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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 선생 58세(1784년 甲辰)
아버지 詠而齋公이 타계하다
2월 10일 아버지 영이재(詠而齋)께서 타계했다. 어머니가 타계한신 3년 후 막내 동생에 이어 아버지까지 잇달아 상을 당한 것이다. 영이재공은 장흥 위씨 문중을 위해 많은 업적을 남겼다. 첫째는 문중 조직인 문회(門會)를 만들었다. 이전까지는 일가 중심의 작은 모임만 있었다. 문회를 발족시키면서 전체를 아우르는 조직이 만들어 진 것이다. 둘째, 충렬공 묘소를 찾아 1741년부터 묘전에서 시제를 지냈다. 그리고 묘전에 비석을 건수했다. 셋째, 1759년에 위씨 최초의 족보인 기묘보(己卯譜)를 장천재에서 발행했다. 당시에는 족보가 있는 성씨와 없는 성씨의 사회적 신분이 크게 차이가 있었다. 그는 후손으로 하여금 행세를 하게 만들었다.
3월 6일 어머니 산소에 합장했다. 선생은 유택(幽宅)에 대해서 당시는 물론 지금도 납득하지 못할 파격적인 사상을 몸소 실천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묘소도 세대 순서로 매장한다는 관념을 가지고 있으나 선생은 이 같은 순서를 무시하고 산소를 썼던 것이다. 7월에 아버지의 마음가짐과 행동을 전편에서와 같이「思誠錄」후편에 상세히 기록했다. 그는 양친이 타계했지만 그때까지 자신의 탯줄이 남아 있었는데 이를 작은 주머니에 담아 지니고 다니며, 부모님의 은혜를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제낭명(臍囊銘)을 썼다. 겨울에 증조부(東寔) 때부터 서재로 사용했던 다산초당(茶山草堂)을 약간 옮겨 규모를 더 넓히는 공사에 착수했다.
원산
첫댓글 영이재공께서도 위문에 대해서는 존재공 못지않은 큰일을 하신것 같습니다.
한가지 궁금한 것은 기묘보의 표지에 "숭정3기묘"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숭정은 병자호란때 재임했던 명나라 마지막 황제의 연호인데, 족보의 발행연도와는 무관한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의미가 있는지요?위상복
조선은 청을 야만족으로 여겨 망한 명나라 연호를 사용합니다. 여기서 숭정은 그 연호입니다.
또 숭정 3이란 3번째 60년을 가리킵니다. 원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