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물 듣는 소리에 잠이 깼다. 머리맡에서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린다. 옆에서 자던 아들 둘이 툇마루에 앉았기에 슬그머니 일어나 내 목소리를 보탠다. 추녀 끝 댓돌과 마당의 자갈에서 그리고 처마 끝 대야에서 빗소리의 삼중주가 퍼진다. 빗속인 듯 비를 피하며 비의 선율에 젖어 잠조차 잊어버렸다.
전주 한옥마을에 왔다. 예고도 없이 내리는 비를 맞으며 도착하자 기와집들이 물을 똑똑 떨구며 반긴다. 씻긴 골목길이 정갈하고 가장자리 도랑에는 맑은 물이 흐른다. 양쪽에 나란히 선 위엄 있는 집들을 지나다 보니 양반댁 마님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다.
오른쪽으로 돌아 과녁빼기 집에 짐을 풀고 이 골목 저 골목을 다녀본다. 어릴 때처럼 팽이 돌리고 연 날리고 외갓집에서의 기억을 살려 물레도 돌려 보며 옛 풍습을 즐겼다. 여기서는 호기심 많은 어린아이, 저쪽에선 널뛰는 처녀가 되었다가, 다른 데서는 베 짜는 아낙도 되며 가는 곳마다 신분을 바꿨다.
추억 속에서 노느라 어둑해져서야 숙소로 돌아왔다. ‘등용문’이란 상호를 적은 한지 초롱과 드문드문 돌이 박힌 토담을 대하니 안에서 누가 날 기다리는 것 같아 마음이 뜨거워진다. 조급하게 죽담을 지나 대청마루 옆 건넛방 문을 열었다. 황토색 장판이 반들반들 윤을 내고 있다. 반가움에 무릎을 대고 앉아서 얼굴을 숙인 채 두 손으로 아랫목까지 죽 밀어 본다. 콩물 먹은 장판이 고소하다.
다음날은 오락가락하는 비와 함께 강진군의 ‘다산촌 명가’에 들렸다. 정약용의 유배지이던 ‘다산 초당’ 입구의 온돌 황토 민박집이다. 대들보와 서까래를 비롯해 창틀과 기둥이 잘 갈무리된 고풍스러운 방이다. 도배를 하지 않았건만 황토 흙벽이 매끈하다. 누런 장판이 여닫이문의 얇은 창호와 두꺼운 벽을 이어주고 있다. 손바닥을 댄 채 방을 한 바퀴 빙 돌았더니 내 손에서 부드러운 진흙 내가 난다. 아득한 날의 고향 집 냄새다.
어릴적의 우리 집 방바닥은 황토가 두껍게 발라져 있었다. 단단하면서 반들반들한 장판은 윤이 나고 한여름에도 냉기가 올라와 시원했다. 얼굴을 대면 부드러운 황토 냄새가 났는데 밭에서 저녁 찬거리를 뽑아 돌아오는 어머니와 논을 갈고 들어오신 아버지에게서 나는 냄새이기도 했다.
기둥 사이를 건너지르는 굵직한 대들보가 듬직하다. 큰 황소도 쉽게 항복시키던 건장한 아버지를 보는 듯하다. 많은 가솔을 거느리느라 자상하지 못해 불만이었지만 계시는 것만으로도 우리를 편안하게 해주던 분이다.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여기서 푹 쉬라고 지켜주는 것 같아 마음 든든하다.
나란히 펼쳐진 서까래에서 무한한 마음을 주시던 엄마의 영상 하나가 애잔하게 기억된다. 교통사고를 당해 의식불명 상태로 있었던 때이다. 보름 만에 “엄마~!”하고 눈을 뜨자 와락 눈물로 나를 안던 그 가슴이 퍼렇게 멍들어 있었다. 깨어나지 못하는 자식이 안타까워 주먹으로 복장을 친 것이다. 나는 그 사랑의 힘으로 살아났다. 영사기의 필름처럼 되감을 수 있다면 황토집에서 살던 때처럼 토벽같이 찰진 마음을 두 분께 바치고 싶다.
서까래를 마주 보는 문을 열었다. 산바람이 솔 냄새를 몰고 온다. 덩달아 짜르르르 매미 소리도 질세라 쏟아져 들어왔다. 그것에 귀를 내주고 편하게 눈을 감았다. 몸이 나른하게 구들장 쪽으로 풀어지면서 매미 허물처럼 납작하게 붙었다. 쌓인 여독이 방바닥으로 스르르 녹아든다.
어릴 때 아래채의 할매 방은 마구간 옆이었는데 장판과 벽지 속은 붉은 황토가 발라져 있었다. 겨울에 밖에서 놀다 들어가며 기침이라도 하면 할매는 이불을 깔아 놓았다가 그 속에 들어가 누우라 했다. 따뜻한 아랫목의 바짝 마른 황토 냄새는 쇠죽 끓이는 장작 연기를 품고 있었다. 이불속으로 기어들어가 한숨 자고 나면 코가 뻥 뚫리며 몸이 가뿐해졌다. 절절 끓는 황토방에서 푹 자고 난 후의 개운함은 내 기억의 곳간에 고이 갈무리되어있다.
집에는 주인의 사상과 문화가 있다. 건물의 형태와 나뭇결, 가구 하나 화초 한 포기에도 의지와 정성이 스며든다. 거기서 머무는 하루하루가 시간 속에 저장되면서 가족에겐 의미있는 장소가 된다. 새로 건축하는 집을 모두 한옥으로 짓는 것은 불가능하다. 시골에서는 나지막한 기와집을 짓고 마당에 채전밭을 일구기도 하지만, 도시에는 아파트나 서양식 집, 퓨전 양옥집이 대부분이다.
한옥 호텔과 전통 민박집을 많이 지어서 여행할 때라도 잠시 묵으며 쉴 수 있으면 한다. 훤칠한 기와집에 들어서면 누렇고 거무스름한 흙 마당이 펼쳐지고 담장 밑에 작은 화단이 있으면 좋으리라. 그곳에는 얌전한 채송화가 여러 색을 자랑하고 고운 봉숭아꽃도 피어있다. 곁집 마당 햇빛 잘드는 장독대에는 크고 작은 단지들이 장을 듬뿍 담고 있어 구수한 냄새가 난다. 구석에는 작은 우물이 있고 석류나무 꽃이 제 모습을 보겠다고 물 위로 고개를 숙인다. 방 내부는 황토 흙을 발라 그대로 두거나 한지로 도배한다. 구들이 놓인 방바닥은 장판에 콩물을 여러 번 먹이고 많이 닦아서 고운 때를 입힌다.
가까이에 이런 전통 가옥이 있어 나비잠을 자며 심신을 풀 수 있으면 얼마나 좋으랴. 편히 쉬면서 풍습을 깨우쳐 경험하고 추억하다 보면 몸과 마음이 저절로 건강해질 것이다.
집은 버팀목이면서 공동체이다. 한옥은 외풍에 흔들리는 마음을 잡아줄 뿌리이고 그리움이다. 무엇보다 황토방은 아득한 전설의 빛깔이면서 빈틈없이 농농(濃濃)한 사랑의 색이다.
첫댓글 한편의 서정 시를 읽는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