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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적 상상력과 공간 인식 속 문장들
_ 김순효 작품론
5월의 장미도 고혹한 색감을 잊은 지 오래다. 이후 왕성한 넝쿨을 타고 자지러지던 연초록의 이파리마저 가시에 무뎌진 칠월이다. 습한 기운을 미리 알아차렸는지 탱탱한 줄기의 수분을 줄여 성장을 멈춘 요즘 비가 많이 온다는 일기예보가 지구 환경의 이상 현상과 맞물려버린 칠월은 몹시 아프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폭염 맛을 미리 보여주듯 간간이 며칠 건너 뜨겁던 한 낮을 보여준 것도 알고 보니 기후에 대한 이상징후였다. 언제였냐는 듯이 하늘 판을 갈아 끼운 것일까 연이어 비가 내린다. 수직으로 내리꽂다가 느리게 번지듯이 하늘이 내려앉았다 들어 올려졌다를 반복하는 변신을 보여준 최근의 변화무쌍한 모습이다. 가을을 예고하는 절기의 질서처럼 먼저 넘어와 길목을 지키고 있는 김순효 시인의 시 다섯 편도 심정적인 변화를 담고 있을 것이다. 시로 형상화되는 대상에 대하여 감정의 변화가 직관을 따라 사유하듯 예상치 못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물끄러미 비를 쳐다보며 비에 젖은 과거의 시간을 회상해 본다. 유년 시절 처마 끝에서 하염없이 쏟아지는 장대비가 초가지붕의 끝단에 매달리다 기어이 땅으로 곤두박질치는 물방울을 보며 잠시 일다 사라지는 ‘비’의 단명한 생애를 무심하게 바라봤던 기억이 새롭다. 그때처럼 김순효 시인의 시를 통해 우리가 알지 못했던 현재의 시간을 통해 과거의 기억을 공유하는 것도 시의 문장 속에서 가능한 일이다.
바랜 시간을 펼치니 장미꽃이 피었다
여린 잎은 햇빛 속에 푸르다
빛깔들이 떠난 당신의 계절은
하얀 기억들이 불빛 사이로 손을 내민다
훈장이 달린 헤링본 슈터를 입은 기사는
무뎌진 검을 움켜쥐고 절룩절룩 걸음을 옮긴다
빛나는 시간은 껍데기로 남는다
힘겹게 잡은 시간을 까마귀 떼가 난장을 친다
안간힘을 다해 저항을 해보지만 녹록치 않다
몇 번이나 마주하는 이별도 끝이 아닌 줄은 알지만
당신은 붉게 피었다가 하얗게 돌아섰다가
시공이 나뉜 평행선을 건넌다
녹턴이 흐르는 혈관 속으로
알코올에 절인 시간이 배어난다
기도는 녹슬어 어둠에 길을 잃는다
장미가 만발한 그 곳에서 서성인다
온전히 당신을 위해
-<타임 슬립> 전문
화자가 바라본 시간은 현재의 의미에서 유효한 것이 아니다. 한때는 분명히 온전한 생명의 기운을 담고 있었던 시간을 표본화한 형체를 보여주던 ‘장미꽃’이다. 그토록 화려한 시간이 경과한 현재는 아무런 의미 없는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런 기억을 송두리째 앗아가는 인식의 회전반응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그럴 것이라는 과거를 뒤집어 “바랜 시간을 펼치니 장미꽃이 피었다/ 여린 잎은 햇빛 속에 푸”른 기운으로 사라져 없던 존재가 사실처럼 유효한 생명의 기운으로 부활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착시일 수도 있는 잠시인 찰나로 그치고 만다. 한때 화려했던 과거의 모든 것은 허망하게 끝나버렸고 영광스런 모습은 그 어디에도 없는 우리의 모습과 닮은꼴이다. 붉은 장미처럼 화려했던, ‘당신의 계절’도 사라져 버렸고 건조해진 시간의 색깔도 무의미한 것이어서 홀로 빛이 되지 못한 “하얀 기억들이 불빛 사이로 손을 내민다”는 것이 전부다. 그렇게 드러낸 반응은 “훈장이 달린 헤링본 슈터를 입은 기사”의 용맹과 위엄은 상징처럼 사라지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무딘 검과 세월을 이기지 못한 몸의 쇠락으로 걸음마저 무겁기만 하다. 간혹은 미련처럼 흘러간 추억 속에 존재한 영욕의 시간이 아쉬워 위안을 삼다가도 그 또한 부질없는 것으로 “빛나는 시간은 껍데기로 남는다”며 없던 기억처럼 하얗게 밀봉을 하고 만다. 이제는 기억마저 온전하게 끌어낼 수 없어 균형 있는 평행선을 긋기도 벅찬 나날의 시간이다. 그것을 위로하는 방법은 은밀하게나마 드나들 수 있는 화자만의 영역 안에 존재하는 미로 같다. 안타까운 이별의 순간을 회상하는 것이 유일한 기쁨으로 그래도 다행인 것은 무의식을 넘나드는 공간에서만큼은 운 좋게 재회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것의 끝은 이성적인 것이어서 언제나 차갑게 돌아서는 것으로 매정한 것이다. 이제 다시는 이별 같은 재회는 없을 것이라면서 사랑이라는 비정함을 핑계 삼아 고개를 외면해야 할 때다. 자아의 빈곤 같은 우울을 조금이나마 완화하고 싶은 것이지만, 야상곡으로 흘러나온 곡조가 잔잔해진 슬픔을 자극하여 그 빈티를 메우는 것은 깊은 술통에서 흘러나온 알코올이 차지한다. 혈관을 타고 흘러든 잔잔해진 과거를 간혹 현재로 소환하는 것의 증상은 누구나 겪는 건강한 자정작용이란 것을 타임슬립’을 통해 화자는 말하고 싶은 것이다. 인간은 과거로부터 잉태되어 현재를 넘어서는 욕망의 끝을 보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드러운 날갯짓으로 영해를 들어선다
풀리지 않는 날개들이 소용돌이 속으로 조밀하게 죄어오면
단단한 것에서 생기는 눈은 나비가 된다
따뜻한 문장은 부풀려진 채로 해방구를 찾아 맴돈다
휘파람소리에 엮이는 것 마다 파탄이다
장막 뒤로 불꽃이 떨어지면 하늘은 눈을 감는다
세상은 다시 눈물이다
몇 편의 시를 길어 올린 시인은 다리를 꼬고 앉아
더 이상 볼 문장은 없다고 말한다
시인의 날갯짓은 경멸보다 아프다
예보는 어긋나지 않았고
직진으로 달려드는 바람에 폐허가 된 문장
날갯짓은 끝이 나도 문장은 그날 이후 부풀지 않았다
극한을 날았던 나비는 폐허 속에 이름을 새기지만
나는 무너진 문장을 쪼는 까마귀를 쫓고 있다
-<나비> 전문
화자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사유 환경은 기상예보에 개의치 않고 감정의 습도를 자율 조절해 가며 감정선을 넘나 든다. 그럴 때마다 사유의 실체로 떠오른 이미지는 특정하거나 한정되지 않으면서 변환을 거듭하여 나타나기도 한다. 여름 장마가 계속되는 요즘은 ‘나비’가 날기에는 부적합한 환경이다. 하지만 어차피 화자의 사유 속에서 날고 있는 ‘나비’는 상상 속의 존재로 일기와 상관없이 무한한 공간을 화자가 원한 만큼 날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지점이 있다. 화자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나비는 매번 날 수 있는 것의 즈음에 새롭게 생성한 나비가 아니라 이미 심리적인 심상 안에 “부드러운 날갯짓으로 영해를 들어선다”며 지금보다 더 가벼운 비행에 대한 미련을 오래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수시로 수만의 날개를 발생시켜 수없이 원하는 공간으로 날려 보냈지만, 욕망을 이룰 수 없었다는 것에서 새롭게 출발한다. 결국 화자가 말하는 ‘날개’는 상상을 통해 현실처럼 실재함을 말하는 것으로 매번 그 실체 속으로 다가가 보지만, 새로운 의문과 궁금증을 해소할 수 없었다. 그럴 때마다 의문의 시선은 새로운 궁금증에 대한 “풀리지 않는 날개들이 소용돌이 속으로 조밀하게 죄어오면/ 단단한 것에서 생기는 눈은 나비가 된다”라고 말하고 있다. 새로운 욕망에 대한 실행적인 상상은 주변 환경과 맞물려 변주하듯 탈출구(대상)를 찾아 나서게 된다. 이제는 ‘휘파람소리’가 관심의 주체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동안 경쾌한 리듬처럼 가볍게 발성되는 심상 안의 고조된 명랑으로 화자를 들뜨게 했을 ‘휘파람소리’는 그 순간만큼은 모든 것의 환상에 대한 실현처럼 듣기에도 좋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고조된 기분과는 상관없이 포물선을 그리며 잦아지는 경쾌한 경음이 무겁고 칙칙한 탁음으로 변성되어 그저 평범한 일상의 ‘소리’였단 것을 깨닫게 된다. 그 순간 화자가 추구한 시적 열망은 “휘파람소리에 엮이는 것 마다 파탄이다/ 장막 뒤로 불꽃이 떨어지면 하늘은 눈을 감는다/ 세상은 다시 눈물이다”라며 환상에 대한 열망을 여지없이 깨뜨려버리는 자괴감은 커질 수밖에 없다. 지금껏 경유한 경로에 있던 가능한 것의 문장들을 다시 냉정한 시심으로 검열을 해보지만 씁쓸한 회의감만 빼곡하다. 마치 포구 가득 일렁이던 윤슬을 지우고 빠져나간 썰물처럼 바닥을 드러낸 화자의 가슴 안이 몹시 허전하다. 그렇게 몇 편의 시들과 시름한 날들도 이젠 지쳐 그것만으로도 크나큰 수확임을 자축하며 끝을 봐야 할 “몇 편의 시를 길어 올린 시인은 다리를 꼬고 앉아/ 더 이상 볼 문장은 없다고 말한다/ 시인의 날갯짓은 경멸보다 아프다”며 마침표를 찍으려 하지만, 화자의 마음은 만족과는 멀어 그렇게 쉽지 않다. 미련처럼 수없이 다시 날기를 시도하지만, 통제 선으로 구획된 비행금지구역을 벗어나지 못하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날갯짓’도 허망한 것이다. 화자 자신을 자책하는 마음을 담고 있는 시 ‘나비’는 시적 문장에 대한 고뇌와 쉽게 구현되지 않는 괴로움을 표현하고 있다.
오래된 가을을 흔들어 깨우는 잎새
휘파람새는 강기슭을 오르며 날선 소리로 운다
꼬리를 물고 떠다니는 빨간 입술
검지가 우우 몰려다니는 강변에 설익은 얼음이 앉는다
갈대가 키우는 바람이 흔들리는 것은
나의 의지와는 관계없는 일이다
그들은 네프티스 때문이라고 말한다
다 그런거다
스스로 태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검지가 호루스의 눈을 찔렀다
햇빛이 쏟아진다
시간이 없다는 말은 그리움을 남기지 않아도 된다는 말
날을 세운 문장이 등 뒤로 떨어졌다
눈물이 켜켜이 쌓여 있다
-<윤슬> 전문
휘파람새가 우는 시간과 계절을 분별할 수 있다면 생을 어느 정도 그윽할 만큼 살아왔다는 연륜을 말해준다. 흔히들 휘파람새는 저승 가는 길을 알려주는 죽음과 연관 지어 바라본 영물스런 새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이번엔 낯선 세계로부터 들려오는 듯한 소리가 귀를 자극한다. 어차피 ‘윤슬’이란 단어가 실체 없는 허상을 통해 빛을 발하는 착시적인 기생 현상이란 것을 안다면 화자가 갖는 심리적 표면을 통해 감각의 크기로 다가온 파장이란 것을 말해준다. 녹음의 표면을 온통 푸르게 물들인 광합성 활동이 어느새 우리가 예상할 수 없는 식물적인 성장을 마감하는 변곡점에 다다른 것을 알려준다. 그것의 정점은 푸른 기운에서 붉어가는 변이 작용으로 시선을 끌면서 시작된다. 마치 잠깐 이는 바람에 푸른 잎사귀의 표면이 뒤집히면서 착시된 환영을 보는 듯한 것이다. 그러다 가을로 깊어가며 서서히 본색을 드러내는 식물성으로 치장한 변화를 놓치지 않고 화자는 심연으로 파고든 충동에 편승 동행하고 있다. 마치 바다에 뜬 달빛에 고요를 뒤집으며 이는 파랑에 반짝이는 ‘윤슬’이 환상적으로 분위기를 돋우는 것처럼 “오래된 가을을 흔들어 깨우는 잎새/ 휘파람새는 강기슭을 오르며 날선 소리로 운다”는 화자의 감상이 계절보다 가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의 징후는 이미 예견된 것으로 오랜 연륜으로 익히 계절감에 대한 체험에 의해 예견하였기 때문이다. 강기슭에 자리 잡은 가을은 오래전 그곳에 당도해 있었고 다만 시기를 가늠하며 발현할 기미를 늦췄을 뿐이다. 그 강변에 해마다 살얼음이 얼기 전 단풍 진 낙엽들(빨간 입술)도 그곳에서 유영을 기다렸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것대로 또다시 시작하는 신생의 시간으로 존재하는 것이어서 단순히 계절의 모습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현상을 통해 변주된 감성의 고조가 불러오는 사유의 중심을 잡아가기 위한 고뇌의 모습이란 것을 알아야 한다. 초심대로 진행되지 않는 화자의 발심은 매번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진전되다 기어이 엉뚱한 곳에서 좌초하고 만다. 경로상에서 간간히 화자의 의지가 아닌 초자연적인 풍향에 흔들리는 현상(갈대)은 화자와는 무관한 일이란 것을 아예 선을 그어놓고 만다. 잘못될 수 있는 변수에 대한 회피성 같은 의도 같지만, 따지고 본다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인간의 의지로 실행하고자 하는 상상력과 구체적인 언어 표현에 대한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으로 그것에 대한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그들은 네프티스 때문이라고 말한다”라며 화자도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모든 것의 근원인 생명활동도 사랑으로 말해본다면 쉽게 이해될 수 있다. 화자가 그토록 열망한 시적 삶도 사랑의 한 형태로 존재한다. 어차피 네프티스도 욕망으로부터 출현한 존재로 그 사랑을 차지하기 위해 호루스의 눈을 찔러야만 했다. 인간이 성취하려는 욕망은 시간과는 무관하게 신들의 관계처럼 우리가 추구하는 삶에서도 유사 반복됨을 말해준다. 모든 것을 이루고 난 뒤의 습습한 마음은 허망한 것이다. 그럴 때 흘리는 눈물은 성취로 발산한 환희의 눈물이 아니라 후회와 반성의 눈물인 것이다.
그녀 탓만 하다 어둠이 발을 빠뜨렸어요
우울은 꼬리를 늘어뜨리고 나를 안아요
예감할 수 있어요
그녀를 떨쳐내기란 쉽지 않다는 것
거추장스러운 하루가 구겨져요
어둠을 밟으면 꼬리는 자꾸만 길어져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어쩌자고 이 밤 샤콘이 흐르는데
얼음 속에서 꿈을 빌려요
미궁을 헤매는 퇴화된 그리움은 걸음이 불편해요
올 마다 쓸려 나간 살점을 핥으며
농창이 난 어둠이 눈을 감아요
현을 밟는 향기에 여리고 장미가 깨어나요
푸른 날개가 돋아나고 있어요
-<샤콘느가 흐르는 밤> 전문
음감으로 출현한 소리가 이미지로 환원되면서 내면 속 감성을 압도한 것일까? “그녀 탓만 하다 어둠이 발을 빠뜨렸어요”라는 상황은 유혹의 시작일까? ‘어둠’이 ‘발’을 빠뜨렸다는 것이 지시하는 은유의 진폭은 쉽게 가늠하기 어려운 것으로 변화되어갈 지점으로의 진행이 멈춘 상태를 말해준다. 화자가 품고 있는 심리적 공간을 유추해 볼 때 그 의미는 현실 속의 시간을 잊었다는 것의 또 다른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음악이 고조되면서 몰입도가 높은 사람일수록 화음이 갖는 신비로움에 흠씬 젖어든다. 그러면서 그 소리의 정점에 있을 사랑의 대상인 누군가를 떠올리곤 한다. 그런데 화자의 감정선을 강하게 흔들고 있는 음악은 바로크 시대의 대표적인 무곡으로 샤콘느’란 곡이다. 샤콘느를 흔히 슬픔과 관련지어 이해하는 경향을 보이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한다. 샤콘느’는 그냥 느린 4분의 3박자의 춤곡으로 어두운 단조 풍의 샤콘느들이 현대에서 자주 연주되는 것일 뿐. 밝은 분위기를 연출하는 곡들이 당시(바로크 시대)에 유행했다고 한다. 화자가 감상에 젖어든 사콘느는 어느 쪽에 가까운 가는 알 수 없지만, 시의 전개를 살펴 감안해 볼 수 있다. 우선 ‘우울’이란 시어가 던지고 있는 분위기는 그 이유를 질문할 수밖에 없는 모호성을 내포하고 있다. 여기에 등장한 ‘그녀’에 대한 전혀 다른 의미를 생각해 본다면 한결 쉬울 수 있어 시의 이해가 가능하다. 그녀(낮)와의 벌어진 일들로 인해 몹시 우울해졌고 그 시간이 자꾸만 길어지고 있다. 지난 일을 빨리 잊어야 하는 데 그것에 대한 결단이 쉽지 않은 것이다. 그러다 보니 모든 것들에 대한 불편이 가중되고 당연히 우울한 기분이 강해질 수밖에 없다. “어둠을 밟으면 꼬리는 자꾸만 길어져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어쩌자고 이 밤 샤콘이 흐르는데”라며 묻고 있지만, 자꾸만 늘어지는 낮의 시간은 음악이 흐르는 템포만큼이나 마음 속 고조된 감정을 붙잡고 놓아주질 않는다. 밤의 행복을 위한 사랑의 밀도가 시간이 흘러갈수록 덤덤해지면서 마음의 낭만은 시간과 비례해 식어만 간다. 이제 모든 것에 대하여 어떤 이유가 된다 해도 죄다 잊어야만 할 시간으로 도래하고 있다. 화자의 것이어야 하는 희망(사랑)은 도저히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얼음 속에서 꿈을 빌려요”라며 추억으로 간직한 그녀와의 아름다웠던 사랑을, 식어버린 과거로 묻어버리거나 그저 담담히 회상하는 수밖에 없다. 그것으로 만족해야 할 시간뿐인 현실 속에서 사랑의 아픈 상처만 확인할 따름이다. 한때는 소중했던 그녀와의 사랑도 이제는 퇴화된 그리움으로 현실 속에 존재하지 않는 추억에 불과하다. 과거의 순간들을 회상할수록 어둠 같은 시간은 괴로운 것이다. 이제는 바이올린의 현을 타고 울리는 사콘느의 음감에 열중해야 한다. 어딘가에 있을 희망의 ‘푸른 날개’가 돋아날 것이기 때문이다. 화자가 몰입할 수 있는 시간의 허락은 자유로운 것이어서 지난 과거의 어떤 사연으로 묻힌 사건도 생생하게 되돌릴 수 있다. 그런 행위는 음악을 통해 심미적인 감동으로도 실천의지를 강행하게 하는 힘이 된다.
부끄러움은 부끄러움을 모르고
얼굴 없는 문장은 얼굴이 없네요
화훼원예사는 노란백합을 재배한데요
아왜나무의 그림자가 뿌리를 내리는 저녁
끼리끼리 모여 씨앗을 나눠가져요
공중에 매달린 십자가를 보며 누군가는 성호를 긋고
누군가는 손바닥을 마주하지 않으려고 발등을 본다
당신은 눈길을 걸어본 적 있나요
한 걸음 한 걸음 똑바로 써 내려가도 틀림없는 당신은
틀림없는 그림자를 키우겠지요
얼굴을 가린 구름과 하늘을 닮은 잎들이 손사래 쳐도
화훼원예사의 노래는 아왜나무 귀를 키운다
아왜나무가 받아 쓴 고해가 공중에 매달렸다
이 저녁 누군가 성호를 긋는다
-<십자가를 매단 저녁> 전문
간혹은 길을 가다 정오를 맞고 누군가는 밥때를 생각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경건한 유일신을 맞이하는 신성한 의식을 행하게 된다. 밥에 대한 시간도 소중한 것이고 신에 대한 경건한 의식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그런 행위에 대한 표면적인 이면에는 인간의 욕망이 존재한다는 것을 간과할 수 없다. 지금껏 행동한 행위에 대한 보상을 위한 절차이기 때문이다. 전자는 신성한 노동의 시간을 수행했기에 응당 배고픔에 대한 식사는 당연한 것이고, 후자는 신을 위한 시간을 살아왔으니 지금껏 행해진 모든 것에 대한 용서와 구복을 바라는 심정일 것이다. 화자는 그런 행위가 갖는 것의 근본에 자리 잡고 있는 인간의 욕망으로 빚어진 “부끄러움은 부끄러움을 모르고/ 얼굴 없는 문장은 얼굴이 없네요”라며 근래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파편적인 현상을 말하고 싶어 한다. 문제는 화훼원예사가 재배하고 싶은 것은 ‘노란 백합’인데 ‘아왜나무’의 강렬한 생장력이 더 빠르게 뿌리를 내려 노란백합이 뿌리내릴 공간을 없애버린 것이다. 사람들은 노란백합의 씨앗이라며 나눠갖지만, 아왜나무의 씨앗을 받아가는 아이러니한 세상을 화훼원예사를 통해 말하고 있다. 인간의 욕망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고유한 개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 풍토는 다양하게 공동체의 삶을 왜곡해 가는 것으로 “공중에 매달린 십자가를 보며 누군가는 성호를 긋고/ 누군가는 손바닥을 마주하지 않으려고 발등을 본다”라고 말한다. 타자의 존재는 없고 자아를 위한 실현만이 궁극의 궁리처럼 인식되는 사회에서 ‘나’의 또 다른 모습인 ‘당신’을 본다. 항상 올바른 삶의 길이기에 어느 것 하나 올바르지 않은 적이 없음을 자신하며 “한 걸음 한 걸음 똑바로 써 내려가도 틀림없는 당신은/ 틀림없는 그림자를 키우겠지요”라며 스스로를 확신한다. 하지만, 아무리 올바로 걷는다 해도 그림자는 삐뚤어지고 굴절된다는 것마저 아예 인정하지 않는 현대인의 아집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아직도 노란백합을 심었다며 하늘을 가리고 있는 아왜나무를 가리켜 노란백합이라고 말을 하는 화훼원예사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인 것이다. 우리는 오직 자신만을 위한 성호를 긋는 데 그토록 믿어 온 신마저 이제는 유일한 대상이 아닐 수 있다. 사람들은 제각각의 의미가 다른 유일신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김순효 시인의 시를 살펴보며 잘 안다는 것과 시를 평하는 것은 전혀 별개란 것을 알게 되었다. 타자를 통해 지시한 지점과 방향성 모두가 또 다른 의식의 세계에서 상상력으로 발현되었기 때문이다. 낯선 의식체인 공간의 범주가 전혀 다른 세계로 환기되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타임 슬립’으로 발제된 시를 통해 김순효 시인이 추구한 세계에 대한 예감을 어느 정도 감안했지만, 현실 속에서 분리된 또 다른 시적 세계를 공유하고 있는 의식의 공간은 다양한 사유로 변주를 거듭하고 있다는 것을 간과했다. 이번을 계기로 알게 된 삶의 깊이로 체현한 상상력이 얼마큼 시적 발현에서 상상 공간을 넘나들며 문장으로 절제되어 나타나는가를 알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인간과문학》가을 4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