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티 윌콕스 노블이 1893년 조선에서 맞이한 크리스마스 이야기
매티는 미국 감리회 소속 선교사인 남편 윌리엄 아서 노블1)을 따라서 20세의 나이에 은자의 나라로 알려진 조선에 왔다. 그는 1892년 10월 15일에 부산에, 17일에 제물포(인천)에 도착하였다. 18일에 증기선을 타고 한양에서 5킬로미터 떨어진 곳(마포)에서 내려 밤 10시경에 서울에 도착하였다. 당시 한양(서울)은 20킬로미터의 길이에 9미터의 높이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였다. 저녁에 문이 닫히면 아무도 드나들 수가 없었고 성벽을 넘는 자는 사형에 처하였다. 조선 말 그 당시는 추방형으로 법이 바뀌었으나 제대로 시행되지 않고 있었다.
매티 노블 일행은,데이비스 여선교사2), 아서 노블, 태프트 씨로 4인이었으나 그들을 마중 나온 스크랜턴 의료선교사3)와 그의 부인, 올링거 씨4)와 마펫 씨5)그리고 많은 종복들로 대부대가 되었다. 그들은 늦은 밤에 도착하였지만 준비해온 밧줄로 성벽을 타고 시내로 들어가 홀 박사 6) 댁에서 서울에서의 첫날을 맞이하였다.
매티 노블은 틈틈이 일지를 기록하였다.
그의 일지는 조선인들에게는 너무 일상적이고 평범한 것이어서 조선인들의 글에는 기록되지 않은 것들이 아주 섬세하게 기록되어 100년 전 조선의 폭력과 비참에 경악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도 카스트보다 더한 양반과 상놈의 계급 차별, 여성 학대, 빈곤과 무지가 빚은 비참과 절망, 잔학상에 전율하였다. 100년 만에 달라진 한반도의 실상을 재확인하면서 그들에게 진 빚을 새롭게 인식하였다.오늘날 우리 교회와 선교사들이 동남아와 서남아 그리고 아프리카에 나가서 하는 일들이 우리가 헌신적이고 신앙이 특출하게 잘 나서 하는 일이 아니라 그들의 뒤를 따르고 있음이라는 사실 또한 깨달았다.
앞으로 계속 그의 일기를 발췌해서 서양 여성이 본 조선말과 일제 강점기의 조선을 보며 우리가 무엇을 잊고, 무엇을 잃고 살고 있는가를 살펴보려고 한다.
다음 글은 ⌜# 1893 . 12 . 25. 크리스마스 초대⌟의 부분을 발췌한 것이다.
전략…
크리스마스는 큰 명절이므로 며칠 전에 나는 선생님(조선어 교사)에게 초대장을 써달라고 하여 이웃에 살고 있는 여성들을 오후에 우리집으로 초대했다. 근처에 있는 한국인 가정집들에 초대장을 보냈다. 모두 아홉 가구였는데 그중에는 부인이 한 명 이상인 집도 있었다. 일요일에 우리는 애오개(아현, 서대문 사거리에서 충정로 삼거리를 지난 마포구 아현동에 이르는 작은 고개)에 갔다. 나는 그곳 여성들도 오후에 초대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참이었다. 내가 초대한 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나의 계획을 들었기 때문에 그들도 대부분이 올 것 같았다. 나는 아주 커다란 테이블을 중앙에 놓고 견과류와 오렌지, 케이크를 준비하여 이 여성들을 대접할 계획이었다. 우리는 홀 박사의 풍금과 나의 한국어 찬송가 책과 ❮누가복음❯을 준비했다.
시계를 갖고 있는 한국 여성이 많지 않기 때문에 이들은 언제 와야 할지를 잘 몰라서 약속 시간이 되기도 전에 왔다. 나는 사람들이 그렇게 빨리 올 줄 몰랐기 때문에, 서둘러 중앙 테이블에 다과를 차리고 이들을 대접할 준비를 했다. 내가 준비한 음식이 모두에게 돌아갈 만큼 충분한지 걱정스러울 정도로 사람들이 오고 또 왔다. 아이들을 제외하고 대략 50여 명의 여성이 왔다. 이들 대다수는 성스러운 크리스마스에 대해서 전혀 아는 게 없었고 예수님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에게 (예수님) 이야기를 해줄 수 있는 얼마나 좋은 기회인지!
내가 말할 때 그들은 조용히 열심히 들었다. 일부는 의자에 앉고 나머지는 바닥에 앉았다. 우리의 방은 넓었으나 이들은 상자 속의 고등어처럼 방을 꽉꽉 채웠다. 나는 예수님을 위해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싶었고 우리들이 그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내가 풍금 뒤에 서서 말할 때 그 여성들이 얼마나 내 얼굴을 주시했던가!
그때 홀 부인 7)이 들어왔고, 나는 풍금을 치며 노래를 불렀다. 그들 대부분은 풍금 소리를 처으 들었고 이를 대단히 좋아했다. 홀 박사와 버스티드 박사8)가 가끔씩 들여다봤고 아서는 나를 도와 식탁을 차리고 먹을 것들을 가져오는 등의 일을 했다. 그러고 나서는 나는 양치는 목자들에게 나타난 천사의 노래에 관한 구절을 읽고 최선을 다해(성탄절) 설명했다. 그들은 이해하는 듯했다.
나는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며 그러므로 우리가 서로 형제자매라고 말했다. 홀 부인이 주기도문을 함께 외웠다. 우리는 다과를 나누어 주었고, 그 가난한 여성들과 아이들이 맛있게 먹는 것을 보니 너무나 뿌듯하였다. 씨앗이 옥토에 떨어지기를 간구하며 우리 주님께서 이를 돌보실 것을 믿었다. 나는 머지않아 이웃 사람들을 방문할 작정이며, 그들이 나를 자신의 집으로 기꺼이 맞이하리라 확신한다.
오후에 여성들이 좀 더 왔고 우리가 매주 일요일에 모임을 갖는 애오개에서도 여성 4명이 왔다. 나는 홀 부인과 함께 늦은 저녁식사를 끝내고 나서 다시 돌아갔다. 나는 복음을 다시 이야기했고, 기도하고 이야기도 하면서 다시 한 번 그들 모두에게 일요일에 교회에 나오도록 권유했다.
후략…
이 땅에 선교사로 와서 가르치며 섬기며 수고하시는 틈틈이 외국인의 시각으로 한국의 정치, 경제 문화, 사회, 풍습과 전통 등에 관한 글을 자신의 경험과 팩트에 근거하여 탐구하는 자세로, 연민의 마음으로 이해하기 쉽게 섬세하게 써주신 매티 노블 선교사님의 애정과 열정과 헌신에 감동을 받았다. 나의 길이 그의 길의 연장이며 연속이라는 사실에 위로를 받으며 힘을 얻는다. 좋은 책을 번역해주신 강선미 님과 이양준 님께 감사를 드린다.
2022.12.27. 새벽
우담초라하니
각 주
1) 노블, 윌리엄 아서(노을지) : 1892년 매티 윌콕스와 결혼하여 1892년 감리교 선교사로 조선에 도착. 3년간 배재학당 교사. 홀 의료선교사 소천 이후 1896년부터 15년 동안 평양에 거주하며 선교. 평양에서 최초로 근대식 교육을 시작하였다.
그는 농민혁명과 청일전쟁, 러일전쟁, 조선의 멸망 과정을 친히 목격한 선교사로 1934년 은퇴할 시 까지 평양 및 서울지방, 수원지방 감리사로 사역함.
그는 사역 초기에 풍토병으로 2명의 자녀를 잃었다. 그의 장녀 룻은 아펜젤러의 맏아들로 배재학당의 교사이자 교장이었던 헨리 다지 아펜젤러와 결혼하였고 두 부부가 함께 양화진에 묻혔다.
2) 리니 F. 데이비스 여선교사 : 1892년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1892년 10월 17일에 도착. 서울 서대문에서 전도활동을 하다가 1896년 장로교단의 선교 구역인 군산으로 내려와서 해리슨선교사와 결혼. 사역지를 전주로 옮겨 여성과 어린이 그리고 환자를 돌보는 사역을 하던 중에 환자에게 전염되어 병으로 사망하였다.
3)윌리엄 벤톤 스크랜튼(시란돈) : 1885년 미 감리교 의료선교사로 내한하여 제중원에서 의료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시병원, 상동병원을 세웠고 아현교회, 상동교회, 동대문교회를 설립하였다. 전덕기목사를 비롯한 많은 교회 지도자를 길러 냈다. 1895ᅟᅧᆫ 콜레라가 대유행일 때 에비슨 박사와 함께 많은 환자를 치료하였다. 그 후 감리교 선교부의 간부로서 성성한역통일회 회장이 되어 성서번역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1907년 선교정책을 둘러싸고 친일파인 해리슨감독과 충돌을 일으켜 선교사직과 감리교 목사직을 사임하고 , 성공회로 교파를 옮겨 평신도로서 서울과 평북 운산, 충난 직산, 줄국 대련 등지에서 의사로서 활동을 하였다. 1917년 일본으로 건너간 후 1922년 소천하였다.
4) 올링거 선교사 : 1887년 12월 아펜젤러의 요청으로 미감리회 선교사로 조선에 왔다. 배재학단 안에 삼문출판사를 창설하였고, 인천 내리교회를 개척. 설립하였다. 정동교회 담임을 역임한 후 1893년에 귀국하였다.
5) 마펫 선교사 (마포삼열) : 1890년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하였다. 1893년 까지는 서울에서 활동, 1893년 이후에는 평양에서 선교활동. 1901년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으로 근대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다. 1918~ 1928년에는 숭실중학교와 숭실전문학교의 교장을 역임하며 평안도에 많은 학교와 교회를 설립하였다.
105사건이 발생했을 당시 사건이 날조되었으며 악랄한 고문을 자행하고 있음을 미국의 장로회 본부에 보고하여 국제여론을 환기시키는 데 힘썼다.
1936년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일제의 강압으로 쫓겨난 그는 1939년 10월에 캘리포니아에서 별세하였다. 그의 두 아들은 장신대 학장으로서, 동산병원 원장으로서 부친의 뒤를 이어 선교사로 종사하였다.
6) 윌리암 홀 선교사 : 1891년 미 감리회 의료선교사로 조선에 도착. 의료 선교사로 1년 먼저 조선에 온 로제타와 결혼하였다.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셔우드 홀이 조선에서 태어난 최초의 서양 아기가 되었다. 1893년 평양으로 내려온 윌리암 홀 선교사는 청일전쟁 발발 후 밀려드는 전염병 환자를 치료하다가 과로로 쓰러져 조선에 온지 3년 만에 30세의 나이로 자신도 전염병에 걸려 소천하였다.
7) 로제타 셔우드 홀 : 1889년 펜실베이니아 여자의과대학을 졸업하고 1890년 미 감리회 의료선교사로 내한, 정동 보구여관(볼드윈치료소)에서 진료활동을 시작하였다. 맹인들에게 점자를 가르쳤고 청각장애인들에게 수화를 가르쳤다. 1899년 평양에 여성 치료를 위해 광혜여원을 열었고 1909년에 청각장애인을 위한 학교를 열었다.
그는 44년 사역 동안에 남편 윌리엄 홀과 딸 에디스를 잃었으며 1933년 미국으로 돌아가 1951년 사망 후에 남편과 함께 양화진에 묻혔다. 그가 세운 보구병원이 이화여대부속병원으로 발전하였다. 한국의 최초 여의사 박에스더는 그가 양육한 의사이다.
8) 버스티드 박사 : 1893년 미 감리교 의료선교사로 내한하여 상동병원에서 의료 및 전도 사업에 헌신하다가 1898년 건강이 악화되어 귀국하였다.
참고서적
매티 윌콕스 노블 저, 강선미•이양준 번역 ⌜노블일지 1892-1934⌟, 이마고,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