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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피란살이
원래 강 후대의 고향은 황해도 옹진군 가천면의 옹진리로 해방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그
의 집은 동네에서도 부자 소리를 들을 만치 잘 살던 집안이었다.
그런데 광복이 되면서 38선이 그어지면서 황해도 옹진군과 연백군 벽성군은 이남으로 분
리가 되어 대한민국에 속하게 되었고 그 외의 지역은 전부가 공산주의자들이 지배하는 북한
소속으로 되었다.
6.25이후 1953년 7월27일 정전과 더불어 휴전선이 그어지면서 이 3개 군은 이북으로 편입
이 되고 말았다.
다만 서해 5도 만이 대한민국의 관활로 들어오게 되어 당초의 이남 땅은 휴전선 북쪽으로
편입이 되고 말았으니 옹진군을 비롯 3개 군에서 살던 사람들은 제 밥그릇도 찾아 먹지 못
한 머저리 신세가 된 것이다.
강화도에서 바라보면 빤히 보이는 곳이면서도 70년째 고향을 가지 못하는 실향민들의 슬픈
심정을 어느 누구에게 하소연을 할 것인가
그 때 할아버지는 과수원을 크게 하셔서 이른 봄이 되면 벌써 할아버지는 과수원 일을
하시기 위해서 일꾼들을 얻어서 나뭇가지를 치고 뿌리마다 걸음을 주었다.
그런데 해방이 되고 나서 읍내엘 나가면 로스케라는 사람들이 생전 보지 않던 장총을 둘러
메고는 읍내를 다니면서 쑤알라대는데 아이들이 무슨 구경이 난 듯이 쫓아다녔다.
그런데 며칠 뒤에 읍내 장엘 다녀오시던 할아버지가 말씀을 하시는 내막을 들으니 아무래
도 재산을 모두 빼앗길 것 같다고 하셨다.
그런 소문이 돌자 지주들이며 잘 살던 사람들은 모두가 동요를 하며 앞으로 어찌 살아야할
지 만나는 사람마다 걱정을 하였다.
할아버지는 그 말씀을 들으시고는 나서 아무래도 이남으로 미리 나가야겠다는 말씅을 하셨
는데 1950년 6월25일 북조선의 인민군이 38선을 돌파하고 이남을 쳐들어가는 전쟁을 일
으키는 바람에 온 나라가 전쟁 속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전쟁이 나자 밖에도 나가지 못하고 집안에서만 있었는데 저녁마다 마을의 세포위원장은 남
녀 각각 사랑방으로 모이라 하고는 인민군대가 이미 서울을 비롯하여 수원을 빼앗고 승승장
구 아랫역으로 진군한다면서 마을의 인민들은 전쟁을 이길 수 있도록 힘을 합해야 한다면서
집집이 경계를 잘 하야한다고 하였다.
하루가 밝으면 거리마다 인민들이 동원되어서 말 마차며 길마다 버려진 탄약상자를 치우고
불에 탄 집들을 정리하였다.
할아버지는 처음에는 과수원이 있는 산으로 가서 있자고 하시더니 얼마 후에 아무래도 전
쟁이 길어질 것 같으니 차라리 남쪽으로 가는 것 만이 살길이라면서 밤저녁에 남쪽으로 떠
나자고 하셨다.
마침내 집안 식구들이 저녁을 일찍 먹고 피란보따리를 싸 짊어지고 길을 나서자 그때 마을
에서 혼자 사는 신영감이 할아버지깨 말을 걸어 오셨다.
“다 저녁때가 되는데 어디를 가는 거요.”
“ 음 신영감이로군. 아무래도 여기 있다가는 위험할 것 같아서 남쪽으로 나가려는 거야.”
“ 남쪽으로 간다고 그렇다면 나도 함께 가야겠는데.”
“ 우린 여러 날을 생각하고 떠나는데 갑자기 갈 수가 있겠어.”
“ 홀아비가 무슨 미련이 있다구.”
“ 그래도 한때는 식구들과 잘 살던 곳인데 미련이 없다구.”
“나 정말이야 아무 미련 없어. 나 그러면 자네를 따라나설거야.”
이렇게 해서 할아버지 강 승남씨를 비롯하여 아들내외와 손자 손녀 머슴과 신 영감님 등이
한 짐씩을 지고 나서니 제법 그 줄이 길었다.
밤새도록 길을 걸을 수가 없어 중간에 숲이 있는 곳에서 쓰러져 자고는 이튿날엔 새벽같
이 밥을 지어서 먹고는 다시 길을 나섰다.
지나는 길마다 탱크가 지나가기도 하고 어떤 때는 인민군들이 말 마차에 탄약을 싣고 가는
때도 있었다.
이렇게 며칠 동안을 고생고생하면서 내려와서 자리를 잡은 곳이 평택이었다.
그때는 가는 곳마다 빈집도 많고 어떤 때는 식구들이 밥을 해먹다가 중간에 떠났는지 밥
솥에 따뜻한 밥이 남아 있기도 하였다.
평택에 와서 더 아래로 내려갈 수가 없게 된 것은 그렇게 건강하시던 할아버지가 주무시지
를 못해서 그런지 감기가 들으셨기 때문이었다.
약도 구할 수가 없어서 할 수없이 남의 빈집이지만 따뜻하게 할아버지를 구완해 드리자 사
흘 만에 겨우 할아버지의 병이 나으셔서 진지를 잡수시기 시작하였다.
할아버지가 병이 나시자 누구보다도 신 영감님이 걱정을 많이 하셨다.
“살려고 나왔는데 죽으면 안 돼. 내가 영감을 쫓아나온 것은 나도 남쪽에 가게 되면 새장
가 한번 멋 떨어지게 들고파서 온 건데 이놈의 난리가 언제 끝나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 장가를 멋지게 들고 싶다구. 언젠가 내가 참한 과부 하나가 있어 소개해 줄려고 했을 때
는 아무 대답도 없더니만.“
“ 사실은 그때는 투전판에 미쳐서 다니느라 마누라 얻을 생각은 전혀 하지를 못했어.”
“하기야 사람이라는 게 어디 그렇게 마음대로 되는 일이 있던가.”
“ 기왕에 그런 생각이 있다면 나를 놓치지 말아.”
“ 자네 말마따나 모든 것은 때가 있다는 게 맞는 말인 것 같아. 지금 와서 나는 몹시 후회
를 한다네”
“ 내가 듣기에는 그 과부가 피란을 우리보다 먼저 떠났다고 하던데 이 여인을 찾아보도록
하면 어떤가.“
“ 정말이야 .”
“ 그래.”
“허허허.”
“과부 소리만 들어도 좋은가.”
“ 기분 나쁘지 않으니까.”
“ 아무튼 앞으로 눈치 작전을 단단히 해야 할 걸세.”
그런데 처음에는 인민군이 승승장구 남한 전역을 휩쓸면서 낙동강까지 처내려간다고 하더
니 전쟁이 난지 3개월이 지나면서부터 인민군이 후퇴를 한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맥아더장
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고 이어서 서울을 탈환하고 중앙청에 태극기를 높이 걸었다는
뉴스가 전국방방곡곡에 울려 퍼지자 각지의 피란민들은 만세를 부르며 고향으로 돌아갈 꿈
에 부풀어 있었다.
사실 인민군이 남한을 침략하자 유엔은 즉각 인민군으로 하여금 38선 이북으로 철수를 하
라고 하였지만 인민군이 이에 호응을 하지 않자 유엔은 즉각 유엔군을 파견하라는 결정을
내려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 16개국에서 파병을 결정하고 전 전선으로 유엔군들이 투입
이 되고 특히 유엔군의 공군기들은 인민군들을 샅샅이 소탕하기 시작을 하자 전선의 승패는
완전히 뒤바뀌기 시작을 하였다.
이후 국군과 유엔군은 38선을 돌파하여 평양을 탈환하기에 이르렀고 마침내 이승만대통령
이 평양 탈환 궐기대회에 참석을 하여 평양주민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피란을 나온 후에 아는 사람도 없는 평택에서 얼마동안을 있던 중에 할아버지는 고향이 궁
금하다면서 단신으로 옹진군을 향해서 들어가신다고 하자 아들과 며느리가 이다음에나 가시
라고 하였지만 할아버지는 듣지 않으시고 단신으로 올라가신다고 하셨다.
“ 우리의 국군과 유엔군이 인민군의 전력을 꺾고 북진을 하고 있으니 이참에 나는 고향으
로 들어갈란다. 마구간에 송아지는 들에 내놓아서 풀을 뜯어 먹고 살았을 것이고 개와 닭들
도 다 살아 있을 것이야. 내가 집엘 들어가야 이런 짐승들을 다 거둘 수가 있을 것이고 밭
곡식이 비를 피하지 못하였겠지만 그래도 좀은 남아 있을 것 아니냐.“
그런데 남쪽에서 멋떨어지게 장가를 가겠다던 신 염감이 느닷없이 말을 하였다.
“ 친구가 간다니 나도 함께 가야겠어.”
“ 이번에 나 혼자 먼저 들어갈테니 다음에나 오라구.”
“아니야 .친구가 간다는데 나 혼자 떨어져 있을 수가 없어.”
할아버지가 가신다고 하자 신 염감님 또한 함께 가신다니 아들내외는 더 이상 말리시를
않았다,
“ 아버님. 아무쪼록 몸 조심하셔요. 저희들도 인민군이 다 소탕이 되면 하루빨리 고향으
로 들어갈 것입니다.“
“ 그래 잘 알았다 .지금 같아서는 우리나라 통일이 금방 될 것 같아. 그럼 다음에 고향에
서 만나자.”
할아버지와 신영감님이 가신 후에도 전쟁은 계속되었고 국군과 유엔군은 평양탈환의 여세를
몰아 압록강까지 진격을 한다는 소식에 이제는 완전히 통일이 된다고 온 백성들이 좋아하였
는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다 이긴 전쟁인줄 알았는데 이 전쟁에 뜻밖에도 중공군이 개입
을 하여 하루아침에 전선은 초비상이 걸리는가 하면 날씨는 한창 추위가 몰아쳐 전진하던
유엔군은 장진 전투에서 중공군의 피리와 꽹과리 부대에게 포위되어 세기에 가장 뼈아픈 후
퇴를 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엄동설한 그것도 북쪽의 추위는 영하 3.40도를 오르내리는 속에서 모든 무기가 얼어들어와
포알도 나가지 않는데다가 유엔군이 후퇴해야 할 단일로는 각종 차량과 포로 막히게 되고
더불어 보급까지 끊겨 병사들은 굶주림과 추위 속에서 맥을 못 추고 픽픽 쓰러지고는 다시
일어나지를 못하였으니 아! 슬프도다. 이역만리 타국에서 자유를 위해 싸우러 왔다가 이렇
게 허무하게 전의를 잃은 채 싸늘하게 죽어가다니 병사들의 눈에서 피눈물이 나오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엄동설한 보급품이 제대로 보급이 되지 않아서 때를 굶은 속에 엄청나게 많은 중공군이
앞산뒷산에 새까맣게 달라붙어 있으니 유엔군은 속수무책 이 난관을 어떻게 하던지 돌파해
나가야 하는데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벋히던 유엔군은 싸늘한 눈밭에 쓰러진 채 영영 일어
나지를 못하였다.
그런 혹독한 굶주림과 추위 속에서도 가까스로 빠져나온 군인들이 있긴 하였지만 동료가 번
히 눈을 감는 것을 보고도 구해주지 못하고 한발자국이라도 앞으로 내딛여야 했으니 삶의
최후의 발악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비참한 눈물의 현장이었다.
세계 지도에도 잘 나타나지 않은 동양의 작은 나라 대한민국이 공산주의자들에게 침략을 당
하자 자유와 평화를 위하여 목숨을 걸고 참전했다가 아깝게도 젊은 나이에 희생을 당한 유
엔 참전국 병사들에게 우리 국민은 그 분들의 은혜를 영원히 잊지 않기 위해서 교류를 해야
하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나라라고 한다면 당영히 후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듣기에는 터키라는 나라는 그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보다 훨씬 잘 살던 나라로 우리가 침략
을 당하자 황제 근위병을 동원해서 파병을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 후에 정쟁으로 인해 공산주의자들이 정권을 잡은 후에는 정국이 불안한 가운데
6.25때 참전했던 가족들은 더욱 살기가 어려워졌다고 하니 이를 방치해서도 안 된다.
우리나라야말로 해방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얼마나 못살고 굶주렸던 백성이었나.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나지 못한 우리나라는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겨우겨우 생명을
지탱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가난은 나라도 당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지만 우리야말로 조선시대 이후 더구나 일제 36년
간이나 침략을 당한 우리나라 사람들은 농사를 지으면 모든 곡식을 공출로 빼앗기고 우리
동포들은 초근목피로 살아왔다,
해방이 되면서 더욱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에 우리나라를 적극적으로 도와준 나라가 있었으
니 바로 미국이란 나라였다.
그 당시야말로 우리는 광복을 맞아서 잃었던 나라를 되찾긴 하였으나 워낙 일제의 압제에
서 시달리던 국민들은 제대로 농사도 짓지 못하고 식량의 생산량은 전 국민을 먹여 살리기
에는 턱없이 부족하여 때를 굶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미국은 그러한 한국을 구해주기 위하여 밀가루와 우유를 보내왔으며 겨울이 되면 입을 것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구제품( 옷가지류)를 보내 주었으니 우리나라 국민 쳐놓고 구제품
을 입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정도로 우리는 가난에서 벗어나기가 참으로 어려웠다.
우리는 그 당시만 해도 미국이라는 나라를 전혀 몰랐지만 그네 나라는 우리가 부족한 것
이 있다면 아무 때고 도와주는 바람에 우리는 어려움을 극복할 수가 있었다,
이러한 우리의 쓰라렸던 과거를 생각해하면 이제는 다른 나라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
로 잘 살게 된 우리나라는 결코 어려움에 처한 유엔 참전유가족들을 외면해서는 안 될 것이
다.
할아버지가 고향으로 들어가실 때만 해도 아군의 승리는 곧 통일의 나팔소리가 삼천리 방방
곡곡에 울려 퍼질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중공군의 참전으로 인하여 우리 국군과 유엔군이
다시 서울을 인민군에게 빼앗기고 말았으니 이 무슨 슬픈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이렇게 전쟁의 끝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닐마다 전선에서는 전투가 계속 되는 바람에 군인
들을 따라서 고향으로 들어간 사람들의, 행방도 묘연하였는데 할아버지 또한 그 후의 소식
을 들을 수가 없었으니 식구들은 저녁만 되면 할아버지 생각에 눈물을 흘렸다.
“ 할아버지가 고향으로 가신다고 하였을 때에 몇 번이고 간에 말렸어야 하는데 왜 그때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하였는지 생각할수록 아들 내외는 말씀을 하시다가 눈물을 흘리셨다.
그때 평택에는 북한에서 나온 피란민들도 많았지만 옹진에서 나온 분들은 만나지를 못하였
다. 피란민들 중에는 고향에서 농사를 짓던 사람들이 대부분으로 이분들도 시골에 가서 일
을 하고 품삯을 받았지만 그러지 못한 사람들은 기차역 근방에서 하루 종일 노동품팔이를
하기도 하였다
아들은 날마다 시장에 가서 야채장사를 하고 부인은 어느 식당에서 일을 하는 바람에 집
에 부부가 들어오는 시간은 꽤 늦은 시간이었다.
이렇게 부부가 집에 늦게 들어오게 되자 남매는 아이들과 날마다 공기받기놀이나 땅뺏
기 놀이를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의 일이다.
대후와 여동생이 마당에서 딱지놀이를 하고 있는데 싸이렌이 울리더니 군인트럭이 지나면서
방송을 하는데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속히 방공호로 가라는 방송이었다,
그 날 따라 아이들의 부모는 늘처럼 시장에 가서 일을 하고 후대는 다섯 살 난 여동생
과 함께 마당에 앉아서 땅뺏기 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차 소리가 들려서 놀다 말고 자리에서 일어서서 보니 군인들이 집집마다 다니면서
지금 적이 쳐들어오는데 웬 아이들이 밖에서 노느냐면서 아이들 모두를 차에다가 올려 태
우는 것이었다.
그러자 아이들은 차에서 내려달라고 몸태질을 하였지만 군인아저씨들은 어서 도망을 가야
산다면서 우는 아이들 대여섯 명을 군용트럭 위에 태우고는 어디론지 가버리었다.
강 대후는 차에 타고나서 엄마와 같이 가야한다면 내려달라고 울면서 애원을 하였으나 그
말을 들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후대는 그날 이후 동생과 같이 어느 고아원으로 보내졌는데 그 숫자가 꽤 많았다.
후대는 아버지 어머니를 찾아달라고 날마다 밥도 먹지 않고 보챘지만 고아원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아이들이 워낙 많다 보니 한 방에 몇 명이 들었는지도 모르고 때가 되면 아이들을 죽 줄을
세우고 밥 한 그릇에 국한 그릇씩을 주면 아이들은 아무 곳에나 앉아서 밥을 먹었다.
그런데다가 날마다 포 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리자 고아원에서는 다른 곳으로 옮겨간다고 하
였다.
나중에서야 안일이지만 대후와 여동생이 옮겨진 곳은 부산의 서면이라고 하였다.
대후와 여동생은 그래도 서로가 떨어지지 않고 용케 고아원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칠 수가
있었고 나중에 대후는 부산의 적십자사에 취직이 되고 여동생 대유는 자갈치시장 사무실에
서 일을 하게 되었다.
머리가 큰 다음에 어머니와 아버지를 찾아보려고 애를 썼지만 좀처럼 알아지지가 않았다.
나중에는 경찰 지서까지 찾아가서 신고를 하자 담담순경은 피란민들이 워낙 많이 모인
곳이 부산이라 부모님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라면서 시간을 두고 노력해보자고 하였다.
대후는 적십자사에서 일을 하면서 수많은 이산가족들이 부산에 많이 모여 있다는 소리를
들은 후에는 길을 다니다가도 혹시 부모님을 만나지는 않을까 하고 주위를 살펴보았다.
한편 시장에서 장사를 하다가 늦게 집으로 돌아온 부모들은 아이들이 갑자기 군용차에 실려
갔다는 소리를 듣고는 장사도 걷어치우고 그 다음날부터 아이들을 찾아다니다가 어느 듯 1
년이 훅닥 지나다 보니 부부는 알거지가 되어 이제는 밥을 얻어먹어야 할 처지가 되었다.
부부는 아이들이 실려갔다는 곳이면 어딘지를 찾아다니느라 전국의 군인부대는 다 돌아다니
다 싶이 하였지만 아이들의 행방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으며 그렇게 찾다가 나중에 닿은 곳
이 부산이었다.
부산에서 찾은 일은 시장에서 청소를 하는 일로 특별한 기술이 없다 보니 할 수 있는 일이
라곤 궂은일뿐이었다.
날마다 새벽에 일어나서 부부가 관내 쓰레기를 손수레에 싣고 옮기는 일을 수십년 하다 보
니 청춘을 부산에서 보낸 셈이다.
부부는 저녁이면 아이들 생각을 하였지만 하도 세월이 가다 보니 이제는 아이들 모습 조차
제대로 생각이 잘 나지 않는다.
어찌 생각하면 아이들을 영원히 만나지 못한 채 부부는 그냥 이 세상을 하직할 것 같아 그
것이 서러워서 엄마는 남편 몰래 부엌에서 수도 없이 울었다.
한편 가슴에 늘 못이 박혀 있는 것은 시아버님이 고향으로 돌아가신다고 하였을 때에 적극
적으로 말려드리지 못한 것이 한없이 가슴을 아프게 하고 있다.
고향의 짐승이 무어이 그리 미련이 있다고 아들며느리가 만류를 하였음에도 전쟁이 끝나지
도 않았는데 겁도 없이 들어가시게 놔두었으니 생각할 수록 원통하여 눈물도 나지를 않는
다.
시아버님이 고향으로 가신다고 하자 신영감님 또한 시아버님과 동행을 하셨으니 이 두 분의
사이가 그토록 돈독하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가 있겠다.
전쟁이 나고 이남으로 피란을 떠나시던 전날도 시아버님은 새벽 일찍 과수원에서 한참을
산으로 올라가서 있는 절을 찾아서 불공을 드리고 오시더니 기분이 좋으시다면서 우리식구
들이 모두가 무사히 피란을 잘 할 거라면서 좋아하셨다.
시아버님은 해마다 4월초파일 부처님의 날에는 한결같이 절을 찾아서 온 가족의 안녕을
축원하시었다.
이제 전쟁이 끝나고 어언 70년의 세월이 지났으니 고향으로 먼저 가신 시아버님은 과수원
모퉁이를 돌아보시다가 그냥 쓰러지신 것은 아닌가.
전쟁과 더불어 피란길에 아이들은 어찌 되었는지도 모르는 채 부부는 이제 아무 희망도 없
이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지 모른다.
아이들도 이제는 몰라보게 나이가 차고 그들의 삶을 살아갈 것이지만 부모는 옛날이나 마찬
가지로 자식들을 그리워하건만 손에 잡히지 않고 소문조차 들을 수가 없으니 그렇게 무심하
게 가고 있는 세월만 바라보아야 하는 것인가.
김 두 수 22.8.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