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9월 6일(일) 09시 52분에 서울역 대합실에서 전공노 늘걷회 회원 치빠흐 씨모으 졷안스 위짜츠 까토나등 다섯명이 만났습니다. 수도권 전철역 671개 모두를 걷기 위하여 서울역 광장 앞에서 첫 출발의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선로상의 거리는 984KM이지만 실제 보행로를 따라 걷는 것은 상당한 차이가 있을 것 같습니다.
서울역 광장 숙대 입구역 남영역 삼각지 로타리 삼각지역 신용산역 용산역 한강대교 노들역 사육신 공원 노량진역 신길역 영등포역 광장 영등포 재래시장 황토 구이집 (돼지고기 모듬) 회식 2차 3차 쏘맥 회식 전공노 귀가
*** 기록은 내 자신을 기준으로 강변역 현대 프라임 아파트를 출발하면서 부터 측정한 것이므로 회원들 각자 조금씩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
하루 걸음수 30,927, 거리 23.17 km, 칼로리 소모 1,075 kcal,
걸은 시간 309분, (보통 10분에 약1,000 걸음)
서울역 애 애 소(愛 哀 訴) 1
서울이라면 대한민국의 수도이지만 한강의 기적이나 88 서울 올림픽등의 굵직한 단어 그 이외에도 떠오르는 몇 가지의 상징성의 단어들이 있습니다.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청와대,이순신 장군과 세종대왕 동상, 한강 다리,지하철 , 동대문, 숭례문, 덕수궁, 비원,세종 문화 회관, 명동, 남대문 시장,서울 성곽길, 서울 둘레길, 북한산, 남산, 도봉산, 남산 타워,북악 스카이웨이 등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상징물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도 서울역이야말로 조선과 한국의 근 현대사 역사의 큰 획을 그은 상징물이며 한민족의 삶의 애환과 고통을 고스란히 몸 담고 있는 살아 있는 증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한국 인구는 약 4,900만 전후에 있으며, 예전 보다는 감소 추세라지만 서울은 아직도 남한 전체 인구의 1/5 이상이 거주하고 있는 대도시이며 인구 밀도로는 세계 6위권에 속한다고 합니다. 면적은 미국 뉴욕보다 작으나 인구면으로는 2배가 넘는다고 하니 얼마나 좁은 공간에서 서울 시민들이 살고 있는지 실감이 납니다. 매일 출근 시간이면 각 지하철과 버스에는 사람들로 뒤 엉키며 시내 도로는 자동차들의 물결로 넘쳐나서 차에서 뿜어대는 매연은 숨이 막힐 지경입니다. 나도 이런 서울에서 살아 가고 있는 세월도 1.4 후퇴 때 부모님 품에 안겨 피난을 나온 이후 몇 년을 빼고는 60여년을 살고 있습니다. 시골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서울 오면 답답하고 너무 정신없이 복잡하여 도저히 살 수 없다고 하는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이곳에서 초 중 고 대학 대학원을 나오고 아들 딸 낳아 기르고 가르쳐서 지금은 손주 녀석들을 내 품에 안겨 주는 행운도 받아 봅니다.누구나 그렇듯이 서울 사람들은 이런 열약한 환경을 몸으로 부대끼면서도 그냥 아무렇지 않듯이 매일 매일을 바쁘게 살아 숨쉬고 살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런 환경이 못마땅하고 싫어서 언젠가는 이놈의 서울을 박차고 벗어나리라는 생각을 하루에도 몇 번씩 되내어 보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며 체념하여 주저 앉기를 한 두번이 아니었습니다.
이번에 수도권 전철역을 모두 걸어서 밟아 보려는 생각도 어쩌면 이 서을이 얼마나 시끄럽고 복잡하며 매연과 소음으로 신음하는 서울 시민들의 현주소를 몸소 체험하기 위한 것도 하나의 이유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지하철 1호선 서울역 역(驛)을 첫 출발 기점으로 정하게 된 이유도 이 나라에서 처음 1974년도에 개통한 지하철 역사의 시작을 음미해 보고 싶기도 한 것입니다.
서울역 역사(驛史)를 되 짚어 보려면 어쩔 수 없이 우리 조선민족의 수모와 수난의 과거도 들여다 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1,800년대 이후부터 시작되는 청나라의 조선 진출과 러시아 제국의 사할린과 쿠릴 열도등으로 세력 확대를 저지하기 위해서도 일제는 조선을 손아귀에 넣어야겠다는 야욕을 노골화 시키게도 하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청일 전쟁으로 조선이 청나라에 조공을 바치던 것을 막고 조선 반도의 광물질과 석탄등을 약탈할 계기가 되기도 했으리라 봅니다. 그러나 조선은 흥선대군의 쇄국 정책으로 서방 세계로의 개방과 문물을 철저히 차단하여 국제 정세에는 전혀 감지를 할 수 없는 우물 안 개구리 신세가 되어 동네 축구공 신세가 되어 버린 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즈음 일제의 흑심은 어떻게든 조선을 속국으로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조선의 매국노들을 앞잡이로 하여금 아첨과 맹종으로 한일 합방이라는 미명의 을사늑약이 체결되는 굴욕을 당한 것입니다.
이처럼 일본 제국주의 자들이 조선을 식민화하여 나라와 민족의 혼을 말살하고 한반도의 모든 재원과 물자를 수탈하여 빼돌리기 위한 방편으로 서울역을 기점으로 철로를 개설하게 된 것입니다. 일본 도쿄에서 조선 철로를 따라 만주 시베리아 횡단을 통하여 청나라 러시아도 쉽게 넘볼 수 있는 지름길을 염두에 둔 계략이라 할 수 있습니다. 2003년 11월 28일 현재 민자 역사의 준공이 되기 까지 1923년도 부터 사용되어 오던 콘크리트 철근조 벽돌 역사가 경성역에서 서울역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한 것이 해방 후인 1947년 11월 1일이었습니다.지금 서울역은 한국철도공사의 경부선 경의선 인천국제공항철도와 서울메트로의 수도권 전철 1호선의 기점으로 지하철 4호선이 통과하는 곳입니다. 경부선 경의선 및 인천 국제공항 철도의 공식명은 서울역이며, 서울 지하철 1호선과 4호선의 공식명은 서울역 역(驛), 지하 서울역으로도 불리고 있습니다. 서울역사(驛史)가 이렇게 여기까지 오기에는 서울 사람뿐 아니라 전국 곳곳의 젊은이들과 서민들을 웃고 울게한 서글픈 과거의 자화상이 뇌리에 각인되어 있습니다, 흘러간 유행가는 그 시대의 사회면과 생활상을 그대로 반영하는 거울과 같은 사연을 담고 있다고 하지요, 앵두나무 우물가의 처녀 총각들이 밭일을 하던 호미자루 물동이 꼴망태 지게 작대기를 내팽개치고 말만 듣던 서울로 호남선 경부선 영동선등의 완행 열차에 몸을 싣고 무작정 서울로 상경을 합니다. 서울에 대한 막연한 기대와 꿈을 품고 그 지긋지긋한 시골 두메산골의 농사일과 집안일을 걷어 차고 아무도 기다리지 않고 낮설고 물설은 서울역에 첫발을 내딛습니다. 하지만 서울의 하늘은 시골처럼 그들에게 포근하게 감싸주는 인정미가 있는 그런 곳은 물론 아닐뿐더러 의지할 곳은 더 더욱 아니었습니다. 여기 저기 이곳 저곳 아무리 헤매여도 일할만한 곳은 찾을 수가 없고 허기진 배를 추스르기에도 벅찬 곳이었습니다. 멍하니 오가는 사람들과 자동차의 불빛만 바라보며 자포 자기 상태의 그들은 매서운 눈과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굶주린 독수리들에게 한줌의 먹이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음씨 좋은 아주머니나 아저씨라도 만나면 돈 많은 부잣집의 식모로 가정부로 아니면 그 당시의 구로공단의 공순이 공돌이로 일할 수 있는 행운을 얻기도 했습니다. 아니면 중국집 짜장면 배달원으로 구두 닦기로 찌들은 서울 나그네의 생활이 시작되기도 했습니다다. 명절 때면 콩나물 시루와 다름없는 열차로 설탕봉지와 미원 종합선물 세트를 한 아름씩 들고는 꿈에도 그리던 고향 땅과 보고 싶던 부모님과 형제들을 찾아 귀향길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솔깃한 감언이설의 꾀임과 유혹에 빠지면 낮과 밤의 구별없이 이름 모를 낮선 남자의 품에 안겨 몸을 파는 성욕의 노예가 되어 버리기도 했습니다. 예쁘고 순진하고 꿈 많은 시골 숫처녀의 가슴은 피멍으로 얼룩지어 버리고 끝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비참한 삶을 살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6,25 전화(戰禍)의 폐허 속에도 끈질긴 우리 민족의 생명력이 1960년대 70년대를 거치면서 이들이야 말로 국가 경제 발전과 수출의 역군이 되고 밑거름이 되었다고 봅니다. 오늘날의 현실을 보면 정치인들은 눈앞의 이익에 눈이 멀고 좌고우면의 극치로 정치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고위 공직자라는 분들은 부정 부패의 온상이기도 하며 더구나 국민의 봉사자가 아닌 국민 위의 군림자로 착각까지 하고 있는 지경입니다.대기업 재벌들의 행태는 돈이면 다 된다는 생각으로 자손들에게는 불법 탈세 증여뿐아니라 문어발식 기업 확장은 보통이며 당연시 되어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기업 총수의 말 한 마디가 바로 법 자체로 황제 경영이 갑질의 원인이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세가지 부류들만 한국 국적에서 제거해 버리고 지구상에서 사라지게만 한다면 국민 소득 3만불 4만불 시대를 눈 앞에 두고 있는 세계 속의 일류 국가로 거듭 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밤이면 휘황 찬란한 네온 싸인과 넘쳐 나는 자동차의 물결의 일렁이는 전면의 모습은 화려함보다 사치의 극치가 아닌가 합니다. 이들 뒤에는 지난 날의 서울역을 스쳐 지나간 젊은 청춘 남녀의 희생과 말 못 할 고생의 뒤안길이 없었다면 어쩌면 불가능한 허상의 금자탑이 되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시대의 동년배로서 고희를 넘긴 전공노(電空老) 세대인 나로서는 지난날의 비참했던 질곡의 세월이 오히려 아름다운 추억으로 새겨 있으며 다시 돌아 가고픈 한장의 흐릿한 흑백 활동 사진으로 다가옴은 역시 나이 탓만은 아닌것 같습니다. 지금은 옛 서울 역사(驛舍)가 문화역 서울 284 (사적284)로서 복합 문화 공간으로 새롭게 단장하여 많은 시민들의 사랑과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그 당시 그 시절 완행 열차를 타고 무작정 상경하곤 고향 떠나온 자신을 미워 하고 후회하면서, 서울역을 원망하며 배회했던 그 젊고 꿈 많던 처녀 총각들은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는지 보고 싶습니다.
20150909 무 무 최 정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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