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웅순의 유묵 이야기>
인종대왕의 묵죽도

인종대왕묵죽도
* 석야, 신 웅 순(시조시인 ․ 평론가 ․ 서예가, 중부대교수)
인종의 동궁 시절 하서는 시강원 설서가 되어 세자를 가르쳤다. 이 때 세자는 하서의 학문과 덕행에 깊이 감동해 「주자대권」과 함께 손수 묵죽도 한 폭을 그려 하사했다. 바위 주위에 위태롭게 솟아 있는 대나무 그림이었다. 하서는 이어 그림에 맞게 시를 지어 화답했다.
뿌리와 가지, 마디 잎사귀는 빈틈없이 촘촘하고
돌을 벗삼은 정갈한 뜻은 그림 한 폭에 가득하네
이제야 알겠네, 성스러운 솜씨의 조화를
어김없이 하늘과 땅이 한덩이로 뭉치셨음을
각별한 애정을 담은 군신 간의 아름다운 합작품이다. 인종이 묵죽도를 하사한 것은 장차 하서를 크게 쓰려는 깊은 뜻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36세 되던 해 인종이 즉위했으나 같은 해 7월 갑자기 승하했다. 소식을 들은 하서는 문을 닫아 걸고 몇날 며칠을 대성통곡했다. 그리고는 병을 칭탁하고는 향리로 낙향했다. 세상을 등진 채 거기에서 평생을 학문을 닦으면서 보냈다.
해마다 7월 1일 인종의 기일이 되면 집앞 난산에 올라 해가 질 때까지 음주, 통곡했다.
명종이 즉위하자 하서에게 학자로서의 최고의 영예인 홍문관 교리를 제수했다.
하서는 두어 섬의 술을 싣고 마지못해 서울로 떠났다. 가다가 대나무 숲이나 꽃이 핀 곳이 있으면 대나무숲, 꽃과 마주앉아 술을 마셨다. 그만 술이 떨어지자 집으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애틋한 인종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더는 갈 수가 없었다. 인종을 위해 그는 이렇게 절의를 지켰다.
하서는 인종을 그리워한 시를 짓기도 했다.
임의 연세 바야흐로 삼십이요
내 나이도 3기(1기는 12년)가 되려는데
새 정이 미흡하여 이별함이 화살 같도다
내 마음은 변할 줄 모르는데
세상일은 동편으로 흐르는 물이로다
젊은 나이에 해로할 짝을 잃었으니
눈은 어둡고 머리털과 이빨도 쇠했는데
덧없이 살기 무릇 몇해던가
지금까지 아직껏 죽지 않았네
잣나무 배는 강 한가운데에 있고
남산에는 고사리도 나지 않았네
도리어 부럽도다 주나라 왕비는
살아 이별하여 권이장을 노래한 것이
필암서원 사당에 특별한 건물이 하나 더 있다. 경장각이다. 이 곳에는 인종이 세자 시절 하서에게 ‘주자대전’ 한 질과 함께 손수 그려 하사한 ‘인종대왕묵죽도’와 그 목판이 소장돼 있다. 이후 묵죽도는 훗날 하서의 높은 절의를 표상하는 하나의 상징물이 되었다.
정조는 하서의 덕행과 절의를 높게 평가했다. 정조가 하서를 문묘에 배향할 때, 장성으로 파발을 보내 선왕이었던 인종께서 하사한 묵죽도의 보관 여부를 확인하고 필암 서원에 경장각을 세웠다. 하서 종가에서 소중히 간직해 온 묵죽도를 경장각으로 옮겨 소장하게 한 것이다.
경장각 편액 글씨는 정조 임금이 초서로 쓴 친필이다. ‘경장각’은 ‘왕가 조상의 유묵을 공경스럽게 소장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인종대왕의 묵죽도’는 인종, 하서, 정조의 세 인물의 고매한 인품과 애틋한 마음이 서려있는 후세의 귀감이 되는 한폭의 그림이자 또한 아름다운 이야기이기도 하다.
한국문학신문(2013.11.13,수)
첫댓글 좋은자료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