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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형식을 통한 역사의 재해석과 리얼리즘 문학
리얼리스트100의 존재이유
(리얼리스트100 창간호를 펼치며) 여기에 『누란』 선전을 해 줘서 너무 고맙네요. 책들 나오는 것 보면 그렇죠. 오죽 실망스러웠으면 『리얼리스트100』이라는 이름으로 이렇게 모이게 되었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심지어 『창비』까지도 이상하게 변질되어서 말이지 이번 ‘신인문학상’이라는 이름으로 나온 것을 보니, 시를 읽고 소설을 읽어봤거든요. 너무 황당해가지고 시는 난해시고 무슨 소리하는지 모르겠고 소설은 또 무슨 얼토당토 않는 판타지 같은 게 들어가 있는데, 판타지가 나쁘다는 거 아닙니다. 그런데 판타지를 쓰려면 그야말로 리얼리티가 있어야하는데 무책임한 판타지를 쓴 것을 신인상을 주고……. 나는 워낙 초중고 때 뭐랄까, 범생이여서 ……(웃음) 범생이가 제일 살기가 쉬운 거예요. 주어진 대로 살기만 하면 되는 거거든요. 주어진 대로 규칙대로 공부만 하면 되는 게 범생인데 범생이었어요. 범생이. 개근을 하고 말이지. 조퇴도 좀 하고 땡땡이도 좀 칠 줄 알고 이래야 똑똑하다고 하거든요. ‘창비’하고 나하고는 관련이 오래됐죠. 대부분의 책이 거기에서 나왔고 지금 편집자문위원에 고문으로 돼 있는데 연말 되면 망년회에서 시상식도 있는데 만해문학상까지 포함해서 신인문학상, 백석문학상 등등 내가 개근을 하는 사람인데 안 갔어. (웃음) 엊그저께 시상식 하는데 기분이 나빠서 오라고 그러는데도 ‘야! 이 새끼들아. 내 더러워서 안 간다.’ 이런 말은 못하겠고, (웃음) ‘바쁜 일이 있어 못 간다. 그러니까 이해해달라.’ 이런 식으로 비겁하게 여러분들 앞에서나 고백하고 말이지. 사실 독서시장을 볼 거 같으면, 그렇지 않습니까. 아무래도 리얼리즘이 폐퇴했다고 하는데 80년대 잘 나가던 리얼리즘문학이 90년대 이후로 와서 패퇴했다, 이 무슨 말인지… 이게 패퇴하고 자시고 그런 말로 얘기하면 안 되는 것이거든요. 리얼리즘 문학이 있고 낭만주의 문학이 있고 서로 공존해야 되는 건데, 거대서사 그랜드내러티브가 있으면 미시서사 마이크로내러티브가 둘 다 공존해야 되는 것처럼 이렇게 문단에서는 여러 가지 장르나 경향이나 트렌드나 다양하게 공존했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어쩌다 이게 전체주의적으로 가벼운 문학 일색으로 도배되고 있어요. 독서시장이. 그렇지 않습니까? 너무 가벼운 거예요. 밀란 쿤테라도 뭐라고 그랬어요? ‘아! 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고 했지만, 그 참을 수 없이 가벼운 문학들, 이것이 이제 독자를 현혹시키고 계속 그런 책만 읽히고 있는 중이에요. 『창비』를 포함해서, 『창비』가 또 『문학동네』 이중대라고 하는 그런 모욕적인 언사를 들으면서까지도 저 모양인데……. 출판사가 문학을 호도하는 중이에요. 소위 자기는 문학한다, 문학을 옹호하고 좋은 문학을 생산한다고 하는 메이저 문학 출판사들이 문학의 이름으로 아주 가벼운 그런 경량급의 물건들을 내놓고 있습니다. 그리고 독자를 사로잡고 돈을 법니다. 돈, 야, 자본이라는 것이 무서워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사실 여기서 돈이 많은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고 스스로 자발적 가난을 선택하고 자본보다는 이념 이런 걸 선택하신 분 같아요. 틀림없이. 저도 이념이나 좋은 생각이랄지 이런 걸 갖고 싶어하는 사람인데 문학이 이제 자본과 섞여가지고 이름난 상업주의 이런 문단이 한심했습니다. 여러분 너무 분노를 느낀 나머지 모였을 거예요. 여러분이, 『리얼리스트100』의 존재 이유가 그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천박한 시장에 반기를 드는 그 모습으로 지금 여러분이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바로 이러한 메이저 출판사들이 만들어 놓은 그런 모습은 메이저 언론이 하는 작태와 비슷해요. 조중동이 해온 그 작태를 보면 그들은 정론을 편다 하면서 왜곡된 기사를 통한 여론시장을 몇 번 경험했습니다. 그 메이저 언론들이 내세우고 있는 것은 역시 상업주의죠. 배금주의, 돈, 또 그리고 거의 범죄적이라고 얘기할 수 있는 거의가 아니라 범죄적이죠. 편견을 심어주는 것. 지역감정 또 뭐죠? 그리고 용공조작. 두 개를 가지고 조작하는 거예요. 지금 지역감정과 용공조작 때문에 여론이 정말 썩을 대로 썩어버린 상태가 되어버렸어요. 이게 조중동이 만들어 놓은 민중의 모습인데 그럼 문학은 어떻게 해야 되냐면 그런 허위의식에 지워져 있는 민중을 향해서 허위위식을 걷어내야 되는 거예요. 본래의 초롱초롱한 눈빛을 드러내는 일, 이것이 문학이어야 되고 언론이어야 할 텐데 그렇지가 않지요. 여러분이 알다시피 조중동에서 쓴 기사들이나 칼럼들을 보면 제가 보기는 너무 무식한 거예요. 무식. 이게 세련된 글도 아니고 레토릭도 없어요. 칼럼이든 뭐든 글이라면 어느 정도 문학적 상상력도 있어야 하는데 그저 나이 들어 공격적이고 왜곡하고 자기변명하고 천박한 그런 기사를 쓰고 있는데…… 여러분, 기자들이 무식하다는 거 아시죠? 세상물정 모르고 애들이 왜 무식하냐? 뭘 모르는 겁니다. 자기 테두리만 알고 자기 계급만 아는 거죠. 지금 젊은 기자들이 어디 출신이죠? 사법부의 젊은 판사나 검사들 대개 어디 출신들이 가 있습니까? 강부자 출신들이 가 있죠. 그들이 재판하고 그들이 기소하고 그들이 여론조작하면서 기사를 씁니다. 조중동은 면접할 때부터 강부자 출신들을 고르는 거예요. 그럼 걔네들은 용산참사 이게 무슨 그 의미가 뭔지 모르고 그저 기사 칠 생각만 하는 거야. 그 의미가 뭔지 모른다, 무식하기 짝이 없는 거죠. 뭘 모르는 거야. 민중이 뭔지 모르는 거지요. 자기 계급만 알고 또 엄마만 알아. 엄마가 판결 요렇게 하라 하면 요렇게 하고. 엄마가 기사 요렇게 써라 하면 예, 하고 마마보이들이 지금 기자하고 판사하고 검사하고 있는 거예요. 이놈의 세상 참 속 터져 죽을 지경 이에요. 그러니까 이렇게 여러분이 모인 겁니다.
연대하는 커뮤니케이션의 힘
프랑스하고 독일에는 노동자극장이 있어요. 기사에서 봤는데 노동자의 투쟁만 공연하는 게 아닙니다. 삶의 애환과 즐거움, 계급의 고유한 정서도 있고 고유한 슬픔과 즐거움도 있을 텐데, 분노만이 아니고. 그렇죠? 그런 것을 공연하고 노동자들이 가서 같이 어울리고 연대의식을 느끼고……. 자기 계급의식을 느끼는 게 굉장히 중요하잖아요. 나는 저 더러운 자본과는 별개의 사람이다, 굉장히 순수하고 순결한 아름다운 사람이다, 이거죠. 이게 노동자의 계급의식인데 우리나라도 말이 빗나갔지만 뜻 맞는 사람들이 이렇게 모였잖아요. 그와 같이 이쪽 리얼리스트 지향하는 사람이 굉장히 많고 그렇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조직되어 있지 않고 연대되어 있지 않습니다. 조직되고 연대가 되면 그게 세력이 될 수 있고, 그게 자신의 삶의 보람이 됩니다. 야! 이런 책이 나왔더라. 『리얼리스트100』창간호가 나왔더라. 이게 다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전달되고 어떤 책, 우리들이 읽을만한 책을 같이 공유하고 어떤 사상을 공유하고 아, 『이현상평전』이 나왔더라, 나도 읽자. 이렇게 호응하고 정서끼리 조직되고. 연대가 안 되었기 때문에 메이저 언론과 메이저 출판사에서 선전하는 베스트셀러나 이런 책들을 보게 된단 말이죠. 보면 실망하고 이런 식으로 된다는 말이죠. 연극도 그렇고 영화도 볼 만한 것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국내에서 생산되는 건 요즘은 별로 없더라고요. 왜냐면 국내는 이창동 등등이 만들었던 좋은 영화, 대중들이 안 봐요. 약간 문학성 있고 문예적 요소가 있고 그러면 대중들이 안 오대요? 진지하고 진실성 있는 메시지가 있는 내용은 괴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죠. 우리끼리 같이 볼 수 있는 영화, 문학도 철학서적도 대다수가 아니지만 소수지만, 이 소수가 언제나 소수가, 창조적 소수가 언제나 다수를 쟁취해서 이런 부분 한 세상 만드 것 아니겠습니까? 소수가 중요한 거죠. 깨어 있는 소수가. 그러기 위해서는 지식의 연대, 지식의 공유, 정서의 공유, 정서의 연대 그런 것의 조직화 이런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할 때 <리얼리스트100>이 보이는 파워는 그런 맥락에 서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물은 흘러야 하는 것
4대강 삽질을 강행하는 MB 얘기를 할 수밖에 없는데……. 조중동이 만든 정권이예요. 조중동이 낳은 정권이기 때문에 MB 정부는 조중동을 배신할 수 없지요. 조중동이 시키는 대로 해야 되고 잘못 나가 조중동이 회초리를 들면 앗, 뜨거라! 하고 다시 돌아설 수밖에 없는 그런 집단인데, 이게 또 같이 공유하고 있는 겁니다. 상업주의, 배금주의, 돈. 돈, 여러분은 이제 자발적 가난을 선택한 문인들이죠. 돈보다는 사상, 이념, 그런 철학을 선택한 사람들이죠. 그런데 이놈의 MB정권이 일파하고 있는 것은 배금주의입니다. 도대체 정신적 가치는 완전히 궤멸하도록 만들어버리고 물질적 가치만 내세우는 이걸 대서특필하고 있는 것이 MB정권입니다. 몇 년 전에 ‘부자되세요’ 라는 광고가 있었죠. 예쁜 여자가 나와서……. 지금도 그 환상에 우리 대중은 젖어 있죠. 그러다 망했죠. 도대체 내 손에 국부가 한정되어 있는데 어떻게 모두가 부자가 됩니까? 모두가 부자가 되는 것은 평준화시켜야 되는데 그게 사회주의 사회입니다. 그 말은 우리 사회주의 나라를 건설합시다, 라는 말하고 똑같습니다. 우리 모두 부자 됩시다. 그러면 어떻게 감귤 한 천원어치……. (웃음) 모두 평등해지자는 거지요. 우리 속담이 있어요. ‘한 동네에 부자가 나오려면 삼 이웃이 망한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동네 재화는 일정한데 한 놈이, 한 집이 부자가 되려면 세 이웃을 착취해서 어떻게 해서든 망해뜨려야 재화가 자기한테 와 가지고 부자가 되는 것 아닙니까? 이게 부자가 되는 얘긴데 어떻게 모두가 부자가 됩니까? MB가 지금 그걸 한다고요. 대중은 그것에 현혹돼 가지고 다시 금융위기를 맞고 절망에 빠져 있습니다. 코스피 지수는 떨어져서 또 절망시키고 있는 모양인데 누가 이렇게 썼습디다. (리얼리스트 책을 펼치며) 인사말에 누군가 물은 흘러야 된다고 썼어요. 물 가지고 장난치면 안 되잖아요. 물, 물은 흘러야 되는 겁니다. 인민은 물과 같아서 정권이라는 배를 띄울 수도 있지만 또 인민은 물과 같아서 그 띄운 배를 전복시킬 수도 있는 거죠. 그게 중국에서 나온 말인데 물 가지고 장난하다니, 썩을 놈의 새끼들 말이지. 그죠? 그 물 가지고 장난하다가 이 물이 정권을 뒤집을 수가 있는 겁니다. 나는 가장 기분 나쁜 게 이 정권이 바로 물질적 가치를 강조하면서 정신적 가치를 완전히 궤멸시키는 이런 사실입니다. 이명박하고 나하고 동갑입니다마는 내 동창들 또래들 사회 나간 애들 다 알지요. 머릿속에 뭐가 들어간 줄 잘 알아요. 문학이란 것 모르고 사랑이란 것 모르고 맨 삽질밖에 모르는 애예요. (웃음) 참……. 맛 간 애가 올라와가지고 고집 세게 저러는데 아까 기자들이 무식하다고 했는데 무식하면 추진력이 없어야 해요. 이명박은 무식하면서 추진력이 있단 말이에요. 일을 그르치게 만드는 거야. 머리 좋고 추진력 있으면 제일 좋은 거고 그 다음은 머리도 나쁘고 추진력도 없고 그냥 그냥 이런 놈. 가장 나쁜 게 뭐냐면 머리는 나쁜데 추진력은 돼 있는 거, 이것이 잘못된 일을 막 밀고 나가는 거야. 이게 걱정이에요. 아까 기자들 무식하다고 했는데 그 무식한 애들이 자기가 미는 게 옳다는 거지. 공세적으로 추진력 있게 밀고 나갑니다. 무식한 것이 무서운 거예요. 그래서 무식한 게 범죄입니다. 범죄. 모르는 게 약이 아니고 모르는 게 범죄인 거죠.
문학으로 표현되지 않은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80년대에는 국민을 민중이라고 부르고 그랬죠. 그 민중이 1990년대 접어들면서 차츰 변질돼 가고 신자유주의 시스템 속으로 편입되면서 약간 시민의 모습을 띄다가 민중보다는, 민중은 옹골찬 그런 어떤 혁명적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걸로 상징되지 않습니까? 그게 탈락되면서 시민으로서 그런데 시민도 아니고 소비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단지 소비자일 따름이죠. 물론 작년에 있었던 ‘촛불시위 집회’ 상당히 중요한 행사고 상당히 중요한 에너지고 동력이고 그렇습니다만, 평하고 있는 것은 수입소고기 문제 아닙니까? 소비자운동 비슷해요. 배독운동 이런 것보다는 소비자운동 물론 그것이 진보할 수 있겠죠. 아무튼 지금의 대중들은 민중도 아니고 시민도 아니고 그냥 소비자인 것 같아요.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 외국에서 하는 얘기죠. 소비. 특히 여자분들 뭘 소비하면 존재감이 느껴지는데, 백화점을 가고 물건을 사고 구경을 하고 그 속에 자기가 존재한다 말입니다. 상품 속에 자기 존재감을 느끼는 겁니다. 상품이니 식료품이니 우리 필수품이라면 모르지만 단지 기호품들 있잖아요? 이런 것들이 많이 생산되어지고 그런 상품들이 우리 주변에 많습니다. 대중들이 상품의 홍수 속에 놓여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자연히 이 소비자인 대중은 가벼운 것만 생각하게 되고 겉치레가 그럴 듯한 것만 눈독들입니다. 우리가 그들에게보다는 이 대중과 더불어 생각해 볼 것은 ‘우리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아니라 본래의 명제대로 ‘우리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걸 돌려줘야 된다는 것이죠. 우리가 생각하고 있고 우리가 글 쓰지 않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존재하는 것은 소비할 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 무언가를 제대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겁니다. 세상은 많이 달라졌습니다. 80년대에서 20여 년이 흘렀습니다. 지금 많이 달라졌죠. 전 20년 전 잘 놀았어요. 여러분들 대학생으로서 잘 놀았던 젊은 친구들인데 벌써 나이가 들어가고 있죠. 80년대를 살아왔어요. 역사도 있었고 민중 그 참혹한 민중현실을 가지고 우리가 투쟁했던 에너지도 있었던 때입니다. 그때 공동체란 말이 굉장히 유행했었죠. 요즘은 근사하게 커뮤니티라는 말로 쓰는데, 동아리라는 말도 쓰고. 80년대는 공동체라는 말이 있었고 그 80년대를 우리가 돌이켜 생각해 보면 문학은 당대의 민중현실 그 척박한 현실에 눈 뜨고 그것은 우리의 문학의 테마가 되었죠. 공동체의 과거, 그것이 역사죠. 역사는 기록되어야 하는데 기록이 안 된 과거가 있었거든요. 공동체의 과거. 일제시대를 비롯해서 해방공간, 6.25를 거쳐서 박정희 유신시절 이런 것이 공동체의 과거입니다. 그 기록이 전 없다고 봅니다. 물론 왜곡된 기록은 있죠. 위정자들이 정권을 가지고 있었던 세력들, 그들의 언어로 그들의 시각으로 기록된 역사는 있었지만 진실한 역사는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80년대는 공동체의 과거를 다시 재조명하기 위해서 분투했습니다. 분투하고 나서 어느 정도 밝혀지려고 했는데 90년대로 넘어가면서 노풍이 오고 다시 어둠속으로 묻혔습니다. 지금 과거란 시간을 생각해보면……. 여러분들이 저를 불러 서게 만들었던 것 보세요. 굉장히 늦었잖아요. (본인 얼굴을 가리키며) 이 얼굴이 과거의 상징입니다. 시간상으로 과거죠. 내 문학도 과거. 사실 전 젊었을 때부터 과거의 시간을 가지고 글을 썼거든요. <제주 4.3>이요. 여러분들이 저를 불러서 과거에서 쓸 만한 것이 없을까 생각해서 부르신 것으로 생각합니다. 과거. (한숨) 지금 문학으로 표현되지 않은 과거는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진실한 의미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극우적이고 관념적인 기록, 그걸 역사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까? 아니잖아요. 예를 들어 <제주4.3>을 비롯해서 육지에서는 <보도연맹 사건>으로 해서 무지한 양민들, 비전투원들 백만이 돌아가셨다고 하는데, 백만은 많고 팔십만도 많은 것 같은데……. 이런 단체가 있습니다. 홈페이지는 ‘제노사이드닷컴’이라고 하는데 '제노사이드'란 말 아시죠? 제노사이드란, 민간인 대량학살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민간인 대량학살을 제노사이드라고 합니다. 이것은 한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외국에도 있었고 아우슈비츠로 상징되는 유태인 학살도 하긴 홀로코스트라고 하죠. 그 제노사이드가 있는데 역대 정권들이 쉬쉬하고 발설 못하게 해왔습니다. 금기로 묶어가지고 <제주4.3>이나 <여수사건>이나 <지리산의 빨치산>이나 건드리면, 금기에 의해서 거기에 발을 들여놓으면 그 지뢰가 터지는 거예요. 그래서 그 영역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은 다치게 마련인데, 저도 다친 사람 중에 저도 한사람입니다. 『누란』이란 내 소설 앞에 나오는 고문장면이 제가 당한 고문장면인데 하도 억하심정이 있어서 제가 맨 앞에 표현했거든요. 물고문장면은 내가 당한 건 아니고 매 맞는 장면은 내가 당한 건데……. 무서웠어요. 이렇게 역대 독재정권들은 그 군부가 한 죄 이 제노사이드를 은폐하기 위해서 이른바 망각의 정치를 행사해 왔어요. 이게 내 말이 아니고 사회과학 용언데 잊게 하는 거예요. 망각. 대중으로 하여금 그 사실을 잊어가도록 만드는 그런 정치를 구사했어요. 만약에 <보도연맹>이 무엇이다, 라고 하고 그것이 실상 이렇습니다, 라고 그러면 당장 솔개가 병아리를 채가듯 채갑니다. 그럼으로써 잊어버리도록 하는 겁니다. 이게 망각이에요. 이게 정치입니다. 이렇게 대중은, 생존자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면 억하심정이 있어도 발설을 못하니까 잊어버리자, 잊어버리자, 잊어버려야 살겠으니까 잊어버리는 겁니다. 저는 그걸 기억의 자살이라고 합니다. 스스로 이걸 펼쳐내고 대명천지하에 밝은 햇빛 속에 원통함을 드러내고 호소하고 또는 분노를 터뜨리거나 그래야 되는데 그걸 못하고 가슴 속에서, 억압된 내면에서, 한숨과 더불어서 잊어야지, 잊어야지. 이게 기억의 자살행위. 역대 정권이 해온 행위는 기억의 타살행위입니다. 작년에 <여순사건> 60주년에 심포지엄을 했습니다. 느낌이 <제주4.3>보다 더 절실한 느낌이 있었습니다. 거기 문인들이 이것을 형상화해야 되겠다, 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모습을 보면서 이것을 어떤 타개책, 어떤 편수를 얻어야 할지 그걸 잘 모르는 거죠. 어렵잖아요?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만약에 망각되어진 이 집단기억이 말살되고 스스로 말살시키려 하고 이런 상태로 가면 공동체 과거, 그런 어두운 과거가 있는데 이게 밖으로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역사화되지 않은 겁니다. 기록화가 안 된 거예요. 역대정권이 그런 일은 없었다 하고 있고, 물론 약간의 르포랄지 논문이랄지 존재하겠지요. 하지만 민중이 그런 글을 읽지는 않잖아요? 그럼 그런 시대는 그런 참상은 이 세상엔 없었던 것이 돼버린 겁니다. 시로 특히 소설로 표현되지 않는 과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문학으로 표현되지 않은 과거는 존재하지 않는 겁니다. 지금 많은 지식인들도 그렇고 제노사이드 이야기할 때 제노사이드라는 말도 알고 홀로코스트라는 말도 아는데, 유태인 대학살의 대명사가 되고 있는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아는데 <보도연맹>이라는 사건은 금시초문이고 안 들어본 얘기란 말이에요.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얘긴데, 그 사건에 80만 인명이 희생됐다는 것인데. 참 그래요. 우리 것은 낯설고 싫고 외국 것은 근사하지요. 아우슈비츠로 대변되고 있는 유태수난 이야기, 그런 영화 얼마나 많이 봤습니까? 감동적인 영화들이죠. 스필버그까지도 그 뛰어난 엔터테이너가 유태인이기 때문에 유태수난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 때에는 돈도 많이 투입해 가지고 자기 민족의 수난이야기를 영화화했습니다. 그게 뭐죠? <쉰들러리스트>죠. 그건 쉽게 보는데 그와 유사한 사건이 한국에도 있었는데 그건 알려고도 하지 않고 들어도 ‘에이, 시시하게’ 이런 식으로 취급해 버리더라고요.
젊은 작가들이 해야 할 일 : 새로운 감각으로 과거의 역사를 발굴해 내는 것
여러분, 소설 쓰는 미국의 촉망받는 교포작가가 있어요. 이창래라고 있죠. 『영원한 이방인(Native Speaker)』, 『제스처 라이프』 라는 책을 쓴 분인데 문장이 좋더라고요. 『제스처 라이프』에 보면 조선민족의 치부인 <정신대> 문제가 있어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정신대>하면 마치 우리 민족의 순결이 버림받은 것 같은 불쾌감만 느끼고, 거기에 대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생각을 안 하고 불쾌감만 느끼고 더 이상 사고의 작동을 안 하려고 그래요. <정신대> 하면 그 순간 딱 정지해버리는 거예요. 할 말을 안 해버려요. 이창래는 자기가 겪은 일도 아니고 그걸 소재로 해서 소설을 쓰고 미국문단에서 좋은 평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안 하잖아요. 우리는 그걸 안 해. 사실 끔찍한 것을 끔찍하지 않게 독자가 읽을 수 있도록 가공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순이삼촌』 등등 <제주4.3>에 대해 쓸 때 이 ‘4.3’의 비극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건 언어들의 참사다, 말로서는 표현할 수 없는 그런 참사다, 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지독하게 단편, 중편 이렇게 쓸 때 그때마다 떼죽음, 떼죽음, 떼죽음, 이런 표현들을 썼어요. 『순이삼촌』 읽고 선배 부인은 까무러치고, 어떤 경우는, ‘야! 이게 한국역사란 말이야? 이게 말이 되나?’ 하고 운동권으로 투신하는 젊은이들도 있었어요. 그런데 젊은이는 『순이삼촌』을 봤는데 나이 든 사람들은 안 보려고 해요. 내가 『누란』을 썼는데 앞에 고문 얘기가 나오니까 던져버린 사람들이 꽤 있더라고요. 더 이상 안 읽어요. 문학은 슬픔이라도 감미로운 슬픔이 문학이 되는 거죠. 멜랑콜리 한 것, 우수라는 것, 그러니까 전반적으로 화창한데 가끔 소나기 궂은 비. 한 시간 동안 쏟아지는 궂은비. 요정도의 슬픔. 전반적인 행복 속에 잠깐 끼어 있는 슬픔. 이것은 독자들이 견뎌요. 그렇지만 전반적으로 피와 땀과 비명과 떼죽음과 이런 것이기 때문에 독자가 감당이 안 되는 거예요. 내가 전작을 좀 잘못 썼어. 지금도 학교선생님들이 전교조 선생님들이 생각을 해서 조금씩 『순이삼촌』이 읽히고 있기는 하지만 많이 안 읽혔거든요. 운동권에서나 복사해서 읽고 그랬지. <용산참사> 있잖아요. 추기경이 돌아가셨을 때 그 슬픔에 그 애도하는 인파가 용산참사 현장에 갔다면 이건 달라졌을 것이다, 그렇게 얘기했어요, 그건 맞는 얘기예요. 그리고 정확한 표현이에요. 용산참사는 감당이 안 되는 겁니다. 보통사람들에게. 추기경의 죽음은 아까 얘기한 눈물도 감미로운 눈물이에요. 평화롭게 가셨으니까 눈물이 나죠. 뜨겁고 감미로운 눈물. 용산참사는 피눈물 아니겠어요? 피눈물. 이걸 경험하기 싫은 거예요. 이걸 문학으로 표현해서 분노 일변도로 나가면 읽는 사람은 ‘아! 씨발.’ 이러는데. 이게 전략이 필요한 거예요. 당장의 상황에 대응해서 포스터로 슬로건으로 시를 만들 수 있죠. 시는 꼭 있어야 되고 중요한 문학입니다. 포스터 문학 슬로건 문학 중요한 문학입니다. 소설은 그게 안 돼요. 소설 자체가 보수적인 편이어서 시간이 지나야 돌아보면서 쓰게 되거든요. 당장은 못하더라도 잊지 말고, <용산참사> 이것을 분노만 말고 분노도 있으면서 어떤 조명, 이런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 공동체의 과거에서 국가폭력에 의해 희생된 사람이 80만이라고 그러는데요. <제노사이드닷컴>을 운영하고 있는 단체가 있어요.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 라는 그런 단체가 있습니다. 그 단체에서 주장하는 게 100만이라고 그래요. 또 80만이라고 그러는데, 100만인지 80만인지 20만인지 이게 진상규명 되어야 할 것 아닙니까? 이게 안 되는 거예요. 무엇보다도 거기서 문학이 안 나왔다 이거죠. 문학이 안 나온 사실은 존재하지 않은 것이고 문학에 등장하지 않은 과거는 존재하지 않았던 과거입니다.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망각의 정치를 구사해왔던 그 시대 유신시대를 이어받은 전두환 시대는 <광주항쟁>과 더불어서 소설로 형상화되었습니다마는 유신시절의 그 공포시대를 누가 소설로 형상화하겠어요? 그럼 그 시대가 존재하지 않은 겁니까? 그런 문학작품이 없었기 때문에 박정희 망령이 되살아나고 있지 않습니까? 부활하고 있지 않습니까? 돌아가신 노무현 선생, 뭣 모르고 자기까지도 다 내버리면서 이 사회의 미만에 있는 권위주의를 타파하는데 앞장섰잖아요. 그분은 그러지 말았으면, 대통령의 정당한 권위는 지켰으면 했는데 대통령의 권위까지도 버리시더라고요. 그것을 여러분이 어떻게 평가할지 모르지만 대중들이 보기에는 카리스마가 있는 지도자가 없는 거예요. 우리 또래 있잖아요. 그 시절 청년으로 우리가 유신시절 살았는데 완전히 토목과 정권하고 항상 밀접한 관계가 있었고, 돈 벌고 이런 것은 정권과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기득권층이 그때 형성되고 박정희를 좋아했겠죠. 젊은 사람들은 민중운동을 통해서 박정권하고 싸웠습니다. 지금 젊은이들, 미체험 세대는 겪지도 않고 풍문에 분위기상 검은 안경 쓰고 하니 카리스마가 있어 보이겠지요. 독재자는 카리스마가 있어 보이는 것 아니겠어요? 노무현이 카리스마가 없다 보니까 지도자로서 카리스마가 있는 사람을 찾는 거예요. 카리스마를 찾다가는 다시 한 번 유신시대를 되풀이하게 되는 것이죠. 그 공포시대가 다시 오게 되는 것이고 다시 그 시절을 살아야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문제는, 그 시절 그 공포에 대해 묘사한 사람이 없다는 겁니다. 이게 문제예요. 문학이 유신시절의 공포에 대해서 안 쓰고 있어요. 난 잘 느끼고 있어요. 그럼 너는 왜 안 하냐, 저보고 말씀하신다면 전 그것도 하려고 했는데 제주도에만 매달려가지고 그러다 보니 못했습니다. 젊은 사람이 그 시대를 바라보면 달라요. 어떤 굴절된 시각으로 프리즘을 통해 볼 수 있으면 새로운 감각으로 그 시대를 볼 수 있어요. 다시 그 시대를 발굴해 내는 일, 이게 젊은 작가들이 해야 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내가 체험 안 했으니까, 이게 아니에요. 체험 안 한 것이 더 좋은 소재가 될 수 있어요. 헤르타 뮐러라는 양반은 독일계 루마니아 사람인데 이번에 노벨문학상을 받았습니다. 그 사람은 루마니아 독재시절, 차우체스쿠 독재자 밑에서 공포정치를 겪었어요. 그 공포정치가 이러이러한게 나빴다가 아니고 서민생활에서 그 파장이 어떻게 오는가, 그 공포가 어떻게 오는가를 산문시로 써 냈어요. 이게 문학이 되려면 형식이 굉장히 중요한 것 같아요. 소설이라도 내러티브 스토리텔링으로 되는 게 아니고 시가 있어야 된다는 것이죠. 그 때문에 그 문체 때문에 노벨문학상을 받았으리라고 생각되는데, 그러려면 무지하게 열심히 공부해야겠죠. 무지하게 책 읽고 무지하게 공부하고 자기가 추구하는 대상에 매달려서 애써야 되고……. 또하나 노벨문학상을 받은 토니모리슨이라는 미국작가인데 이 사람의 소설 중 번역된 거 『빌라미드』 딱 하나만 읽었습니다. 내용이 무엇이냐면 150여 년 전 미국의 남북전쟁이 있지 않았습니까? 먼 과거예요. 남북전쟁 이전에 있었던 흑인이 차별받는, 흑인의 참담한 모습, 이것을 소설화한 겁니다. 그게 뭐가 소설화될 수 있을까. 흑인들이 수난받은 것이야 다 알려진 일이고,『뿌리』라고 헤일리의 작품도 있었지만, 『빌라미드』그 소설을 읽으면 옛날에 이랬었다, 이런 내러티브가 아니고 스토리텔링이 아니고 지금 당장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아요. 그 소설을 읽으면 150년 전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당장 벌어지고 있는 것 같은 그런 형식을 취하더라고요. 형식이 중요한 거구나 생각하게 되지요. 주인공이 여자인데 그 집안에 아기유령이 거주해요. 어린 ‘빌라미드’라는 애기가 있었는데 그 어머니가 목 졸라 죽인 거예요. 자기 애를. 그럴 수밖에 없는 정확한 상황, 그걸 극대화시키기 위해 그렇게 설정한 모양인데, 그 유령이 집안에 같이 사는 거예요. 그건 무슨 형식일까요? 매직리얼리즘이잖아요. 남미의 작가 가브리엘 마르케스 이런 사람들이 취했던 환상 판타지 이런 겁니다. 판타지를 넣더라도 리얼리즘을 위해 판타지를 넣어야지, 판타지 운운하면서 리얼이라는 말은 전혀 없고 공허한 판타지가 유행하고 있죠. 그건 아니라는 거죠. 우리 같이 열심히 해봅시다. 이렇게 만나게 된 것을 축하드리면서 제 얘기는 여기서 끝내겠습니다.
현기영 1941년 제주에서 태어났으며, 197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아버지」가 당선되었다.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과 한국문화예술진흥원장을 역임했으며, 제5회 신동엽창작기금(1986)과 제5회 만해문학상(1990), 제2회 오영수문학상(1994), 제32회 한국일보문학상(1999) 등을 받았다. 소설집으로 『순이 삼촌』 『아스팔트』 『마지막 테우리』 등이 있고, 장편소설로 『변방에 우짖는 새』 『바람 타는 섬』 『지상에 숟가락 하나』 『누란』 등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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