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상반야(實相般若)>
‘반야(般若)’라는 빠알리어로 '묘한 지혜'라는 의미의 ‘빤냐(panna)’라고 한다. 반야는 바로 빠알리어 ‘빤냐’의
음역어로서, 그 발음만 따서 옮긴 것이다. 이는 ‘마하’와 같이 그 의미가 퇴색됨을 우려해 따로 번역하지 않고
‘반야’라고 쓰고 있다.
그렇다면, ‘반야’ 또한 우리 범부의 사량(思量)으로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단어일 것이다. 반야를 굳이 번역한다면 ‘지혜(智慧)’라고 옮길 수 있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단순한 지혜가 아니라, 최고의 지혜, 즉 ‘깨달음을 이루신 부처님의 밝은 지혜’를 의미한다.
인간이 진실한 생명을 깨달았을 때 나타나는 근원적인 지혜, 통찰(洞察)을 반야라 한다. 보통 말하는 판단능력인 분별지(分別智, vijnana)와 구별하기 위해 반야라는 음역을 그대로 사용한다.
‘지혜(智慧)’와 비슷한 단어로, ‘지식(知識)’이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지식’은 ‘지혜’와는 근본적으로 큰 차이가 있다. 우리들이 계산하고, 암기하고, 생각하고, 분별하는 능력이 극대화된 것이 ‘지식’이라 한다면, ‘지혜’는 이러한 범부중생의 사량분별(思量分別)을 초월하는 것이다.
반야의 지혜는 머리를 굴려 생각하고 분별하는 일련의 행위에 대해서 오히려 버리고 비울 것을 강조한다. 그래서 지식을 알음알이라 해서 선지식들이 ‘잔머리 굴리지 말라’고 경책하는 것이다. 사찰의 주련에 곧잘 ‘막존지해
(莫存知解)’라고 쓴 것을 보게 되는데, 이 역시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는 말이다. 이때 알음알이가 지식이다.
불경에서 반야지혜라고 하는 것은 보통의 총명함과 같은 것이 결코 아니다. 이는 도(道)를 알고, 도를 증득해 깨닫고, 생사번뇌를 해탈하고, 득도해 성불하는 지혜를 가리키며, 도의 본체(本體)에 있어서의 근본적인 지혜에 속한다.
‘근본적인 지혜’란 바로 일반적인 총명함과 보통의 지혜를 초월해 생명의 본원과 본성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지혜가 반야이다. 따라서 '지혜"라는 두 글자는 결코 반야가 내포하고 있는 완전한 의미를 나타내지 못한다.
대승 불법은 반야를 문자반야(文字般若), 관조반야(觀照般若), 실상반야(實相般若)의 세 가지로 분류한다.
대체로 언어문자를 가지고 설명한 반야의 이치를 문자반야라고 칭한다. 본질적으로 말하면 반야는 문자의 상(相)을 떠난 것이다. 그러나 만약 언어문자를 가지고 설명하지 않으면 근기가 부족한 일반 수행자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도리를 이해하기 매우 어렵다. 일체의 모든 경전이 문자반야에 해당하므로 이것이 직접적으로 반야는 아니지만, 반야지혜를 이끌어 내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방편이 되는 것이므로 반야라고 한다. 따라서 문자반야는 부처님과 범부를 연결하는 매개체라 하겠다.
다음 관조반야는 문자반야로 깨달은 지혜에 의해 선정(禪定) 수행을 하는 가운데 감지(感知)하고 관찰해 가는 것을 일컫는다. 관조반야는 실천 수행하는 가운데 진리를 관찰하는 지혜로, 이것은 일체의 현상계를 바로 비추어보는 정견(正見)하는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선정 가운데 이러한 관찰을 수년 혹은 수십 년을 지속하다가 보면 마지막에 결국 궁극을 성취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관조반야를 오랜 기간 수행하면 홀연히 불법의 실상을 증득해 깨닫게 되는 경지를 실상반야라고 한다.
‘실상(實相)’은 법의 진실한 모습, 존재의 참다운 이치, "있는 그대로"란 뜻이다. 주관이나 편견에 물들지 않고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말한다. 본래성품의 진실한 모양, 허망하지 않고 변하지 않는 체성, 진리의 참모양이라는 말인데, 무상(無相)ㆍ공(空)과 같은 개념이다. ‘존재의 본질’ 혹은 ‘존재의 본성’ 등 다양한 의미를 함축하면서, 진실 자체의 모습이라는 기본적 의미로부터 평등의 실재, 불변의 이치, 모든 존재의 이치가 되는 성질을 가리키는 말이다.
또한 실상(實相)이란 세상의 모든 존재(만유)는 연기(緣起)로 나타난 현상일 뿐 실재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러한 것임을 바로 아는 것이 실상이다.
실상을 안다고 하는 말은 3법인, 즉
①제행무상(諸行無常) ②제법무아(諸法無我) ③열반적정(涅槃寂靜)을 안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금강경>에서 말했다. “모든 상은 다 허망한 것임(凡所有相 皆是虛妄)”을 알아라. 그리고 무슨 상을 보든지 그것이 ‘참이 아님(非相)’을 아는 그것이 곧 부처님을 보게 되는 것(則見如來)이라고 했으니까, ‘실상을 안다’고 하는 것은 견여래(則見如來, 여래를 봄), 즉 참나(부처님)를 봤음을 의미하고, 실상의 법을 보면 부처님을 보는 것이나 다름없고, 이것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증득을 의미한다. 그것이 곧 실상반야를 이루는 것이다.
그리하여 ‘실상반야(實相般若)’는 제법(諸法)의 실상, 즉 있는 그대로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편견 없이 ― 고정된 바 없이 비춰 보는 지혜를 말한다. ‘제법실상’이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 세계의 모습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위와 같은 삼종 반야는 부처님의 지혜인 깨달음의 실상반야에 이르기 위한 세 가지 단계라고도 할 수 있는데, 흔히 우리가 부처님의 지혜라고 일컫는 것은 진리의 당체(當體)인 실상반야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실상반야는 일체종지(一切種智)를 의미하고, 실상반야의 성취함은 곧 십바라밀(十波羅蜜)을 완성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실상반야에 이르기 위해서, 즉 실상반야를 체득하기 위해서 우리는 단계를 밟아야 한다. 우선 우리는 부처님의 말씀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경전을 읽고 공부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방편반야, 즉 문자반야이다.
이렇게 방편반야로 공부를 한 뒤에는 반드시 실천이 뒤따라야 한다. 그 실천이 바로 관조반야이다. 관조반야란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편견, 고정관념 없이, 있는 그대로 비추어 보는 실천 수행법이다. 이렇게 방편반야로 부처님의 법을 이해하고, 그 후 관조반야를 실천했을 때 나타나는 진리의 실상이 바로 실상반야이다.
‘반야’의 힘은 참으로 위대하다. 그 힘은 평등, 절대, 무념(無念), 무분별(無分別), 비움의 경지일 뿐 아니라, 반드시 상대의 차별 현상을 관조(觀照)해 그런 차별상을 극복하게 하는 중생 교화의 능력을 갖고 있다. 단순히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의 현명함이나 지식이 높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참모습에 대한 ‘눈뜸’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반야’의 성취는 인생과 우주의 참다운 실상을 깨닫는 일이며,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이며, 행복을
성취하는 길이고, 사회의 제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이며, 해탈을 성취하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한 것이다.
<대품반야경>의 서두에서 부처님의 첫마디가, “보살마하살이 존재의 실상을 여실히 보는 지혜를 얻어 일체사물의 진면목을 알려고 하면 반야바라밀을 닦아야 한다.”는 것으로 시작한다. 육바라밀을 실천하려면, 그리고 부처님의 복전에 씨앗을 뿌리려고 하면, 모든 부처님으로부터 칭찬 받고자 하면, 부처님의 눈이나 법의 눈을 얻고자
하면, 무슨 일이든지 좋은 결과를 얻고자 하면, 반드시 반야바라밀을 닦아야 한다고 설했다.
여기서 실상(實相)이란 말을 좀 더 천착해보자.
실제로 우리들 눈에 보이는 겉모습, 즉 몸이 실상인가. 아니면 눈에 보이는 겉모습을 깡그리 걷어내고 그 겉모습 속에 웅크리고 있는 속내, 즉 마음이 실상인가. 그도 아니면 겉모습과 속내를 서로 다독이며 함께 끌고 나아가게 하는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이 실상인가.
나의 실상은 무엇인가? 지금 살아 꿈틀거리는 나의 몸이 실상인가. 아니면 나도 함부로 어찌하지 못하는, 주어진 환경에 따라 이리저리 마구 흔들리는 내 마음이 곧 나의 실상인가. 그도 아니면 몸과 마음을 모두 떠나 대자연의 순리에 따라 그저 그렇게 물처럼 흘러가게 놔두는 것이 실상이란 말인가.
불교에서는 모든 존재의 참된 속성을 실상이라고 했다. 참된 속성, 대체 그 어떤 것을 참된 속성이라고 말하는 것일까? 이 세상살이의 모든 미련을 훌훌 벗어던지고 깊은 산속에 들어가 수도를 통해 이 세상의 그 어떤 진리를 깨치고 나면 나의 참된 속성이란 것이 빛과 그림자처럼 서로 환하게 드러나는 것일까?” ― 이종찬
어디 이 답을 생각해보자.
모든 존재의 언어나 마음으로 분별할 수 없는 진실 자체의 모습, 그 자체는 진실하고 상주하므로
진여(眞如)라 하고, 그렇게 진실하고 상주하는 것이 모든 존재의 진실한 모습이므로 실상이라고 한다.
실상(實相)은 허망하지 않고 변하지 않는 체성(體性), 진리의 참모양이라는 말이다. 결국 불법이란
사실을 사실대로 아는 것이라고 하겠다. 즉, 실상을 바로 아는 것이 실상반야고, 그것이 곧 불법이다.
따라서 <법화경>에서는, 실상이라 함은 <묘법연화경>의 이명(異名)이요, 제법이라 함은 <묘법연화경>을 말하는 것이다. 실상이라 함은 곧 부처님의 상(相)이니, 경에 말씀하시기를 “묘법(妙法)이 실상이니 묘법이 곧 부처님이시다. 실상을 보는 자는 곧 부처님을 보는 자이다. <묘법연화경>이 실상이요, 실상이 <묘법연화경>이니,
<묘법연화경>을 받아 지닌 자 곧 부처님 몸을 받아 지닌 자가 아니겠느냐.”라고 했다.
그리고 유마힐 거사도 “자기 몸의 실상을 보는 것이 곧 부처님 상을 보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리하여 실상반야(實相般若)란 제법(일체존재)이 모두 공(空)임을 알고 모든 미망으로 부터 떠나게 하는 지혜를 말한다. 실상반야란 진리의 당체 ― 공(空)을 이야기하는 건데, 말로써는 설명할 수 없고 스스로 취득해야 알 수
있는 지혜이다.
이것은 모든 것의 본체(本體)이고 마음의 이체(理體)인데, 중생은 모든 것을 이 본체에 의지하고 있으면서도
자기생각, 망상, 아집에 덮여서 이 실상반야가 있는 줄 모르고 있다.
이 세계는 나와 너, 혹은 ‘그’라는 사실들, ― 즉 색(色)들이 서로 관계를 맺으며 존재하는 연기(緣起)의 세계이다. 그리하여 색즉시공(色卽是空)의 세계에 대한 똑바른 깨달음이 실상반야이다.
여기에는 보는 자와 보이는 세계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보는 자가 보이는 현실세계, 우주와 하나가 돼버릴 때 이것이 바로 실상반야이다. 이러한 실상반야를 우리가 올바로 깨달아 바르게 비추어 보게 되면, 이것이 바로 관조반야(觀照般若)이다. 우리가 흔히 일체의 모든 존재에 불성이 있고, 법신(法身) 부처님이 두루 변만(遍滿)해 계신다고 할 때, 바로 이것은 실상반야의 모습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실상반야는 일체 허망한 상을 여읜 우주의 본상(本相)이고, 실성(實性)이고, 우리가 증득해야 할 이체(理體)이다. 부처님이 깨달으신 우주 삼라만상의 참모습도 이 실상이었다. 그 참모습에 대한 깨달음이 실상반야이다. 사람들이 실상반야를 얻지 못하는 것은 이미 여러 가지 사고(思考)의 틀에 얽매어 있기 때문이다. 고정관념에 얽매이고, 관습에 얽매이고, 환경의 지배를 받고, 언어문자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즉, 관조반야는 정밀한 관찰을 통해 얻는 지혜라면, 실상반야는 직관(直觀)에 해당한다.
실상반야란 만법의 실제 모습은 텅 비어 있다는 것을 깨우치는 것이다. 텅 비어 있으니 안과 밖이 없고 우주에 상즉 해 있으니 더럽힐 수도 없다. 물들 것도 없는 것, 이것이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근본마음이라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무아(無我)'라고 말씀하셨을 때 정말로 '나'라는 것이 없다고 한다면 '단멸론'에 빠지게 되는 것이니 이것도 외도요, '나'라고 하는 실체가 있다고 하면 '유신견(有身見)'에 빠지는 것이니 이것도 외도인 것이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본래 '나'라고 할 실체가 따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닦아내어 버릴 것 또한 없다는 것이다. 닦아내어 버릴 것이 있다면, 그것은 번뇌의 실체를 인정하는 것이니, 제법무아에 위배되는 것이며, 만법이 공하다는 가르침에 위배되는 것이다. 그러니 번뇌를 닦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번뇌 또한 공한 것으로 마음 따라 생겨났다가 마음 따라 없어진다는 그림자 같은 것이다. 이것을 깨우치는 것이 바로 실상반야(實相般若)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