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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농연수원에서 6월 14일 15일 1박2일간 시와 시조 낭송페스티발 행사가 있습니다
다음 작품중 하나를 암기 하셔서 준비하시면 됩니다.
위 공지 사힝을 참고해 주세요
(낭송용 자유시 31편)
공광규 순두부찌개
권택명 비지찌개
권지현 숲해설가
김상용 남으로 창을 내겠소
김용택 꼬막조개
김종길 성탄제
김현민 마늘을 까면서
노향림 오이장아찌
박주택 어리굴젓
서정주 국화 옆에서
신경림 농무
신달자 선지해장국
오세영 비빕밤
윤동주 별 헤는 밤
이근배 떡꾹
이상국 국수가 먹고 싶다
이승하 청국장
이어령 감자반
이육사 청포도
이원규 발톱마다 꽃등불-일생 단 한 편의 시
이정록 간장게장
이하석 따로국밥
이향희 봄날
이화은 산나물
조성식 가족
조의연 쟁기질
정지용 향수
정호승 산낙지
최옥향 호두, 그 기억의 방
허영자 도다리쑥국
허형만 낙지볶음
순두부찌개 / 공광규
순두부는 부드럽고 연하고 순해서
조금만 건드려도 부서지고 뭉개지기 쉬운 뇌 같은 것
마음 같은 것
연인의 입술이나 덜 익은 사랑 같은 것
그래서 처음에는 약한 불로 요리를 시작해야 하지
사랑의 처음처럼 약한 불에 참기름과 고추를 볶아 고추기름을 만들고
다음엔 좀 진전된 사랑처럼 센 불에 돼지고기를
돼지고기가 없으면 쇠고기를 볶아 입맛을 두텁게 하지
거기에 물은 붓고 마음처럼 잘 끓이면
양념으로 파와 바지락을 넣고 순두부를 넣으면 되지
계란은 넣어도 되고 안 넣어도 되고 요리사 맘대로
소시지를 넣으면 부대순두부찌개
김치를 넣으면 김치순두부찌개
만두를 넣으면 만두순두부찌개
버섯을 넣으면 버섯순두부찌개
들깨를 넣으면 들깨순두부찌개
굴이나 새우나 주꾸미를 넣으면 해물순두부찌개
사랑에 무르익은 애인처럼 부드럽고 연하고 순하여
다른 것과도 잘 어울리는 순두부는 입술의 맛
그러나 급하게 먹으면 입에 화상을 입을 수 있지
급한 사랑처럼
그래서 후후 불면서 먹어야 해
살갗에 불어오는 봄바람 흉내를 내며
비지찌개 / 권택명
수십 년래의 혹한이라고
구석 선반의 먼지 쓴 TV가 뉴스를 전하고 있는 사이
보글보글
황달 걸린 흰자위처럼 노리끼리한
비지찌개가 끓는다
언 손 비비고 들어온 어깨 처진 사내들
김 서린 안경 너머로
컬러풀한 신품 막걸리잔 부딪치며
그래도 호기롭게 원샷을 한다
포도청 같은 목구멍을 달래는 순한 알코올의 기운
콩비지묵은 김치 돼지고기 양파 마늘 새우젓
여리고 착한 것들 질그릇 냄비 안에서 사이좋게 섞이며
싼 게 비지떡 신세에서
섬유질 단백질에
한 많던 세월 밤새워 두부 만드시던
아아 이미 지상에는 없는 어머니,
고향의 그리움까지 섞이어
웰빙 건강식 대접받는다고,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라고
지글지글
힘차게 끓어 넘친다
숲 해설가 / 권지현
휘돌던 매 부리내린 능선에
나무구름 풀구름 흐르고
바위틈 얼비치는 물빛 건너온
숲 해설가 어깨에
날아와 앉는, 옥색긴꼬리산누에나방
산초나무 나란히 사람들 멈추어 선다
저기 양 팔을 층층이 펼친 건 층층나무구요,
이건 누리장나무, 뒷간에 심어 냄새를 중화했지요
잎을 뜯어 냄새 맡아 보세요
산뽕나무 가지에서 머리 들고 돌아보는
구름표범나비 애벌레, 눈 사이 일렁인다
잎새 건네받은 얼굴에 푸른 수액이 돌아
촉지도 읽듯 나뭇결 더듬대며 쓸어보는 사람들,
양평 봉미산이 들어 올린 잣나무 사이로
다래덩굴 타고 내린다
은빛 가지 틈틈 부신 해, 머리 위에서 화선지를 펼치고
바람에 결 다듬은 잎새를 뒤집은 숲으로
호랑지빠귀 푸르르르 날아올라
촘촘히 타래 풀리는 빛,
나무뿌리 밑으로 플러그를 꽂는다
산 아래 굽어보던 자작나무가
비탈 얽어 내린 뿌리를 땅껍질 위로 차고 오른다
남으로 창을 내겠소 / 김 상 용
남으로 창을 내겠소
밭이 한참갈이
괭이로 파고
호미론 풀을 매지오
구름이 꼬인다 갈리 있소
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건
웃지요
꼬막조개 / 김용택
동네 사람들은
재첩을 꼬막조개라고 불렀다.
커다란 바위 뒤 물 속
잔 자갈들 속에서 살았다.
아이들 엄지손톱만 한 것부터
아버지 엄지손톱만 한 것까지 있었다.
어쩌다가 다슬기 속에 꼬막조개가 있으면
건져 마당에다가 던져 버렸다.
꼬막조개가 있으면 다슬기 국물이 파랗지 않고
뽀얀했다.
강에 큰물이 불면
꼬막조개 껍질이
둥둥 떠내려갔다.
어느 해부턴가
꼬막조개가 앞강에서 사라졌다.
어른이 되어 하동에 갔더니
온통 재첩국 집이었다.
나는 재첩이 무엇인지 그때 알았다.
우리 동네에서 사라진
꼬막조개가 하동에서
재첩이 되어 있었다,
시원하고 맛있었다.
성탄제 / 김종길
어두운 방 안엔
바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로이 잦아드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藥)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 오신
그 붉은 산수유 열매ㅡ.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승,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열(熱)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그 날 밤이 어쩌면 성탄제(聖誕祭)의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 새 나도
그 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옛 것이란 거의 찾아볼 길 없는
성탄제 가까운 도시에는
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서러운 서른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 속에 따오신 산수유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일까.
마늘을 까면서 / 김현민
겨울을 잘 넘겼는지
올해 시집살이 참을성이 있었나 속이야기 좀 들어보자
세상 바닥 같은 신문지 펴서 불러 모은 때 묻은 집합체
허물벗기는 작업이 시작된다, 하나 둘 신체검사를 하듯
숨긴 몸들을 두루두루 만져본다
쌀쌀한 손의 감촉은 벌써 탄력을 잃었다
체질도 변했는지 맛조차 톡 쏘는 것을 모른다
겨울 내내 우울히 드러누웠는지 슬그머니 부스스한 얼굴을 내민다
잘 들지 않는 칼로 먼저 머리채부터 잘라주마
빗지도 않아 엉킨 파마끼 남은 곱슬머리가 툭 떨어진다
봄에는 산뜻하게 긴 머리 짧게 커트해야 기분의 좋지
꼭 다문 입을 성급히 벌려보니 사이사이 썩은 이가 보인다
하기야 이제 이빨도 자주 아릴 나이겠네
다행히도 성한 것이 더 많은 사랑스러움이 꼭
가짜 다이아몬드 같다면 또는 덜 익은 석류알처럼 보여
아직 쓸만한 모양새 남아 있구나
지저분한 얼굴을 깔끔히 씻으면 윤기 없는 허깨비 탈을 벗으면
아직 나름대로 독특한 냄새 손 끝에 묻어난다기에
모두 싫어하지만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일찍 부름 받은 일꾼이었다
닦고 씻는 재주밖에 없는 어미의 불규칙한 갱년기의 표정들
그래 겨울나기가 힘들었다 말하지 마라
언제가 귀한 양념이 자리란다
전문가도 젊어지는 시대를 살아가면서
소외된 쭉정이처럼 날아가지 말아야지
쭉정이는 부피만 많고 근사해 보인다
이렇게 한 겨울을 지나면서
빈 껍질 안에 갇혀서 먼지 안에 들어서
가지 못한 곳이 많다 해도
하지 못한 것이 많았다고 해서 잘못 산 것은 아니다
몇 개의 희망이라도 건질 수 있는 때
껍데기 속의 즐거움이 젊은 너희를 다스린다
좋은 씨종자를 남기는 희생으로
그렇게 봄을 맞는 자도 많이 않을 것이다
오이장아찌 / 노향림
남도의 인심은 후해서 남정네들은 저녁이면
싸리나무 낮은 울타리 너머로 이웃들을 불러 모은다.
“어이, 막걸리나 한 잔 함세”
“여보, 장아찌 후딱 내와요 잉”
사내가 말하면 아내는 잽싸게 뒤란 장독대로 달려간다.
꺼낸 오이장아찌를 잘 씻어 정구지에서
박자 맞추듯 도마에 써는 소리 정겹다.
막사발과 막걸리 주전자를 반상에 함께 올려
대청마루로 내가면 동네 남정네들은
어느덧 자리에 정좌해 기다리고 있다.
따뜻한 남도의 유별난 기후가 실한 오이를 잘 자라게 해
집집의 장독대엔 큰 오이장아찌 장독이 따로 놓여 있다.
오이 거둬들이는 일은 김장만큼이나 큰 일 년 농사,
그것들은 절반으로 쪼개어져 소금에 알맞게 절인 뒤
소쿠리에 담아 장독대 위에 놓고 볕에 잘 말린 뒤
술 담그고 남은 술지게미를 넣은 항아리에
하나하나 박아 넣는다, 남은 오이들은
고추장에 깊숙이 박았다가 꺼내 먹는 맛 맵싸하다.
맵짠 아낙들의 손맛이 빚어내는 남도의 장아찌
아삭아삭 씹는 소리마저 청량해라.
어리굴젓 / 박주택
간월도 바닷물이 섬을 이었다 끊었다 하는 동안
굴은 굴대로 자신의 목숨을 안으로 삭혀 향을 품었을 것인데
바위도 간월암 추녀 끝을 지나는 구름에 몸을 내주며
일생을 써내려갔을 것인데
서산시 부석면 간월도, 부석사 지나 간월도
그곳에는 갈매기가 내려앉아 마치 바다를 양 날개로 떠미는 것 같고
생이란 생을 가볍게 떠미는 것 같고
햇볕으로 구름으로 풍랑으로 달빛에 절여
굴은 싱싱하도록 녹진거리기도 하는데
벌겋게 깻잎에 받쳐 올라온 어리굴젓
밥상 앞 고이는 침을 삼키며 젓가락을 들 때
고인 침과 함께 길게 빼문 혀 위에 얹히는 어리굴젓
하얀 쌀밥에 섞어 우물거리며 문득 밖을 바라보는 순간
삭힌 것들이 주는 시큼하고도 달달한 것은
한사코 갯마을 노인들을 닮아 있다
소설 몇 권을 녹인 주름을 닮아 있다
국화 옆에서 / 서정주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농무(農舞) / 신경림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 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 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뿐
처녀 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 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라리를 불꺼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꺼나
선지해장국 / 신달자
한 사내가 근질근질한 등을 숙이고 걸어갑니다
새벽까지 마신 소주가 아직 온몸에 절망을 풍기는
저 사내
욕을 퍼마시고 세상의 원망을 퍼마시고
마누라와 자식까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퍼마시다가
누구를 향해 화를 내는지 두리번거리다 다시 한잔
드디어 자신의 꿈도 씹지도 못한 채 꿀꺽 넘겨버린
저 사내
으슥으슥 얼음이 박힌 바람이 몰아치는 청진동 길을
쿨럭쿨럭 기침을 하며 걸어가다가
바람처럼 ‘선지해장국’ 집으로 빨려들어갑니다
야릇한 미소를 문지르며 진한 희망 냄새 나는
뜨거운 해장국 한 그릇을 받아 드는데
소의 피, 선지 한 숟가락을 물컹하게 입 안으로
우거지 한 숟가락을 들판같이 벌린 입 안으로
속풀이 해장국을 한 번에 후루룩 꿀꺽 마셔버리는데
그 사내 얼굴빛 한번 시원하게 붉으레합니다
구겨진 가난도 깡소주의 뒤틀림도 다 사라지고
속 터지는 외로움도 잠시 풀리는데
아이구 그 선짓국 한 그릇 참 극락 밥이네
어디서 술로 밤을 지샌 것일까 구석진 자리
울음 꽉 깨무는 한 여자도
마지막 국물을 목을 뒤로 젖힌 채 마시다가
마른 눈물을 다시 한 번 문지르는데
쓰린 가슴에 곪은 사연들이 술술 사라지는데
여자는 빈 해장국 오지그릇을
부처인 듯 두 손 모으고 해장국 수행 끝을
희디흰 미소로 마무리를 하는데.....
비빔밥 / 오세영
음식 나라에선
비빔밥이 민주국가다.
콩나물과 시금치와 당근과 버섯과 고사리와 도라지와
소고기와 달걀ㅡ이 똑같이 평등하다.
육류 위에 채소 없고
채소 위에 육류 없는 그 식자재
이 나라에선 모두가 밥권을 존중한다.
음식 나라에선
비빔밥이 공화국이다.
콩나물은 시금치와, 당근은 고사리와
소고기는 콩나물과 더불어 함께 살줄을 안다.
육류 없이 채소 없고
채소 없이 육류 없는 그 공동체 조리법
이 나라에선 아무도 홀로 살지 않는다.
음식 나라에선
비빔밥이 복지국가다.
각자 식자재가 조금씩 양보하고,
각자 조미료가 조금씩 희생하여
다섯 가지 색과 향과 맛으로 우러내는
그 속 깊은 영양가.
이 나라에선 어느 누구도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다.
아아, 음식나라에선
한국이 민주주의다.
한국의 비빔밥이 민주주의다.
별 헤는 밤 / 윤동주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憧憬)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스라이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서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떡 국 / 이근배
까치설날이면 우리 동네 삼꽃마을
김 구장댁 마당의 발동기가
숨가쁘게 통통거렸다
집집마다 시루에서 쪄낸 쌀밥을 이고 지고 와서
발동기로 떡가래를 뽑아 가느라 붐볐다
우리 집 박 서방이 한 짐 날라 온
떡가래를 협도로 써는 일은 내 몫이었다
종갓집 맏며느리인 어머니는 밤늦도록
오대봉사 차례상에 올리는
제수준비를 해놓고는
외동아들 설빔으로 솜바지저고리 조끼까지
손바느질로 끝내느라 꼬박 밤을 밝히셨다
차례를 지내고 어른들께 세배를 드리고
온가족이 둘러앉아 먹는 한 그릇 떡국은
우리네 가장 큰 명절인 설날 아침에만 맛볼 수 있는
축제의식의 아주 맛있는 별미였다
“떡국을 많이 먹으면 죽는단다”
할머니의 우스개 말씀처럼 떡국 한 그릇은 나이 한 살
떡국 먹고 나이 먹고 떡국 먹고 키가 크고
잠자리에 들면서 손꼽아 기다리던
설날은 떡국 먹는 날
먹은 나이 다 내려놓고 돌아갔으면
어머니가 지어주신 새 한복 입고
조상님께 절하던 그 아침으로
국수가 먹고 싶다. / 이상국
사는 일은
밥처럼 물리지 않는 것이라지만
때로는 허름한 식당에서
어머니 같은 여자가 끓여 주는
국수가 먹고 싶다
삶의 모서리에서 마음을 다치고
길거리에 나서면
고향 장거리 길로
소 팔고 돌아오듯
뒷모습이 허전한 사람들과
국수가 먹고 싶다
세상은 큰 잔칫집 같아도
어느 곳에선가
늘 울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
마음의 문들은 닫히고
어둠이 허기 같은 저녁
눈물자국 때문에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사람들과
따뜻한 국수가 먹고 싶다
청국장 / 이승하
할머니가 메주를 뜨는 날은
온 동네에 고약한 냄새가 퍼지는 날이었다
할머니가 간장을 쑤는 날은
온 동네의 개들이 짖어대는 날이었다
그보다 열 배는 더 고약한 냄새
청국장을 보글보글 끓이는 날은
창문 다 열고 선풍기까지 동원하지만
냄새는 옷에도 몸에도 가방에도 배어
우리는 학교에 가서 얼레리 꼴레리
바지에 똥 싼 아이 취급을 받았다
냄새는 고약하지만 맛은 죽여주는 청국장
할머니 손끝은 참으로 요술쟁이여서
이맛살 찌푸리며 한 숟갈 뜨면
미소가 번지면서 숟갈질이 바빠졌다
메주콩을 더운 물에 불렸다 물을 붓고 푹 끓여
말씬하게 익힌 다음 보온만으로 띄운 청국장
콩 사이사이에 볏짚을 넣고 띄우면
똥 색깔 똥 냄새 할머니처럼 퀴퀴한 청국장
할머니 돌아가신 뒤
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것이 사라졌다
김자반 / 이어령
김을 모르고 서양 사람들은
카본 페이퍼라 한다.
모르시는 말씀. 그건 초록색 바다 밑
몰래 흑진주를 키운 어둠이라네
파도가 가라앉아 한 켜 한 켜 쌓여서
만들어낸 바다의 나이테를 아는가
어느 날 어머니가 김 한장 한장
양념간장을 발라 미각의 켜를 만들 때
하얀 손길을 따라 빛과 바람이 칠해진다네.
내 잠자리의 이불을 개키시듯
내 헌 옷을 빨아 너시듯
장독대의 햇빛에 한 열흘 말리면
김 속으로 태양과 바닷물이 들어와 간을 맞춘다.
김 자반을 씹으면 내 이빨 사이로
여러 켜의 김들이 반응하는 맛의 지층
네모난 하늘과 바다가 찢기는 맛의 평면
이제는 손이 많이 간다고 누구도 만들지 않는
어머니 음식이라네
빈 장독대 앞에서 눈을 감으면
산간 뜰인데도 파도소리가 나고
채반만큼 둥근 태양의 네모난 광채
고향 들판이 덩달아 익어간다네
청포도 / 이육사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 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및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 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도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룰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발톱마다 꽃등불
-일생 단 한 편의 시
이원규
저승에선 산 사람의 발톱만 보인다는데
하늘재 아래 여든아홉 살의 속골댁
다저녁때 헤진 버선을 벗다말고
하이고, 남사시러버라!
몽당 빗자루 두 발을 감춘다
할매요 이 뭐꼬, 바람났능교?
손톱도 아이고 이래 열 발톱에다
봉숭아 꽃물을 들였능교?
산 아래 삼팔장에 콩 팔러 간 할배야
하마 오십 년도 넘었는데
여적지 또 누구를 기다리능교?
아이다, 야야 그기 아이다
대문 밖이 구천인데 내사 뭘 더 바라겄노
한평생 고무신 털신
행여나 오밤중에도 버선발로 지새다가
이래 못난 발톱에 삼세판 꽃물을 들이뿌니
야야, 인자부터는 홀로 저승길
저 캄캄한 길도 꽃등불 환하다카이
간장게장 / 이정록
내 별명은 밥도둑이다. 등딱지는
열 번 넘게 주조한 이각반합이다.
밥 한 그릇 뚝딱! 게눈 감추듯 치워버리는,
이 신비한 밥그릇을 지키려 집게손을 키워왔다.
손이 단단하면 이력은 두툼하다.
복잡한 과거가 아니라 파도를 넘어온 역사다.
양상군자와 더불어 반상군자로
동서고금의 도둑 중에 이대성현이 되었다.
바다 밑바닥을 벼루 삼으니 먹물마저 감미롭다.
음주고행으로 보행법까지 따르는 자들이
발가락까지 쪽쪽 빨며 찬양하는 바다.
내 등딱지를 통해 철통밥그릇을 배워라.
밥그릇은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
큰 그릇이 되려면 지금의 그릇은 버려라.
묵은 밥그릇마저 잘게 부숴 먹어라.
언제든 최선을 다해 게거품을 물어라.
옆걸음과 귓걸음질이 진보를 낳는다.
따로국밥 / 이하석
국밥 먹기란 얼마나 성급한가?
선 채로 먹건 앉아서 먹건 그 뜨거움에 숨을 몰아쉬면서
현실과 꿈, 나와 너, 또는 지나온 곳과 가야 할 곳까지
말아서 후딱 해치우느니.
그러니, 숨을 돌리기 위해 국 따로 밥 따로 해서
국에 밥을 말아 먹건, 밥 먹고 국을 떠먹건
느긋하게 해결하도록 따로국밥을 낸 거다.
얼큰 화끈한 기질 아닌가.
뼈 우려낸 국물과 밥은 한 기운으로
자욱한 김에 싸인다.
이 분지에서는 누구든 그 기운으로 일어선다.
평상에 앉아서 맹더위와 싸울 때나,
장터 언저리에서 매서운 추위와 너나들이 할 때
그 뜨겁고 매운 걸 한사코 들이켠다.
서로 만만치 않은 삶을
그런 자욱함으로 휩싸버린다.
봄 날 / 이향희
일손이 이른 산마을은 아침 해가 길어진다
흥거난 안개의 숲에 갇힌 나무들, 하나 둘 깨어나면
엎드린 길들이 젖은 눈썹 부비며 일어선다
꼬리 흔들며 멍멍이들 하루를 맞으러 달려나가고
빈 툇마루의 한나절, 슬며시 기웃거리는 앞산 봉우리는
겨우내 재워둔 말이라도 하고 싶은 것일까
미끄러운 햇살의 등을 타고 구석구석 몸 푸는 풀씨들
어디서 왔는가 설레는 마음으로 다가앉으면
두꺼운 어둠의 흙벽 뚫고
아래로 아래로 밀어가는 뿌리들의 발길질
풋풋한 봄나물 흔들어 씻듯
묵은 빨래같은 사람들 퀴퀴한 인정도
바지랑대에 내다걸어야 하는 눈 시린 봄날
마늘순 북돋으며 처진 밭이랑 매만지는
어머니의 봄은 잘 씻긴 매주 가라앉히듯
서두르지 않는다
개울물 녹아 논으로 밭으로 스며드는
물의 길처럼
사람의 길을 찾아가고 있는가
저문 들녘 가로지르는 아버지의 잰걸음이
산을 마들고 또 강을 만들어 간다
앞뒷산도 불러들여 마주앉은 저녁탑
말간 된장국에 어리는 잔정들 풀어 놓고
어둑한 길위에 나서서 뒹구는 돌들이 소리 듣는다
이마 문지르며 두리번거리면
흙더미에 덮인 낯익은 얼굴들이 걸어나오고
어깨 미는 밤별들, 침침한 나무그늘 밑을 오래 몰려다닌다
산나물 / 이화은
시집 온 새댁이 산나물 이름 서른 가지 모르면 그 집 식구들 굶어 죽는다는데
ㅡ가죽나무 엄나무 두릅나무 오가피 참나물 참취 곰취 미역취 개미취 머위 고사리 고비 돌나물 우산나물 쇠뜨기 쇠무릎 원추리 방아풀 메꽃 모싯대 비비추 얼레지 홀아비꽃대 노루오줌 환삼덩굴 마타리 상사화 꿩의다리 윤판나물 자리공
촌수 먼 친척 같기도 하고 한 동네 동무 같기도 한 귀에 익은 듯 낯선 이름들
가난한 가장의 착한 반려자처럼 덩그러니 밥 한 그릇
고기반찬 없는 적막한 밥상을 사철 지켜 주던,
생으로 쌈 싸먹고 무쳐 먹고 국 끓여 먹고
말렸다가 나물 귀한 겨울철 묵나물로 먹기도 하지만
그 성질 마냥 착하고 순하기만 한 것은 아니어서
홀로 견뎌낸 산 속 소태 같은 세월
어르고 달래어 그 외로움의 어혈을 풀어 주어야 한다
독을 다스려 약으로 만드는 법을 이 땅의 아낙들은 모두 알고 있으니
간나물 한 접시보다 산나물 한 젓가락이 보약이다
조선간장 파 마늘 다져 넣고 들기름 몇 방울 치면 그만이다
먹고 사는 모든 일에 음양의 조화가 있듯
음지에서 자란 나물과 양지 나물을 함께 섞어 먹는 일
남과 여가 한 이불 덮고 자는 일과 다르지 않으니
이 모든 이치가 또한 손 안에 있다
손맛이다
여자의 맛이며 아내의 맛이며 어머니의 맛이다
삼라만상의 쌈싸름 깊은 맛이 모두 여기에 있다
가 족 / 조성식
집에 들어서면 대문 옆에 헛간이 서고처럼 서 있는데
처마 끝에도 대여목록 카드처럼 여섯 자루의 호미가 꽂혀 있다.
아버지 호미는 장시간 반납하지 않은 책처럼
한번 들고 나가면 며칠씩 밤새고 돌아온다.
산비탈을 다듬는지 자갈밭을 일구는지
듬성듬성 이가 빠져 자루만 조금 길면 삽에 가까운 호미,
그 옆에 어머니 호미는 가장 많이 빌려 보는 연애소설 같다.
테이프 여러 번 붙인 표지에서 파스 냄새가 난다.
빛나는 손잡이에 밥주걱의 둥근 날을 가진 넉넉한 호미,
땅을 파는 일보다 아버지가 파 놓은 흙을
다시 훑어보는 돋보기 알 같은 눈 밝은 호미,
나란히 서 있는 아내와 내 호미는 주말이나 가끔 들고
나가는 장식용 백과사전, 철물점 쇳내도 가시지 않은 두 자루 쇳덩어리,
제대로 땅 한 번 파지 못하고 마늘이나 고구마 살점만 물어뜯는 날선 칼날,
그 옆에 장난처럼 걸려 있는 아이들의 호미가 있는데
할아버지 할머니 밭에 나가실 때 말동무로 따라 나서는
동화책같이 착한 호미가 한집에 산다.
쟁기질 / 조의연
보습의 날이 파고드는 깊이만큼
땅의 살은 일구어진다.
아버지의 한 생애는 비탈밭을 갈아 일구는
쟁기꾼이셨다.
어떤 이는 지금이 어느 시대라고
저 늙은 쟁기꾼은...
하며 의아해했지만
이랴 이랴 워워
내 유년의 들에는 굴레를 등에 맨 황소 목울음 소리가
골짜기를 휘돌아와 깊은 꽃잠을 깨우곤 했다.
한 생을 묵정밭에서
돌멩이를 골라 내고, 얽히고 설킨 세월의 잔 풀뿌리를
써레질로 달래어 심고 또 심으신 씨앗들.
빗물에 흘러내리지 않고 실한 싹을
틔우리라는 믿음으로
생의 줄기에 우리도 함께 심으신 것일까.
이랴
이랴
워-워
당신께서 갈아 오신 수십 년의 뒤엉킨 세월
견디는 일이 사는 뱁이여.
깊이깊이 심어야히여.
입버릇처럼 되뇌이곤 하셨다,
옥토에 떨어져 결실을 맺는 한 알의 영혼을 위해
씨 뿌리는 일만 하신 예수님을 닮으시려는 것이었을까.
바람이 불어도 넘어지지 않고
짓밟히면 다시 일어나
튼실한 열매 한 개라도 맺으라고
쟁기질로 고르고 고른 찰진 땅에 파헤쳐 심으신 씨.
가물어 다져진 땅.
비틀거리는 이랑길 곧추세우며
어르고 얼러 비탈밭 길을 내시는 일을
평생 땅강아지처럼 마다하지 않으셨다.
쟁기를 잡고 뒤돌아보면 안되는기여.
이랑길이 뒤틀리고 헝클어지는겨.
앞으로 앞으로만 가야혀.
아버지의 쟁기질에
가시의 뿌리 뽑히고, 잡초의 허물, 땅의 허물 벗겨지고
그 땅에 굳게 심어진 나는 실한 싹일까.
뿌리 속에 흑박테리아를 만들어 숨기고
억겁 세월 생명을 품어 안는 흙.
이랴
이랴
워-워-
보습의 날이 파고드는 깊이만큼
땅의 살을 일구어진다.
향수 / 정지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워 고이시는 곳.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초롬 휘적시던 곳.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긴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산낙지 / 정호승
신촌 뒷골목에서 술을 먹더라도
이제는 참기름에 무친 산낙지는 먹지 말자
낡은 플라스틱 접시 위에서
산낙지의 잘려진 발들이 꿈틀대는 동안
바다는 얼마나 서러웠겠니
우리가 산낙지의 다리 하나를 입에 넣어
우물우물거리며 씹어 먹는 동안
바다는 또 얼마나 많은
절벽 아래로 뛰어 내렸겠니
산낙지의 죽음에도 품위가 필요하다
산낙지는 죽어가면서도 바다를 그리워한다
온몸이 토막토막 난 채로
산낙지가 있는 힘을 다해 꿈틀대는 것은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바다의 어머니를 보려는 것이다
호두, 그 기억의 방 / 최옥향
굴곡진 삶
지도위의 협곡같은 몸을
동그랗게 말아 안은 둥근 동굴의 소리를 듣는다
어디 하나 싹 틔울 씨눈조차 보이지 않게
으스러져라 껴안고
골마다 바람도 없이 풍장되어 가던
깜깜한 벽 속의 간극을 재어 보던 소리
늙은 동굴 같은 안방에선
언제나 할아버지의 깊은 시름을 알리는
염주 굴리던 소리가 났었지
손수 앉힌 마당의 징검돌을 건너면
그 끝에서 빛나던 항아리들처럼
한때는 고소한 젖빛 냄새로 흐르던 방들
다시는 정정한 한 그루 나무로 서지 못한 채
오랜 세월을 앉은뱅이로 홀로 견뎌야 했던
목수였던 당신의 호두빛 깊은 주름
달그락, 달그락
둥근 방문 고리를 흔드는 바람소리와
집 모퉁이에 서서 늙어 버린 지팡이처럼
언제나 마른 삭정이 냄새가 나던 그 기억의 방
툭, 딱딱하게 굳은 손아귀에서 마지막 떨어져 구르다
목침 위에 나란히 놓였던
유난히 반질거리던 그 두 알의 호두
결코 소멸되지 않을 단단한 기억 하나가
지금 흔들리며 걷는 내 호주머니 속에서
자꾸만 환한 밖을 기웃거리고 있다.
도다리 쑥국 / 허영자
우리들 마음속에
저 무채색의 겨울이
아직도 도사리고 있거든
바닷길 푸르게 열리는
남쪽 어느 포구 마을을 찾아가자
사량도 맑은 바람 속에 자란
쑥 한 소쿠리
욕지도 깊은 바다에서 건져 올린
펄펄 뛰는 도다리로
도다리 쑥국을 한 솥 끓이자
쑥은 민초들 구황의 푸성귀
곰이 변신하여
여자가 되고 어머니가 되는
마법의 약초
도다리 쑥국 한 그릇이면
밥상 위에는 이른 봄이
아지랑이로 피어오르고
우리 마음 속
사나운 북풍은 숨을 죽이리
도다리 쑥국 한 그릇이면
목마름도 배고픔도
문득 가시고
우리 마음 속
꽝꽝한 얼음은 녹아내리리.
낙지볶음 / 허형만
자고로 힘이 떨어진 소에게
낙지 한 마리만 먹이면 뽈딱 일어선다 했다
살아 있을 때 칼로 온몸을 잘라도 한참을 꿈틀거리는
머리에 붙은 팔이 여덟 개라 팔팔한 낙지
흡반으로 조개를 잡아먹을 만큼 강인하면서도
성질은 순하고 독이 없고 그 맛은 달고
비늘도 없고 뼈도 없는 낙지
내가 알기로 낙지 중의 낙지는 역시
전라남도 무안 앞바다 갯뻘 속에서 숨쉬는
새까만 뻘낙지, 세발낙지가 최고라
산낙지는 산낙지대로, 낙지전골은 전골대로 제 맛이지만
소금으로 문질러 씻어낸 낙지와 입맛 돋는 고추장
다진 생강과 온갖 양념을 잘 버무려
자글자글 볶아낸 낙지볶음에 소주 한 잔 곁들이면
맛 중의 맛이요 보양 중의 보양이니
자고로 기운 없고 힘이 부친 사람이
낙지 한 마리만 먹으면 힘이 불끈 솟는다 했다
(낭송용 시조 31편)
권갑하 아버지 호박잎
김삼환 복매운탕을 앞에 놓고
김상옥 백자부
김상옥 봉선화
민병도 흙
민병찬 딸을 보내고
문무학 청보리
변현상 환한 휴식
서정택 냉이곷 아내
신동익 콩 낱알을 주우며
신현배 동치미
유재영 다시 월정리에서
윤선도 오우가
이남순 장날
이두의 작약의 이름
이병기 비
이상범 오두막집행3
이승현 봄빛 밥상
이은상 가고파
이종문 아버지가 서 계시네
이지엽 해남에서 온 편지
이호우 달밤
이호우 살구꽃 핀 마을
임종찬 문을 바르며
전연희 무말랭리
정용국 시래기나물밥
정완영 고향생각
정완영 연과 바람
조동화 눈 내리는 밤
조운 구룡폭포
최영효 봄편지
아버지 호박잎 / 권갑하
연둣빛 더듬이 세워 아득한 허공 길을
팍팍한 돌서덜엔 환히 밝힌 호롱불꽃
덩굴손 움켜쥔 사랑 동글동글 맺어 놓고
김 모락모락 나는 흰쌀밥을 쌈해 먹는
밥물에 살짝 쪄낸 풋풋한 그 맛이란
강된장 구수한 향에 꺼끌꺼끌한 식감까지
잔칫집 돼지고기 시장에선 꽁치 조기
천렵 갈 땐 된장 고추장 주섬주섬 싸가던
넓적한 음식보자긴 가난마저 감쌌었지
넘실남실 넌출넌출 타고 넘는 한 생이라
후두둑! 빗발 쳐도 온몸으로 받아내는
뭉툭한 아버님 손엔 속정 가득 넘쳤어라
복 매운탕을 앞에 놓고 / 김 삼 환
그 사람 눈 아래에 복 매운탕이 끓고 있다
콩나물과 미나리가 뜨겁게 어울려서
한 순간 속으로 삭힌 말이 부글부글 올라온다
맵고 짜게 살아 온 지난 길의 흔적마다
한 그릇 뜨거운 탕이 울컥, 목에 걸려
휩쓸려 흐르지 못한 가시처럼 남는다
뼈마디 사이사이 부스러기 살을 바를 때
한때는 다부지게 독을 품고 살았을
복어의 눈동자에도 독 기운이 빠진다
펄펄 끓는 삶을 다시 살아 보고 싶다고
누구 몸에 젖어 들어 쓸쓸함을 해독할지
흰 벽면 복어 그림과 말을 하는 그 사람
백자부(白磁賦) / 김상옥
찬서리 눈보라에 절개 외려 푸르르고
바람이 절로 이는 소나무 굽은 가지
이제 막 백학 한쌍이 앉아 깃을 접는다.
드높은 부연 끝에 풍경소리 들리던 날
몹사리 기다리던 그린 임이 오셨을 제
꽃 아래 빚은 그 술을 여기 담아 오도다.
갸우숙 바위 틈에 불로초 돋아나고
채운 비껴 날고 시냇물도 흐르는데
아직도 사슴 한 마리 숲을 뛰어드노다.
불 속에 구워 내도 얼음같이 하얀 살결!
티 하나 내려와도 그대로 흠이 지다
흙 속에 잃은 그날은 이리 순박하도다.
봉선화 / 김 상 옥
비 오자 장독간에 봉선화 반만 벌어
해마다 피는 꽃을 나만 두고 볼 것인가
세세한 사연을 적어 누님께로 보내자
누님이 편지 보며 하마 울까 웃으실까
눈앞에 삼삼이는 고향집을 그리시고
손톱에 꽃물 들이던 그날 생각하시리
양지에 마주 앉아 실로 찬찬 매어 주던
하얀 손 가락 가락이 연붉은 그 손톱을
지금은 꿈속에 본 듯 힘줄만이 서누나
흙 / 민 병 도
어머니는 칠십 평생 흙을 파며 사셨다
손에 흙이 묻어야 목에 밥이 넘어간다며
날마다 빈들을 깨워 온 몸으로 안았다
원하는 3할 치는 밥을 주고 꽃을 주던
세상과의 이별을 위해 어머니가 흙을 놓자
가만히 흙이 다가와 긴 노고를 감싸주었다
언제나 땀에 젖어 하나도 젖지 않은
누군가의 몸이었을, 누군가의 어머니였을
흙이여 너의 몸에서 어머니의 살내가 난다
딸을 보내고 2 / 민병찬
그 날은 너 보내고 그냥 덤덤 하다못해
눈물이 아니 나서 정 모자란 탓만 했다
천천히 슬픔이 올 줄을 내가 미처 모르고서.
조석으로 마주하며 어린양만 여기다가
지아비, 시부모랑 남의 권솔 되어가니
내 언제 나목이 된 양 팔이 이리 허전하냐.
내게선 남은 날이 너에게는 오는 날이
언젠가는 엇갈리게 작정된 길이거니
아직은 이별이라 말고 연습이라 해 두자.
잘 살아란 한 마디는 가슴에 묻어 두고
꽃다운 네 젊음을 굳게 믿고 생략했다
더러는 바람 센 날도 있는 줄을 알거라.
청보리 / 문무학
도라지 꽃빛 입술로 봄을 씹던 누부야
앞들 논 서마지기 보릿골 이랑마다
긴긴해 허기를 묻고 꿈을 캐고 있었제.
꽃불 타던 산허리 뻐꾸기 봄을 울면
아지랑이 아물아물 나른한 한나절을
누부야 청보리 같이 그래 살고 싶었제.
환한 휴식 / 변현상
낡은 장화 한 켤레가 마당귀에 나와 있다
기미낀 콧잔등이 오독이 아니었다
뒷굽은 삐딱하지만 반듯한 냄새였다
젊음을 증언하던 문서들은 필요 없다
오로지 주인 위해 논밭을 밟고 온 길
어둠은 별을 불러와 생채기를 다독였다
시드는 걸 생각하며 피운 꽃이 있었던가
아낌없이 다 준 삶이 눈부시게 빛이 나네
환하게 앉은 그 자리 달빛도 쉬고 있다.
냉이꽃 아내 / 서 정 택
아파도 아프단 말 한마디 못하고
기도하듯 웅크린 채 고철을 줍는
그 아내 우묵한 등이
자질자질 저문다
일을 사랑했으되, 오래 할 수 없었던
왕년을 전후하여 들이닥친 매운 한파
일 하나 못 가진 죄로
나는 고철이었다
그렇게 겨울 오고 또 몇 번의 겨울 가고
집게가 그를 들어 바구니에 던졌을 때
보았다, 고철을 찢고
흰 꽃을 올린 당신을
콩 낱알을 주우며 / 신 동 익
늙바탕에 할 일 없어 텃밭을 일구고
그루밭에 심은 콩이 따닥따닥 익어간다.
적막은 일흔아홉 평 심심파적 낙이로세.
“목수는 낱못을 줍지 않는다.” 하였던가
그루에서 떨어진 콩 낱알을 줍나니
아이들 사탕 값도 안 되는 일, 농심을 줍는다.
한 알에 감사하니 두 알에 은혜롭고
세 알 네 알 보람이요, 다섯 여섯 흥감 터라
자연이 주신 흑진주 오지랖에 안는다.
동치미 / 신현배
1
할머니 살아 생전
눈물 많은 섬을 놓아
적당한 소금기로
간을 맞춘 겨울 바다,
그 바다 얕고 좁아도
다도해를 이루었네.
2
섬과 섬 사이사이
부표로 띄운 댓잎
동지섣달 서릿바람
서걱서걱 밟고 가면
바람에 씻긴 섬들이
성에 같은 눈을 뜬다.
3
한 사발 넋을 부어
차오르는 설움이여.
썰물되어 떠난 얼굴
지워진 그 자리에
서릿빛 그리움으로
목이 메는 물소리.
다시 월정리에서 / 유재영
정강이 말간 곤충 반점으로 울고 있는
등 굽은 언덕 아래 마당 깊은 집이 한 채
나뭇잎 지는 소리가 작은 창을 가리고
갈대꽃 하얀 바람 목이 쉬는 저문 강을
집 나간 소식들이 말없이 건너온다
내 생애 깊은 적막도 모로 눕는 월정리.
오우가 / 윤 선 도
내 벗이 몇인가 하니 수석水石과 송죽松竹이라
동산東山에 달 오르니 그 더욱 반갑구나
두어라 이 다섯 밖에 또 더하여 무엇하리
구름 빚이 좋다 하나 검기를 자주 한다
바람 소리 맑다 하나 그칠 때가 많구나
좋고도 그칠 때가 없는 것은 물뿐인가 하노라
꽃은 무슨 일로 피면서 쉬이 지고
풀은 어이하여 푸르는 듯 누르나니
아마도 변치 않을 것은 바위뿐인가 하노라
더우면 꽃 피고 추우면 잎 지거늘
솔아 너는 어찌 눈서리를 모르느냐
구천九泉에 뿌리 곧은 줄을 그것으로 아노라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곧기는 누가 시키며 속은 어찌 비었느냐
저렇게 사시四時에 푸르니 그를 좋아 하노라
작은 것이 높이 떠서 만물을 다 비추니
밤중의 광명光明이 너 만한 이 또 있느냐
보고도 말 아니 하니 내 벗인가 하노라
장날 / 이남순
꿈결에도 벼리고 삭혀 알알이 익힌 감을
가야장날 난전 길에 소담스레 펼쳐놓고
보이소 감 좀 사 가이소 억수 달고 맛있어예
함지박 찬밥 한술 그마저도 건너뛴 채
혀 닳은 하루해가 방어산을 넘어갈 때
발치에 쪼그린 아이 집에 가자 보채댄다
이 발에서 저 발치로 채이고 동그라져
옆구리 터진 감을 제살 벤 듯 끌어안고 `
어둑살 난장에 서서 동동대는 울 어머니
작약의 이름 / 이 두 의
노숙의 피로를 감춘 민낯의 안개들이
담쟁이 오르다만 창가를 기웃댄다
어머니 먼 길 가신 뒤 고요마저 끊긴 빈 집
스멀스멀 흩어지는 안개를 따라가면
뭉개진 손금 위에 두고 가신 꽃 한 송이
봄처럼 부지런해라 그 말씀, 울컥하다
사람이 가고 나면 그림자도 거둬지고
사랑도 흩어져서 꽃잎처럼 지겠지만
작약의 이름 하나로 지키는 봄이 아프다
비 / 이병기
짐을 매어 놓고 떠나려 하시는 이날
어두운 새벽부터 시름없이 내리는 비
내일도 내리오소서 연일 두고 오소서
부디 머나먼 길 떠나지 마오시라
날이 저물도록 시름없이 내리는 비
저으기 말리는 정은 나보다도 더하오
잡았던 그 소매를 뿌리치고 떠나신다
갑자기 꿈을 깨니 반가운 빗소리라
매어 둔 짐을 보고는 눈을 도로 감으오
오두막집행 3 / 이상범
눈 내리는 밤엔
변두리행 버스를 타자
마른 꽃 다발다발
바람의 눈망울로
흰 커튼 사이로 불빛이
손짓하는 오두막집.
소꿉살림 창가에 앉아
시를 호호 불어대고
산냄새 살냄새 사이
시집들이 키를 재는
고뇌도 갈색으로 익어
잎이 지는 작은 방.
때로 미친 바람이
산자락을 뒤흔들어도
색종이 꼬깃꼬깃
아픈 시가 눈뜨는 곳
저물면 끈끈한 숨결이
놀라 깨는 작은 집.
봄빛 밥상 / 이승현
우수쯤 오는 빗소리는 달래빛을 닮았다
그 파장 촉촉함에 환해지는 동강할미꽃
온 들녘 향긋한 밥상을 받아 안는 시간이다.
몇 차례 마실 오실 꽃샘추위 손님꺼정
서운치 않게 대접하려 분주한 새아씨 쑥
제 몫의 밭두렁만큼 연두 초록 수를 놓고
윗방에서 아랫방으로 겨우내 몸살 하시던
팔순 어머니도 냉이국에 입맛 다실 때
쪼로롱 구르는 물방울 봄노래를 품는다.
가고파 / 이 은상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이 눈에 보이네
꿈엔들 잊으리오 그 잔잔한 고향 바다
지금도 그 물새들 날으리 가고파라 가고파.
어릴 제 같이 놀던 그 동무들 그리워라.
어디 간들 잊으리오 그 뛰놀던 고향 동무
오늘은 다 무얼 하는고 보고파라 보고파.
그 물새 그 동무들 고향에 다 있는데
나는 왜 어이타가 떠나 살게 되었는고
온갖 것 다 뿌리치고 돌아갈까 돌아가.
가서 한데 얼려 옛날같이 살고지라
내 마음 색동옷 입혀 웃고 웃고 지내고저
그 날 그 눈물 없던 때를 찾아가자 찾아가.
아버지가 서 계시네 / 이 종 문
순애야~ 날 부르는 쩌렁쩌렁 고함 소리
무심코 내다보니 대운동장 한복판에
쌀 한 말 짊어지시고 아버지가 서 계셨다
어구야꾸 쏟아지는 싸락눈을 맞으시며
새끼대이 멜빵으로 쌀 한 말 짊어지고
순애야~ 순애 어딨노? 외치시는 것이었다
너무도 황당하고 또 하도나 부끄러워
모른 척 엎드렸는데 드르륵 문을 열고
쌀 한 말 지신 아버지 우리 반에 나타났다
순애야, 니는 대체 대답을 와 안 하노
대구에 오는 김에 쌀 한 말 지고 왔다
이 쌀밥 묵은 힘으로 더 열심히 공부해래
하시던 그 아버지 무덤 속에 계시는데
싸락눈 내리시네, 흰 쌀밥 같은 눈이,
쌀 한 말 짊어지시고 아버지가 서 계시네
해남에서 온 편지 / 이지엽
아홉배미 길 질컥질컥해서
오늘도 삭신 꾹꾹 쑤신다.
아가 서울 가는 인편에 쌀 조깐 부친다 비민하것냐만 그래도 잘 챙겨묵거라 아이엠 에픈가 원가가 징허긴 징헌갑다 느그 오래비도 존화로만 기별 딸랑하고 지난 설에도 안와브럿다 애비가 알믄 배락을 칠 것인디 그 냥반 까무잡잡하던 낯짝도 인자는 가뭇가뭇하다 나도 얼릉 따라 나서야 것는디 모진 것이 목숨이라 이도저도 못하고 그러냐 안.
쑥 한 바구리 캐와 따듬다 말고 쏘주 한 잔 혔다 지랄 놈의 농사는 지먼 뭣하냐 그래도 자석들한테 팥이란 돈부, 깨, 콩, 고추 보내는 재미였는디 너 할코 종신서원이라니……그것은 하느님하고 갤혼하는 것이라는디……더 살기 팍팍해서 어째야 쓸란가 모르것다 너는 이 에미더러 보고 자퍼도 꾹 전디라고 했는디 달구똥 마냥 니 생각 끈하다
복사꽃 저리 환하게 핀 것이
혼자 볼랑께 영 아깝다야.
달밤 / 이호우
낙동강(洛東江) 빈 나루에 달빛이 푸릅니다.
무엔지 그리운 밤 지향 없이 가고파서
흐르는 금빛 노을에 배를 맡겨 봅니다.
낯익은 풍경이되 달 아래 고쳐 보니
돌아올 기약 없는 먼 길이나 떠나온 듯
뒤지는 들과 산들이 돌아돌아 뵙니다.
아득히 그림 속에 정화(淨化)된 초가집들
할머니 조웅전(趙雄傳)에 잠들던 그날 밤도
할버진 율(律) 지으시고 달이 밝았더이다.
미움도 더러움도 아름다운 사랑으로
온 세상 쉬는 숨결 한 갈래로 맑습니다.
차라리 외로울망정 이 밤 더디 새소서.
살구꽃 핀 마을 / 이호우
살구꽃 핀 마을은 어디나 고향 같다
만나는 사람마다 등이라도 치고지고
뉘집을 들어서면은 반겨 아니 맞으리
바람 없는 밤을 꽃그늘에 달이 오면
술 익는 초당마다 정이 더욱 익으리니
나그네 저무는 날에도 마음 아니 바빠라
문을 바르며 / 임 종 찬
한지로 문을 바르며
국화꽃을 붙여본다
한짝 문엔 댓잎도 붙여
상청(常靑) 봄을 살게하고
나머지 여백의 자리엔
달 실리게 하리라
엎어놓은 문짝위에
종이를 덮어보니
보길도(輔吉島) 옥산(沃産)바다
맑게 이는 포말이여
생활이 여유롭고자
어부가도 적을란다
인생은 짜여진 문살
가로 세로 다듬거니
비애도 애증도 모두
문살 위에 얹어두고
풀 먹인 종이 문지르듯이
어루만져 살일이다.
무말랭이 / 전 연 희
굵게 채친 조선무가 가을볕에 반지하다
흰 속살 물기 빠져 보송보송 말라가면
꼬들한 시름 몇 줄이 채반 안에 남는다
질긴 명줄 잇듯 두레상을 지켜오던
손부의 손맛이야 어제처럼 맵짜한데
오래 전 소식이 끊긴 먼 안부가 시리다
손가락 굵은 마디 가시처럼 돋는 심줄
서운할 일 없다 해도 이리 삭은 가슴에야
켜켜이 버무린 양념 기다림을 섞는다
시래기나물밥 / 정 용 국
바람도 몸을 푸는 허수간 처마 밑에
귀뚜리 친구 삼아 밤잠을 설치다가
눈발에 저도 모르게 속마음이 들레고
겨우내 진이 빠진 궁시렁 밥상에는
웬만한 밑반찬도 입맛에 마땅찮아
죄 없는 개다리소반만 말도 없이 늙는다
실하던 살피들을 바람에 다 내주고
바스락 한 줌으로 성불한 이파리가
뭉긋이 물을 머금고 마른 몸을 풀어냈다
모진 바람 한기까지 온 겨울을 담아 낸
구수한 나물밥을 푸근히 받는 저녁
또 한 해 씨앗을 챙기는 바쁜 손이 곱구나
고향 생각 / 정 완 영
쓰르라미 매운 울음이 다 흘러간 극락산 위
내 고향 하늘 빛은 열무김치 서러운 맛
지금도 등 뒤에 걸려 사윌 줄을 모르네
동구 밖 키 큰 장승 십리벌을 다스리고
푸수풀 깊은 곳에 시절 잊은 물레방아
추풍령 드리운 낙조에 한 폭 그림이던 곳
소년은 풀빛을 끌고 세월 속을 갔건만은
버들피리 언덕 위에 두고온 마음 하나
올해도 차마 못잊어 봄을 울고 갔더란다
오솔길 갑사댕기 서러워도 달은 뜨네
꽃가마 울고 넘은 서낭당 제 철이면
생각다 생각다 못해 물이 들던 도라지꽃
가난도 길이 들면 양처럼 어질더라
어머님 곱게 나순 물레줄에 피가 감겨
청산속 감감히 묻혀 등불처럼 가신 사랑
뿌리고 거두어도 가시잖은 억만 시름
고래등 같은 집도 다락 같은 소도 없이
아버님 탄식을 위해 먼 들녘은 비었더라
빙그르 돌고 보면 인생은 회전목마
한 목청 뻐꾸기에 고개 돌린 외사슴아
내 죽어 내 묻힐 땅이 구름밖에 저문다
연과 바람 / 정완영
옛날 우리 마을에서는 동구 밖에 연밭 두고
너울너울 푸른 연잎을 바람결에 실어두고
마치 그 눈푸른 자손들 노니는 듯 지켜봤었다.
연밭에 연잎이 실리면 연이 들어왔다 하고
연밭에 연이 삭으면 연이 떠나갔다 하며
세월도 인심의 영측(盈昃)도 연밭으로 점쳤었다.
더러는 채반만하고 더러는 맷방석만한
직지사 인경소리가 바람 타고 날아와서
연밭에 연잎이 되어 앉는 것도 나는 봤느니.
훗날 석굴암 대불이 가부좌하고 앉아
먼 수평 넘는 돛배나 이 저승의 삼생(三生)이나
동해 저 푸른 연잎을 접는 것도 나는 봤느니.
설사 진흙 바닥에 뿌리 박고 산다 해도
우리들 얻은 백발도 연잎이라 생각하며
바람에 인경 소리를 실어 봄즉 하잖는가.
눈 내리는 밤 / 조 동 화
땅의 부끄러움을 이미 다 보았거니
굳이 남은 것들을 들추어 무엇하리
하늘이 무명옷 한 벌 밤새 지어 입힌다.
지상에 殷盛(은성)하는 어둠보다 더 큰 사랑
한없이 다독이며 안아주는 용서 앞에서
아기의 젖니가 돋듯 태어나는 세상이여.
달과 별이 숨었어도 스스로 차는 밝음
나무들 하나같이 뿔 고운 순록이 되어
한잠 든 마을을 끌고 어디론가 가고 있다.
구룡폭포 / 조운
사람이 몇 생을 닦아야 물이 되며 몇 겁이나 전화해야 금강에 물이 되나! 금강에 물이 되나!
샘도 강도 바다도 말고 옥류(玉流) 수렴(水簾) 진주담(眞珠潭)과 만폭동(萬瀑洞) 다 고만 두고 구름 비 눈과 서리 비로봉 새벽안개 풀 끝에 이슬 되어 구슬구슬 맺혔다가 연주팔담(連珠八潭) 함께 흘러
구룡연(九龍淵) 천척단애(千尺斷崖)에 한번 굴러 보느냐.
봄편지
-5학년2반14번 조옥순 올림
채 영 효
여보 당신, 잘 계셨능교, 보고지꼬 또 보고시퍼쏘
당신이 심고 떠난 울타리 옆 개나리꽃
우째서 혼자 보나시퍼 서글프고 원망스럽소만
진작에 이 글 배워 한 배 가득 띠울라캐도
이제사 터질 듯 말 듯 옹알이를 시작했는데
이놈 글 돌부리처럼 여든 앞길에 채여쌓소
그래도 참깨 콩이 때약벼테 크듯이
낱글이 익어서 되글 대고 말글 댄다고
검지에 힘 꼭꼭 주어 이 편지 쓰느만요
배울 때는 맘속에 없는 말꺼정 할라캔는데
말 다르고 글 달라 뜻대로는 안 대서요
서산 해 산 넘어 가모 바늘 간 데 실 갈라요
당신께 배운 대로 소 한 마리 키우는데
눈빛이 마주칠 때는 꼭 당신 닮아써요
그렁께, 젊은 여자랑은 행여 곁눈질 마시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