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테의 돈으로 세상 읽기 85
노벨문학상에 대한 小考
노벨상은 스웨덴의 화학자이자 발명가인 알프레드 노벨(Alfred Nobel)의 유언에 따라 제정되었다. 그는 자신의 발명품인 다이너마이트로 막대한 재산을 모았으나 다이너마이트가 전쟁과 폭력에 악용될 것임을 알았다.
1888년 그의 형 루드비그 노벨이 사망했을 때 생긴 해프닝이 노벨상을 만든 결정적 계기가 됐다. 프랑스 신문이 실수로 형이 아니라 동생 노벨이 죽었다고 부고를 실었다. 신문은 "죽음의 상인, 알프레드 노벨이 사망했다"라는 제목을 달았다. 노벨은 그 기사를 보고 자신의 이름이 죽음과 파괴의 상징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잠을 설쳤다. 그의 재산을 인류의 평화, 과학, 문화 발전을 위해 기부하기로 한 이유였다.
노벨문학상 수상은 세계문인들이 꿈꾸는 궁극의 염원이다. 한국의 소설가 한강이 올해 노벨문학상을 받는다. 기대하지 않았던 낭보다. 한때 노벨문학상 후보자로 입에 오르내리던 어떤 시인은 틀면 나오는 수도꼭지처럼 시가 나왔지만 알고 보니 똥물이었다는 여류시인으로부터의 비난에 한순간 괴물이 되어버렸다. 그 묵혀온 숙원을 한강이란 소설가가 풀어냈으니 크게 반길 일이다.
글 속에는 글쓴이의 사상이 담겨있다. 영국의 자연주의자이자 작가인 W. H. Hudson(허드슨)은 문학을 언어의 매개물을 통한 인생의 표현이라고 정의했다. 어떤 문학작품이든 그 속에는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작품이란 그릇에는 그것이 크든 작든, 또는 둥글든 모가 나든, 작가가 생각하는 세계가 담겨있다.
그동안 한강이란 작가가 세상에 내놓은 소설에도 그녀의 인생관이 담겨있다. 세간에서는 한강을 두고 인간의 폭력성과 존재의 고통, 상처, 그리고 치유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작가라고 평한다.
작가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채식주의자》(2007)에서는 여성의 억압과 자아 해방이라는 주제를 다뤘다. 필자가 만져본 소설의 주인공 영혜의 영혼은 치유되지 못했다. 그녀는 고기를 거부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몸을 거부하고, 나중에는 식물이 되고 싶다는 강박에 빠진다. 이는 인간의 폭력과 육체적 한계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자유를 얻는 길이 자아 파괴라는 극단적 수단으로 가능한지를 묻는다. 그녀의 식물화는 사회와의 단절을 나타내지만, 동시에 그녀는 사회적 관계와 존재의 의미를 포기함으로써 자신을 더욱 구속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영혜는 형식적으로는 육체적 구속에서 벗어난 듯 보이지만, 실제 내면적으로 더 깊은 구속 상태에 자신을 던져넣었다고 볼 수 있다. 작품 속 질문에 대한 답은 거기까지다. 화가인 지인이 이삿짐을 싸며 던져놓은, 소설 《채식주의자》를 읽은 독후감이다.
폭력을 다룬 한강의 대표적인 소설로는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을 배경으로 한 《소년이 온다》(1980)가 꼽힌다. 하지만 플롯과 메시지가 너무 뻔하다고 생각되어 읽지 않았다. 한국을 대표하는 여류작가라고 호들갑이던 어떤 소설가의 작품을 읽고 실망한 경험이, 그런 유형의 작품에 대해 문학적 완성도를 의심하는 선입견이 생겼다. 다만 필자가 처음 접한 소설 쓰기 기법에 관한 책은 한강의 부친이 쓴 《한승원의 소설쓰는 법》이다.
소설가 한승원은 이 책 서문 첫 문장에 “당신도 소설 한 편을 써서 대박을 터뜨릴 수 있고, 한국 소설문학의 판도를 바꾸어놓을 수 있다.”라고 썼다. 그 주인공이 자신의 딸이 될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는 방송 인터뷰에서 “노벨문학상 심사위원들이 사고를 잘 낸다. 뜻밖의 인물들을 찾아내서 수상한 경우들이 많이 있었지만, 전혀 기대를 안 했다.”고 말했다.
한국 사회는 이런 경사를 두고도 패가 갈린다. 한쪽에서는 작가를 찬양하기 바쁘다. 소위 진보적인 작가라는 점에서다. 한편에서는 떫은 감 씹은 표정이다. 그가 쓴 소설들이 지나치게 편향적이고 사실을 왜곡하거나 정의를 조작한다고 주장한다.
양비론은 원래 비겁한 논법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비겁할 수밖에 없다. 어느 쪽을 봐도 한강이란 작가의 작품에 대한 비평이 없다. 작품의 문학적 가치에 대한 토론은 찾기 어렵고 오직 내 편이라서 좋고 네 편이라서 싫다. 그들은 지성의 실종을 수치로 생각지 않는다. 어쩌면 그들에게는 원래 지성이란 게 없는지도 모른다. 먹물이 들면 무릇 진보적이어야 한다거나, 세상 이치를 모르는 겉멋 든 머저리들이라고 얕잡아보는 부류나 딱하기는 마찬가지다.
소설가가 지성인이란 생각은 옛말이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소설을 쓸 수 있다. 인터넷 소설을 문학의 범주에 넣느냐의 다툼도 부질없는 논쟁이다. 지하철에서 읽는 웹 소설에서 인간의 본질에 대한 물음을 찾는 일은 미련한 짓이다. 문인들이 정작 국내 문학을 외면한 지도 오래다. 작가야말로 세상의 부조리에 대항하여 싸워야 한다는 어쭙잖은 정의감이 문단을 황폐화하는 데 일조한 것도 사실이다.
한강이란 소설가에게 바람이 있다면 노벨상을 받은 작가답게 인간에 대한 좀 더 깊은 성찰이 있길 기대한다. 정의감에 가려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해골 같은 바위산 너머에는 누렇게 익어가는 들녘이 있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 나락이 익기까지 수고한 농부의 땀방울이 다른 이를 위해서가 아니고 자신과 가족을 먹여 살리려고 흘린 땀방울임을 알았으면 좋겠다. 그런 인간의 외투를 투시하지 못하면 정의는 필경 위선과 치환된다.
한강의 노벨상 수상을 트집 잡는 사람들에게 묻는다. 한강이란 작가가 쓴 소설조차 품지 못하는 사회가 진정 자유로운 열린 사회인가? 그대들이 애독하는 칼 포퍼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의 바로 그 적들의 사회가 되길 원치 않는다면 비난을 멈추시라. 관용과 포용이 우파의 무기란 점을 망각해선 안 된다. 소설은 소설일 뿐이다. 행운도 거저 오지 않는 법, 더하면 옹졸함을 넘어 시기요 질투다.
학자들은 세상을 알면 아는 만큼 모르는 것이 늘어난다고 한탄한다. 소크라테스는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고 일침을 가했다. 알 것 같지만, 모르는 세상일, 이렇게 나대다가는 욕먹을 게 뻔하다. 그냥 축하한다고 말하고 싶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