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烈(1902-1974년)의 初名은 準植으로 慶北 聞慶 出身이다. 1919년 日本으로 건너가 無政府主義 運動에 投身하였으며 秘密結社 黑濤會를 組織하였다. 1923년 그의 愛人 가네코 후미코의 協助를 얻어 天王 暗殺을 實行하려던 直前에 發覺되어 日本 警察에 逮捕되었다.
天王 暗殺을 위해 海外에서 爆彈을 輸入하려 했다는 것이 裁判 課程에서 밝혀졌으므로 1926년 3월 25일에 가네코와 함께 死刑宣告를 받았으나, 4월 5일에 無期懲役으로 減刑되었다. 두 사람이 日本檢察의 問招를 받을 때 서로 포옹하는 모습을 日本 判使가 撮影, 寫眞이 社會에 漏出되자 政府에서 國事犯을 優待한다고 野黨에서 들고 일어나는 등, 日本 政界에 큰 波紋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두 사람이 服役 중 가네코는 刑務所에서 自殺하였다. 1945. 8·15光復으로 朴烈은 22年 2個月 만에 釋放되었다. 著書에《新朝鮮革命論》이 있다. 1989년 建國勳章 大統領章이 追敍되었다.(네이버 百科辭典)
아나키스트(Anarchist)의 선두주자
申乭石, 崔益鉉, 金佐鎭, 安重根, 尹奉吉, 李陸史 등 이 중에 모르는 사람이 있는가?
그런데 李康秊, 申泰植, 朴烈, 민순호, 심거벽, 이긍재 등 이 중에 아는 사람은 몇이나 있는가?
앞서 羅列한 사람들은 學窓時節 國史책에서 또는 言論을 통해 無數하게 많이 보아왔기에 거의 다 記憶 속에 存在하는 人物인 것으로 안다. 그러나 뒤에 擧論된 人物 중 알고 있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되는가? 이분들과 關聯된 집안 사람들이거나, 鄕土史에 關心이 있는 사람은 알고 있겠지만 大多數 生疏한 이름으로 다가올 것이다. 위에 擧論된 분들 모두가 빼앗긴 나라를 찾기 위해 목숨을 바친 義兵家와 獨立運動家이다. 모두가 이러할 진대 누구는 記憶이 되고 있고, 누구는 記憶조차 없는 사람이어서야 되겠는가? 더구나 뒤에 羅列된 분들은 우리 聞慶에서 태어나 나라를 위해 한 목숨 불사르신 분들인데. 물론 이분들이 내 이름 하나 世上에 드높이고자 自身의 목숨과 바꾼 것은 절대 아니다. 이중 朴烈 義士도 우리 聞慶에서 태어난 獨立運動家 중의 한 사람이다. 獨立運動을 했지만 左右를 決定해야 하는 始期에 中立路線을 걸었기에 한때는 南韓에서도 北韓에서도 그리 빛을 보지 못한 人物이었다. 그러나 歲月이 흘러 이 분의 活動狀況은 南韓에서 北韓에서 그리고 日本에서 매우 積極的으로 評價되고 있는 人物 중 한 사람이다.
人物에 대한 評價作業이 꽤 오랜 歲月 동안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진 結果라 할 수 있다.
麻城面 오천리에는 그의 生家가 지난 2004년 慶尙北道 記念物 제148호로 指定이 되었다. 또한 生家 뒤편에는 그의 삶을 記念하는 展示館이 建立되었다. 물론 展示館이 지어졌다고 해서 完璧한 評價가 이루어졌다고는 할 수 없지만, 人物에 대한 歷史的 評價의 意志가 없었다면 이렇게 까지는 絶對 進行되지 않았을 것이다. 朴烈의 人生에 있어 朴烈을 아나키스트로 完璧하게 만든 것은 그의 첫 번째 婦人인 가네코후미코(金子文子)女史일 것이다. 日本 留學時節이던 1922년경 朴烈과 만나 戀人이 되었으며, 黑道會와 흑우회에 加入하고 雜誌를 함께 發行하는 등 그와 뜻을 같이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두사람은 서로 다른 곳에 잠들고 있다. 朴烈義士는 北韓에, 金子文子女史는 大韓民國 聞慶에 安葬이 되어 있다. 天王暗殺企圖 事件으로 死刑을 言渡 받았을때 “朴烈과 나를 한 絞首臺에서 같이 목매어 죽여달라. 그리고 죽은 白骨도 더불어 묻어달라”고 陳述할 程度로 同志이자 戀人이었던 두사람. 비록 살아서는 짧은 기간 生을 같이 했더라도 죽은 以後에는 함께 하길 빌어본다.
“地球를 깨끗이 淸掃하는 일 가운데 첫걸음이 日本 帝國을 쓸어버리는 일”
朴烈은 1902년 3월 朴英洙의 아들로 태어나 咸昌公立普通學校를 卒業한 후 15歲에 서울로 올라가 京城高等普通學校 師範學科에서 修學했다. 京城高普 在學 중에 3·1 運動 萬歲 示威에 加擔한 嫌疑로 退學당하고, 1919年 日本 도쿄로 건너가, 세이소쿠가쿠엔(正則?園高等?校) 高等學校에서 修學 하였다. 形便이 어려웠던 그는 新聞配達 등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세이소쿠가쿠엔 高等學校를 다녔다. 日本에서는 社會主義者, 無政府主義者들과 交流했고, 1920년 1월 日本에 있는 朝鮮人 苦學生들과 勞動者 社會의 相扶相助를 表面上의 目的으로 하는 東京 朝鮮苦學生同友會를 結成해 組織活動을 始作했다. 以後 義血團, 黑友會 等을 組織했다. 이렇게 朴烈은 黑濤會라는 無政府主義者 團體에 加擔한 아나키즘 信奉者로 活動을 始作하면서 아나키스트로의 길을 걷게 된다.
死刑宣告를 받았으나 向後 無期로 減刑되었다. 이 課程에서 婦人 金子文子는 絞殺(自殺이라고도 함)되었으며, 그의 遺言에 따라 南便의 故鄕인 聞慶에 安葬 되었다. 朴烈이 拘束되어 公判이 열릴 때 그의 氣槪가 滿天下에 알려진 癸期가 있었는데 잠깐 紹介해 보고자 한다.
“公判이 열리기 전에 朴烈은 面會갔던 朝鮮 學友會의 조헌영(趙憲泳, 詩人 趙芝薰의 父)에게 自身과 金子文子가 韓服을 입고 裁判받게 해달라 附託해서 韓服을 借入했다. 公判廷에 入廷한 朴烈은 쌍학교비(雙鶴交飛)하는 婚禮服에 紗帽를 쓰고 冠帶를 둘렀으며 太極扇을 든 채였고 金子文子는 흰 玉洋木 저고리에 검은 공릉치마 차림이었다. 日本 王을 代表하는 裁判官이라면 나는 韓國民族을 代表하기에 韓服을 要求함이며 裁判官席과 被告席의 높이를 同等하게 하라고 要求함이며 나는 韓國말을 使用할 테니 通譯을 딸려라고 말함이며 審問에 裁判官이 꿀릴 만큼 氣槪가 堂堂했다. 그는 地球를 깨끗이 淸掃하는 일 가운데 첫걸음이 日本 帝國을 쓸어버리는 일이다는 등 報道하지 못하게 한 「아의 宣言」 등 極端 發言이 많았다.”
解放 後 23年間의 獄苦를 마감하고 新朝鮮建設同盟委員長을 맡는 등 旺盛한 活動을 벌이던 중, 6·25事變때 拉北되었다. 1974년 享年 74세로 北韓에서 生을 마감했으며 1989년 3월 1일 大韓民國 建國勳章 大統領章에 追敍되었다. 이 짧은 글로 治熱했던 朴烈의 삶을 整理한다는 것이 말도 안되는 소리겠지만 서서히 世上을 그를 드러내기 위해 多樣한 分野에 多樣한 사람들의 努力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만큼은 確實한 것 같다.
그와 日本人 婦人 金子文子의 思想과 삶을 硏究한 硏究書도 많이 發刊되고 있고, 그를 기리는 行事도 이곳저곳에서 開催하고 있다. 특히 日本人들이 朴烈과 金子文子 女史를 보기위해 그의 故鄕마을에 적잖이 찾고 있다는 소식이다. 이런 渦中에 聞慶市에서는 朴烈義士의 뜻을 기리기 위해 展示館 建立을 持續的으로 推進해오던 바 지금은 展示室이 完工되어 聞慶邑 팔령리에 모셔져 있던 金子文子 女史의 墓所를 麻城面 오천리 朴烈義士 記念館 옆으로 옮겨 놓았다. 또한 朴烈 義士의 生家地로 알려진 집터를 文化財로 指定하여 現在 復元이 되어 있다. 이 집의 建立年代는 正確하게 알 수는 없지만 1900년 以前에 지은 집으로 推定이 되며 그간 수차례에 걸친 所有主 變更과 補修 및 增·改築이 이루어져 元來의 모습을 相當 部分 잃고 있다.
지난 2004년 6월 文化財로 指定이 된 후 地域住民들과 後孫들의 證言을 土臺로 이듬해 復元을 하였으며 展示館 領域에 包含되어 展示館이 開館되면 많은 사람들이 찾을 것으로 企待된다.
朴烈 義士 生家地 標識石 除幕
우리나라 獨立運動史上 23년이란 最長 其間 獄中生活을 記錄한 聞慶出身 朴烈 義士. 그의 出生地인 聞慶市 茅田洞 陰地마 311番地에 지난 3월11일 ‘朴烈 疑辭 生家地’ 標識石이 除幕됐다.
지난해 7월25일 이 마을 이인환 씨를 비롯해 9명이 ‘朴烈義士生家地標識石設置推進委員會’를 發足한 지 8個月여 만이다. 이 推進委員會는 標識石을 세우기 전인 지난해 8월7일 茅展洞會館에서 朴烈 義士가 이곳 出生이라는 事實을 發掘한 筆者를 招請, ‘茅田洞 陰地마 出身 獨立運動家 朴烈과 정원영’이란 主題로 講義를 갖고, 이곳에 標識石을 세워야 한다는 根據를 明確하게 地域住民들이 理解 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10월20일 聞慶邑 唐浦里 聞慶댐 水沒地에서 標識石을 採集하고, 올해 2월14일 標識石 文句 ‘朴烈義士 生家地 茅田洞 311’을 確定지었다. 그 후 2월19일 박근노 先生으로부터 標識石 設置를 받아 이를 돌에 새기고 이날 標識石 除幕式을 가졌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標識石 案內板을 세웠다.
位置 : 慶尙北道 聞慶市 茅田洞 311(陰地마)
이곳은 1920年代 初 日本帝國主義에 온몸으로 맞서 싸운 革命家이자 獨立運動家인 朴烈義士(1902. 3.12 ~ 1974. 1.17)가 태어난 곳이다. 1923년 9월 日王을 爆殺 하려한 嫌疑로 日帝에 붙잡혔으며, 裁判課程에서 끊임없이 日帝侵略의 不當性과 天王帝의 惡辣함을 소리 높여 批判하였다. 結局 日帝로부터 無期懲役 宣告를 받았으나, 22年間이라는 獄中生活을 굳건히 이겨내어 ‘運命의 勝利者’라 불려진다. 光復 後에는 튼튼한 國家建設과 젊은 靑年들의 成長을 後援하는데 힘을 쏟으며 完全한 統一祖國을 渴望하였다. 그러나 韓國戰爭 時 拉北되었고, 그곳에서 ‘在北平和統一促進協議會長’으로 活動하시다 1974년 1월 17일 영면(永眠)하였다. 大韓民國 政府는 1989년 3월 1일 義士의 功勳을 기려 大韓民國建國勳章 大統領章을 追敍하였다. 朴烈義士가 태어난 陰地마는 當時 申泰植 義兵將과 함께 朝鮮 獨立運動 後援義勇團에 加擔하여 軍資金 募集活動을 한 정원영 선생이 살았던 곳으로도 有名하다.
이처럼 民族을 위해 몸 바친 獨立運動家를 排出한 陰地마는 標識石設置推進委員會를 構成하여 잊혀져가는 先賢들의 자취를 記憶하고 後世에 널리 알리고자 標識石을 세운다.
2016. 3. 11.
朴烈義士生家地 標識石 設置 推進委員
□ 茅田洞(陰地마) 獨立運動家 朴烈과 정원영
茅田洞 311番地(陰地마)는 抗日獨立鬪士 朴烈이 태어난 곳이다. 朴烈義士는 醴泉 龍門(金堂실)에 世居하였던 咸陽朴氏 後孫으로, 祖父 代(1880년대)에 一家族이 陰地마로 移駐하였다.
이곳에서 1902년 3월 12일 朴烈義士가 태어날 무렵까지 한 世代를 陰地마에서 살았다. 누님 문성(文城 1882), 큰형 정식(庭植 1886), 작은형 (斗植 1888)이 태어나 祖父母 父母 姑母와 함께 大家族을 이루며 살았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朴烈義士가 태어난 지 몇 해 되지 않아, 家族들은 麻城面 오천리 98番地(샘골)로 떠났다.
朴烈義士가 태어난 집 뒤 언덕(茅田洞 313番地)에는 敎堂집이라 하여 書堂이 있었다. 이곳은 書堂 訓長 정원영 先生(1872~1953)이 살던 곳으로 先生은 많은 後學들을 가르치고 隣近 地方까지 널리 알려진 漢學者였다. 그는 1920년 申泰植 義兵將과 함께 朝鮮獨立運動後援義勇團에 加擔하여 軍資金募集 活動을 한 獨立運動家이다. 또한 先生의 딸(정말분)은 열부(烈婦)로 興德洞 254番地에 세워져 있는 창열각(彰烈閣)의 主人公이다.
茅田洞 陰地마는 陽地마를 마주하며 예로부터 咸昌과 幽谷 聞慶을 잇는 길목에 位置한 近洞의 中心마을로 대단히 큰 마을이었다. 抗日獨立運動家 朴烈義士와 정원영선생이 태어나고 살았던 陰地마는 이제 그 옛 모습을 찾을 수가 없다. 하루가 다르게 變化하는 마을에 이분들의 삶과 抗日獨立精神을 찾아 記錄하고자 한다.
□ 推進 委員 名單
推進委員長 : 이인환
推進委員 : 권오성, 신현일, 유승환, 박병한, 박상규, 윤정탁, 이원우, 이용우, 박건화
□ 朴烈義士 主要年表
- 1902. 3. 12 茅田洞(陰地마) 311番地 出生
- 1906. 8 麻城面 오천리 98番地로 移住
- 1912 ~ 1915 咸昌公立普通學校 修學
- 1916 ~ 1919 京城高等普通學校 師範科 修學
- 1919. 3 3.1 萬歲運動 積極加擔, 10월 日本憧憬 遊學
- 1920 ~ 1923 “義擧團”등 反日團體 및“朝鮮人苦學生同友會”結成, 最初의 無政府主義 反日運動 團體“ 흑도회”創立,秘密結社團體“불령사”組織, 爆彈入手 推進
- 1923. 9. 3 關東大地震으로 鏡察에 檢束당함
- 1925. 7. 17 ‘大逆罪, 爆發物取締規則違反容疑’起訴
- 1926. 3. 25 東京大審院 死刑宣告, 無期減刑(4월 5일)
- 1945. 10. 27 釋放(22년 2個月 獄中生活)
- 1946. 1. 20 新朝鮮建設同盟委員長, 在日朝鮮人居留民團長(10.3)
- 1950. 6. 28 6.25戰爭으로 拉北
- 1974. 1. 17 平壤에서 死亡(在北平和統一促進協議會長)
- 1989. 3. 1 大韓民國建國勳章 大統領章 追敍
- 2012. 10. 9 朴烈義士記念公園 및 記念館 開館(麻城面 오천리 샘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