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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그림의 내용입니다.
만리현 교회 약사
거금 년 전(1911년 5월7일)에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만리동 2가 260번지(고) 김덕순(남)속장이 당시 몇분 형매들과 정동교회를 다니던 중 왕내에 불편함과 불신자 구령상에도 애로를 느껴서 당지에 기도처를 설립함이 타당케 여겨 의견이 일치되어 당시 정동교회 담임 최병헌 목사에게 승인을 얻어 우선 주일 저녁과 수요일 기도회 만은 김더순 속장 사택에서 모이게 된 것입니다. 동시에 김덕순씨는 생활도 빈곤한 터로 유일한 초가 4간을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처로 바친 것이 동기가 되어 만리현 지역에 유일한 교회가 세워진 씨가 된 것입니다. 당시 기도처에는 정동교회에서 장원근, 김지연 전도사와 신학생을 계속 파송하여 예배를 인도하여왔다. 교인으로는 여반에 김사라, 김신도, 김눌라, 허사라씨 등 네(4) 인에 불과하였었습니다. 그후 집회를 위하여 정동교회에서 김종우목사, 정득성(남) 전도사가 파송되어 수년 간 수고하였습니다.
1915년 경에 김덕순 속장이 별세하니 애도의 정을 금할 수 없었다.
1915년 7월 20일에 교인수도 늘고 겸하야 주일학교까지 둠으로 협착하야 희사한 기도처를 방매하는 한편, 김사라, 김신도씨는 교회를 위하여 눈물어린 기도와 소유인 오마사리집을 팔고 혹은(김사라씨는) 지방에 있는 전지며 심지어 가구 의류 등 까지 방매하여 헌납함으로 당지 서대문구 만리동 2가 100번지로 이전하니 비로소 만리현감리교회라 칭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집도 초가 7간 집이요 다쓰러져가매 그 후에 전부 개축하다.
1917년경에는 한석원씨와 양익환씨가 임시 파송되어 1년 동안 보좌하였고
1918년경에는 김덕수(남) 전도사가 2년간 수고한 바 있었다.
1920년 4월에 연회에서 비로소 정식 사송하니 즉 기미운동 당시 33인중 1인이요 령계에 거장이며 아멘 목사로 명성이 높은 초대 담임목사로 이필주 목사가 부임하다. 동년 동월에 연화봉구역이 설정되어 (연화봉, 이촌동, 만리현) 이 세 교회가 한 구역으로 편입됨과 동시에 연화봉교회 최도익(남) 전도사가 여러 해 동안 목회를 보좌하다. 이필주 목사 부임후 교회는 파죽지세로 날로 부흥됨에 따라
1922년 7월 경에 후일 만리현교회에 초석이 되고 지도적 역할을 할 최문환, 김진호, 김영순, 짐정렬, 엄두만씨 등 청년들이 연달아 입교항 후 상부상조하며 신애로써 친형제와 같이 지내게 됨에 인격적으로 향상됨에 따라 교회는 부흥과 발전의 기세였으며 최문환씨는 매일같이 봉학산정(현 균명학교자리)에 올라가 새벽기도를 할 때에 혹은 금식기도로 해를 거듭할 때 청년 전원이 감동되어 합심기도를 수삼년간 시행하였었다.
쳥년들은 학업과 사업에 근면하고 밤이면 교회에 모여 기도와 성경연구로 열중하니 교회는 점진적으로 부흥되다. 이는 전혀 이목사의 성신충만한 역사로 신령한 신앙과 기도의 열심히 순복음적 교도를 받고 또는 최도익 전도사와 합심하여 열심 기도로 일반 교인의 심열ㅇ은 늘 기쁨과 감사로 지냈으며 그리하여 신앙의 아버지로 존경하였다. 또한 믿음의 어머니라고 존경한 분들은 김신도, 김사라, 김눌라 세 분이었는데 김덕순씨와 같이 본 교회 창설 때부어 존경을 받은 분입니다.
1924년경에 최도익 전도사 별세 후로 최문환씨가 1925년 10월 경부터 4년간이나 보좌하다. 교회 부흥에 따라 쪼는 지역적으로 무산 아동이 많음으로 교육 보급과 문맹 퇴치를 목적 삼고 육영 사업을 하기로 항 후 교회내에 유치원, 주간학원, 여자 야학교 등을 설립하다.
1928년 3월에 이필주 목사 부임후 8개 년간을 열심 교역함으로 교회를 신령한 토대위에 큰 부흥을 보고 연회 파송으로 수원지방 남양교회로 전임되다.
그 후임으로 1928년 4월에 청렴강직하다는 평이있는(2대 목사) 김태현 목사가 부임되다. 1년간 교역한 후 시내 왕십리교회로 전임되다.
그 후임으로 1929년 4월에(3대 목사) 이동욱 목사가 파송 부임되다. 2년간 교역하고 전임되다.
1929년에 교인 증가와 교육사업 등으로 장소가 협착함에 이저할 장소를 물색중 김진호씨가 남감리교 선교부 소유인 임야 1,200평이 만리현 봉학산 산정에 있는 것을 탐지한 후 교섭 계약하다(대금 6,000환). 이 기지 내에는 과목 및 분묘가 수 많이 있는 것을 정리함에 있어 김정렬씨가 단독 책임을 맛고 많은 수고를 하다. 그 후, 일변, 지목변화과 분활 방매하고 서대문구 만리동 2가 산 6번지 산정 507평을 택한 후 당지에 교회당을 신축한 경위는 전교회당(100번지)을 매각하고 태반 이상 부족되는 것을 김학응, 김진호, 최문환, 최동식, 김정렬, 김영순, 임성복, 엄두만씨 등의 특별한 헌금과 열의로 준공을 보게 된 것이다.
그 후, 교회, 교육 사업을 확장함과 동시 학원을 균명학교로 승격하고 여자 야학교도 겸용한 것이다. 학교 대표로 김정렬 장로가 교장으로 10여년간 시무한 바 있다. 균명학교의 전신인 것입니다.
이동욱 목사 후임으로 1931년 4월에 연회에서(4대 목사) 이은택 목사가 파송 부임되다.
1931년 경 주일학교에서 생장한 임성복씨는 자당인 김눌라씨가 임종할 때 예수 잘 믿으라는 간곡한 한 마디 (말)유언이었으나 이 유언에 크게 감동되어 그 후 불같은 열열한 신앙으로 교회 봉사와 열심을 다하여 충성하였고 희생적으로 물심을 기울여 힘 쓴 바 많었습니다.
1932년 4월에 교회 부흥회시 설교중에 큰 감화를 받은 김학응씨는 교회 봉사와 더욱 열심과 충성 일관적 신앙 생활을 통하야 많은 사람에게 감화력을 발함에 무너의 전도자라는 칭송을 받다
1933년 4월 5일에 교회 우치가 너무 높고 험노인지라 노인들ㅃㄴ 아니라 인발적으로도 통행이 불편함으로 교회 발전상 많은 지장이 있었다. 그러므로 시급히 교회당 처소만이라도 시급히 옮기기로 결정하고(서대문구 만리동2가 218의1호)에 대지 49평 기지위에 교회당 신축 공사를 시작하다. 그러나 공사비 준비도 없이 착수함에 공사비로 인해서 어려움 당한 것은 이루 형언키 어려웠다. 공사 시작 후 세 차례나 중단한 바로 1년이 지나서야 겨우 완공하 곧
1934년 5월에 연와제로 28평을 준공하게 되다. 때를 같이하야 연화봉구역에서 완전히 분리되어 만리현구역으로 독립되다.
동년 6월16(또는 17)일에 교회 봉헌식을 양주삼 총리사 사회로 거행한 후 교회만 이전하다. 이 이면에는 이은택 목사의 눈물어린 기도와 끊임업슨 지서으로서며 말할 수 없는 곤경을 당했던 것은 지적키 어려우며 특히 임성복씨의 희생적 노력과 교유들의 혈한이 숨어있습니다. 이은택 목사는 4년동안 요약하는 중 큰 공로를 남기고
년 4월에 교유 일동과 석별의 정을 누누고 미국 유학의 길을 떠나다 그 후임으로
1935년 4월에(5대 목사) 김유순(6.25때 납북됨) 목사가 부임되다.
1937년 3월에 김진호 장로는 15년간이나 지성으로 교회 봉사와 주일학교장으로도 심혈을 다하야 10년 동이나 수고를 하여 많은 공노를 남기고 황해도 해부읍으로 이주하다. 그후 역시 애석하게도 납치를 당하다. 20여년 간을 만리현 교회를 위하여 희생 봉사와 심혈을 기우려 힘을 다해 충성하였고 많은 수고를 한 최문환 장로가 1942년 6월6일에 54세를 일기로 별세함에 일반 교우들은 애석해 하다.
1937년 4월에 이강훈씨가 본 교회에서 장로로 피택된 후로 주일학교장으로 또는 일반 교인에게 성경지식을 교도하는 동시에 청년 회장으로 청년 지도에도 심혈을 기우려 노력하다. 일제 장기 전쟁으로 한국 교회 탄압을 받아 교회는 침체중에 있었으나 교인들의 신앙은 조금도 변함없이 교회를 사수하고 더욱 은혜중에 지내오다.
1945년 8월 15일 하나님의 은혜로 한국 민족은 역사적인 해방을 당하여 어느 단체보다도 가장 압박을 받은 기독교회는 모든 것이 자유속에 옛날 세계로 돌아가다.
1947년 4월에 박순신(朴順信) 전도사가 목사를 보좌하다.
1950년 9.28 즉전(직전, 필자 주) 영등포구 염창으로 은둔 생활을 하던 중 너무도 감격에 벅차서 가슴에 태극기를 붙이고 나오다가 적탄을 맞고 순직하다. 그 후문은 전혀 알 수 없었다. 심히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신앙이 견실하시고 매사에 관대한 김유순 목사는 본 교회 창설이래 봉직 최고 기간인 13년 동안을 헌신요역하는 중에 어려운 전쟁 시기에 만난을 극복하면서 한국 감리교회 역사에 잊을 수 없는 교역자요, 당파투쟁에 파별(벌)없이 참다운 신앙의 위용을 지켜온 것은 교회 전체에게 큰 시범이 되었으며 여러면으로 큰 공로를 남기시고 1948년 3월에 연회파송으로 시내 북아현 교회로 전임되다.
그
후임으로 1948년 4월에 (6대 목사) 고영춘 목사가 파송 부임되다.
1948년 9월에 고영춘 목사는 기관파송되다. 그 후임으로
1948년 9월에 (7대 목사) 청년 목사로 정의감에 불타며 교회 정치에도 유능한 박설봉 목사 부임되다.
1947년 3월 경에 경기도 개성교회에서 장로로 시무하시던 김성훈씨가 본 교회 장로로 이명된 후 박목사를 보좌하다.
엄두만 권사가 20여년간 교회를 위하여 봉사하다가 1949년에 44세를 일기로 별세하다.
1949년 3월에 교회 증축을 위하여 기성회를 조직하고 맹활동을 하던 중 뜻하지 않은 6.25를 당하여 모든 계획은 부득이 중단되고 김성훈 장로는 납치를 당하다.
1952년 4월에 전용반 여전도사가 파송되어 박목사를 보좌하다. 박목사는 참다운 신앙으로 교우들을 인도할 뿐만 아니라 성경연구며 자유토론 특별집회 및 기도회 전도 등으로 교회는 점진적으로 부흥 발전을 보여 우수하고 모범적 교역자로 우대하는 동시에 매주 신자가 증가 됨에 따라 교회 증축을 결의하다. 당시 교인 수는 300여 명에 달하였으며 속회도 14속으로 매주 200명이나 모인바도 있었다,
교회 봉사와 여러면으로 수고하였고 당시 유사부장이었던 김학응 장로가 1954년 3월 7일에 56세를 일기로 별세하다.
1954년 5월에 교회 접근한 주택 및 대지를 매수하다.
1955년 3월 17일에 김사라 장로가 교회에 큰 업적을 남기시고 81세를 일기로 세사을 떠나시니 교회장으로 장례를 집행하다.
1955년 4월 3일 부활정을 계기하여 교회 증축을 위하야 목표액 200만환으로 정하고 합심기도로 헌금한 결과 목표액 보다 초과되니 하나님께 감사의 찬양을 돌렸습니다.
1955년 8월 25일에 40평 증축 공사를 착공하고 동년 11월 22일에 준공을 보다
년 7년 3월 17일에 박설봉 목사 근속10년, 전용반 여전도사 근속 5년 기념식을 성대히 거월 행한 바 있다.
1959년 3월에 12년간 교역한 박설봉 목사는 재임중 다방면으로 크신 공노를 남기고 시내 중구 남창도 상동교회로 전임되다. 그 후임으로
1959년 4월에 강원도 원주지방 감리사로 있던 이명구 목사가 (8대 목사)로 부임되다.
1959년 3월에 김효원 여전도사가 파송되어 현재까지 보좌중에 있다. 이명구 목사는
년간 교역한 후 1961년 4월에 시내 마포구 도화동교회로 파송 전임되다. 그 후임으로
1961년 4월에 시내 마포구 도화동 교회에서 다년간 교역한(9대 목사로) 이강연 목사가 부임되다.
1961년 5월 26일에 교회 창설 초부터 열심 봉사한 崔東植장로가 83세를 일기로 별세하다.
교회 창설자의 한 분이시고 물심 양면으로 봉사한 金信道 장로가 1962년 3월 19일에 97세를 일기로 별세하다.
1963년 4월에 2년간 교역을한 이강연 목사가 시내 중구 도동교회로 전임되다 그 후임으로
1963년 4월에 인천 율목교회에서 다년간 교역한(10대 목사로) 정등운 목사가 부임되다. 이어 3,4년 동안 교역하는 동안 교회는 날로 부흥되어가다.
이용하 장로는 1947년 입교 후 1964년에 장로로 피선된 후 교회 봉사를 하던 바 1966년 10월 14일에 61세를 일기로 별세하다.
이강훈 장로는 1937년4얼에 본 교회 장로로 입교 후 여러 방면으로 교회 발전을 위하여 수고하시다가 1966년 11월 3일에 64세를 일기로 별세하다.
1966년 12월 4일 새벽에 뜻하지 않은 불의의 화재로 삽시간에 교회당 전체가 전소되고 이웃 주택까지 연소되어 교회로서의 하니남의 영광을 가리운 것뿐아니라 전일 파란 과 곡절이 많았고 혈한을 짜내서 희생적으로 건립된 애절했던 일이 많은 만리현교회가 일조의 재로 변함에 잿더미 위에서 예배르 보며 혹은 균명학교 교실을 빌려서 보기도 하였으며 방황하면서 지나는 중에 경향각처 교회에서와 혹은 개인들의 뜨거운 동정의 위문금이 답지해온 것과 또한 교회적으로도 눈물을 흘리며 간절한 기도와 정성을 다하여 헌금한 결과로 우선 시급한 예배를 볼 장소를 마련코자 제일차로 지하실을 수리하게 되어 공사비 만원을 책정 후 1967년 10월 30일에 착공하다. 그후 동년 12월 20일에 준공을 보게되어 비로서 당 지하실에서 예배를 보게되다.
신은순 장로는 1964년 4월에 입교후 열심히 교회를 열심히 봉사하고 많은 수고를 하였으며 1967년에 장로로 피택된 후 더욱 충성을 하던 바 1968년 5월 1일에 55세를 일기로 별세하다.
1969년 10월 3일에 재로 화한 교회당 전체를 개축할 것을 결정하고 총 공사비 350만원을 책정한 후 기동식을 하다. 교회당 85평, 주택 기타 15평 등 총 100평 가량이었다. 공사 완료 후
1970년 6월 14일에 교회 봉헌식을 거행하다. 그때 교회 전교우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넘치는 기쁨으로 찬송과 영광과 감사를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공사 착공으로 완공될 때까지 당시 탁사부장이던 최인송 장로가 총 감독 책임을 가지고 많은 수고를 하다. 봉헌식을 거행한 구 동일에 이어 50년 동안 본 교회를 섬겨왔고 시무 장로로 40년간 또한 유사부장으로 20년 간이나 수고한 김정렬 장로의 은퇴식도 있었는데, 교회 창설이후 처음이었다.
교회 재건과 교회 발전에 따라 부목사를 모시기로 하다. 그 후 1970년 강화교회에서 다년간 교약하던 김형두 목사가 부목으로 부임하다. 그 후 1년 7개월간 정등운 목사를 보좌하다가 1972년 3월에 부목사 김형두 목사는 시내 중구 남산교회 부목으로 전임되다.
오래동안 교회 봉사를 하였고 여선교회 회장으로 다년간 수고하던 朴壽男 권사가 1971년 6월 28일에 61세를 일기로 별세하다.
1972년 3월 17일에 정등운 목사 후임으로(11대 목사로) 시내 용산구 한남동 교회에서 다년간 교역하던 김광원 목사가 부임하다. 김광원 목사는 목회를 함과 동시에 감리교 교육국 총무로서 1년간 수고하였으며 또한 청소년 지도 문제 등에도 많은 관심과 연구 노력하는 터이오며 목회에 있어서도 방력(박력)있는 유능한 청년 목사로서 교회의 각 분야에 발로 부흥 발전되어가고 있습니다. 또한 1975년 연회에서 선교부 총무직을 맏고 맹활동 중에 있습니다.
1972년 4월 9일에 정등운 목사(부임후만 9년) 재임중 교역하는 동안 교회를 다방면으로 많은 수고와 업적을 남기었고 겸하야 연로한 터이오나 중부연회장으로 또는 감독직으로 重任을 역임한바 도 있어 우리 만리현 교회로서의 자랑스러운 바입니다. 교회 헌법에 의하여 만 70세면 정년이 됨으로 은퇴찬하식을 거행하고 은퇴하신 것입니다.
고희집 장로는 1972년 4월 경에 불광동으로 이거함과 동시에 또는 사정으로 불광동 동산교회로 이명한 바 1956년 경에 만리현교회에 입교한 후 본 교회를 위하여 다방면으로 수고할 뿐만 아니라 교회학교장으로도 4년간 이나 노략한 바 있습니다.
35년간이나 교회를 봉사한 조옥성권사, 여선교회장으로 수고한바였는데 1972년 12월 7일에 57세를 일기로 별세하다.
박천규 장로는 입교후 34년 동안 신앙생활을 통하야 교회봉사와 충성을 하였으며 수년간 유사부 서기와 부장으로 2년여유를 수고하든 중 1973년 8월 11일에 54세를 일기로 별세하다.
1973년 12월 30일 당회에서 세 분 장로를 선임하니 이수철 권사와 김은규 권사와 박문규 권사였으며 36년간 35년간 유년부 때부터 믿은 세 분 권사였으며 1974년 4월 28일 장로 취임 장립식을 거행하다.
1974년 1월 6일 김종순 (남)전도사를 교육 전도사로 추천하여 담당자 담임 시무하였으며 1975년 3월 14일 연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목사로 피택되어 기관목사로 전임되다.
이광호 박사는 1974년 2월 24일 (오랜동안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인연 깊은 우리 교회에서 봉사를 전과 같이 하게되어 교회학교장으로 피선되다.
유득윤 장로는 만리현교회에 입교 후 18년간 봉사한 바로 많은 수고를 하였으며 탁사부장으로 수년간 헌신한 바 있었으며 1975년 3월 2일 장로교 정능제일교회로 송별식을 거행하고 석별하다.
첫댓글 참 귀중한 기록입니다. 누가 언제 어떤자료에 근거해서 썼는지 모르기때문에 정사라고 할 수 없지만 상당한 신빙성이 있는 기록입니다.다만 이필주목사님은 1919 만세 사건으로 2년형을 받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셔서 1921년11월에 출옥하셨기 때문에 아마 우리교회에는 1922년에 부임한 것이 맞을겁니다.(서울연회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