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 역시 서예 카페에 올린 글입니다.
과거 제도가 우리나라에서는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요.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는 반성의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송의 과거시험은?
송은 유가의 학문을 詩作보다 우선하면서, 과거시험에 공정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공정성을 앞세우니 행권도 없어졌다.
그러나 공정성의 문제는 누가 主考官(시험을 주도하는 관리)이 되느냐에 따라서 선비들은 문장과 서법을 주고관이 좋아하는 방법을 따르지 않으면 합격할 확률이 매우 낮았다.
미불이 남긴 글이 핵심을 잘 말해준다.
“이종악이 주문(主文-글에 일을 주관하는 관리, 대개 홍문관 대제학이 한다)이 된지 오래 되니 사자(士子-선비)들이 모두 그의 書를 배웠다. 그의 비위를 맞추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이로서 오직 귀(貴-관료)의 書를 따라 했다. 송선헌공이 참정이 되었을 때 온 조정이 모두 그의 書를 배웠다. 그래서 그의 글씨를 조체(朝體)라 불렀다. 한충헌공 기(이름)는 안서(안진경의 글씨)를 좋아했다. 사(士)의 풍습이 안서를 배웠다. 그리고 채량이 귀(관리)가 되자 庶人이 모두 글의 글을 배웠다. 왕문공 안석이 재상이 되자 사속(士俗)이 모두 그의 글씨 체(體)를 배웠다.
이로서 古法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 글을 보면 과거시험도 공정성에 문제가 있다. 그뿐인가 오늘의 우리 사회가 공정성을 내세우면서 인재를 선발하는 여러 방법이 과연 공정할까.
고려의 과거제도도 볼까요
우리나라도 고려 4대 광종 때 중국인 쌍기의 권유로 과거제도를 시행했다.
과거제도를 시행한 이유는 지방 호족과 귀족의 세력을 견제하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나 호족 세력도 무시할 수 없어서 관리 임용 제도를 시험에 의한 과거제도와 추천에 의한 음서제도를 함께 시행했다.
과거제도에서도 합격 여부는 시험관의 손에 달렸다. 시험제도는 시문 작문을 보는 제술과와 유교 경전을 시험 보는 명경과가 있었다. 무과는 없었다.
과거 시험관(지공거)는 ‘좌주’이다.(종백이라고도 한다.) 시험관과 합격자의 관계는 좌주-문생의 관계로 아버지-아들 관계(부자관계) 만큼이나 절대적이었다. 평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제자 노릇을 했다. 이것은 인맥을 형성하고, 파벌을 형성하는 관계가 되었다.
과거제도가 호족-귀족 세력을 억제하는 방법으로 제도화 하였으나 새로운 문파를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시대는 고려시대만큼 절대적이지는 않았으나. 시험관-합격생의 관계는 돈독했다.
*과거 시럼은 일반적으로 명경과와 진사과로 나눕니다.
명경과는 공자, 맹자 등의 경전이 시험의 과목이고, 귀족이나 권세가의 자제들이 응사하였습니다.
진사과는 '시 짓기'의 시험으로, 문인사대부(속칭 선비들)들이 응시하였습니다.
첫댓글 옛부터 파당은 심화되어 있었군요...
세력의 견제를 위한 과거제도가 새로운 세력을 만들다니요...
인간세상의 일은 알듯 모를듯 합니다. 좋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
과거시험에 합격을 하면
집안의 명예가 올라가기에 부모들은 자식을 서당으로 보내
유명한 선생 아래서 경전을
공부하도록 했다고 생각합니다.
시험관과 합격생의 관계를 상상해 볼 때
파벌이 생겨날 수밖에 없는 이치를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공부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