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동포 학자 양재윤 박사의
청와대 근무 18년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직필 증언
"박정희 대통령 탄신 107 주년 기념행사에 강연하기 위해 가지고 갔던 원고입니다
못나오셔서 원고를 보내드립니다"
(받은자 김회창)
라인강의 기적을
한강의 기적으로
제가 오늘 여기 나온 것은 서독대사를 초빙해서 우리 경제개발 초기에 차관을 제공해 주고, 2차대전으로 페허가 된 독일을 다시 일으켜 부강한 나라로 만든 천금같은 경험과 지혜를 준 독일정부와 국민들에게 감사를 드리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사정으로 독일대사는 못나오셨지만 우리나라는 5천년 역사 이래 처음으로 가장 풍요롭고, 국민소득 3만5천불을 넘는 세계 10대에 들어가는 부강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오늘 박정희 대동령이 탄생한지 107주년이 되는 성군의 생신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날에
하늘이 내리신 지도자 박정희 대통령은 어떻게 5천년동안이나 주변 강대국들로부터 억압받고 수탈당해서 세계에서 가장 못살고 있는 가난한 나라를 이렇게 빠르게 부강한 선진국으로 만드셨는지
수많은 어려움을 어떻게 슬기롭게 국민의 의지를 하나로 모아 성공시켰는지
그런 우리나라를 도와준 나라는 또 어떤 나라였는지
그분의 애국 애족의 장신과 타고난 천재적인 지혜와 그리고 영웅적인 지도력을 여러분들과 함께 다시 한번 기억하는 기회를 가지고자 합니다.
저는 1961년 5.16군사혁명정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비서실에 행정관으로 보직을 받고 공직생활을 처음 시작해서 18년동안 그분을 모시고 공직생활을 했습니다.
당시 최고회의는 혁명주최인 군장교들이 완전무장을 하고 살기가 등등 했습니다
그속에 민간인은 나혼자였고 혁명군 장교들은 국민복을 입은 나를 보는 눈빛은 예사롭지가 않았습니다
박정희 장군은 어떻게 군사혁명을 일으킬 생각을 했고 목적이 무었이었는지 혁명과업을 어떻게 성공시켰는지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어려웠던일들을 그분을 18년동안 모시고 공직생활을 했던 제가 옆에서 보고 느꼈던 세상에 잘알려지지 않은 어려웠던 일들을 다시 기억하면서 오늘 그분에 대한 애국심과 애민정신을 같이 추모하고자 합니다
5.16 군사혁명의 배경
1961년 5.16 군사혁명이 일어나기 전에는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2번째로 제일 가난하고 못사는 나라였습니다
국민들은 먹을 것이 없어 들판에 나가 나물을 캐고 뒷동산에 올라가 소나무껍질을 벗겨다 삶아먹고 그야말로 초근목피로 겨우 보릿고개를 넘겼습니다
청년들은 일자리가 없어 대학을 나와도 취직할 곳이 업었습니다
와중에 북한 괴뢰집단은 호시탐탐 무력남침을 획책하고 있을 때
우리는 돈이 없어 적을 막을수 있는 군장비도 변변치 않았고 나라는 데모천국이 되어 혼난에 빠져 있었고 군인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군장교들의 정군운동
이를 본 육군사관학교 8기생 엘리트 라고 하는 김종필, 김형욱, 오치성, 길재호, 옥창호 등 11명이 대표가 되어 당시 현석호 국방부장관에게 부패한 정군의 계획을 건의하려고 갔다가 면담을 거절당했습니다
이에 실망을 한 대표장교들은 평화적인 방법이 아닌 부패한 민주당 정권 자체를 제거하는 거국적인 무력혁명을 하기로 결정한 것이 5.16군사혁명의 기초가 된 것입니다
혁명거사계획을 4번이나 변경
이들은 혁명위원회를 조직하고 박정희 소장을 주군으로 모셨습니다
그리고 국내외의 경제, 사회, 문화, 특히 농촌경재문제의 특수성 등에 관한 방대한 자료수집과 민족중흥을 이루기 위한 새로운 정부형태를 준비 했습니다
그리하여 당시 부산군수기지 사령관 박정희 소장을 주측으로 민족의 영원한 장래를 위해 1960년 5월 8일 군사혁명을 하기로 거사일을 정했다가 4.19 학생혁명으로 거사가 중지되었습니다
해병대 단독 거사를 계획
4.19 학생혁명으로 거사가 중지된 후에 해병대 내에서도 군 인사에 불만을 가진 해병장교들이 제1여단장 김윤근 준장을 중심으로 해병대창설 기념일인 4월 15일 해병대 단독으로 거사를 하기로 정했습니다
그러나 박정희장군의 혁명계획이 진행되고 있음을 안 후 해병대 자체계획은 또 불발이 되었습니다
5.16 한국 군사혁명
그후도 박정희 소장은 혁명 거사일을 3번이나 연기한 끝에 드디어 1961년 5월 12일 비장한 결심을 하게 됩니다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올라와 제5사단장 채명신 준장과 혁명동지회 김종필, 김형욱, 오치성, 길재호, 옥창호 등 11명을 만나 거사일을 5월 16일 새벽3시로 확정을 합니다
이렇게 군에서 혁명거사일을 4번이나 변경하는 동안 장면 정부나 군수뇌부에는 그 기밀이 많이 알려 있었지만 드디어 올 것이 오는구나 하고 제지할 의지도 힘도 없었고 국가나 국민들은 당연한 일로 군사혁명을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혁명군은 드디어 5월 16일 새벽 3시에 영등포 문래동에 있는 제6관구사령부에서 출발해서 서울로 한강다리를 건넜습니다
마침내 혁명군은 피한방울 흘리지 않고 무혈로 국가 3권을 장악한뒤 육군참모총장 장도영을 위원장으로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했습니다
이것이 혁명정부 국가재건최고회의 입니다
그리고 혁명제1성에서
“우리가 궐기한 것은 부패하고 무능한 현정권과 기성 정치인들에게 더 이상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맡겨둘 수 없다고 단정하고 백척간두에서 방황하는 조국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궐기한 것이다” 고 발표를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는다.
UN 헌장을 준수 한다
지금까지 사회의 부패와 구악을 일소해서 새로운 기풍을 진작한다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 한다“
이렇게 혁명공약을 발표했습니다
이와같이 혁명정부의 야심찬 계획은 도탄에 빠진 국민들에게 하늘같은 희망을 불어넣개 되었습니다
국가 3권을 장악하고 혁명에 성공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 장군은 맨 먼저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국민을 구하고 경제개발계획의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 우리와 가장 가깝다고 생각했던 John F. Kennedy 미국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미국을 방문했습니다
그러나 Kennedy 미국 대통령은 헌정을 중단시키고 군인들이 혁명을 일으켜 정권을 받은 박정희 의장을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원조로 먹고사는 나라에 무슨 돈을 꿔줄수 있는가 하고 박정희 의장 일행을 만나주지도 않고 문전박대를 했습니다
미국대통령도 만나지 못한 박정희 의장 일행은 Hotel에 돌아와 가난한 나라의 설움에 복받쳐 서로 얼사안고 눈물을 흘리며 돌아왔다고 합니다
가장 믿었던 미국에 가서 문전박대를 받은 박정희 의장은 가난한 나라의 설움에 목이 메었다.
고심 끝에 우리 민족역사에 처음으로 서독 상업차관
라인강의 기적을 일으켜 신흥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있는 서독을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처럼 분단국가의 아픔과 패전의 상처를 딛고 당당하게 일어나 라인강의 기적을 이룬 서독을 보면서 같은 입장에 있는 우리의 사정을 호소해 보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전쟁의 잿더미에서 서독처럼 한강의 기적을 이뤄보자 라는 각오를 하게 됩니다
혁명정부는 61년 11월 말 정래혁 상공부장관을 주축으로 차관 교섭단을 구성해서 서독으로 보내기로 결정을 합니다
그런데 당시 독일어 통역을 할사람이 없었습니다.
알아본 결과 이승만 대통령시절 국비유학생으로 서독 뉘른베르크 에를랑켄대학에서 경제학박사 학위를 받고 중앙대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백영훈 박사와 연락이 되어 사절단의 통역관으로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사절단이 서독에 도착은 했으나 듣도 보도 못한 가난한 나라에서 차관교섭단이 왔다고 누구도 만나주려고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를 옆에서 본 백영훈 박사는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2년 후에 서독 총리가 됨)재무장관과 같은대학을 나온 자신의 대학은사를 찾아가서 장관을 좀 만나게 해달라고 눈물로 호소를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61년 12월 11일 우리 사절단은 마침내 루트거베스트리크 재무차관을 만나게 되었고, 그 다음날 에르하르트 재무장관을 만나서 마침내 1억 5천만 마르크(약 3,000만 Dollars) 상업차관을 얻는데 합의를 했습니다
사절단은 서로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런데 또 문제가 생겼습니다.
은행의 지급보증이 있어야 하는데 국가신인도가 없는 나라에 지급보증을 해주겠다고 하는 나라는 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