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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도송(悟道頌)
男兒到處是故鄕 (남아도처시고향) 平平仄仄仄仄平
幾人長在客愁中 (기인장재객수중) 平平仄仄仄平平
一聲喝破三千界 (일성갈파삼천계) 仄平仄仄平平仄
雪裡桃花片片紅 (설리도화편편홍) 仄仄平平仄仄平
한용운선사(韓龍雲禪師)
남아가 가는 곳 그 어디나 고향이건만
시름에 겨운 사람 아직도 그 몇이던가?
한 소리 버럭 질러 온 우주를 깨우쳐 밝히니
펄펄 날리는 눈 속에 복사꽃이 붉구나!
이 게송(偈頌)은 근래선지식(近來善知識)인 한용운선사(韓龍雲禪師)님의 칠언절구(七言絶句) 평기식(平起式) 오도송(悟道頌)이다. 압운(押韻)은 향(鄕)은 하평성(下平聲) 양통(陽統) 운족(韻族)이고, 중(中) 홍(紅)은 상평성(上平聲) 동통(東統) 운족(韻族)이다. 이 오도송(悟道頌)도 칠언절구(七言絶句) 평기식(平起式) 게송(偈頌)인데 기승전결(起承轉結) 평측(平仄)도 기구(起句) 3, 4, 5, 6자(字)가 전부 측성(仄聲)이 넷이라 맞지않다. 세자 운(韻)은 상평(上平) 하평(下平) 두 평(平聲) 운자(韻字)로 작게를 해서 근체시(近體詩)로 보면 운자(韻字)는 맞는 편이다. 한용운 선사님은 독립운동(獨立運動)가이지만 또한 시인(詩人)이라 운통작법(韻統作法)이 근체시(近體詩) 작법(作法)에 맞을 작시(作詩) 했을 것이라고 기대하였는데 기대가 좀 어긋났다. 선사님은 고향이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서 출생하였고, 어릴 때는 고향에서 당대 기호학파(畿湖學派) 거두(巨頭)로부터 한학(漢學)을 배웠고, 명진학교를 졸업하고, 18세 때 고향을 떠나 백담사에서 불교 서적을 읽고 1905년 영제(永濟) 스님한테 수계(受戒)를 하고 법명(法名) 용운(龍雲)이다. 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에 선언(宣言)하고 자진체포(自進 逮捕)되었다. 3년을 복역(服役)한 뒤 출소(出所)해 민족의식(民族意識) 계몽(啓蒙)에 대한 준비를 한 후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을 출판하여 저항 문학에 앞장서고 불교계 항일 단체 '만당'에 당수로 추대되는 등 각종 민족 운동 및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어려운 불교를 대중에게 쉽게 알릴 수있는 방법(方法)에 대해 고민해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의 핵심(核心) 부분만 뽑아내어 불교대전(佛敎大全)을 간행하였으며 유심(唯心)이라는 불교잡지(佛敎 雜誌)를 발간하여 글로써 민족의식(民族意識)을 지키고자 노력하였다. 1944년, 광복을 불과 1년 남기고 향년 65세로 입적(入寂)했는데, 사인은 뇌졸중. 숨진 뒤에도 체온이 내려가지 않고 혈색도 양호했기에 사람들은 한용운이 다시 눈을 뜨지 않을까 기다렸다가 사흘이 지나자 화장했다고 하며 화장한 후 망우리 공동묘지(共同墓地)에 매장했다. 1962년, 대한민국(大韓民國) 정부(政府)로부터 건국공로훈장(建國功勞勳章) 중장(重章)(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작품(作品)은 님의 침묵이 선사님의 대표적 작품이다. 한용운 선사님에 대해서는 잘못 전해진 오해도 많다고 한다. 성북동에 있은 심우장(尋牛莊) 대문(大門)을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건물을 보지 않으려고 북분(北門)을 냈다는 설도 잘못 전해진 말이라고 한다. 심우장에 가보면 그곳 건물들은 거의가 다 북향(北向) 북문(北門)이다. 지역의 특성이 그런데 누가 독립운동가 한용운선사를 미화(美化)하려는 뜻에서 와전(訛傳)된 것이라고 본다. 역사는 거짓이 없어야 한다. 바로 잡아 주었으면 한다.
“네이버 자료에 의하면 한용운이 생전에 지은 시집 님의 침묵은 그 불교적인 비유와 상징적 수법으로 지금도 초ㆍ중ㆍ고등학생 교과서에 수록되어 있다. 제자 중에는 기행으로 유명한 춘성(春城) 선사(禪師)가 있다. 동국대학교는 1기 졸업생인 한용운을 높이 기려 만해관, 만해광장, 만해시비 등으로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동국대학교의 전신은 1906년 설립한 명진학교가 기원인데, 한용운이 명진학교 출신이기 때문에 동국대학교 졸업생으로 간주할 수 있는 것이다. 고향인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는 한용운의 생가를 복원하고, 만해 체험관을 건립했다. 경기도 광주시의 남한산성 입구에는 만해기념관이 있다. 만해기념관은 한용운을 연구한 전보삼 교수가 모은 한용운의 유품과 관련 자료들을 소장하고 있다. 대처승(帶妻僧)을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으며, 이에 대해 조선총독부에 허가를 요구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박노자도 자기 칼럼에서 스님이나 그 외의 종교인(宗敎人)들도, 사랑할 권리가 있다고 했으니, 시대를 앞서갔다. 한용운 본인도 대처승이 되었는데, 원래 출가 전에, 결혼해서 아들 1명(한보국)을 두었다가 이혼하고 나중에 승려 시절인 1931년에 재혼하여 외동딸(한영숙)을 보았다. 첫째 아들인 한보국은 신간회에서 활동하는 등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을 하다가 한국전쟁 때 월북했다. 한보국은 북한에서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라며 그럭저럭 대우를 잘 받았고, 1976년에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다. 둘째인 한영숙은 아버지의 기념행사에 가끔 참석하는 것을 제외하면 특별한 대외 활동을 하지 않고 평범한 생활을 하면서 성북동의 심우장을 지켰다. 심우장 건너편에 일본 대사관저가 들어서자 아버지처럼 이를 보지 않으려고 심우장을 떠났다는 야사가 있었으나 한영숙 씨가 부인했다. 한용운의 대처승 인정 요구는 주장할 당시에도 파격적인 소수 의견이었고 광복 이후 한국 불교의 주류가 된 조계종도 대처승을 허용하지 않아 현대에도 소수의 승려만 결혼한다. 태고종(太古宗)은 대처승(帶妻僧)을 인정하는 대표적인 종파이다. 이 대처승 문제는 한국 불교계의 친일 잔재 문제와 교파의 정통성 문제와도 연결되기 때문에 생각보다 더 복잡한 편이다.
자세한 내용은 대한불교조계종(大韓佛敎曹溪宗) 및 한국불교태고종(韓國佛敎太古宗) 문서 참조. 한용운은 이른바 근대적 불교를 추구하며 불교의 대중화를 꾀했고 그 과정에서 대처승의 인정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한용운의 근대적 불교 추구는 사회진화론적(社會進化論的) 색채(色彩)가 보인다고 비난(非難)을 받으며 불교 사회주의(社會主義)등 다양한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한용운이 근대적 불교를 추구한 것은 일제강점기를 거쳐 불교의 영향력이 약화 되어 가는 과정을 직접 목격한 세대이며 동시에 그가 공부한 것으로 알려진 사회진화론은 사상적인 위험성을 내포(內包) 하지만 독립운동(獨立運動)과 민족 운동에 큰 영향을 준 학설이기 때문이다. 한용운이 스님이 된 지 얼마 안 됐을 때의 일인데 세계를 여행하며 경험을 쌓고 싶었던 한용운이 배를 타고 가다가 블라디보스토크에 들렀을 때의 일이다. 동료 스님들과 같이 있었던 한용운을 한 무리의 조선 청년들이 포위했다. 당시 일제의 앞잡이나 친일파들이 스님으로 많이들 위장했다고 하는데 진짜 스님인 한용운이 엉뚱하게 친일 밀정으로 몰린 것이다. 맞아 죽을 위기에 처한 스님들이 ”우린 단지 중일 뿐이다. 살려달라'고 애원해도 청년들은 쉬이 의심을 풀지 않았고 분위기는 험악 해져갔다. 그때 한용운이 "우릴 죽여도 개의치 않겠으나 이국의 바닷물에 던지지 말고 조국 땅에 묻어주시오.'라고 대답하자 그제야 그들이 친일파가 아님을 안 청년들이 사과하고 물러갔다고 한다. 만주로 향하면서 '굴라재'라는 고개를 넘는데 키가 작고 스님이라 머리를 매우 짧게 깎은 그를 주변을 정탐하러 온 일본인으로 오인한 조선 독립군 후보생 청년들이 한용운을 향해 총을 쏴서 총알이 머리에 박혔다. 하지만 그렇게 치명상을 입은 상황에서도 쏜 사람을 욕하거나 하지 않고 재빨리 그곳에서 피신하기만 한 다음 묵묵하게 마을에 도착하였으며, 병원에서 무마취수술(無摩醉手術)을 받으면서 신음 한 번 내지 않았다고 한다. 치료(治療)해준 독립운동가 김동삼은 '활불(活佛)(살아 있는 부처)'이라며 감탄했다고 한다. 나중에 청년들이 병원으로 찾아와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자 한용운은 "뭐 그럴 게 있나? 청년들이여, 아무 걱정들, 마시오. 나는 독립군이 그처럼 용감한 줄은 미처 몰랐구려. 난 이제 마음을 놓았소. 조선의 독립은 그대들 같은 용사들이 있어서 아주 희망적이오."라고 화답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총격의 후유증으로 한용운은 한평생 머리를 이유 없이 흔들거리는 체머리(한의학에서는 풍두선(風頭扇)이라고 칭함) 증상이 생겼으며 “뼈, 속까지 박힌 총탄도 다 빼지는 못해 입적할 때까지 그 상태로 살아가야 했다.
어느 날 한용운이 친일(親日) 주지(住持)들이 가득 모인 회의장(會議場)에 우연히 참석(參席)하여 연설(演說)을 하게 되었다. 한용운은 갑자기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주지(住持)들은 모르겠다고 했고 한용운(韓龍雲)은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것은 바로 똥이다."라고 했다. 그런데 한용운은 "하지만 똥보다도 더 더러운 것이 있다. 그게 무엇인지 아십니까?"라고 물었고, 주지들은 대답(對答)하지 못했다. 그러자 한용운은 "그건 송장(送葬)이다. 똥 옆에서 밥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은 있어도 썩어가는 송장 옆에서 밥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럼 송장보다도 더 더러운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라고 했다. 흥미가 동한 주지들이 귀를 기울이자 한용운은 단상을 후려치며 벽력같이 외쳤다. "바로 여기에 모인 네놈들이다!" 1921년 12월 22일 서대문형무소(西大門刑務所)에서 가석방(假釋放)되던 날 한용운 및 그와 함께 출감(出監)하는 민족대표(民族代表)들을 한영(歡迎) 하려는 많은 인파가 형무소 대문에 모여들었다. 그러나 한용운(韓龍雲)은 친일(親日)을 하던 사람, 3.1 운동 준비 과정에서 내뺐던 사람들 몇몇의 얼굴을 기억하다가 그들이 군중에 섞여 있는 모습을 보고는 "환영 나올 줄은 알면서 왜 자신이 환영받을 일은 하지 못한다는 말인가!"라고 쌀쌀맞게 말했다. 이광수, 최린 등의 유명 인사들이 스스로 창씨개명(創氏改名)하고 친일파(親日派)로 전향(轉向)하자 격노한 홍명희가 한용운을 찾아와서 "이보게, 만해. 어떻게 이런 개 같은 놈들이 있나?"라고 분통을 터트렸다. 그러자 한용운은 "벽초, 그들은 개 같은 놈들이 아니네."라고 말했다. 홍명희가 "그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냐고 따지자 한용운은 "개는 주인(主人)을 배신(背信)하지 않네. 하지만 이들은 민족(民族)과 조국(祖國)을 배신(背信)했으니, 개만도 못한 놈들이네. 개들이 자네 말을 들었으면 얼마나 섭섭해, 하겠나?"라고 화답했다. 그러자 홍명희는 "이런, 개에게 큰 실례를 범했구먼."이라고 수긍하고 개에게 사과를 읊조렸다고 한다.
살아 생전에 조선일보를 지지했다는 점 때문에 '조선일보의 친일 행각은 조선총독부의 강압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에 대한 대표적인 근거로 거론되기도 한다. 조선일보가 진보 성향이던 1930년대 초, 뿐만아니라 폐간하던 1940년까지 조선일보에 계속 기고했다. 조선일보가 친일 행적을 남긴 1938~1940년에도 조선일보에 계속 기고한 사실을 보면 한용운은 조선일보가 친일 매국 신문으로 변절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일례로 변절한 친일파 최남선이 한용운과 가까운 사이임을 자처하자 한용운은 최남선의 장례를 치르고자 하였고 후에 최남선이 찾아오자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선생님, 접니다. 육당(최남선의 호)이 왔습니다." "육당이 누구요?" "아니? 선생님, 이 육당을 벌써 잊어버리셨습니까?" "내가 알던 육당은 벌써 뒈져서 장례를 치렀소." 선생의 냉대에 최남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냥 돌아갔다고 한다. 비슷한 이야기가 최남선-정인보, 이광수-홍명희에게도 있다. 3.1 운동 때 김윤식(金允植)이 독립청원서(獨立請願書) 사건(事件)으로 작위(爵位)를 박탈(剝奪)당한 얼마 뒤에 라빈드라나트 타고르가 우연의 일치로 노벨 문학상으로 받은 기사 작위(爵位)를 반납(返納)하게 된 사건이 벌어지자, 한용운은 인도에도 김윤식 같은 사람이 있었다고 칭찬하는 듯 까는 듯, 하는 말을 했었다는 일화(逸話)가 전 해진다. 사실, 만해 선생의 시는 타고르의 영향을 받았고 "타고르의 시(詩) Gardenisto를 읽고"라는 제목의 시를 쓴 적도 있다.
하루는 친일반민족행위자(親日反民族行爲者)로 변절(變節)한 최린이 딸에게 용돈을 쥐여주자 격노(激怒)하면서 "더러운 돈이다"라는 말과 함께 돈을 빼앗아 최린의 얼굴에 던져버렸다는 일화도 있다. <님의 침묵>을 비롯해 지은 대부분(大部分)의 시(詩)들은 대단히 여성적인 어조로 쓰였지만, 한용운 본인은 호방(豪放)한 사람이었다. <님의 침묵> 서문에서도 이를 잘 확인할 수 있다.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를 전후해서 중추원(中樞院)과 통감부(統監府)에 승려(僧侶)의 대처(帶妻) 문제(問)와 관련하여 헌의서(獻議書)와 건백서(建白書)를 보냈다. 건백(建白)은 정부(政府)나 임금에게 자신의 뜻을 올린다는 뜻이다. 그 글에서 데라우치 마사타케에게 '전(殿)'이라는 경칭을 사용했고 조선 왕조를 전 한국(前韓國)이라고 표현했다. 또한 1937년 '지나사변(支那事變)과 불교(佛敎)라는 글에서 중일전쟁을 옹호하고 총후국민의 의무를 강조하는 글을 썼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일제의 통감부에 건백서(建白書)를 올린 것은 당시에는 불교 개혁이 절실했고 개혁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정치의 힘을 빌리려 했던 것이다. 또한 건백서 제출만으로 만해를 친일로 볼 수는 없다. 그뿐만 아니라 '지나사변과 불교' 글은 만해의 글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다. 이 글은 당시 불교지 편집장(編輯長)이였던 이종욱[이 쓴 것임을 전 <만해전집> 편집자였던 최범술(崔凡述)씨가 확인했다고 한다. 참조 기사 따라서 이 논쟁은 1979년에 끝난 논쟁이다. 같은 민족대표(民族代表)였지만 1930년대 이후 자치론, 1940년대에는 친일이라는 전형적인 변절 루트를 밟은 박희도와의 재미있는 비교가 천도교(天道敎) 계열인 개벽사의 잡지 《제일선》 1932년 7월호에 ‘대경실색, 가장 행렬화보’라는 제목으로 합성 사진과 함께 실렸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사 달라지는 것이 없다.
한용운(韓龍雲禪師)는 남겨진 한시(漢詩)만도 현재 전해지는 것만 20수(首)라고 전한다. 시제(詩題) 자소시벽(自笑詩癖) 시(詩)를 보면 시마(詩魔) 시벽(詩癖)에 걸려 있음을 자소(自笑)하고 있다. 한창, 나이 건만 시로 시들어 홀쭉해진 볼에 입맛도 없네, 세속 떠난 몸이라 자처하나, 청춘을 삼킨 시벽(詩癖)이 애석하구나!<詩癖太酣反奪人 紅顔減肉口無珍 自說吾輩出世俗 可憐聲病失靑春> 칠언절구(七言絶句) 측기식(仄起式) 시(詩)다. 압운(押韻)은 인(人), 진(珍), 춘(春)은 상평성(上平聲) 진통(眞), 한 운목(韻目)으로 작시(作詩)이다. 근체시(近體詩)로 작법(作法)을 한 것 같다. 시제(詩題)도 자소시벽(自笑詩癖)이다. 근체시(近體詩) 작법(作法) 시마(詩魔)에 걸려서 젊을 때 한창, 나이인데도 작시에 골몰하다 보니, 볼이 홀쭉해져 입맛도 잃었다고 기구(起句)로 파제(破題)까지 한다. 노심초사(勞心焦思)가 역역하다. 명색이 출가한 스님인데 왜? 이렇게 사성운통(四聲韻統) 성병(聲病)이 들었는지 가련하단다. 성병(聲病)은 성운학(聲韻學) 사성(四聲) 106운(韻) 운목(韻目) 운족(韻族) 익히는 것을, 말한 것이다. 한시(漢詩) 작법(作法)은 까다롭다. 사성(四聲) 평측법(平仄法)에 맞게 근체시(近體詩)를 지어야 한다. 자소시벽(自笑詩癖) 시(詩)는 칠언절구(七言絶句) 측기식(仄起式) 시(詩)다. 기승전결(起承轉結) 평측(平仄)을 맞추었나 살펴보자, 기구(起句)=平仄仄平仄仄平, 승구(承句)=平平仄仄仄平平, 전구(轉句)=仄仄平仄仄仄仄, 결구(結句)=仄平平仄仄平平, 이다. 이 시도 칠언절구(七言絶句) 측기식(仄起式) 평측(平仄)에는 맞지 않는다. 기대하였는데 근체시 한시 작법이 쉽지 않음을 알 수가 있다. 옛날 중국이나 우리나라에도 한시(漢詩)짓기 시마(詩魔)에 걸려 평생(平生)토록 작시(作詩)에 매달렸으나 마음에 드는 명시(名詩)는 남기지 못했다고 한다. 요즘 시(詩)야 이런 멋, 맛, 감흥도 없으니 말해서 무엇하랴! 오늘은 근대불교계에 선지식이었던 한용운(韓龍雲禪師) 님의 오도송(悟道頌)은 근체시(近體詩) 운목평측(韻目平仄)을 맞추어 반추(反芻)해 보았다.
여여법당 화옹 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