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연한 초월자가 되는 법 : 니체처럼 산책하면 성공을 깨닫는다.
니체는 독일을 대표하는 시인이자 철학자입니다. 그는 "신은 죽었다", 라고 말했습니다. 왜 그러한 말을 해야 했을까요? 그는 매일 산책을 하면서 하루에도 몇 번 씩 자연과 하나로 녹아드는 기쁨과 감격을 느끼며, 절로 명상에 빠져들었습니다.
그에게는 이러한 산책이 단순한 소일거리가 아니라 깊은 절망과 고통을 이겨내고 삶을 긍정하게 하는 절절한 생명의 시간이었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철학가여도 정신적인 고통은 있기 마련입니다.
니체은 스위스의 한 호숫가를 거닐다가 피라미드 모양의 바위와 마주치자 발길을 멈췄습니다. 그 순간 영원 회귀에 대한 영감이 옴몸을 관통했다고 합니다. 영원 회귀는 살아온 삶의 모든 순간이 앞으로도 똑같이 무한히 반복된다는 철학의 개념입니다.
그는 이 사상을 받아들이고 자기 삶을 긍정하는 사람을 초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철학자들의 삶에는 대부분 관조, 명상, 그리고 초월이 있습니다.
관조(觀照)란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을 말합니다. 무언가를 볼 때 개인적 사고와 감정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입니다. 객관적으로 보는 것과도 차이가 있습니다. 아무리 객관적이라고 해도 사고(思考)가 개입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명상이라고 하면 엄숙한 분위기에서 정좌를 하고 앉아 마음을 단단히 먹고 해야하는 특별한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대중화 되었지만 아직도 다소 영적이고 경직된 이미지가 강합니다.
하지만 명상은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한 아주 잠깐의 시간도 명상이기 때문입니다. 사고(思考)를 멈추고 무언가에 집중한 상태라면 언제든지 우리는 명상을 하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명상은 언제나 관조(觀照)와 연결됩니다. 관조와 명상이 깊어지면 자신을 초월한 깨달음에 이르기도 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종교적 색채가 밴 관념이 아니라 기원전부터 인간이 실제로 체험한 것들입니다.
관조를 하고 명상을 하면서 깨달음을 얻는 것, 이 세가지는 경계 없이 서로 이어져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깨달음을 얻으면 그 채로 쭉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데 아무리 깨달음에 도달했다고 해도 그 상태에 계속 머무를 수는 없습니다.
곧 현실로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방법을 아는 사람은 현실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자기 자신을 계속해서 구원해 가며 살 수 있습니다. 깨달음은 특정한 방법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개인의 의지로 도달할 수 있는 영역도 아닙니다.
오히려 이 모든 것을 내려놓았을 때 비로소 불현듯 찾아오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삶의 신비이자 명상을 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신의 선물일 것입니다.
니체는 어느날 산책을 하다가 그만 울고 맙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나 자신을 훨씬 뛰어넘었지, 마침 숲 속을 지나가던 한 남자가 나를 유심히 보더군, 그 순간 내 얼굴은 넘치는 행복으로 빛나고 있었을 거야,"
니체의 이런 고백을 의사들은 다행증과 같은 정신질환이라고 추측했습니다. 비정상적으로 과도하게 느끼는 행복감을 [다행증]이라고 합니다. 그 진단을 했던 의사들이 과연 명상다운 명상을 한 적이 있었을까요?
나 또한 혼자 깊은 산속에서 산책을 하면서 운 적이 있습니다. 너무 기쁘고 행복해서 눈물이 멈추질 않았습니다. 누군가와 함께 하이킹하는 기분으로 숲 속울 산택하면 자연과 하나됨을 느끼기 어렵습니다.
즉 나는 그저 나일 뿐이고 주위를 둘러싼 초목은 자연 그대로에 불과해집니다. 하지만 혼자 산과 들을 걸으면서 무의식중에 명상 상태로 들어가면 나와 자연의 경계가 허물어집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어느새 하나가 되어있음을 느끼는 순간이 옵니다.
그러면 니체처럼 넘치는 기쁨을 온몸으로 맛볼 수 있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하는 명상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산책을 하면서도 얼마든지 자신을 초월하는 명상 상태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참선하는 승려가 수행 이외에 청소나 생활에 필요한 잡무를 묵묵히 해낼 때도 일종의 [선정] 즉 사고하지 않는 명상 상태에 이를 수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말로 표현하기가 힘듭니다.
자신이 실재로 경험해야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니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연의 풍경 속에서 우리 자신을 재발견하고 유쾌한 전율을 느낄 때가 있다. 땅에서 이런 느낌을 받은 사람은 분명 행복할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에 창조성이 깨어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세상일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오지랖을 많이 부립니다. 내가 상관해 주면 상대방에게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전혀 아닌 경우가 더 많습니다.
오지랖이 넓은 사람은 가벼울 때가 많습니다. 자신의 오지랖에 상대가 웃으면 자신이 맞다고 착각하고 상대가 웃지 않으면 오히려 아무 잘못 없는 상대를 욕합니다.
세상 일에 전혀 관여하지 않는 시간을 가져보세요. 당신이 할 일은 따로 있다는 것을 알게될 것입니다. 판단과 사고하는 것을 잠재우는 관조를 하면서 명상에 빠져들면 풍요롭고 평온한 느낌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내가 완전히 자연 속으로 녹아들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모든 대상이 한층 멀어지면서 동시에 한결 더 진실한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모든 게 나를 관통해서 지나다니는 느낌마저 들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성장의 욕구가 일어납니다. 나의 내면에서 나무가 자라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나도 모르게 시(詩)와 같은 한 문장이 떠오른다면 아마 당신은 자연을 경험했던 것일 것입니다.
당신의 영혼은 얼마나 투명할까요? 투명하다는 것은 그 무엇도 섞이지 않은 명료하게 하나됨을 의미합니다. 업무가 끝난 후애 뭘 할지 정신이 없이 쏠려 있거나 뉴스나 음악을 들으며 적당히 작업하면서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 업무만을 되는대로 해 가면서 살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이렇게 마음이 흩어진 채로 불완전한 기계처럼 행동하고 있지는 않나요? 앤서니 드멜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식기를 닦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식기를 깨끗하게 할 목적으로 닦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닦는 행위 자체를 목적으로 닦는 방법이다. 첫 번째 방법은 죽은 방법이다. 왜냐면 몸이 식기를 닦는 동안 내 마음은 그릇을 깨끗이 하려는 목적에만 얽매여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번째 방법은 살아있다. 마음과 몸이 공통된 하나의 목표를 향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삶의 자세가 명상이 이끌어내는 집중력의 일부분입니다. 투명하게 산다는 것은 몸과 마음의 일치가 이끌어내는 집중력으로 인생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혼자서 조용한 시간을 가질 때 창의적이 됩니다. 잡념을 없애는 명상만으로도 우리의 영혼은 치유됩니다. 명상(meditation)이라는 뜻의 어원은 라틴어에서 나왔는데 여기에는 의료(medical)와 자유(freedom)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모든 고통은 조용히 앉아 혼자가 될 수 없는 곳에서 생겨난다.] 인생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 일일이 동요하는 사람은 드라마에서도 현실에서도 불행하고 가파른 비탈길만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혼자의 시간이 주어지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다면 어떠한 창조력을 얻지도 그것을 유지하지도 못할 것입니다. 창조 과정을 학습하는 것보다 훨씬 풍부하게 창조력을 높이는 방법은 단독자가 되는 시간을 의식적으로 확보하는 일입니다.
지금부터 하려는 일을 미리 앞질러 생각하지 말고 보상받거나 피하려는 생각도 떨쳐보세요. 마음을 굳게 먹고 현재의 상황에 부딪혀 보려는 자에게는 시간이란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한 순환으로서 아름답게 빛날 것입니다.
중국 선승들의 어록에 [일일시호일(日日時好日)]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날이든 그대로 긍정하고 매일에 충실하면 만족은 언제든 느끼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 변화가 자신에게 일어난다면 틀림없이 현실적인 구원이 됩니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일에도 일희일비(一喜一悲)의 감정 기복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전자 제품의 전원을 전부 끄고 혼자 있어 보세요. 그렇게 있는 것이 편안한 상태가 되기까지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럽고 이상한 느낌을 견디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자꾸만 휴대폰을 만지고 싶고 무언가를 듣고 싶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아직 마음이 사회의 번잡함과 활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습관적으로 활기를 추구하는 마음이 말이나 소리, 바쁜 용무로 일상을 채우려 드는 것입니다.
불편하고 초조한 만큼 평소 본연의 자신을 잃은 채 살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정적에 익숙해지면 기억이 밀려옵니다. 멀리에 있는 기억부터 최근의 기억까지 하나하나 다가오면 감정은 다채롭게 움직입니다.
그것을 마치 남의 일처럼 바라보면 그 감정은 다시 나에게서 멀어지다가 어느덧 사라지고 다시 현재로 돌아옵니다. 자연의 소리만 들리는 상태에서 가만히 앉아있다 보면 시작했을 때와는 상당히 달라졌음을 자각할 수 있습니다.
부족함이 없어질 것입니다. 더 바랄게 없어지는 느낌이 일어납니다. 사회 속에 섞여 있었을 때의 자신은 분열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나와 하나가 된 자신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비로소 체감하게 됩니다.
그러한 정적 속에서 혼자 식사해 보세요. 먹은 식기를 닦고 창밖의 하늘을 올려다 보십시요. 느껴지는 시간 자체가 평소와는 다를 것입니다. 내가 나를 만나는 시간이 바로 이러한 시간입니다.
그때 나는 철학자가 되고 시인이 되며, 깨달음의 문을 두드리는 수행자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현실의 고통에 흔들리지 않고 내면 속의 창조의 나무를 커다랗게 성장시켜 나가는 길입니다.
어떤 날이든 그대로 긍정하고 매일에 충실하면 언재나 당신의 삶은 만족스러울 것입니다. 매일 혼잡함을 잠재우고 조용히 관조하고 명상해 보십시요. 그속에 내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 출처 : 책 「니체와 함께 산책을」 - 시라토리 하루히코 저서 / 다산초당 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