기 내부에 있다고 생각한다. 공부가 꽤 진전된 나중에 매너리즘에 빠지게 되면서, 나또한 공부환경을 바꿔볼까하는 유혹이 있었으나 그냥 버텼다. 결과적으로는 생활패턴을 유지하는 것이 안정적이었던 것 같다.
처음 4월달부터 손에 잡은 것은 2차과목이었다. 매일 영어와 일본어를 각각 2시간씩 오전에 할애를 하였고, 1시부터 5시까지는 경제학을 공부했다. 그리고 6시부터 11시까지는 국제법을 공부하였다. 국제정치학은 학교수업을 통해 해결하기로 하고 3학년 1학기에 전공과목을 많이 신청하였다. 역시 국제정치학은 교수님들의 살아있는 강의와 학생들간의 토론이 중요하다. 어차피 국제정치학은 단권화된 교과서가 없기 때문에 늘 논리적인 사고를 배양하려고 의식적인 노력을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첫댓글 연세대 인문계열은 화백실에 못들거가겠죠.?..ㅠ.ㅠ.. 글 잘읽었습니다..^^
1차 합격할 경우에는 제한된 인원이 들어올 수도 있을지도 모릅니다. 타과생 수용 여부는 올해 3차 시험 끝날 때 정도 되면 윤곽이 드러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