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로 가랴마는
박 용 철
설만들 이대로 가기야 하랴마는
이대로 간단들 못 간다 하랴마는
바람도 없이 고이 떨어지는 꽃잎같이
파란 하늘에 사라져버리는 구름 쪽같이
조그만 열로 지금 수떠리는 피가 멈추고
가는 숨길이 여기서 끝맺는다면
아. 얇은 빛 들어오는 영창 아래서
차마 흐르지 못하는 눈물이
온 가슴에 젖어 나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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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박용철의 이 시를 처음 알게 된 것은 24살 시절이었다.
그것도 시집이나 교과서를 통해서가 아닌 만화를 통해서.
레코드샵을 하던 시절. 음반을 사러 왔던 손님이 놓고 간 단행본 만화 한 권.
지금은 제목도 기억에서 사라져버린 만화작품이지만
머리에 남아있는 건 오로지 만화가 박흥용 글 그림이라는 것뿐이다.
하지만 지금 그의 작품 프로필에서 그 만화의 제목을 찾을 수 없다.
아니, 정확히는 그 내용을 가진 만화를 찾을 수 없다.
떠돌이 같은 한 청년이 시골 전원주택의 정원관리사로 들어와
그곳에 살고 있는 두 자매를 만난다.
언니는 청년에게 친절하게 대해주지만 동생은 늘 쌀쌀맞기만 하다.
과묵한 청년은 언제나 무표정으로 묵묵히 맡은 일을 하지만
갈수록 그를 향한 동생의 트집은 늘어만 간다.
몇 개월의 정원관리가 끝나가자 이별의 때를 감지한 청년은 전원주택을 떠나기로 한다.
언니는 만류하지만 청년의 자유로운 영혼을 꺾지 못 한다.
정원관리자 청년이 떠나던 날, 그가 떠나는 뒷모습을 2층 창문에서
홀로 지켜보던 동생은 혼자 오열한다.
동생은 언니의 마음보다 더 청년을 사랑했을까?
그녀의 트집과 냉대도 그를 향한 관심과 사랑의 표현이었을까?
시골의 전원주택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정경을 따뜻하게 엮어 나가는 이야기.
그가 춤을 추며 떠나는 뒷모습 뒤로 박용철의 이 시가 흐른다.
설만들 이대로 가기야 하랴마는...
이대로 간단들 못 간다 하랴마는...
비록 만화를 통해서이지만 이 시를 처음 읽는 순간은 충격이었다.
이별의 안타까움을 몇 줄 되지 않은 짧은 문장으로
이토록 냉혹하고도 비극적으로 쓸 수 있다는 사실이.
그날 이후 이 시는 추억과의 이별을 채색하는 가장 비극적인 명작으로
내 가슴에 내려앉았다.
박용철(朴龍喆,1904.6.20-1938.5.12), 호: 용아(龍兒)
박용철은 1904년 광주시 광산구 소촌리에서 박하준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일찍 두 형이 죽는 바람에 4남매 중 장자가 된 그는 1911년 광주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한다.
1916년 휘문의숙에 입학했다가 배재의숙으로 전학하여 다녔다.
1921년 동경의 청산학원 중등부 4년에 편입한 그는 여기서 영랑 김윤식을 만나 친교를 맺고 시를 쓸 것을 권유 받았다.
그러나 그해 여름방학 집에 돌아와 있는 동안 동경에 대지진이 일어나 도시가 잿더미로 변하고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약을 뿌리고 건물에 불을 지른다는 헛소문을 퍼뜨려
경찰 군인이 총동원되어 동포들을 학살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는 일본에 가지 않고 서울로 가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나, 반년만에 중단하고 돌아와서는
고향에 칩거하며 자신의 독서실에 문학.철학 등의 책을 닥치는 대로 읽으며 세월을 보냈다.
1919년 12월 당시 16세 소년으로 부모의 뜻에 따라 15세의 울산김씨와 결혼을 한 그는
신학문을 접하지 못한 부인에게 실망, 부인의 방에 출입을 하지 않고 15년 동안 지내다가 이혼하고,
1년 뒤 이화여전 영문과를 졸업한 박씨와 재혼을 했다.
이 때부터 스스로 방황에게 벗어나 눈부신 문학활동을 전개했다.
1929년 시문학이라는 시전문지 발간을 서둘렀다. 영랑을 비롯한 문인들이 모였으나
이 계획은 광주학생사건으로 중단되었다가 해를 넘기고 1930년 김영랑. 정지용 등과 함께
시동인지 <시문학>을 창간했다.
용아는 매달 오는 2백원 생활비 중 30원만 쓰고 나머진 모두 잡지 발간에 쏟아부었으나 시문학은 3호로 끝을 맺었다.
1931년 11월 종합문예지인 <문예월간>을 창간했다. 용아는 이 두 잡지에 많은 서평과 번역시를 발표하면서
연극에도 눈을 돌려 극예술연구회에 입회 기획부 간사를 맡았고 유치진의 '버드나무 선 동리의 풍경'에선 농촌
머슴으로,'베니스의 상인'역에서는 단역으로 무대에 섰다.
1934년 봄 그는 '문학'이라는 조그만 동인지를 발행,시.수필.평론.소설 등을 실어냈다.
그때부터 몸이 쇠약해져 문학도 그치고 고향으로 내려와 요양을 한다. 결핵이었다.
달리 특효약이 없었던 그 시절, 이 병은 무서웠다. 다음해 잠시 병세가 차도가 있자 먼저<정지용시집>을 발행한다.
1938년 5월 12일 진퇴를 거급하던 신병을 이기지 못하고 34세 나이로 세상을 등졌다.
그뒤 부인은 남편의 뜻을 이어<시문학>을 뒷바라지하며 아들 셋을 길러냈다.
용아 박용철은 안에서 밖을 내다보려 한 내향적 시인이었다. 그의 유작시들을 보면 방안에서 하늘을 보고,
그 하늘의 가없음에 놀라 밖으로 나가려 하지만 실제로 나아가 눈에 거칠 것 없는 들녘 언덕위에서
하늘을 차일 삼아 바위를 어루만지며 서 있는 것은 그저 마음 뿐이었다.
그의 시를 읽을수록 빈번하게 확인되는 것은 미래에 대한 전망의 불투명성이다.
방에서 떠나 밖으로 나아간다 해도 '앞대일 어덕인들 마련이나 있을거나'라든가,
'머지도 않은 앞이 그저 아득하여라'라는 시행에서 보듯 기댈 언덕도 밝은 앞도 없다. 다만 이렇게 축원하고 있다.
"가진 것 없는 우리에게서 슬퍼하는 마음마저 빼앗으시고 / 장승같이 아침을 기다리게 하옵소서."
박용철은 배재고보 동창이었던 염형우와 친하게 지냈으며 <사의 찬미>로 유명한 윤심덕도 염형우의 소개로 알게 되었다.
주요 작품으로는 1930년 떠나가는 배/ 싸늘한 이마/비 내리는 밤/밤기차에 그대를 보내고<시문학창간호>,
시집가는 시악시의 말/우리의 젖어머니/한 조각 하날/ 사랑하든 말<시문학2호>
1931년 선녀의 노래/시조 6수/ 고향/ 어디로? <문예월간2호>
광주 광산구 소촌동에는 생가가 있으며 광주 송정공원과 광주공원에 시비가 건립되어 있다.
첫댓글 제목; 가실 이는 가옵시고
태극 그려진 국궁의 과녁에
가슴 내어주고
이고 가는 아낙의 물동이는
또 얼마나 무거우랴
산짐승에게 찢겨진
친정 오래비 생각만으로
관중을 외쳐보는
횃불 들게 하여 당긴 시위
그림 속, 해 졌거늘
사방 어둡지 않기에
오늘 밤은 아직도 멀다
2017 8 1 산지기
머물러 주심에 감사드려요. 좋은 날 되시어요. (산지기님 스타일)ㅎㅎ
백 번을 읽고 생각해 봐도 도저히 닿을 수 없는 두터운 메타포라의 벽을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황순원 문학관에서 만나면 시의 의미에 대해 끝장을 봐야할 듯 합니다.ㅎ
나두야 간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거냐 하는 박용철의 시를 접하며 감동받았었지요
어린시절 만화책에서 만났던 명시와의 인연이 놀랍군요 사랑과 이별에 대한 감성적 시는 훗날 영랑과
이어져 갔지요 감사합니다
용아 박용철의 [떠나가는 배]는 고교 교과서에도 나오는 그의 대표작이죠.
이 시는 일제 강점기의 현실에서 정든 고향을 떠나야 하는 사람들의 비애를 담고 있다고 배웠는데
저는 [이대로 가랴마는] 작품을 만화에서 처음 접했습니다. 생각하면 진짜 웃기죠.ㅎ
결핵을 이기지 못 하고 일찍 세상을 떠난 그의 짧은 인생을 생각하면 무척 애석한 인물입니다.
댓글로나마 나누는 시에 대한 공감이 참 감사하게 느껴지는 시간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