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 수필 '상재(上梓)), 그 불행한 시제(時制) / 이원우
내가 시원찮은 책, 즉 拙著를 내 놓고 기고만장해 가지고 우쫄댄다면? 그게 바로 꼴불견이다. 늘 그래왔으니, 몇 번째인가를 밝힌다면 오히려 내 정서에 부정(否定)의 항체만 생긴다.
거기서 겁도 없이 한 걸음 나아가기 예사라, 존경하는 어른께 올리면서 ㅇㅇㅇ님 혜존(惠存)이라 썼다. 혜존이 한자니 저자인 내 이름 뒤에는 맞서는 말로 '근정(謹呈)'이라 스무 다섯 획을 보태고, 제법 유식한 척했다. 그게 뒤죽박죽 엉망진창이란 걸 근래에 알았으니, 낭패로다. 어디에 가서 얼굴을 바로 들 것인가?
내가 문제를 끄집어냈으니 내가 설명을 하자.
'혜존'이란 말은 은혜 惠/ 있을 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존(存)이 뒤에 붙는 말은 '보존(保存)'이 대표적이겠다. 그런데 이 혜존이 일본말 찌꺼기라는 것이다. 그 뜻을 밝히면 아연실색할 정도다.
내가 은혜롭게 쓴 이 책을 잘 보존하시오.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보니 아직은 내 정신이 완전히 간 건 아닌 모양이다. 휴우 안도의 숨이 나온다.
그제 어디 함부로 말해도 되는 자리에서 나는 또 입을 벌였다. 그리고 지꺼렸다. 상대편이 자기보다 수상(手上)이거나 동년배일 경우에는 '님'이라 호칭하는 게 대단한 결례라고. 그럴 경우 ㅇ ㅇㅇ 님 혜존이라면 망발 중의 망발이라고 우겨댔다. 예의 그 짝짓기(?)를 강조하여 이왕 저질러진 일이라면 거기에도 '謹呈'이 어울릴 거라는 강변(强辯)을 덧붙였으니 낭패로다. '드림'이라는 말은 사라져야 한다는 지론으로 뱉은 건데 '呈'이 드릴 정 자이라는 걸 뒤늦게 알았기 때문이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더니, 어쨌든 피난처는 '께'와 '올림'이다. 나는 다시 무릎을 쳤다. 글을 잘썼든 못썼든 상관없다. 수하라면 'ㅇㅇㅇ님에게/ 저자 이원우'면 족할 테고.
오늘은 하릴없는 사람처럼 문인 협회와 관계되는 홈 페이지를 여기저기 들락날락한다. 부산 문인 협회가 모태인지 모르지만, 대개가 그 형태를 취하고 있다. 뭐 대동소이하다고나 할까? 그런데 불만이 하나 있다. 자기가 쓴 글을 자기가 클릭하면 조회수가 따라서 올라가는 것, 이건 유혹(?)의 한 원인이다. 문협 회원이 1천 명 남짓인데, 수백 명이 그 글을 읽은 것 같은 결과쯤 예사롭게 나타난다. 요컨대 허수다. 반면 <부산 수필 문인 협회>나 <가톨릭 문인 협회' 같은 경우는 어림없다. 자기 것은 자기가 손대 봐야 헛일이다. 그래서 신뢰감이 가는 것이다. <천주교 부산 교구 노인 대학 연합회>도 마찬가지다.
어쨌거나 신간(新刊) 소개가 많이 나온다. 봇물처럼 터진다. 나 같은 어정뜨기가 한꺼번에 두 권의 졸저 이름을 새겨 넣었으니 두말해 무엇하랴.
우리가 언제부터 '상재(上梓)'라는 말을 써 왔는지 모르지만, 이 시원찮은 말이 판을 친다. 그냥 출간이라면 될 텐데 왜 위(上)에서 한 자, 가래나무(梓)에서 나머지를 빌어오는지 이해가 안 된다. 나는? 다행히 그 근처에도 안 가 봤다. 솔직히 말해 뜻을 잘 몰라서였을 것이다.
내친김에 이것 저것 뒤져 보자.
가래나무/ 가래나뭇과의 낙엽 활엽 교목(8미터 이상 높이 자라고 위쪽에서 가지가 퍼지는 나무로 큰키나무라고도 함)
상재/ 출판하기 위하여 인쇄에 돌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상재'는 책을 인쇄하고 있는 것을 뜻함인 것이다. 그걸 뭐 대단한 일이라고 '출간' 혹은 '출판'을 제치고 앞세우는가? 더욱 충격적인 것을 적을까/ 말까 망설이다가 나는 전자를 택한다.
<강희자전(康熙字典)>이라면, 중국 최대의 자전 즉 옥편이다. 49,030자 수록! 42권 12집, 239부로 이루어졌다나? 거기에서의 '상재'는 사람을 놀라 자빠지게 만든다.
俗謂上文書於板曰梓
풀이하면 이렇단다. 가래나무는 재질이 굳고 좋아 글을 새기는 판목으로 쓰여져 왔다. 그래서 본래 가래나무에 글자를 새기는 걸 '상재'라 했는데,나중에는 '활자 인쇄로 도서 출판하는 것'까지 포함하게 되었다.
아리송하다. 오직 '가래나무와 글자 새김'만 주장해 온 나 자신이 민망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도서 출판'까지 외연이 확대되었다. 나무에 글자를 새기는 것만 아니라, 보라, 찍어내는 것까지 포함될 수도 있다지 않는가?
그런데 단서가 있는 것이다. 하늘이 무너져고 솟아날 구멍이 있다더니 말이다. <강희 자전>에서는 '상재'를 '출간'의 속어(통속적으로 쓰는 저속한 말)로 보고 있다 했으니. 길을 두고 메로 간다는 자체가 현명하지 못한 선택이다. 이 경우 '출간'은 길이요, '상재'는 메다.
그리고 말이다. 상재는 출간의 전 단계지, 결코 출간 자체가 아님은 심하게 표현해서 쉬 짐작이 간다. 인쇄되어 고고의 소리를 낸 지 몇 년이나 지난 책과 저자에다가 상재라니 개발에 편자다. 기어이 '출간'이라 우기기 망설여진다면, 이는 현재 진행형인 그 책과 저자는 시제의 모순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혜존이니 근정이니, 님과 상재(시제)/ 출간 모두가 혼란을 부추기는 요인이다. 그들과 더불어 사는 우리가 불행하다고나 할까?
이원우
1984년 여름호 <한국 수필> 천료/ 전 초등학교장/ 유네스코 부산 협회 부회장 역임/ 북구 분화 예술인 협회장 및 북구 문인 협회장 역임/ 학교 재직 중 토요일 오후마다 노인 대학 18년 운영/ 지은책 16권/ 자랑스런 부신 시민상(봉사 본상) 및 KNN 부산 방송 문화 대상/ 황조근정 훈장/ 허균 문학상 수필 본상, 쿠알라룸푸르 한인회장 감사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