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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걷기사랑
 
 
 
카페 게시글
*그 곳에 가고싶다 스크랩 권오설의 가일마을
김병용 추천 0 조회 40 09.08.11 14:5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안동의 모스크바라 불리우게 된 가일 마을, 권오설 그는 이 마을의 신선한 바람이자 충격이었다.

 

 Frank Duval / Seven Eternities


시습제(時習齊)는 화산 권주(花山 權柱 1457~1505)의 고택이다. 화산은 도승지등 많은 벼슬을 거쳤으며 중국어에도 능통하여 대명외교에 일익을 담당 하였다고 한다. 500년이 넘었다는 훼나무가 대문 처럼 버티고 있는집. 퇴계가 30세에 재취(再娶)를 하니 평소 존경하던 이댁의 주인이신 화산이 처조부가 되며 화산의 맏아들 권질이 장인이 된다.

 

 

사당에 모셔져 있는 현판은 퇴계의 친필로 선원강당은 화산이 공부하던 자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후손이 지었다고 한다. 현판과 시판은 이댁 사당에 모셔져 있어서 아무때나 볼 수 있는게 아니라 특별한 경우에만 공개가 된다. 권질은 신사무옥(辛巳誣獄)으로 9년째 예안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는데 "자네는 내 집일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집안의 참극으로 정신이 혼미해진 내 여식(女息)을 누가 데려 가겠는가? 아무리 궁리를 해봐도 자네 밖에는 없으니 처녀를 면하도록 하여 이 죄인의 원을 풀어 주게나" 폐비윤씨에게 사약을 내릴때 그 사약을 가지고 갔다는 이유로 할아버지가 화를 입고 아버지는 귀양을 갔으며 숙부는 비참하게 죽었고 숙모는 관비로 끌려가는 참극으로 정신이 혼미하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이집안의 참극은 후일 복권이 되지만 퇴계의 인품은 그런 부인을 고이 여기며 끝까지 아낀데 있으리라. 퇴계의 제자중에는 전주에 사는 이함형 이라는 선비가 있었는데 부부간의 금슬이 좋지 않아 부인을 소박 한다기에 "자네 잊지 말고 내일 조반은 우리집에서 하고 떠나시게" 하였다. 아침상은 된장과 가지나물, 산나물 한가지뿐 참으로 초라 하였다. 그런 부인에게 퇴계는 극진하였다. 이함형은 크게 뉘우치며 정신적으로 부족한 부인을저토록 아끼고 소중히 할 수 있을까 하였다. 떠나려 하자 도중에 뜯어보지 말라는 당부와 함께 편지 한통을 건네 주었다. 내용은 이러하니

"자네가 부인과 금슬이 좋지 않다고 하니 참으로 개탄할 일이로다. 조강지처불하당 이라는 말이 있는데 부부의 근본도리를 잊고 글공부는 해서 무엇에 쓰겠는가? 또한 천하의 이치는 남편이 노래하면 아내가 따라하고 숫소가 내달으면 암소가 따라가고 수탉이 울어데면 암탉이 순응하니 무릇 성인은 이처럼 언행을 다스려야 하며 이야말로 현명한 사람이 취할 바이다. 라고 하였는데 한 집안조차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고 성인의 말씀을 배운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깊이 명심하여 공규를 알뜰히 지키는 부인 곁으로 기꺼이돌아가 주기를 이 노부는 간곡히 바라네" 하였다. 물론 이함형은 돌아가 아내를 소중히 여기고 자손을 이었다고 한다.

 

 

퇴계는 63세(1563)때 외조부 산소에 성묘를 가는 길에 처조부와 장인 어른의 묘소를 찾아뵙고 각각을 향한 그리운 마음을 노래한 시가 있는데 글씨는 퇴계종택에 아직 생존해 계신 올해 99세 되시는 15대 종손 이동은 선생이 썼다. 사당에 고이 모셔 놓은걸로 봐서 두 집안은 서로를 중히 여긴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題權參贊柱墓道

어려운때 겪은 고난 운명이 아니랴

무성한 송백에 푸른 연기만 자욱하네

절행이야 훗날의 역사에 남겠지만

문장이 전하지 않아 천고에 한이로다

拜權奉事公墓

옛날 그 땐 참사람을 몰라보고

까닭 없이 저승으로 이 분을 데려갔네

고향에 돌아와서 묘사를 지낸 후

매화 피는 모습보고 장인 생각 하옵니다

   

 

 

 

권태응(權泰應) 가옥은 연못과 정원수가 조화를 이룬 전통적인 양반가의 모습을 잘 갖추고 있다. 안동권씨는 나라 안에서 워낙 유명하지만 가일권씨라고 따로 부를 정도로 이 마을 권씨들의 자부심 또한 대단하다. 가일의 지주들은 소작인들이 곡수를 부족하게 가져오거나 전혀 못내도 따지거나 독촉하지 않았다고 하며 큰집들은 대문을 활짝 열어두고 과객을 맞이 하였으며 떠날때는 노자까지 챙겨 주었다는 훈훈한 마을이다. 

 

 

수곡종택 담밑을 걸으며 가일마을이 품고 있는 야유당, 일감당, 동곡재사, 노동서사, 근와서재같은 훌륭한 문화재를 떠올린다. 하회마을과 가까운 거리의 가일마을은 안동의 남서부 지역에 속하고 1894년 7월 안동에서 처음 갑오의병이 일어나고 1895년 을미의병이 일어났으며 1896년 초가을까지 전국 유림들과 문중들이 들고 일어 났는데 가일은 의병에 자금을 지원하는 소극적 자세를 보이는 듯 했다. 1910년대 나라를 잃은뒤 가일마을 사람들의 대응 방식 또한 대한광복회에 자금을 지원하는 일이었다. 어쩌면 이러한 지원방법은 대단히 중요해서 1910년대 안동의 주력 인물들이 만주로 대거 망명한 상태에서 자금줄이 고갈된 상태나 다름 없었는데 어쩌면 핏줄과 같았으리라. 1910년대 영남지역은 유림이나 의병출신의 비밀결사체인 광복단, 독립의군부, 민단조합, 조선국권회복단등을 만들었다. 1913년 풍기에서 채기중(蔡基中)이 중심이되어 만들어진 광복단은 1915년 대구에서 대한광복회로 발전하였다. 전국에 명성이 알려졌고 가일마을 사람들은 군자금 모집에 적극동참 하였다. 이때의 사람으로는 권준희, 권준흠, 권영식 등이며 모두 가일마을 8부자로 일컬어지는 집의 후손들이다. 권준희를 비롯한 마을 주역들이 몽땅 잡혀가는데 자금은 단순히 광복회의 지원이 아니라 서간도 독립군기지 건설사업 그 자체거나 참여하는 활동 이었다. 3.1운동이 안동에서 순국자만 30여명이 될 정도로 커다란 폭풍이 되어 지나 갔지만 하회, 가일은 그나마 다른곳에 비해 잠잠했다. 그러나 이때 폭풍을 몰고 온 사람이 있었으니 권오설이다. 

 

 

남천고택(南川古宅)은 권장(權璋)이 철종 1년(1850)에 그의 아들 권수(權繡)에게 지어준 집으로 권수의 택호에 따라 남천고택으로 불리운다 권오설을 따른 집안 청년중 6.10만세 운동으로 구속되어 1927년 순국한 권오운은 이댁의 후손이다.

 

 

지금의 주인이신 권장(權臧)어르신의 멋진 문패.

 

 

남천고택과 담을 사이에 두고 비닐하우스로 변해버린 오늘 찾아온 목적인 권오설(權五卨 1897~1938)의 생가터. 1920년대 사회주의 이념을 민족문제에 대입시켜 자주 독립을 일구려 했던 애국자. 전남도청에 근무하고 광주에서 3.1운동을 맞은 권오설은 배후로 지목되어 6월형을 받고 그해 가을 가일 마을로 들어와 원흥의숙이라 부르는 신식교육을 가르치는 학교를 세운다. 신식교육뿐 아니라 농민운동과 청년운동을 함께 펼쳤다. 이는 서울에서 활동하던 오미동의 김재봉, 우롱골의 이준태와 같은 고향 선배들과 깊은 연관이 있다. 1923년 풍산소작인회를 결성한 권오설이 그 대표자격을 갖고 서울로 갔다. 이듬해 조선노동총동맹의 10인으로 구성된 상무위원회 위원을 거쳐 책임자가 되었다. 1925년 4월 17일 조선공산당이 창당 되는데 김재봉이 책임비서, 권오설은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1926년 5월1일 메이데이 시위를 기획 하였는데 갑작스런 융희황제 순종의 승하로 인산일에 대중적 시위로 방향 전환을 하는데 6.10 만세운동의 기획인 것이다. 권오설은 서울에서 유학하던 권오상, 권오운, 권태성, 유연희등 가일과 이웃마을 청년들을 6.10만세운동 한복판에 세웠다. 6월 7일 권오설은 일경에 시위 준비가 사전에 노출되어 체포되고 불발로 끝날 위기에 종로4가 네거리에서 예안출신으로 중앙고보에 다니던 이선호가 계획 했던데로 뛰쳐 나가며 만세를 부르기 시작했고 이것이 신호탄이 되었다. 권오설은 20개월동안 미결수로 있었는데 김남수는 통일조선공산당이라는 3차당 활동으로 구속되기 직전까지 권오설을 지원 하였다. 7년형 구형에 5년형을 선고받고 1930년 7월에 출옥이 예정 되었으나 100일을 앞둔 4월 17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갑자기 순국 하였다. 권오운, 권오상, 권오설의 6.10 만세운동으로 인한 순국은 가일 마을의 아픈 역사 일부분일 뿐이다. 6.10은 3.1운동을 계승한 투쟁이고 광주학생의거를 연결하는 중요한 투쟁 이었다.  

 

 

권오설보다 아홉살 적은 친동생 권오직은 권오설이 추진중이던 뜻데로 안동출신의 안상훈등과 모스크바 동방노력자 공산대학에 20여명과 유학 하였다. 1929년에 졸업하여 10월에 귀국하는데 조선공산당 조직 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선전부 책임자가 된다. 1930년 3.1운동 11주년 기념일에 광주학생운동으로 고조된 반일 격문을 배포하여 체포된뒤 1940년에 종로 경찰서에 또다시 검거되어 8년형을 선고받고 보역중 해방을 맞았다. 미군정때 조선공산당이 비합법조직으로 탄압받자 북한으로 건너가는데 그를 따라간 가일마을 학생과 청년이 30명이 넘는다고 한다. 1948년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 대표자 대회에서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 되었다. 6.25 전쟁때는 헝가리주재 공사와 중국주재 대사로 해외에 있었다. 가일 출신의 권오설보다 한살적은 안기성이라는 인물은 권오설과 거의 같은 길을 걸었다. 권오설이 체포되던 1926년 소련으로 도피 했다가 만주로 이동 하였다. 동만주국 책임비서가 되었는데 일경에 체포되어 경성지법에서 5년형을 선고받고 수감중 만세운동을 주도하여 징역 6월이 추가되어 1935년 출옥한다. 중앙인민위원회 후보위원으로 추대되고 1946년 상임위원및 사무국 제정 부장이 되었다. 1947년 미군정 포고령 위반으로 재판에 회부된뒤 월북하여 해주에서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 되었다. 6.25전쟁때 경기도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으나 권오직과 마찬가지로 1953년 8월 출당 되었다. 이들 외에도 가일마을 출신들의 국내외 항일 투쟁사는 사회주의 계열과 달리한 활동도 많이 있다. 마을 들어가는 입구에는 가곡지(佳谷池) 라는 저수지가 있는데 수백년된 버드나무들이 이마을과 이들의 역사를 다 알고 있으며 그 나무들 사이에 2001년 11월 11일 기적비를 세웠는데 권오설의 동지였던 군자리 오천 유적지의 김남수, 그의 아들 김용직 서울대 명예교수가 짓고 강원대 교수 황재국이 쓰고 권오설 건립위원회에서 세웠다. 집사람이 베껴쓰고 있는 목판을 본뜬 설명판은 안동독립운동기념관 관장인 김희곤교수의 특허이니 저런 모양을 한것은 독립운동에 관한 것이다. 김희곤 교수는 어쩌면 안동땅 어딘가에 살았던 옛선비가 환생한것이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 정도로 지금도 잊혀졌던 지역의 역사를 깨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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