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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의 아비 마귀(다른 ㅎ님)
본문<요8:37~59>
지난주에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더 부연~)
여기서 자유케 됨이란 죄로부터의 자유라고 했지요. 죄로부터의 자유..이게 사실 사람에게 있어 가장 큰 복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사람이 죽는 것은 죄 때문인데 죄의 문제가 해결된다면 죽음을 초월하는 존재가 된다는 말이니 이것보다 더 큰 희소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히2.14절에서도 말씀하고 있지만, 모든 사람은 죽기가 무서워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하는 자들입니다. 한번 죽으면 끝이라고 여기니까, 사고로 죽든, 병들어 죽든, 명대로 살다 죽든, 아무튼 죽으면 끝이니까 여하히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며 사는 것입니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의 공포에 떨며 살고 있는 시한부 인생들, 죽음이 무서워 하루도 발 뻗고 쉬지 못하는 가련한 존재의 모습을 성경은 일생에 매여 종노릇한다고 말하는 것이지요.
그런 자들에게 죄로부터의 자유를 주시는 비책이 진리를 아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진리란 ㅎ님 말씀이고 ㅎ님 말씀을 좀 더 압축해서 말하면(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성경을 상고~ 성경은 곧 나에 대하여 증거함) 십자가 달리신 IX입니다. 따라서 진리란 다른 말로 십자가복음이라고 말할 수 있고, 복음을 우회적으로 표현한다면 ㅎ님의 사랑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즉 IX의 십자가는 곧 ㅎ님 사랑의 증거라는 말이지요.
그러므로 진리란,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자들을 놓아주시려고 ㅎ님이 사랑을 베푸셨는데, 그것이 바로 ‘ㅎ님 아들 예수를 사람의 형상으로 오게 해서 그 아들을 화목제물 삼으신 게 ㅎ님의 사랑이었노라’고 증거 합니다. 즉 십자가는 ㅎ님 사랑의 증표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자기백성들이 죄 때문에 ㅎ님과 원수 되어 죽을 수밖에 없었지만, ㅎ님의 화목제물이신 IX의 십자가 피 공로로 영생의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죽음에서 해방된 자유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무슨 공로를 세워서 주어진 영생이 아니라, ㅎ님의 긍휼과 사랑으로 죽음에서 해방되어 죽음이 없는 영생을 갖게 된 것입니다.
롬5:8절에서도 같은 말씀을 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ㅎ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니까 십자가를 보면 무엇이 떠올라야 됩니까? ㅎ님이 나를 사랑하신 증거구나,,
내 죄로 인해서 내가 받을 심판의 자리에, 나를 대신해서 죽으신 예수님의 피 흘리심의 은혜와, 당신의 독생자를 내주신 ㅎ님의 사랑이 보여지고 만져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롬8장에서는 ㅎ님이 의롭다 하시는데 누가 송사하리요?(반문)
왜냐하면 IX의 피로 우리를 의롭다고 여겨주셨는데, 누가 ‘너 아직 죄 있다’고 시비를 걸겠느냐는 것입니다. 따라서 IX안에 있는 ㅎ님의 사랑에서 그 어느 것도 끊을 수 없노라고 단언하는 것입니다. 이 ㅎ님의 사랑을 아십니까? 그가 진리를 아는 자입니다. 진리를 아는 자는 새언약으로 일하시는 ㅎ님의 구원이 그냥 믿어질 뿐입니다.
그래서 저절로 감격에 겨워 감사가 터져 나오는 것이지요.
오~ ㅎ님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저 같은 무지랭이를 구원하시다니요..저 같은 죄악 덩어리를 사랑하신다니요..~하면서, 심령 깊은 곳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찬송이 주체가 안 되는 것이지요. 이 사랑에 감복하여 나오는 행복과 기쁨과 안식을 ‘자유’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자유는 아무도 빼앗을 수 없어요. 그리고 한 번 주어진 자유는 영원하고 견고 합니다(취소되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지요. 이게 또한 사랑의 능력입니다.)
죄로부터의 자유란 ‘죽음으로부터의 자유’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죽음이란 육신의 죽음을 말하지 않습니다. 육신의 죽음 이후에 오는 심판을 거쳐 오는 둘째 사망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3가지 죽음을 말합니다. 육신의 죽음, 영의 죽음(첫째 사망), 둘째 사망(백보좌 심판 후 둘째 사망인 불못인 지옥)..이렇게 세가지 죽음(사망)이 있습니다.
알다시피 선악과 따먹은 인간은 ㅎ님 말씀대로 먹은 즉시 죽었습니다. ‘네가 이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정년(반드시) 죽으리라는 말씀대로 첫 아담은 범죄로 인해 죽은 자가 되었습니다. 그게 영이 죽은 자입니다. 물론 아담의 육신은 창5:5을 보면 930세를 살았습니다. ㅎ님과 분리된 인간을 성경은 죽었다고 하지 살았다라고 하질 않습니다. 이는 영이 죽은 것을 말합니다. 영이 죽었기 때문에 ㅎ님을 알 수도 없고 선을 행할 수도 없습니다.
이렇게 죽은 자들이 요5장에서 ㅎ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온다고 합니다. 그게 바로 진리의 말씀이고, 십자가 복음이지요. 이 새언약의 말씀을 이루시고 그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키기 위해 주님이 구약시대가 끝나자 오신 것입니다. 구약이 끝났다는 말은 옛언약의 기간이 끝났다는 말입니다. 옛언약은 무엇입니까? 인간이 행함으로 ㅎ님 말씀을 지켜보라고 주어진 기회였습니다. 그것이 실패로 끝났기에 새언약을 성취하시기 위해 IX가 오신 것입니다.
새언약은 ㅎ님의 창세전부터 작정하신 은혜의 구원입니다. 그래서 이미 구약 율법을 주실 때부터 새언약은 곳곳에 복선으로 깔아 놓으셨던 것입니다. 모세로부터 주어진 율법만 봐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주어진 율법말씀을 기록한 돌판은 깨뜨려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리가 잘 지키겠습니다.’ 장담하고 뒤돌아서자마자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서 어겼기 때문에 첫 언약은 파기된 것입니다. 이게 바로 인간의 정체성이고 한계입니다(무능, 무기력)
그래서 그 약속대로 백성들이 ㅎ님의 심판을 받아 죽어가는 와중에 모세가 자신의 목숨을 걸고 용서를 받고나서 다시 받은 율법이 두 번째 돌판 입니다. 모세는 IX의 예표적 인물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받은 두 번째 돌판은 새언약을 상징 합니다. 그 돌판이 지성소의 언약궤 속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언약궤 뚜껑은 속죄소(혹은 시은좌)입니다. 거기에 대속죄일에 염소의 피를 7번 뿌려서 온 백성의 죄를 완전하게 속하는 것은 ㅎ님의 자기백성의 죄를 IX의 피로 완전하게 대속하는 그림자입니다. 알고 보면 언약궤는 IX를 상징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은 정죄와 심판이 아니라, ㅎ님의 한없는 용서와 긍휼을 담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것을 모르기에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에 대해 ‘모세의 율법대로 돌로 칠까요’라고 으름장을 놓은 것입니다. 그런 자들에게 주님은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니까 모두 물러갑니다(바리새인도 같이 물러감..)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지 죄를 해결하는 게 아님을 증명한 것입니다. 아무리 율법을 잘 지켜도 자기 죄를 없이 할 수 없습니다.
죄는 인간이 스스로 자기 죄를 해결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종교인들 중에서 가장 죄를 안 짓고 살 것 같은 자를 예를 들다보니, 지난주에는 속세를 등지고 출가한 성철스님을 말하게 되었지요. 해탈을 통해 열반을 추구하던 자가 무슨 죄를 짓겠어요? 죄짓기는커녕 자신을 모기에게 내어주던 그런 자였지만 내면에서 꿈틀거리는 죄의 욕구를 처리하지 못해서 죽음을 앞두고 고백하기를 ‘나는 해탈을 말하는 석가모니에 속았다’라며, ‘내 죄를 없애줄 자가 없기에 나는 지옥에 간다’고 토설한 것입니다. 죄를 해결할 분은 ㅎ님 한 분 외에 없습니다.
사실 전능자 ㅎ님도 그냥 우리를 용서할 수가 없으십니다. ‘죄의 댓가는 사망’이라는 ㅎ님의 공의에 위반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우리를 구원키 위해 ㅎ님은 당신의 외아들을 죄 값으로 죽이시고 우리를 용서하신 엄청난 긍휼을 베푸신 것입니다. 지나가던 어느 청년이 죽은 게 아닙니다. 존재 가치도 없는 피조물인 우리를 살리기 위해 창조주 ㅎ님이 성육신하여 죽으셨단 말입니다. (다시 말) 십자가는 자기백성에 대한 ㅎ님의 지독한 사랑의 엑기스라는 말입니다.
-행4, 천하 인간에 예수 이외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노라.
그런데 누가 이러한 망극한 은혜와 사랑을 입게 됩니까? 모두가 자기 죄로 인해 육신의 죽음이후에 심판을 받고 지옥에 가야 하는데, 여기서 IX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입은 자들이 있으니, 그들이 바로 창세전 ㅎ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들인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믿는 것은 가장 큰 기적이고 복입니다. 수백 억 짜리 로또가 있다 해도 여기에 비하겠습니까? 백년도 못가는 일장춘몽이지요. 죄로 인해 죽었던 자들이 사는 비책은 오직 IX 십자가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죄로 죽은 자임을 아는 것도, 그런 죄에서 벗어날 길은 예수 밖에 없음을 알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는 것도, 다 성령의 역사로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던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물은 세례로서 내가 죽은 자임을 알게 되는 단계이고, 그런 자에게 성령이 임하여 거듭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거듭날 때에 죄로 죽었던 자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계20장에서의 첫째 부활입니다.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한 자는 복이 있다고 합니다. 둘째 사망(지옥)이 없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석가모니나 성철스님처럼 온 평생을 면벽수도를 하거나, 또는 율법주의자들처럼 끝없는 종교적 행함으로 되는 게 아니라, 오직 IX를 믿음으로만 사망을 이길 수 있습니다. 인간 자신이 노력해서 얻는 게 아니고 오직 예수님 피 공로를 믿음으로 선물로 받는 것이기에 자유함이 있는 것입니다. 애초부터 인간의 행함으로 주어지지 않고 은혜로 주어졌기에, 나중에 인간의 행함이 잘못되었다고(죄 짓는다고) 취소되지도 않습니다. 여기에 진정한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갈5:13~14>
우리의 부르심의 목적이 무엇이라구요? 즉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가 자유라고 합니다.
자유가 바로 구원 받은 증거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지금 자유 하십니까? 예수님 때문에 기쁘시냐구요. 이방인은 죽기가 무서워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하는데, 구원 받은 성도는 여기서 자유함을 누리는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이방인은 자신이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 살아가야 하기에 무엇을 먹을까 생존에 대해 걱정하고 혹시 병들거나 사고로 죽으면 어쩔까? 노심초사하며 살지만, 성도는 그런 세상 염려에서 벗어난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여기서는 행인과 나그네로 사는 자세, 그게 자유자의 삶의 양식((L/Patten)입니다. 그런데 자유자가 되었다니까, ‘난 구원 받았고, 이 구원은 취소되지 않으니까 내 맘대로 살 거야’한다면 그는 자유를 방종의 빌미로 삼는 자이니 실상은 은혜를 모르는 자요, 구원받은 자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은혜를 받은 자는 은혜를 나누고 베푸는 사랑에 매여 사는 사랑의 종된 모습을 나타내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자기백성들에게 생명을 주시러 오신 예수님을 못 알아보고 유대인들은 예수님과 대적하는 장면이 오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요8:37~38> 37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38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
38절,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들은 것을 말하고, 유대인은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들은 것을 행한다고 말씀 하십니다. 앞의 23절도 비슷한 말씀(나는 위에서 낫고 너희는 아래에서 낫고)을 하십니다. 이것이 차이점입니다. 주님은 하늘에서 오신 분, 사람은 땅에서 난 자들...
하늘과 땅, 육과 영, 진리와 비진리는 차원이 틀립니다. 무전기의 주파수가 틀리면 통화가 안 되듯이 계속해서 주님과 유대인이 서로 겉도는 것입니다. 말이 안통해요. 물과 기름 같이 피차 따로 놀뿐이지 섞이지가 않습니다. 사용하는 용어는 같은데 그 안의 내용이 다릅니다.
-믿음, 은혜, 복음, 예수, ㅎ님, 십자가,..등등..서로 사용하는 단어는 같지만 차원은 완전히 다르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속으면 안 됩니다.
가령 믿음하면, 종교인들 관점에서 믿음이란, 사람의 열심과 정성이 클수록 좋은 믿음이라고 여깁니다. 결국 사람의 행함을 믿음의 기준으로 규정합니다. 그러나 진리 안에서의 믿음이란 반대입니다. 자기 행함은 완전히 기각 당하고, 오직 IX의 행함심을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은혜 역시 같은 개념입니다. 종교인들의 은혜란 자기에게 좋은 일이 일어난 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갑자기 행운이 찾아온 어떤 일들- 병들었다가 낫거나, 사업이 잘된다거나, 자녀가 잘나가면 ㅎ님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진리 안에서의 은혜란 전혀 다릅니다. 뭘까요? 결코 받을 수 없는 자에게 선물로 주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그건 이 세상에 없는 하늘의 것입니다. 죄로 죽어야할 자가 십자가 대속으로 살아난 이와 같은 영적인 차원을 두고 은혜라고 합니다.
그리고 날마다 죄가 발각되면 죄로 죽어야 하는데, IX의 은혜로 살아가는 게 은혜이지요.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종교인들은 예수 믿으면 구원도 받고 자기의 소원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행함에 따라 구원이 된다는 발상이 맞겠습니까? 이것은 우상숭배입니다. 더불어 ㅎ님을 섬기는 목적이, 예수를 믿는 목적이 세상 형통과 문제 해결 때문이면, 이 얼마나 추하고 더러운 망상이겠습니까? ㅎ님은 죄인을 대속하기 위해 독생자를 죽였는데, 피가 뚝뚝 떨어지는 십자가 밑에 와서 고작 ㅎ님 이것 주세요, 저것 주세요, 한다는 발상이 미친 짓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이 말하는 십자가 자체가 우상입니다.
이런 모든 자들을 다른 복음, 다른 예수 다른 ㅎ님, 다른 영을 갖은 이단들이라고 성경은 고발하고 있습니다. 이런 정신사고가 다 어데서 왔습니까?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왔다고 하시는 겁니다. 이런 현상은 이미 구약 이스라엘에서부터 있어 왔던 일들입니다. 사29장을 보면, 입술로는 ㅎ님을 찾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탄식), 마음은 콩밭(세상 복에)가 있으면서 입으로는 ‘ㅎ님 사랑합니다.’라고 거짓을 말한다는 것이지요.
렘2장을 보면 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다고 탄식하십니다.
곧 생수의 근원이 되는 ㅎ님을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팠는데, 그게 터진 웅덩이라고 합니다.
사단 마귀는 인간 속에 종교심이 있음을 간파하고 있기에 ㅎ님을 믿지 못하도록 막을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만든 계책이 ㅎ님을 믿되 그 방향을 돌려놓는 일을 합니다.
그래서 구약의 역사를 보면 ㅎ님 자리에 어느새 다른 ㅎ님을 갖다놓고 섬기라고 종용하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광야에 나오자마자 아론에 의해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무어라고 지칭합니까? 이 금송아지가 자기들을 애굽에서 나오게 한 ㅎ님이라고 섬겼습니다.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을 한 것입니까?
아합 왕 때는 바알과 앗세라를 ㅎ님이라고 섬겼습니다(풍요와 다산). 사실 이스라엘 역사는 온통 우상숭배로 도배를 했다고 해도 맞는 말입니다. 주변 국가들이 잘사는 이유는 그들의 신이 강해서라고 여겼기에, 심지어는 그들의 신상을 본 따서 ㅎ님 성전 마당에 그들의 신상을 세우고 섬긴 적도 있었습니다. 이런 작태들이 ㅎ님을 버리는 짓이고, 다른 우물을 파는 행위입니다. ㅎ님으로 갈증을 해갈하지 못해서 다른 신을 찾아 방황 했다는 말입니다.
참되신 ㅎ님은 천국에 부합한 자로 만드시기 위해서 이 땅에서 고난과 역경을 통해 훈련하시십니다. 그래서 성도에게 광야라는 고달픈 삶을 안배하십니다. 그러나 이게 싫다는 거지요. ‘우리도 남들처럼 잘 먹고 잘살게 해주는 신을 찾아 나서자’라고 한 것이 우상숭배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게 영적인 음행이고 간음입니다.
호세아서 전체가 이것을 지적하는 내용입니다. 호세아는 제사장입니다. 율법대로 하자면 제사장은 반드시 정결한 처녀와 결혼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ㅎ님은 제사장 호세아에게 부정한 여인 음녀 고멜을 데려다가 혼인하여 살라고 명하십니다. 누가 이 명령이 좋겠습니까마는 할 수 없이 호세아는 고멜을 데려와 혼인하고 아이까지 낳았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음탕한지 아이까지 있는 유부녀가 외간 남자가 좋아서 계속해서 집을 나갑니다. 그러면 호세아는 또 찾아가서 값을 치르고 데려오기를 반복하는 내용이 호세아서입니다. 제사장 호세아는 거룩하신 ㅎ님을 상징하고 음녀 고멜은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거룩하신 ㅎ님이 애초부터 부정한 여인, 정말 깜도 안되는 자들을 택하여 아내로 삼았지만 이스라엘은 음탕한 속성을 버리지 못하고 계속해서 세상 복을 찾아 헤메는 더러운 자들임을 비유적으로 표출한 내용이 호세아서입니다.
이처럼 땅에서 출생한 인간은 거룩하신 ㅎ님을 스스로의 힘으로 섬길수 없음을 구약 전체를 통해 고발하는 것입니다. ㅎ님께 순종하는 분은 오직 죄 없으신 IX 한 분 밖에 없고, 그 IX를 믿음으로 예수님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될 때 구원이 성사되는 것이지 인간의 행함으로는 절대 불가능함을 성경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8:39~40>
40절,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했다..
땅에서 난자인 육은 영의 일을 알지 못합니다. 롬8장- 육신의 생각은 ㅎ님을 기쁘시게 못할뿐 아니라 ㅎ님과 원수가 된다고 지적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니까 예수를 이단으로 여겨서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렇지 아니했다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이 구원 받은 것은 ㅎ님의 부르심으로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인생 여정을 보면, 마치 어린아이 걸음마 시키듯이, ㅎ님에 대하여 문외한이던 자를 한 걸음 한 걸음을 이끄셨던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창15장을 보면, 밤에 하늘의 별을 보여주면서, 저 무수한 별들처럼 네 자손이 창대케 될 것이라는 말을 아브라함이 믿었더니 그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여겨주십니다. 이게 아브라함의 신앙입니다. 자신이 한 게 없어요. 다 ㅎ님이 북 치고 장구 치고 한 것입니다.
창18:1절ㅇ[도, 세 사람이 아브라함을 찾아 옵니다. ㅎ님과 두 천사가 현현한 것입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고운 가루로 더을 만들고 좋은 송아지를 취하여 요리하여 대접 합니다. 무엇을 상징합니까? 좋은 떡과 고기?(IX의 몸과 피)를 상징합니다. 이것으로 ㅎ님을 대접했다는 것은 십자가 복음을 기쁘게 받아드렸다는 비유입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나를 대접했거늘 너희는 나를 죽이려고 하네?(하십니다)
이렇게 유대인들은 ㅎ님이 보내신 자 나 예수를 믿어야 영생이라는 주님의 말을 믿지를 못합니다. 왜 그래요? 율법지킴을 가치로 여기고 자산으로 쌓아왔는데, 그 모든 것을 부인하고 생소하게 예수를 믿어야 구원이라니 어떻게 수긍이 가겠습니까? 맞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사람의 의지나 결단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지금 주님이 이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 행위로 만들어 낸 가치를 믿지, 아무도 예수가 주는 구원을 믿지 못하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은 성령을 받아야 가능합니다.
<요8:43~44>
38절, 아비 마귀에게서 들은 대로 행한다고 하지요?
그러니까 두 ㅎ님이 있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섬기던 ㅎ님은 진리의 ㅎ님인데, 너희가 섬기는 ㅎ님은 마귀라고 말씀합니다. 거짓의 아비 마귀, 이런 별명이 어디서 주어진 겁니까? 에덴동산에서 화와를 미혹할 때 거짓말을 했지요.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ㅎ님의 말씀을 변개시켜서, 이것을 먹으면 ㅎ님처럼 눈이 밝아질 건데, 그래서 ㅎ님이 못먹게 한 거야(하니까), 그 말을 듣자 갑자기 선악과가 그리도 보암직, 먹음지, 탐스럽게 보이더라는 거지요,
이처럼 사단은 항상 ㅎ님의 백성들을 미혹합니다. 마4장을 보면, 사단이 40일을 금식하신 예수님을 찾아와 시험을 하지요. 네가 ㅎ님의 아들이면, 돌로 떡을 만들어 먹어라. 이 한 구절에 벌써 두 가지 올가미를 놓았습니다. 네가 ㅎ님의 아들이면~(뭡니까?), 적어도 ㅎ님 아들이라면 이 정도는 해야지 않겠어? 은근히 실력을 자랑하게 만듭니다. 아주 교묘하지요...이어 덧붙인 말이 떡을 만들어 먹으라고 합니다. 40일 금식했으니 얼마나 시장하겠습니까? 약점을 아주 이용하는 사단이 허를 찌른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시험을 이깁니다. 사람은 떡(세상 복)이 중요한 게 아니라 ㅎ님 말씀으로 사는 자야..(이것을 모르면 기복주의로 변개됩니다.)
두 번째 시험은 높은 성전에서 떨어져도 다치지 않을 테니 해 보라고 시험 합니다(뭡니까?)
요즘 말로 하면 은사주의, 신비주의 신앙을 권장하는 미혹입니다. 요즘 신사도운동이 유행하던데요.. 과거 사도들이 여러 가지 이적과 기적을 행하였듯이 그런 운동이 다시 일어나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그래서 금이빨, 은이빨이니, 장풍이니, 꿈이니, 예언이니, 여러 은사들과 신비한 체험을 일으키는 바람이 붑니다. 그게 신기해서 사람들이 모여들고 헌금이 쌓입니까? 이런 게 다 사단의 장난임을 저들은 모릅니다. (신도림동 성락교회: 김기동)
마지막 시험은 세상 영광을 추구하라고 합니다. 작금의 기독교가 어떻게 가르칩니까? 성공출세 해야 ㅎ님이 살아계신 증거니까, 신자들은 누구보다도 성공해야한다고 부추깁니다. 이게 바알신앙이지 뭡니까? 삼박자 축복이니 뭐니 하면서, 심지어 여의도의 조00목사는 ‘예수님이 우리의 가난을 다 감당하셨으니까 성도가 부자되는 게 ㅎ님이 원하시는 거’라고 설교를 해왔지요. 그러니 축복에 눈먼 자들이 미어터진 게 여의도 순복음교회 아닙니까? 성경과 거꾸로 가르친다니까요. 70만 성도요? 거의 다 바알 신도들이지요..
<요8:45~47>
ㅎ님께 속하지 아니했기에 진리를 듣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성령을 받아 거듭나지 아니하면 절대로 십자가 복음이 들리지 않습니다. 여의도 조목사처럼 십자가도 자기 멋대로 갖다 붙이잖아요. 예수가 십자가에서 가난을 다 해결했으니 우리가 부자 되는 게 ㅎ님 뜻이라니요.
그러니 거기에 모인 자들의 가려운 귀를 살살 긁어주니 우리 목사님 따봉, 최고야, 칭송이 울려 퍼지지요. 그러나 어쩝니까? 눅6장에 보면,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는 자는 화가 있다네요. -거짓 선지자는 늘 사람이 듣기 좋은 말을 한다는 고발입니다.
계13장에서는 이처럼 세상 복주는 ㅎ님을 섬기는 자들을 땅에서 올라온 짐승, 거짓 선지자라고 밝히고 있고, 그들이 파는 신앙을 666이라고 합니다. 666은 사람의 수 짐승의 수라고 하잖아요? 즉 짐승화 된 사람이 욕심의 본능으로 추구하는 3가지 요소인 -생존문제, 종교적 영광, 세상영광을 도모하는 거짓 신앙을 말하는 것이지 바코드가 아닙니다. 이렇게 풍요와 형통을 주는 짝퉁 ㅎ님, 짝퉁 예수는 누가 섬기느냐하면 어린양의 생명책에 녹명되지 않은 자들이 세상 복주는 ㅎ님(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을 경배한다고 증거 하고 있습니다(누가 이 짐승과?~)
<요8:56~59>
56절, 나의 볼 때를 ..
<창22:16~18> 여기서 네 씨란 네 자손을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언약백성의 대부입니다. 상징이라는 말이지요. 언약백성이란 ㅎ님의 약속을 믿음을 생명으로 삼고 사는 자를 말합니다. 17절, 네 씨가 장차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는 약속을 받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자손에게서 메시야가 나와 대적 마귀사단을 이길 것이라는 계시를 이미 받고 믿었다는 말입니다.
<갈3:15~16절> 네 자손이 누구다? ‘곧 그리스도다’라고 바울이 해석을 해 줍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이미 자신의 씨에서 메시야가 나타나 장차 사단을 이길 것일 내다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의 볼 때를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했다고 하는 겁니다(언약, 즉 계시를 믿는 자)
이같이 성령을 받은 성도는 시공을 초월하여 ㅎ님의 언약 안에서 이미 성취된 ㅎ님의 구원의 완성을 보고 기뻐하는 자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본향인 천국을 소망하며 살기에 육신을 입고 사는 현실 세계에 매이질 않고 형통하든지 불통하든지 상관없이 그저 행인과 나그네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그네가 하루 묵어가는 여관방 시설에 대해 어쩌니 저쩌니 탓하는 사람 없듯이, 하루살이 같은 인생에 마음 쓰지 않고 가볍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방원의 하여가가 떠오릅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 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잠시 왔다 가는 인생 ㅎ님 만났으면 무엇이 부족하리,
-감사 찬송 목청껏 부르다가 주가 오라시면 득달같이 달려가리..
이방원의 하여가가 딱 맞는 세계관, 이게 성도의 라이프 패턴이 아니겠습니까?(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