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마태복음 6장 9절~13절: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누가복음 11장 2절~4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
누가복음 버전은 마태복음에 비해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구절과 맨 마지막의 최종 송영(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부분이 생략되어 대단히 콤팩트합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의 전문 안에 누가복음의 핵심 사상이 고스란히 포함되어 있으므로, 우리는 마태복음의 주기도문 전문을 깊이 분석함으로써 주기도문 전체를 온전히 이해하는 신학적 성취를 이룰 수 있습니다. 개역한글판과 비교해 볼 때 '마시고'가 '마시옵고'로, '주시기를'이 '주시옵고'로 수사적 표현이 약간 다듬어졌을 뿐 그 안에 담긴 복음의 본질은 완벽하게 일치합니다.
우리가 이스라엘 예루살렘 성지를 방문해 보면, 감람산(올리브산) 정상에서 기드론 골짜기로 웅장하게 내려오다 가 길가 우측에 세워진 거룩한 문 하나를 만나게 됩니다. 그 문을 열고 안으로 걸어 들어가면, 기독교 역사 유적인 유명한 '주기도문 교회(The Church of the Pater Noster)'가 장엄하게 서 있습니다. 교회의 들어가는 입구 문 정면에는 라틴어로 '파테르 노스테르(Pater Noster)'라는 오래된 문구가 새겨져 있습니다.
파테르(Pater)는 아버지를 뜻하고 노스테르(Noster)는 우리의(Our)를 뜻하는 라틴어로서, 곧 '우리 아버지'라는 장엄한 선포입니다. 전 세계의 거의 모든 신학자와 교회사학자들은 라틴어 성경 주기도문의 첫 두 단어를 따서 이 기도를 공식적으로 '파테르 노스테르'라고 부릅니다.
주기도문 교회의 복도 정랑 통로와 외벽 전면에는 전 세계의 수많은 성도와 국가들이 저마다 자국어로 번역해 헌헌한 주기도문 판넬석들이 수십 수백 개나 부착되어 장관을 이루고 있습니다. 하얗고 단단한 대리석 판에 글자들을 정교하게 아로새겨 놓았습니다. 제가 과거 2007년도에 우리 신학생들과 성지탐사 여행단을 직접 이끌고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찍은 생생한 현장 사진이 바로 이것입니다. 2007년 사진이니 벌써 20년 전의 빛바랜 역사의 기록이 되었습니다.
그 외벽 통로를 가만히 걸어가며 살펴보면, 신약성경을 최초로 받아 적은 오리지널 원어인 헬라어(그리스어) 주기도문 "파테르 헤몬 호 엔 토이스 우라노이스(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가 웅장하게 새겨져 있고, 과거 제임스 티소(James Tissot) 화가가 그려 브루클린 박물관에 소장 중인 예수님이 감람산에서 제자들을 둥글게 모아놓고 다정하게 기도를 가르치시는 성화 그림도 만날 수 있습니다. 나아가 예수님 당시 유대 사회의 실제 통용어이자 아람어의 모태가 되는 고대 '시리아어(Syriac)'로 정교하게 새겨진 주기도문 판넬도 엄숙하게 박혀 있습니다.
조금 더 걸어가면 자랑스러운 한글로 새겨진 반가운 주기도문 대리석을 만나게 되는데, 먼저 설치된 것은 가톨릭(천주교) 체제에서 기증한 문구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그 나라가 임하시며..."라는 천주교식 번역 주기도문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최근에 가보니 한글 개신교 성도들을 위한 판넬이 영어 'KOREAN' 표기와 프랑스어 'CORÉEN' 문구를 달고 우측 외벽에 추가로 장엄하게 부착되어 있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로 흘러가는 개신교식 번역 대리석입니다. 성전 통로에 자리가 부족해지자 이제는 마당의 외부 벽면까지 가득 채우며 전 세계 140여 개가 넘는 수많은 다채로운 언어로 주기도문이 선포되고 있는 감격적인 현장입니다.
2. 기도의 표준이자 복음 전체의 요약
이 위대한 주기도문의 단어적 구조를 계량해 보면 대단히 흥미롭습니다. 헬라어 신약성경 원어의 단어 수는 정확히 72개 단어로 짜여 있습니다. 영국의 킹제임스버전(KJV) 영어 성경은 66개 단어로 구성되어 장엄하게 흐릅니다. 반면에 우리말 성경 글자 수로 확인해 보면 개역한글판 주기도문은 총 159개 글자이고, 조사가 두 개 더 늘어난 최신 개역개정판 주기도문은 총 161개 글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단어의 배열과 길이는 언어마다 차이가 있지만, 이 주기도문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범지구적인 인류가 하나님 앞에 올릴 수 있는 '최고의 기도'이자 '가장 적합하고 완벽한 표준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조잡한 수식어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직접 조율하여 쥐어주신 완벽한 기도의 디자인이기 때문입니다.
주기도문 안에는 단순히 무언가를 달라는 간청을 넘어, 하나님의 자녀인 인간이 이 땅에서 어떠한 우주적 철학관을 가지고 살아가야 마땅한지, 인간이란 존재는 근원적으로 무엇을 필요로 하는 연약한 생명체인지를 명확하게 가르쳐주는 인생의 청사진이 녹아 있습니다. 주기도문은 크게 '일곱 가지의 거대한 영적 간구 기원(Seven Petitions)'으로 정교하게 짜여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기도해야 마땅한지를 보여주는 완벽한 기도의 원형이자 알파벳입니다.
고대의 신실한 초대 초기 교부였던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는 이 주기도문의 가치를 두고 "주기도문은 예수 복음 전체의 완벽한 요약이요, 기도의 정수이자, 기도를 가르치는 위대한 기도의 스승이다"라고 극찬했습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역시 이르기를 "이 기도는 기도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섭리하는 가장 완벽한 기도 중의 기도이며, 성도가 배워야 할 모든 기도의 거룩한 알파벳(A to Z)이다"라고 찬양했습니다. 또한 현대 신학자 요아킴 예레미아스(Joachim Jeremias) 교수 역시 "주기도문은 예수님의 모든 하늘 가르침을 가장 밀도 높게 압축해 놓은 간결한 요약집이다"라고 해설했습니다. 주님이 이 땅에 세우고자 하셨던 하나님 나라의 통치 철학과 성도의 실천적 삶의 도리가 이 짧은 72개 단어 속에 완벽하게 정제되어 있는 것입니다.
3. 주기도문 전반부의 신학적 깊이: 하나님을 향한 세 가지 기원
오늘 우리는 주기도문의 거대한 일곱 가지 간구 중에서, 서론부와 더불어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드높이는 전반부의 세 가지 대기원을 집중적으로 주석해 보겠습니다.
① 서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우리는 기도의 문을 열 때 가장 먼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이름을 소리 높여 부릅니다. 헬라어나 라틴어, 영어 성경 등 대부분의 서양 언어는 '우리의 아버지(Our Father)'라는 관계적 칭호가 문장의 맨 처음에 먼저 튀어나옵니다. 반면에 우리말 성경은 언어적 어순의 특성상 공간적 배경인 '하늘에 계신'이라는 수사어가 맨 앞에 먼저 배치되어 불립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입술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부를 때, 우리는 과연 저 우주의 공기 층 너머에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영광의 보좌를 펴고 실재하시는 '천국 하늘의 실제성'을 온 영혼으로 정말 확실하게 믿고 계십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거룩한 하늘나라가 참으로 실존한다는 그 절대적인 믿음의 전제가 없다면, 우리가 암송하는 주기도문은 그저 공중에 흩날려 사그라지는 허무한 유행가 노래 가사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매 순간 하늘 보좌를 절절하게 사모하며 나그네 인생길을 걸어가고 있는지 스스로 영성을 점검해야 합니다. 주기도문을 외칠 때마다 보이지 않는 하늘 나라의 실재를 뼈저리게 확신하는 사람만이 참된 그리스도인입니다.
또한 하늘에 계신 그 하나님이 진정으로 살아서 역사하시는 나의 아버지가 되심을 확증합니까? 히브리서 11장 6절은 신앙의 가장 위대한 대원칙을 이렇게 선포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창조주 하나님의 실존하심을 온전히 신뢰하는 자만이 이 기도를 온전하게 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가 기정사실로 세워져야 그 뒤의 창조와 구원의 역사가 내 삶의 능력이 됩니다. 전도서 5장 2절에서도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실존과 주권을 철저히 의식하는 성도라면, 삶의 일거수일투족과 언어 행실이 경거망동하지 않고 무겁고 거룩하게 다듬어지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열매입니다. 시편 14편 1절의 선포처럼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라고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굳이 변증하려 들지 않고,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지혜요 부인하는 자는 영적인 바보일 뿐이라고 기정사실로 엄숙하게 선언합니다.
나아가 주님은 '나의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Our)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독점적인 내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공통된 아버지이시라면,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모든 성도와 이웃들은 그리스도 보혈 안에서 천국 가문을 이룬 단 하나의 '거룩한 형제자매들'입니다. 너와 내가 남이 아니라 거룩한 한 가족이라는 뜻입니다. 내 곁에 있는 성도가 영적인 나의 형님이고 누님이며 아우이자 동생이라는 깊은 가문 의식과 정서적 연대감이 뼈저리게 도출되어야 비로소 "우리 아버지"라는 단어를 무례함 없이 온전히 고백할 수 있습니다.
신명기 6장 4절의 위대한 이스라엘의 신앙 고백인 '쉐마(Shema)'에서도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라며 단수가 아닌 '우리 하나님'의 공동체적 고백을 선언합니다. 말라기 2장 10절에서도 선지자가 백성들을 향해 눈물로 호소합니다. "우리는 한 아버지를 가지지 아니하였느냐 한 하나님께서 지으신 바가 아니냐 어찌하여 우리 각 사람이 자기 형제에게 거짓을 행하여 우리 조상들의 언약을 욕되게 하느냐." 우리가 서로 미워하고 시기하며 다투면서 입술로만 우리 아버지를 부르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가증한 행위입니다. 주기도문은 성도 간의 깊은 화평과 사랑의 연대감을 요구하는 연합의 기도입니다.
그 우리가 부르는 아버지는 도대체 어떠한 분이십니까? 그분은 온 인류의 엘로힘 하나님이시자 천하만물을 무에서 유로 부르신 창조주이시며, 나를 살리려 십자가에 피 흘리신 자비로운 구속주이십니다. 만군의 여호와이시며 스스로 계시는 자존자이시고, 내 머리카락까지 세시는 전지하신 분이자 무소부재하시고 은혜로우신 나의 목자이자 영원한 구원의 반석이십니다. 이 거대하고 전능하신 우주의 통치자가 다름 아닌 나의 아버지가 되셔서 나의 신음 소리를 들으신다니, 우리 인생에는 더 이상 두려워하거나 낙심할 이유가 단 1%도 없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부르는 것 자체가 최고의 영광입니다.
② 첫 번째 기원: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서론을 지나 첫 번째 거대한 기원이 터져 나옵니다. 원어의 구조를 뜯어보면 우리말 성경에는 생략되어 있지만 헬라어나 영어 성경에는 명확히 소유격인 '당신의(Thy / Your) 이름'이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 번역 선조들이 100여 년 전 성경을 우리말로 옮길 때, 문장에다 대놓고 높은 하나님 아버지를 향해 "당신의 이름이~"라고 직역하면 동양의 유교적 문화 관습상 대단히 무례하고 버릇없어 보인다고 판단했습니다. 귀하의 이름이라 할 수도 없고 그대의 이름이라 할 수도 없어서, 고심 끝에 이인칭 대명사 당신을 과감히 생략하고 명사만 살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대단히 점잖고 아름답게 번역 문구를 확정해 놓은 것입니다. 3인칭 존칭으로는 당신을 써도 무방하지만("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아낌없이 주셨다"), 기도할 때 2인칭 대면 격으로 당신이라 부르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원어적 구조에는 명백히 '아버지의 귀하신 이름'이 주격으로 살아 역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잠들 때까지 과연 누구의 이름을 온 세상에 빛내기 위해 오늘도 치열하게 사업을 경영하고 땀을 흘리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내 명예와 내 자아의 이름을 드높이기 위해 일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나를 구원하신 하늘 아버지의 이름을 찬란하게 빛내기 위해 살아가고 계십니까? 영국의 위대한 설교가인 찰스 스펄전(Charles Spurgeon) 목사는 이르기를 "참된 기도의 첫째 목적은 내 이기적인 유익을 위해 무언가를 채워달라고 떼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을 위하여 그분의 이름을 구하는 것이다"라고 단언했습니다. 기도의 최우선 순위는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이어야 합니다. 기도하자마자 내 속사정부터 쏟아놓으며 이거 달라 저거 달라 떼쓰는 기도는 유치한 어린아이의 때 부림일 뿐입니다. 주기도문의 첫 번째 최고 망상과 최대의 기원은 오직 아버지 하나님의 귀하신 이름을 온 우주 위에 찬란하게 영화롭게 만드는 데 정조준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름'이란 성서적으로 무엇을 뜻합니까? 성경 문맥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하나님 신성 존재 자체'를 뜻하며 그분의 거룩한 성품과 주권적 권위, 무한한 능력을 완벽하게 집대성하여 함축해 놓은 결정체입니다. 이름이 곧 그분의 인격이자 명예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가볍게 취급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우리가 육신의 부모님의 전함을 타인에게 말할 때도 예의를 다해 글자 사이에 '자' 자를 붙여 존중함을 표현하듯이, 온 우주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이름은 말할 수 없이 엄숙하게 존경받아야 마땅합니다. 이름의 글자를 써놓고 밟으면 그 존재를 짓밟는 모독이 되듯이, 하나님의 이름을 사소하게 다루는 것은 창조주를 모독하는 무서운 죄악입니다.
얼마나 중요했던지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영원한 도덕법인 십계명을 주실 때, 상위 법조문인 제3계명에 이 이름의 엄위함을 명시해 놓으셨습니다. 출애굽기 20장 7절의 대선언입니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우주의 10대 계명 중 세 번째 자리에 이름법을 장치해 두신 것입니다. 이름을 농담거리의 소재로 삼거나 경박하게 함부로 입술로 지껄여서는 안 됩니다.
구약 역사 속에서 선지자들이 장래를 예언할 때도 오직 '여호와의 이름(권위)'으로 선포했고, 제사장들이 백성들을 축복할 때도 신명기 10장 8절 말씀처럼 오직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도록 권한을 부여받았습니다. 졸업장이나 위임장 맨 끝에 총장의 이름과 직인이 찍혀야 법적 권위가 서듯이, 여호와의 이름은 우주 최고의 신적 법적 권위의 보증 수표입니다.
그 이름이 어떻게 되기를 기원합니까? 바로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입니다. 우리는 앞선 제63번 강의에서 '거룩함의 진정한 의미(카도쉬)'를 2시간에 걸쳐 대단히 깊이 공부한 바 있습니다. 거룩함이란 속된 세상과 완벽하게 구별되어 따로 떼어놓은 신성의 청정함입니다. 거룩함을 대면할 때 피조물 인간의 영혼 속에는 죄에 대한 소름 끼치는 두려움과 엄숙한 경외심이 저절로 솟구쳐 오르는 동시에, 그 완벽한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나도 모르게 이끌려 들어가는 거룩한 매혹과 영적 긴박감을 체험하게 됩니다. 모세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여호와의 거룩한 면전을 대면했을 때 신발을 벗고 벌벌 떨었던 그 경외심의 경지가 바로 거룩함입니다. 시편 기자가 외치듯이 우리는 날마다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최고의 영광을 돌리며 그 거룩한 성호를 자랑하고 찬양해야 마땅합니다. 사소한 약속을 남발하면서 "내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한다"고 경박하게 이름을 도용해서는 안 됩니다. 레위기 24장 16절에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면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 것이니라" 할 만큼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이름은 온 백성이 벌벌 떨며 두려워했던 최고의 존엄이었습니다. 우리가 주기도문을 부를 때 이 이름의 무게를 묵직하게 의식하며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내 삶을 온전히 정돈해 드려야 합니다.
③ 두 번째 기원: "나라가 임하시오며"
두 번째 위대한 기원은 '하나님의 나라(당신의 나라)'가 이 땅에 속히 도달하기를 구하는 기원입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나라가'라고 주격 조사 가가 쓰였는데, 고어체 번역인 개역한글판에 "나라히 임하옵시며"라고 기이하게 쓰인 흔적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명사 뒤에 받침이 있으면 '이'를 쓰고 없으면 '가'를 쓰는 현대 문법과 달리, 고대 문법에서는 나라 뒤에 자음 'ㅎ' 종성을 살려서 '나라히'라고 표기했던 훈민정음 시절의 아름다운 국어 문학적 흔적입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통치가 온전히 실현되는 거룩한 통치 영역입니다. 오늘날 지상에 존재하는 참된 '교회'는,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부름받은 거룩한 천국 특공대이자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사탄이 지배하는 어둠의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직접 왕으로 다스리실 평화의 나라가 속히 성취되도록 날마다 쉬지 않고 복음을 전파하고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교회가 진짜 살아있는 참된 교회입니다. 천국 건설이라는 거대한 영적 비즈니스를 위해 수고하는 교회가 진짜 주님의 교회인 것입니다.
만약 교회의 직책과 영적 권세를 도용하여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아닌 '내 자아의 왕국'을 건설하려 하거나, 자기 정치를 하며 내 명예의 아성을 쌓아 올리는 자가 있다면 주님의 나라가 임할 때 단호하게 파멸당하고 심판받게 될 것입니다. 교회의 직분을 사리사욕을 채우는 도구로 삼는 자는 엄숙한 심판의 대상입니다. 빌립보서 3장 20절의 대선언처럼 "우리의 시민권은 오직 하늘에 있는지라" 하셨으니, 우리는 이 땅의 나그네 기득권에 목매지 말고 영원한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기를 사모하며 살아가야 마땅합니다. 이 땅의 세상 권력과 나라들은 세월이 흐르면 흔적도 없이 파멸하여 멸망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대대로 쇠하지 않고 존속하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하나님의 나라가 도대체 어느 때에 임합니까"라고 정치적 독립의 시기를 질문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7장 20절~21절에서 대단히 심오하고 특별한 신학적 선포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이 말씀은 장차 예수님이 구름 타고 천사들과 재림하실 때 눈에 보이게 임할 영광의 나라가 없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은 구속사 안에서 펼쳐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두 가지 입체적인 왕국 구조로 나누어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는 지금 현재 성도들의 심령 속에 먼저 건설되어야 할 '은혜의 왕국(The Kingdom of Grace)'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 종말에 예수님의 재림으로 우주 위에 장엄하게 도래할 '영광의 왕국(The Kingdom of Glory)'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하신 것은 바로 '은혜의 왕국'을 가리키는 교훈입니다. '너희 안에'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어는 '엔토스 휘몬(Entos hymon)'입니다. 전치사 엔토스(Entos)는 문맥에 따라 두 가지 뜻으로 정교하게 번역됩니다.
첫째는 '너희 내부의(Within you)', 즉 너희 각자의 마음과 심령 중심을 뜻합니다. 성도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왕 노릇 하여 감정과 의지를 통제할 때 은혜의 왕국이 내면에 먼저 들어섭니다.
둘째는 '너희들 사이에(In the midst of you)', 즉 너희 공동체 한가운데를 뜻합니다. 너와 나 사이에, 성도와 성도 간의 인간관계 신앙 소통 속에 시기와 다툼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평강과 화평이 온전히 지배할 때, 우리 교우 관계 한가운데 하나님의 자비로운 은혜의 왕국이 건설된다는 뜻입니다.
성도 여러분, 장차 도래할 우주적인 영광의 왕국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 영생을 누리기를 열망하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현재 내 마음속 공간과, 내 가족, 내 성도 간의 관계 한가운데 이 '은혜의 왕국'이 먼저 확실하게 건설되어 작동해야 마땅합니다. 매일 교회 안에서 형제를 시기하고 다투며 미워하는 시궁창 같은 심령을 품고 살아가면서, 나중에 죽어서 하늘나라 영광의 왕국에 가겠다고 고집하는 것은 신학적으로 불가능한 모순입니다. 오늘 내 안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경험하는 은혜의 왕국 리더가 됩시다.
④ 세 번째 기원: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세 번째 기원 역시 우리말 성경에는 생략되어 있지만 원문에는 명확히 '당신의(Thy) 뜻'이라고 소유격이 살아 있습니다. 헬라어 원어로는 하나님의 완전한 기획과 하고자 하시는 결단을 뜻하는 '델레마(Thelema)'라는 단어가 쓰였습니다.
우리가 흔히 입술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미래형 기원처럼 외치지만, 원어적 문장 구조를 꼼꼼하게 추적하여 직역하면 "당신의 완전하신 뜻이 하늘 세계에서는 이미 온전히 성취되어 완료된 것 같이(As it is done in heaven), 이 땅 위에서도 일점오차 없이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갈망합니다"라는 대단히 정교하고 확실한 고백적 번역이 됩니다.
그렇다면 이 땅 위에 성취되어야 할 '하나님의 완전하신 뜻(델레마)'의 내용과 본질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바울은 로마서 12장 2절에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성경이 밝히 증거하는 하나님의 최고의 뜻은 바로 '인류 구원 사업의 성취'입니다.
요한복음 6장 38절~40절에서 예수님이 성육신의 절대 목적을 직접 선포하셨습니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거대한 뜻은, 사탄에게 미혹되어 파멸해 가는 죄인들을 한 영혼도 놓치지 않고 십자가 보혈로 다 찾아내어 살려내고, 마지막 날에 부활시켜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해 가시는 '대속 구원 사업의 완수'입니다. 예수님은 이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기도하시며 십자가 제단으로 걸어가셨습니다.
나아가 이 구원의 뜻이 성도들의 삶 속에서 구체화하는 실천적 실체는 바로 '거룩함(Sanctification)'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3절의 대선언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행을 버리고." 베드로전서 1장 15절~16절에서도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하십니다. 성도들이 세상의 더러운 음행과 죄악의 트렌드를 과감히 거절하고, 주님의 성품을 닮아 모든 행실에 흠 없고 깨끗한 '거룩함'을 이루어가는 삶의 실천이 바로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뜻을 성취해 드리는 성도의 의무입니다.
베드로전서 5장 2절에서도 교회 리더들을 향해 명하기를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양 무리의 본이 되라" 하십니다. 성도들이 공동체 안에서 기쁨으로 자원하여 봉사하고 양 무리의 의로운 모본이 되어 더 많은 영혼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해 내는 행동이 곧 하나님의 뜻을 이 땅 위에 구현하는 신앙입니다.
마태복음 12장 50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 예수님의 혈육이었던 마리아와 동생들이 면회를 왔을 때 하신 엄숙한 선언입니다. 주님의 진정한 하늘 가족이 되는 유일한 입장권은, 귀로만 말씀을 듣는 가짜 제자가 아니라 아버지가 세워두신 뜻과 법령대로 삶 속에서 온전히 '행동하고 실천하는 자'뿐입니다.
마태복음 7장 21절의 엄중한 경고도 결을 같이합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입술의 구호로만 예수 이름을 외치는 가짜 믿음 소유자들은 결코 천국 영광의 왕국에 적합하지 않으며 다 차단당할 것입니다. 천국은 오직 이 땅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성실히 실천해 낸 진짜 신앙인들만 들어가는 곳입니다.
예언의 신 영감적인 서적인 <산상보훈> 110페이지에서는 이 세 번째 기원의 우주적 가치를 다음과 같이 웅장하게 주석해 놓았습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간구하는 것은, 이 지구 성상에서 사탄과 악의 통치가 마침내 영원히 마감되고, 죄가 영구히 소멸되며, 영원한 의의 나라가 온전히 건설되게 해 달라는 장엄한 대구속사의 기도이다. 이 기도가 이루어지는 날에는, 천상 세계에서 천사들이 기쁨으로 순종하듯 이 땅 위의 모든 피조물도 하나님의 모든 선하시고 인자하신 뜻을 기쁨으로 순종하며 영화롭게 하는 위대한 대통치의 역사적인 날이 이르게 될 것이다."
실로 가슴을 울리는 영감적인 대해설입니다.
5. 신학 강의 최종 종합 요약
오늘 여덟여덟 번째 시간으로 고찰한 '주기도문 전반부의 진의'에 대한 신학 강의 전체 내용을 최종 요약정리하겠습니다.
첫째, 주기도문(파테르 노스테르)은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중 마태복음 6장(산상수훈 시의 풀 버전 72단어)과 누가복음 11장(제자의 요청에 의한 콤팩트 버전)을 통해 가르쳐주신 기도로서, 인류가 하나님 앞에 올릴 수 있는 '가장 완전하고 적합한 최고의 표준 기도이자 기도의 교과서'입니다.
둘째, 교부 테르툴리아누스가 "복음 전체의 개요"라 극찬하고 루터가 "모든 기도의 으뜸 지위이자 알파벳"이라 칭송했듯이, 주기도문은 이기적인 간구를 쏟아놓기 전에 우주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영광과 그분의 통치를 최우선으로 구하는 '일곱 가지의 거대한 영적 기원'으로 구성되어 기도의 참된 패러다임을 혁명적으로 교정해 줍니다.
셋째, 서론부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부름은, 성도가 보이지 않는 '천국 하늘의 실재성과 하나님의 살아 계신 실존'을 뼈저리게 확신할 것을 요구하며(히 11:6), 나아가 하나님이 독점물이 아닌 '우리 공통의 아버지'이심을 고백함으로써 교회 안의 모든 성도가 천국 가문의 거룩한 형제자매들이라는 깊은 연대감과 화평을 실천할 것을 의무 지웁니다(말 2:10).
넷째, 첫 번째 대기원인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는 하나님의 주권, 권위, 성품, 인격 자체를 총칭하는 '아버지의 귀하신 이름'을 내 일생의 사업과 삶을 통해 최고의 가치로 드높일 것을 구하는 기원이며, 십계명의 제3계명(명칭 오용 금지)에 명시된 엄위함을 따라 하나님의 거룩하신 신성(카도쉬) 앞에 최고의 경외심과 예배의 영성을 회복하겠다는 성도의 장엄한 헌신 서약입니다.
다섯째, 두 번째 대기원인 "나라가 임하시오며"는 그리스도의 자비로운 동치가 지배하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구하는 기원으로서, 성도들의 심령 중심과 교우들의 평화로운 관계 한가운데 건설되어야 할 '내적인 은혜의 왕국(엔토스 휘몬 / 너희 안에/너희 사이에)'을 오늘 현재 성실히 경험해 내야만, 장차 재림으로 완성될 '외적인 영광의 왕국(새 예루살렘)'에 당당히 입성하는 영적 시민권을 획득하게 됨을 가르쳐 줍니다(빌 3:20).
여섯째, 세 번째 대기원인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는 천상 세계에서 천사들이 완벽히 순종하여 성취된 하나님의 거대한 기획(델레마)이 이 땅 위에서도 그대로 실현되기를 구하는 기원이며, 그 뜻의 실체는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인류 구원 사역의 완수(요 6:39)'이자 성도들의 삶의 실천인 '행실의 거룩함(전 4:3)'입니다. 입술의 구호가 아닌 아버지의 뜻대로 묵묵히 행동하고 실천하는 참된 신앙인들만 천국 보좌에 참여할 수 있음을 경고하는 엄숙한 기원의 장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매일 암송하는 주기도문의 전반부 문장 속에는 이토록 깊고 장엄한 하나님 중심의 구속사 철학이 가득 배어 있습니다. 이제는 아무 생각 없이 주문을 외우듯 경박하게 입술로만 주기도문을 지껄이는 영적 타성을 과감히 깨뜨려 버립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부를 때마다 그분의 실존 앞에 벌벌 떠는 경외심을 회복하시고, 그분의 이름과 나라와 뜻을 위해 내 삶의 우선순위를 전적으로 재정돈해 올리는 진짜 지성적인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으로 주기도문 전반부 신학 강의를 마감하고, 다음 여든아홉 번째 시간에는 우리의 구체적인 필요와 영적 영성을 구하는 주기도문 후반부의 깊은 내용을 연속해서 공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시간까지 주님의 거룩한 이름의 영광 안에서 늘 평안하고 승리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 핵심 요약 정리
주기도문(Pater Noster)의 성경적 구조와 가치:
주님이 제자들에게 직접 가르쳐주신 기도의 원형이자 알파벳으로서, 마태복음 6장(산상수훈 시의 72단어 풀 버전)과 누가복음 11장(제자의 요청에 의한 콤팩트 버전)에 기록됨. 우리말 개역성경 글자 수는 약 160여 자임.
교부 테르툴리아누스가 "복음 전체의 개요"라 평했듯, 내 이기적인 정욕을 구하기 전에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을 최우선으로 구하는 '일곱 가지 거대한 영적 기원'으로 조직된 기도의 완벽한 교과서임.
서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의 신학적 의무:
하늘의 실재성과 신적 실존: 기도를 올리는 성도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천국 하늘의 실제성과 창조주 하나님의 살아 계신 실존(히 11:6)을 온 영혼으로 철저히 확신할 것을 요구함 (하나님의 실존을 믿는 자는 전도서 5장 2절 말씀처럼 말을 아끼고 삶의 행실을 엄숙히 정돈하게 됨).
우리 아버지의 연대감: 하나님이 독점물이 아닌 '우리 공통의 아버지'이심을 고백함으로써, 교회 안의 모든 성도와 교우들이 보혈 안에서 천국 가문을 이룬 단 하나의 '거룩한 형제자매'라는 연대감과 화평을 실천할 공동체적 의무를 지우게 됨 (말 2:10).
1대 기원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의 본질:
원어상 '당신의(Thy) 귀하신 이름'이 주격으로 살아 역사함.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 인격, 성품, 권위 자체를 총칭하는 결정체임.
십계명의 제3계명(명칭 오용 금지)에 명시된 엄위함을 따라, 내 자아의 이름을 지워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카도쉬)을 일생의 사업과 삶의 현장 속에서 최고의 가치로 높여 예배하겠다는 성도의 장엄한 헌신 서약임.
2대 기원 "나라가 임하시오며"의 입체적 왕국 구조:
은혜의 왕국 (엔토스 휘몬 / 너희 안에 / 너희 사이에): 주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일차적으로 성도들의 심령 중심(Within you)과 교우들 간의 화목한 관계 한가운데(In the midst of you) 임하는 '내적인 은혜의 왕국'임.
오늘 현재 내 삶과 공동체 속에서 이 은혜의 왕국을 치열하게 경험해 내는 시민권을 가진 자만이, 장차 예수가 구름 타고 재림하실 때 우주 위에 장엄하게 완성될 '외적인 영광의 왕국(새 예루살렘)'에 당당히 입성할 수 있음을 가르쳐 줌 (빌 3:20).
3대 기원 "뜻이 하늘에서...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의 실체:
천상 세계에서 천사들이 완벽히 순종하여 이미 성취 완료된 하나님의 거대한 계획(델레마)이 이 땅 위에서도 일점오차 없이 실현되기를 구하는 대구속사의 기도임.
그 뜻의 신학적 실체는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단 한 영혼도 잃어버리지 않고 살려내시는 인류 구원 사역의 완수(요 6:39)'이며, 성도들의 삶의 현장 속에서 구현되어야 할 '품행의 거룩함(전 4:3)'임. 입술의 구호가 아닌 아버지가 세워두신 뜻대로 묵묵히 행동하고 실천하는 진짜 신앙인들만 천국 보좌에 합당함을 일깨워 주는 엄숙한 기원의 장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