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박눈이 펑펑 내린 2024년 11월 27일(수) 백전초 42회는 서울로 향한다. 117년 만의 기념비적인 성대한 눈이 내리는 날이다.
함양을 출발할 때 흩날리던 비는 한양이 가까워질수록 굵어지다가 이내 눈으로 변하고, 급기야 눈 폭탄으로 천지를 덮어 버린다.
이러다 중간에서 돌아가는 불상사는 없겠지?
들뜬 마음이 불안해진다.
하얀 카펫으로 수놓은 들녘, 가을은 나뭇잎새에 떨고 있다.
가을 속 겨울을 감상할 기분은 아니지만 멋진 풍경에 마음을 빼앗긴다. 하지만 오고 가는 차량은 설경에 관심 없다.
새가슴 되어 앞만 보며 달린다. 베테랑 기사님의 자기 자랑에 힘입어 무사히 한국헤르만헤세 사무실에 도착했다.
펑펑 내리는 눈을 뒤집어쓰고 서울 친구들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괴성을 지른다. “와 정말 오랜만이다야. 잘 있었나!”. 하늘은 울고 우리는 희희낙락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 없이 건강하고 화사하다. 모두 잘 살아줘서 고마워. 너무나 감격적인 만남이라 어떤 제스처를 써야 할지 모르겠다. 한 손으론 부족해 두 손을 잡다가,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짓누를 수 없어 포옹으로 이어진다.
초딩과의 만남은 허심탄회해서 좋다. 너 내가 없고, 남과 여가 없는 일심동체다.
박회장 집무실은 넓고 아늑하며, 아름다운 여인들로 수놓은 꽃밭이다. 서재는 책으로 울창한 숲이다.
집무 탁자 위에 높게 쌓인 책들에 놀라 “노벨상 받을 사람은 여기에 있구만”이라 했다. 준비한 선물들로 가득하다. 친구들에 대한 마음 씀이 한눈에 들어온다. 고맙다는 간단한 멘트에 화답하는 박회장이 울먹인다. 모두 깜짝 놀란다.
그리운 고향 초딩들과 마주하니 감정이 북받쳤나 보다. “내가 이곳에 있어도 마음은 항상 고향에 있다. 지금도 부모님 생각하면 불효자라는 생각이 든다”. 솟구치는 감정을 추스르지 못해 말꼬리가 흐려진다. 그 흐느낌에 모두 숨을 죽인다. 가슴이 뭉클하다.
이건 박회장의 모습이 아닌데 하면서도, 부모님에 대한 애틋한 애정에 초연하다.
‘자식은 부모님이 돌아가야 철 든다’고 했다. 누군들 효도를 다 했겠는가! 돌이켜보면 모두 불효자가 아닐까? 내 또한 할 말이 없다. 우리를 불효자로 만든 박회장의 참모습을 보게 되어, 더 의미 있는 만남이다.
북적북적한 카페 한가운데서 맛있게 먹는 해물덮밥, 고르곤 피자, 통닭과 아메리카노가 중요한게 아니다. 그저 친구와 함께라서 좋다.
먹던 수저 놓고 찾아가 묵은 이야기를 끄집어낸다. 설익은 정이 무르익을 정도로 동심에 푹 빠진다. 그중에 유독 감미로운 썸씽이 담긴 사진 한 장. 잊혀져 버릴 뻔한 아름다운 추억이다. 지금 생각하면 철없던 시절의 첫사랑이려나!
즐거운 시간을 폭설이 자꾸 훼방 놓는다. 머리에 함박눈이 쌓이는 줄도 모르고 서울내기들과 아쉬운 정을 나눠야 한다.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갈 길이 천리다. 빙판길에 오가지 못할까, 걱정이 앞선다. 못다 한 정을 뒤로 하고 k.Hemingway Cafe를 떠났다. 친구들의 애절한 손 흔들림을 끝까지 바라보면서.
단순한 만남을 예상했는데, 너무나 찐한 감정들이 오고 간 행복한 순간이었다.
예전에 이러한 추억은 없었다. 어찌 보면 늙어간다는 증거인지도 모른다.
손잡는 순간, 말하는 순간 ‘언제 또 볼 수 있을까’라는 아쉬움이 밀려온 것이다. ‘오늘이 항상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살아라’했던가. 오늘의 이 감정이 다 가기 전에 팔다리에 힘 있을 때, 조만간 시간을 만들자는 약속을 굳게 믿으며 고향으로 향한다.
만사가 귀찮아지는 나이다. 한양까지 오고 간 그 많은 시간을 폰에 의지하고, 술 한잔에 의지했다. 예전 같으면 출발하자마자 흔들어 댔을 것인데. 이젠 흥이 없다. 삶의 근간이 되는 의지도 약하다.
세월만 탓하지 이겨낼 힘이 없다. 그래도 오늘, 삶의 보람은 얻었다. 다음을 기약하고 건강할 것을 약속했다. 희망 고문이 될지언정 희망을 갖자. ‘다음에 꼭 건강한 모습으로 만납시다’라고 약속한 것이다. 오늘 너무나 즐거웠고 행복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