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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의 덕목인 인의예지(仁義禮智)를 따와 동서남북 사대문 이름을 지은 서울한양도성 스탬프투어를 하고 있는데 돈의문에서 숙정문을 거쳐 혜화문까지 걸었고 오늘은 숭례문에서 남산을 넘어 광희문, 흥인지문으로 해서 혜화문까지 걸어 한양도성 순성길을 마무리 지으려고 한다. 시청역 8번 출구에서 숭례문으로 향한다. 그동안 세월의 부침이 많았던 숭례문은 개성의 남대문, 평양의 보통문과 함께 우리나라 성문을 대표하는 건축물이다. 현재 남아있는 성문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된 성문이다. 숭례문에서 끊어졌던 성곽이 힐튼호텔 앞에서 이어진다. 백범광장을 지나 얼마 전 조선신궁 터 앞에 발굴 복원된 ‘한양도성 유적전시관’을 지나 계단을 오른다. 그 옆에 일제강점기에 설치된 방공호가 있는데 이 방공호는 태평양 전쟁을 앞두고 일본이 경성(서울)에 1만 개의 방공호를 만들기로 하고 건설된 방공호의 일부다. 대표적으로 경희궁 옆에 있는 방공호와 삼청동 일대 주택가에서도 여러 개의 방공호가 발견되었다. 계단을 지긋이 올라 케이블카 정류장을 지나면 봉수대 터와 국사당 터인 남산팔각정 앞 N서울타워 광장 정상에 도착한다. 이곳 남산정상에서 순환버스를 이용해도 되고 성곽탐방로인 나무 데크 길로 내려가도 된다.
성곽탐방로를 따라 한참을 내려가면 국립중앙극장 앞을 지나게 된다. 횡단보도를 건너 한국자유총연맹 옆 반야트리 호텔 입구 도로를 따라 올라가 호텔 야외주차장 옆으로 진입해 골프연습장을 끼고 나무데크 길로 조금가면 서울숲, 버티고개 생태 통로와 내부 순성길과 외부 순성길로 갈라지는 성곽길을 만나게 된다. 성곽길을 따라 동국대학교 담장을 끼고 성곽길이 한참동안 이어진다. 동국대학교 입구와 신라호텔을 지나면서 장충체육관 앞에 도착하게 되는데 성곽도 이곳에서 끊긴다. 큰 도로를 건너 장충동과 신당동 경계인 신당동천주교 성당 골목길로 한참을 내려가 오른쪽 길로 접어들어 다시 왼쪽 길로 들어서 광희문교회를 바라보고 내려가면 광희문에 닿는다. 장충체육관 앞부터 광희문까지 가는 길에 순성길 안내판이 간간이 있기는 하지만 동네길이라 조금 난감할 수가 있다. 광희문에서 큰 도로를 두어 번 건너 동대문역사문화공원 역, 동대문역사문화공원과 이간수문을 지나 신 평화시장을 지나 흥인지문에 도착하면 되는데 흥인지문까지 가는 길 역시 난감하다.
흥인지문에서 동대문대로를 건너 동대문성곽공원으로 올라서면 성곽길이 다시 이어진다. 예전 이대병원이 있던 병원 건물은 개조돼 서울디자인연구소로 사용되고 있다. 이곳에서 성곽을 따라 계속가면 이화동벽화마을을 지나게 된다. 벽화마을을 지나면 바로 낙산하늘쉼터가 있고 그 옆이 낙산공원이다. 예전에 이곳 주변은 시민아파트가 있던 곳이다. 쉼터에서 암문을 통과해 낙산성곽 길을 따라 내려가면 삼선동 장수마을 옆을 지난다. 한때 이곳도 미술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마을 담장과 벽에 벽화를 그려놓자 구경꾼들이 몰려들어 몸살을 앓기도 했으나 지금은 대부분 지워지고 남아 있는 벽화가 몇 개 없다. 이어지던 낙산성곽 길을 내려서면 혜화문과 삼선동 사이의 도로로 성곽이 잠시 끊겼다가 서울과학고 앞에서 성곽이 다시 이어진다. 전에 혜화문까지 걸었기 때문에 한양도성 순성길 18.627km 전체를 오늘 모두 걸어 스탬프 투어를 마무리 짓는다. 한양도성 순성길은 전체를 한 번에 걸을 수는 없고 두어 번에 나눠서 걸어야 한다. 투어를 모두 끝내면 완주기념배지를 주는데 기념배지를 받으려고 걷는 사람은 없으리라 생각한다.
숭례문
조선왕조를 세운 지 3년째인 태조3년(1394)에 한양이 새 도읍으로 정해지고 여기에 새 도성이 건설되었다. 도성 건설계획에 따라 먼저 종묘와 사직을 건설하고 곧이어 경복궁을 건립하였으며, 수도 전체를 방어할 목적으로 도성 둘레 네 산에 성곽을 쌓았다. 성곽에는 동서남북에 각각 4개의 큰 문과 4개의 작은 문을 두어 도성 내외로 출입하기 편리하게 하였고, 정문인 남대문을 숭례문(崇禮門)이라 이름 지었다. 숭례문은 개성 남대문, 평양 보통문과 함께 우리나라 성문을 대표하는 건축물이며, 현재 남아있는 성문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된 성문이다.
태조5년(1396)에 시작하여 태조7년(1398)에 완성되었는데 세종30년(1448), 성종10년(1479), 고종5년(1868) 등 여러 차례에 걸친 수리를 통해 잘 보존되어. 1962년12월20일 국보 제1호로 지정되었다. 2008년2월10일의 방화로 문루2층이 불에 타 무너지는 등 큰 피해를 입었으나, 정밀 피해조사2년, 복구공사3년 등 모두 5년에 걸친 작업 끝에 원형에 가깝게 복구되었다.
조선시대의 숭례문
숭례문은 한양 도성 4대문의 하나로 도성 출입에 쓰인 성문인 동시에, 사신을 마중하고 배웅하는 나라의 관문 구실을 하였다. 또 중국에 사신을 보내거나 군사를 출병시킬 때 관료들이 숭례문 밖에서 전송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영조(1724~1776)가 숭례문 문루에서 죄인을 다스렸다거나, 정조(1724~1776)가 수원 현륭원에 행차할 때 숭례문 안팎에 척후와 복병을 배치하였다거나, 순조(1800~1833)가 능에서 장례를 치르고 돌아온 신주를 숭례문 밖에서 맞이했다거나 하는 기록 등을 통해 숭례문의 쓰임새가 매우 다양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성문과 주변에 군사를 배치하여 도성 내부의 왕궁과 백성을 파수(把守)한 것은 물론 통금 시간(2경~5경)에는 성문을 닫아 출입을 통제하였다. 성문을 여닫는 신호는 종이나 북을 쳐서 알렸는데 2경에 성문을 닫는 제도를 인정(人定), 5경에 성문을 여는 제도를 파루(罷漏)라 하였다. 일상적으로 성문을 여닫는 일 이외에 가뭄이 심해 기우제를 지내야할 경우에는 불의 방위인 남쪽의 숭례문을 닫고 물의 바위인 북쪽의 숙정문(숙청문)은 열어 시장을 옮기고 북을 치지 못하게 하는 등 음양오행사상에 따라 하늘에서 비를 내려주기를 기원하였다. 비가 내리면 다시 숭례문을 열고 옮긴 시장을 원래 상태를 되돌렸는데, 중종23년(1528) 가을 가뭄에는 여름과 달리 기우제만을 지냈다.
숭례문의 건축
숭례문은 화강암을 높이 쌓아 만든 홍예문(虹霓門:무지개 모양의 문)을 출입구로 삼아 도성 안팍으로 드나들 수 있게 했으며, 그 위쪽에 2층 목조 건물(문루:門樓)를 세웠다. 2층 문루로 오르내릴 수 있도록 동서 양쪽에 돌계단을 설치하였으며, 문루 둘레에 전통 벽돌 담장을 두르로 돌계단과 만나는 곳에 작은 문을 내어 문루 출입구로 삼았다. 문루 하층 내부 바닥가운데 1칸은 마루를 깔고 나머지는 모두 흙바닥으로 만들었다. 지붕은 층마다 모두 겹처마로 만들어졌으며, 추녀마루에는 잡상(雜象), 용마루 양쪽 끝에는 취두(鷲頭)라 불리는 장식용 기와를 각각 세워 지붕에 위엄을 더하였다.
근대의 숭례문
1899년 숭례문의 홍예 아래로 전차가 통과하게 되면서 도성 안팎의 출입을 통제하던 고유의 기능을 비롯하여 군사적, 의례적, 사상적 기능은 사라지게 되었다. 그 결과 숭례문을 비롯한 도성의 4대문은 도로의 확장에 따른 성곽의 철거, 도시의 확장에 따를 도성의 해체과장 등을 겪으면서 축대와 문루로만 이루어진 성문으로 남게 되었다. 일봉에 의한 강제병합 이후인 1910년에는 숭례문 주변에 원형 석축이 만들어지고 그 주위로 전찻길과 도로가 만들어졌다. 이후 일제 강점기 동안 숭례문은 물산공진회나 박람회의 장소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1930년대 후반부터는 홍예 내부로의 출입과 접근마저 금지되어 숭례문은 주변 도로로 둘러싸여진 섬처럼 고립되게 되었다.
남산공원
남산을 중심으로 조성된 서울에서 가장 큰 공원이다. 갖가지 수목들이 울창하게 들어차서 서울의 허파 노릇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일본인들이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주둔했던 것을 기념해서 1897년 도로를 내고 벚나무를 심은 것이 남산공원의 출발점이다. 남산은 크게 나눠 장충지구, 예장지구, 회현지구, 한남지구로 나뉜다. 장충지구에서는 대한제국 시절 일본에 맞서 싸우다 숨진 이들을 기리는 사당인 장충단, 홍수를 예방하기 위해 기둥에 눈금을 표시했던 15세기의 돌다리 수표교, 전통 활을 쏘는 석호정, 국립극장을 돌아 볼 수 있다. 예장지구와 회현지구에는 서울을 수도로 삼은 지 600년이 된 것을 기념해서 조성한 서울천년타임캡슐광장, 와룡묘, 안중근의사 기념관 한옥의 수려함과 근대 한국인의 주거문화를 볼 수 있는 남산골한옥마을이 있다. 한남지구는 야외식물과 습지식물을 가꾸는 야생화공원이 있다. 남산의 상징인 남산 중앙에 우뚝 솟은 23.7m높이의 첨탑인 N서울타워에 오르면 서울의 풍경을 한눈에 볼 수가 있으며, 맑은 날이면 인천 앞바다와 남한산성, 개성의 송악산까지 보인다.
끊어졌던 성곽이 힐튼호텔 앞에서 이어진다..
백범광장
백범 김구 선생 동상
안중근 선생 말씀
조신신궁 배전 터
한양도성 남산 구간은 1925년 일본의 식민통치를 상징하는 조선신궁 건립으로 크게 훼손되었다. 일제강점기 일제가 한양도성을 철거하고 그 위에 조선신궁을 세웠음이 발굴과정에서 확인 되었다. 광복이후 조선신궁이 없어진 자리에는 이승만 대통령 동상이 들어섰다가 4.19혁명으로 철거되고 남산식물원과 분수대가 들어섰다가 2006년 철거되었다.
한양도성 유적
한양도성은 조선 왕조 내내 지속적인 보수를 통해 유지되었다. 이 유적은 태조, 세종, 숙종 이후 쌓았던 부분들이 하나의 성벽을 이루고 있어 시기별 축성양식의 변화를 확인할 수 있다. 성벽을 쌓을 때 임시로 나무 기둥을 박았던 구멍의 흔적들도 함께 발굴되었다.
방공호
일제강점기에 설치된 이 방공호는 1941년 태평양 전쟁을 앞두고 일본은 경성(현재의 서울)에 1만 개의 방공호를 만들기로 하고 건설된 방공호의 일부이다. 입구계단을 내려가면 약 33제곱미터의 방과 긴 통로가 있다. 서울의 가장 대표적인 곳이 경희궁 옆에 있는 방공호와 삼청동 일대 주택가에서도 여러 개가 발견되었다.
목멱산 봉수대 터
목멱산(木覓山) 봉수대 터는 서울에 있다고 하여 경봉수(京烽燧)라고도 불렸는데 전국의 봉수가 집결되었던 곳이다. 전국 각지에서 오는 봉수는 남산에서 집결하였고, 남산 봉수대는 제1봉수대부터 제5봉수대까지 다섯 곳의 봉수대가 있었다. 제1봉수대는 함경도~강원도~양주 아차산, 제2봉수대는 경상도~충청도~광주 천림산, 제3봉수대는 평안도 강계~황해도~한성 무악 동봉, 제4봉수대는 평안도 의주~황해도 해안~한성 무악 서봉, 제5봉수대는 전라도~충청도~양천 개화산에 이르는 봉수를 받았다.
서울의 중심점
서울은 조선 태조 3년(1394) 한양 천도로 도읍지가 되어, 시대의 흐름에 따라 행정구역 확장이 이루어져 한양 도성 중심에서 한강의 남북을 아우르게 되었다. 따라서 서울의 지리적 중심점은 남산의 정상인 현 위치에 이르게 되었다. 이 표지는 우리나라의 지리적 위치를 결정을 위한 측량의 출발점인 대한민국 최초의 경위도 원점이었던 곳에 설치된 것으로, 국가기준점(서울25삼각점)과 지리적삼각점으로서 측지와 지적 측량에 쓰인다.
남산을 오르려면 교통편도 다양해서 회현지구(안중근의사 기념관, 남산도서관)은 02번버스, 한남지구(남산전시관, 야외식물원, 야생화공원)은 6호선 한강진역 이용, 장충지구(장충단공원, 국립극장)은 02번,03번,05번 버스, 예장지구(한옥마을, 서울애니메이션센터, 남산예술센터) 3,4호선 충무로역, 팔각정주변(서울N타워, 팔각정, 봉수대, 성곽)은 4호선 명동역 1번 출구에서 10분 걸어 케이블카를 이용하면 된다.
각자성석(글자를 새긴 성돌)
축성과 관련된 글자를 새긴 돌이라는 뜻이다. 천자문 순서로 표시된 축성구간 명칭, 축성 담당 지방, 공사관계자 이름과 석수의 이름을 새겼다. 한양도성에는 이처럼 다양한 시기와 유형의 각자성석이 280개 이상 전해지고 있다.
서울 한양도성
한양도성은 조선왕조(1392~1910)의 도읍지인 한성부의 경계를 표시하고 방어하기 위해 쌓았던 성곽이다. 1396년 조선태조 이성계는 전국에서 약 20만 명을 동원하여 한양을 둘러싼 4개의 산, 백악, 낙산(타락산), 남산(목면산), 인왕산의 능선과 그 사이 평지를 연결해 성을 쌓았다. 성의 전체 길이 약 18.6km의 대규모 성곽인 한양도성은 근대 도시와 과정에서 일부 훼손되었지만 세계적인 대도시 서울 안에서 본래의 가치와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현재 전체의 70%, 약 13km구간이 남아있다.
국립극장
국립극장 안에는 여러 개의 극장들이 있다. 해오름극장, 달오름극장, 별오름극장, 국민은행 청소년 하늘 극장이 있다. 그 중 해오름극장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1,563석의 객석의 대 극장으로 모든 장르의 공연이 가능한 종합 무대공간이다. 특히 국내 극장 가운데 객석 간격이 가장 넓어 쾌적한 공연을 관람할 수가 있다. 달오름극장은 427석의 중극장 규모로 국립예술단체들의 상설공연을 주로 올리며 특히 연극과 창극 전용극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별오름극장은 신진예술가들의 창작공연 활성화를 목적으로 100여석 규모이다. KB국민은행 청소년하늘극장은 732석의 객석을 가진 국내 최초의 돔형 공연장으로 지붕 일부가 자동으로 열리고 닫혀 자연 채광이 가능하고, 비 또는 눈이 오거나 추운 날씨에 관계없이 안정적인 공연을 할 수 있는 자연친화적인 극장이다.
장충체육관
광희문
한양도성의 동남쪽 문으로, 시구문(屍口門) 또는 수구문(水口門)이라고 불렸다. 일제강점기에 일부 무너지고 1960대에 퇴계로를 내면서 반쯤 헐렸던 것을 1975년 본래의 자리에서 남쪽으로 15m떨어진 이곳에 고쳐지었다.
동대문역사문화공원
공원 내에는 서울성곽과 이간수문(265m 8,030㎡)외에도 동대문역사관(1,313㎡), 동대문유구전시장(4,460㎡), 동대문운동장기념관(339㎡), 이벤트홀(2,058㎡), 디자인갤러리(400㎡) 등이 들어섰다. 특히 동대문운동장을 기념하기 위해 남긴 야간경기용 조명탑 2기와 성화대도 자리한다. 문화재발굴조사를 통해 서울성곽(이간수문, 치성)이 드러났으며, 야구장 및 축구장 부지에선 하도감 터를 비롯한 조선전기~후기 건물지유 구 44기와 조선백자와 분청사기 등 조선전기~일제강점기 때의 도자 류 등 주요 유물 1,000여 점이 출토되었다. 현재는 서울의 살아있는 역사를 만나는 역사문화 테마공원이자, 현대의 디자인과 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전시관 및 행사장이자,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이간수문
청계천의 오간수문 바로 남쪽에 도성의 성곽을 통과하는 수문이다. 이 물길은 도성 밖에서 청계천 본류와 합류한다. 2개의 홍예문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며, 오간수문의 형태를 축소한 것이다. 일제강점기 경성운동장이 들어서면서 자취를 감추었던 것을 복원하였다.
흥인지문
흥인지문은 태조7년(1398)에 세운 당시 서울 도성의 동쪽 문이다. 지금의 문은 고종6년(1869)에 다시 지은 것이다. 당시 서울 성곽에 4개의 대문과 4개의 소문을 세웠다. 동서남북의 사대문에는 각각 인(仁), 의(義), 예(禮), 지(智)의 글자를 넣어 이름을 지었는데, 그중 동쪽의 대문은 흥인문이라 하였다. 흥인지문은 서울의 숭례문과 더불어 가장 규모가 큰 성문이다. 성벽과 이어진 축대에 아치형의 통로를 내고, 그 위에 문루를 세워 성문을 만들었다. 서울의 성문 가운데 문루를 2층으로 만든 것은 숭례문과 흥인지문밖에 없다. 문루(궁문, 성문 따위의 바깥문 위에 지은 다락집)는 문을 지키는 장수가 머무는 곳으로 유사시에는 군사를 지휘하는 지휘소의 역할도 했다. 문루 바깥으로는 벽돌로 된 담장과 나무판으로 된 창문을 설치해서 적을 막는 데 유리하게 하였다. 흥인지문의 문루는 전체 구조는 간단하지만 장식이 많은19세기 건축물의 특징을 잘 반영한다. 또 흥인지문의 앞에 적을 막기 위한 반달 모양의 옹성(성문을 보호하고 성을 튼튼히 지키기 위하여 큰 성문 밖에 쌓은 작은 성)을 둘렀는데, 이는 서울 성문 가운데 유일하다.
동대문성곽공원
낙산(125m)
서울의 내사산의 하나로 풍수지리상 한양의 동쪽을 지키는 좌청룡에 해당하는 산이다. 지형이 낙타의 등처럼 생겨 낙타산 이라고도 했으며, 일대에 궁중에 우유를 보급하던 왕실 목장이 있어 타락산(駝酪山)이라고도 불렸다. 한양은 북쪽에 백악산(북악산)과 서쪽에 인왕산, 남쪽에 목면산(남산), 동쪽에 낙산이 둘러 싸여 있는 터를 말한다. 서울의 내 청룡(內靑龍)은 삼청터널 위로 혜화동을 거쳐 낙산까지 이어지는 능선이다. 드러누운 용처럼 뻗은 순성길을 따라 걸으면 발아래 서울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낙산공원
대학로와 동대문으로부터 이어지며 역사와 문화를 함께 즐길 수 있는 공원이다. 대학로에서 낙산공원에 올라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서울전망을 보고, 언덕 정상부위에 밀집한 주택과 벽화가 있는 이화동 벽화마을 등 흥인지문에서 한양도성 순성 길을 따라 올라가는 순성길은 성곽 을 따라 한적한 도심 속 숲길을 걸을 수 있다. 혜화문 건너편에서 올라가는 길은 외부성곽 벽면 전체를 보면서 걸을 수 있어 오랜 과거로의 여행 같은 느낌을 주고, 정상에 올라 북동방향의 서울전경을 볼 수도 있다.
삼선동 장수마을
삼선동이라는 동명은 조선 시대 혜화문 밖 동소문동, 동선동 일대의 평평한 들판을 ‘삼선평’이라고 칭한 데서 연유했다. 또 옥녀가 하늘에서 내려온 세 신선과 놀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기도 하다. 삼선교는 원래 북악에서 발원해 청계천과 합류하는 성북천에 놓인 다리 이름이다. 한 치의 땅도 아쉽던 시절, 이 천을 복개했지만 지금은 한성대입구역에서 청계천 합류 지점까지 천을 복원해 생태 하천의 모습을 갖추었다. 서울 성곽과 삼선공원 사이 구릉지에 있는 이 동네는 6.25 이후 높고 험한 이곳에 판자나 천막으로 집을 마련하고 길을 따라 축대를 쌓아 마을이 형성되었다. 한동안 재개발 예정 구역이 되면서 이 장수마을은 거의 폐허처럼 변했다. 그러다가 삼선공원 안의 삼군부 총무당 등 문화재 때문에 재개발사업 추진이 지지부진하다가 2013년 재개발이 해제되면서 점차 마을자치의 힘으로 마을을 다듬고 가꾸어서 아름답고 소박하고 정겨운 지금의 모습을 갖춘 것이다. 한때 미술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마을 담장과 벽에 벽화를 그려놓자 구경꾼들이 몰려들기도 했다. 지금은 대부분 지워지고 남아 있는 벽화가 몇 개 없다.
혜화문
한양도성의 동북쪽 문이다. 창건 당시에는 홍화문(弘化門)으로 불렸으나 중종6년(1511)에 혜화문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영조 때에는 없던 문루를 지어 올렸다. 문루는 1928년에, 홍예는 1938녀네 헐렸는데, 1994년에 본래보다 북쪽으로 옮긴 자레에 문루와 홍예를 새로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