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반(小盤)
친정어머니 유품을 정리하러 형제들이 모였다. 가리비처럼 꽉 다문 친정집 현관문을 여니 부유물처럼 흩어졌던 먼지들이 일제히 고개를 든다. 무릎을 가지런히 접어 양반다리를 하고 있던 소반도 번쩍 귀를 세운다. 그도 그럴 것이, 태어나면서부터 사람 손에서 놀던 소반이라 사람의 인기척을 가장 먼저 알아챘으리라.
어머니는 다시 돌아오실 거라고 믿으셨던 걸까. 급하게 병원으로 떠나던 날 흔적이 거실에 그대로 남아있다. 모든 것이 예전 그대로인데 안주인만 없다. 형제들과 분담해 부엌살림을 정리하는데 아까부터 눈에서 떨어지지 않는 것이 있다. 들어오면서부터 눈에 걸렸던 두리반이다.
명절 때 친정에 오면 큰 교자상 두 개를 펴도 자리가 부족해 아이들 밥은 두리반과 소반에 따로 차려야 했다. 아직도 몇 년은 거뜬히 쓸 수 있을 것 같은 두리반은 학창 시절에 책상으로 쓰던 상(床)이다. 공부를 하다 밥때가 되면 밥상으로 변신하고 교회에서 목사님이 신방을 오시면 성경책을 올려놓고 예배를 보기도 했다.
자식들 밥 먹이는 것을 최고의 즐거움으로 여기던 친정어머니는 유독 밥상에 애착했다. 철들 무렵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많이 들은 말도 상(床) 없이 바닥에서 밥 먹지 말라는 거였다. 어머니는 밥상 없이 살면 평생 궁색스러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하셨다.
어머니가 잔소리처럼 매번 밥상을 입에 올리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어머니한테 자매처럼 가깝게 지내는 육촌 동서가 있었다. 어릴 때 아주머니라고 불렀는데 단칸방인 그녀의 집에 가면 아랫목에 널브러진 이불밖에 보이지 않았다. 장롱 하나 없는 방구석은 비키니 옷장이 독차지하고 부엌에는 밥상으로 쓸만한 개다리소반 한 개가 없었다. 누른 국수를 잘 만드는 아주머니가 국수를 삶는 날이면 우리 식구도 같이 먹었는데 그때마다 방바닥에 솥단지를 올려놓고 먹었던 것 같다. 보다 못한 친정어머니가 육각 소반을 마련해주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매한가지로 방바닥에 구부리고 앉아 밥을 먹었다.
변변한 직장 없이 날품 팔아서 먹고사는 삼촌 탓도 있었겠지만, 어머니는 여자가 게으르고 생활력이 없어 그렇게 사는 것이라며. 상다리를 꺾어 앉힌듯한 바닥에 밥그릇을 놓으면 자식들 무릎이 접혀 앞날이 펴지지 않는다고 하셨다. 그래서일까. 삼촌네는 초라한 세간붙이만 남겨 둔 채 야반에 마을을 뜨고 말았다.
가끔 고택을 여행하다 소반을 보면 자연스럽게 친정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중년의 여인상을 의미하는 소반과 어머니의 인생이 겹쳐졌기 때문이리라. 여인의 뒤태를 연상하게 하는 둥근 소반은 삼시 세끼 더운밥을 차려내야만 하는 어머니의 고된 운명마저도 꼭 닮았다.
소반은 어느 집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한 물건이지만, 어머니의 마음처럼 어느 것 하나 건성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없다. 여인들의 신체구조를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소반은 들어 옮기기 편하게 사람의 어깨너비에 맞춘다. 소반 다리에 구멍을 내 멋진 운각을 새기는 것도 상의 힘을 분산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아마도 부엌과 안방이 떨어져 있는 옛날 한옥 구조도 소반 제작에 한 몫하지 않았을까 싶다.
소반은 음식을 놓는 물건이라 음식물이 묻어도 좀이 쓸지 않도록 옻칠을 한다. 친정아버지도 두리반 테두리가 낡고 색이 벗겨지면 수시로 옻칠을 했었다. 식구들의 건강을 염려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담아 옻칠을 하고. 상의 무게를 줄여 어머니들의 고단함을 줄여주려고 가벼운 은행나무를 선택한 것만 봐도 우리 조상들이 얼마나 지혜로운가.
결혼할 때 어머니가 마련해주신 교자상 말고도 육각 소반과 살짝 휜 상다리가 마치 개의 뒷다리처럼 앙증맞은 개다리소반 한 개를 더 준비했다. 차남이지만 장남 역할을 해야만 하는 남편의 무게감 때문이었다.
철철이 시댁의 경사를 챙겨야 하는 우리 집은 신혼 때부터 손님이 많았다. 수시로 모여 복닥거리는 시댁 식구들 때문에 세 개나 되는 상(床)에 물 마를 날이 없었다. 덕분에 나는 시부모님으로부터 세상에서 가장 부지런하고 장한 며느리라는 별명을 얻었다. 하나, 내 자존감을 높여주며 집안을 화기애애하게 만들던 상(床)이 언젠가부터 자취를 감추었다.
양가 부모님이 돌아가시면서 두리반까지 다 내다 버렸기 때문이다. 가족을 이어주던 매개체가 없으니 더는 그 큰 상에 둘러앉을 일이 없을 것 같아서였는데 요즘은 식탁이 비좁아 더러 후회하는 날도 있다.
어머니는 매일 차리는 밥상이 싫증 나지는 않으셨을까. 대충 정리한 그릇들을 매동그리다가 어머니의 숨결이 느껴지는 두리반을 만져본다. 어머니 옆에서 숱한 날들을 보내며 만들어진 손 무늬와 나이테가 잘려 생긴 목리(木理)까지. 세월이 매만지며 늙어가는 것들은 수더분하다. 두리반에서 멸치 넣은 된장찌개가 먹기 싫다고 성내던 남동생의 밥투정과 한 숟가락이라도 더 먹이려는 어머니의 지청구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돌이켜보니, 어머니의 소반은 가족을 위해 음식을 올리는 어머니의 성소이자 기도처였지 싶다. 어머니가 해준 밥을 먹으면 무탈했던 것처럼 소반에는 둥근 모양만큼 자식들이 모나지 않게 세상길과 잘 어울리며 살라는 어머니의 바람도 깃들어 있었다.
새벽마다 곤히 잠든 부엌의 선잠을 깨우며 두리반 가득 자식들의 음식을 채우던 어머니. 밥은 만든 사람의 마음을 먹는 일이니, 인생의 고비마다 그 밥상이 얼마나 든든하고 힘이 됐던가. 어떤 방식으로든 이별을 향해 달려가는 눈바람 속에서도 어머니의 밥상은 늘 온기가 있었다.
감히 생각해보건대. 30년이 넘는 결혼 생활 동안 나를 위해 격식 있게 차려 본 밥상이 기억에 없다. 혼자 먹는 밥도 꼭 상에 차려서 먹으라고 하시던 어머니의 말씀을 왜 유념하지 않았던지. 잘 차려진 밥상으로 지친 마음을 위로하면 다시 일어날 힘이 생긴다고 하시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해 유품 정리를 하면서도 또 목이 멘다.
한동안 손길이 닿지 않았다고 툴툴거리는 소반을 한 번 쓸어내리고 일어서는데 어머니와 늘 함께하던 부엌이 자꾸 말을 걸어온다. 밥상 위 밑반찬처럼 기본으로 깔리는 귀에 익은 소리“푹푹 떠서 든든하게 먹어라”라는 어머니 목소리가 귀울음처럼 나를 울린다.
왜 아니겠는가. 한 여자의 서사가 시작되던 기막힌 자리. 평생 밥상만 차리던 어머니 인생 서사의 가장 큰 줄기를 담당하던 공간이었으니 부엌에 서면 어머니가 더 그립고 소반을 보면 목이 멘다. 평생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것을 낙으로 여기신 어머니가 너무 보고 싶다. 2023년 충북작가 여름호
*눈바람: 인생의 심한 고난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수필과비평 2월호 월평]
주제의식의 구체화와 의미화 / 엄현옥
주제主題는 중심이 되는 문제, 또는 작품을 통해 작가가 나타내고자 하는 기본적인 사상을 말한다. 소재는 주제를 살리기 위해 동원되는 모든 재료이며, 소재 중에서 글의 중심이 되는 것이 제재다. 주제의식의 구체화는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선택된 소재에 대한 자기 해석의 방법이며, 제재를 자기화하는 관점이다. 주제의식의 구체화는 분산된 사유와 중심사상을 수렴하고 작품의 통일성에 기여한다. 수필가는 일상에서 다양한 소재에 대한 접근으로 주제를 구체화한다. 수필의 소재는 일상의 신변잡기에서 얻어낸 단상이나 예측할 수 없는 삶과 사회 현상에서 발견한 철학적 메시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일상에서 얻는 소재일지라도 그것을 어떻게 형상화하느냐에 따라 문학작품이 되거나 단순한 신변잡기에 머무르기도 한다. 수필은 형상의 기록이 아니기 때문에 소재의 나열에 그치기보다 그것들을 하나로 꿰는 통찰력을 통해 주제를 드러낸다. 모든 작품은 저마다의 주제를 담고 있는데 굳이 수필을 ‘주제의 문학’이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시와 소설을 화자를 내세워 말하고 작가는 작품 뒤에 물러나 있지만, 수필은 독자에게 무언가를 직접 말하는 형식에 가깝기 때문이다. 수필에서의 주제는 직·간접적인 경험을 통하여 터득한 인생관이나 자연에서 느낀 주관적인 정서, 생태 보존을 위한 생각이 될 수 있다. 대상을 통한 철학적 사유나 사회 구성원으로서 지나칠 수 없는 사회 문제, 여행이나 답사에서 얻은 소회나 인간의 정신이 갖추어야 할 요소로 주제를 내세울 수 있다. 이렇듯 수필의 주제는 삶을 통하여 느낀 사소한 감상에서부터 인간의 삶과 죽음이 주는 철학적인 물음에 이르기까지 무궁무진하다. 수필 주제의 본령本領은 대부분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다. 수필에서 서정성을 문학성과 동일시하던 등식은 무의미하다. 일상에서 얻은 소재일지라도 대상의 객관화와 인간의 본질과 가치에 대한 깊이 있는 인식을 담아낼 때 울림을 준다. 이번 호에서는 주제의식을 구체화하기 위해 효과적인 기법을 적용한 작품에 대해 주목해 보았다.
- 박종희의 〈소반小盤〉
어머니의 유품 정리를 위해 찾은 인기척 없는 친정집에서 작가는 소반小盤을 발견한다. 안주인을 잃은 집에서 임무를 다한 소반이 다리를 접은 채 놓여있다. 작가의 시선을 붙든 두리반도 있다. 책상이나 밥상 등 다양한 용도로 쓰이던 상은 자식들에게 밥 먹이는 것을 최상의 즐거움으로 여기고 밥상에 애착했던 어머니의 삶을 소환한다.
① 가끔 고택을 여행하다 소반을 보면 자연스럽게 친정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중년의 여인상을 의미하는 소반과 어머니의 인생이 겹쳐졌기 때문이리라. 여인의 뒤태를 연상하게 하는 둥근 소반은 삼 시 세끼 더운밥을 차려내야만 하는 어머니의 고된 운명마저도 꼭 닮았다.
② 돌이켜보니, 어머니의 소반은 가족을 위해 음식을 올리는 어머니의 성소이자 기도처였지 싶다. 어 머니가 해준 밥을 먹으면 무탈했던 것처럼 소반에는 둥근 모양만큼 자식들이 모나지 않게 세상길과 잘 어울리며 살라는 어머니의 바람도 깃들어 있었다. 새벽마다 곤히 잠든 부엌의 선잠을 깨우며 두리반 가득 자식들의 음식을 채우던 어머니. 밥은 만든 사람의 마음을 먹는 일이니, 인생의 고비마다 그 밥상이 얼마나 든든하고 힘이 됐던가. 어떤 방식으로든 이별을 향해 달려가는 눈바람 속에서도 어머니의 밥상은 늘 온기가 있었다.
①의 예문을 통해 어머니가 생전에 즐겨 쓰던 소반은 식기를 올려두는 단순한 작은 상이 아니라, 어머니의 고단했던 삶을 상징하는 도구로 기능하며 어머니의 삶으로 연결된다. 어머니의 삶과 소반이라는 대상에 대한 은유로 전개될 작품의 흐름을 예상케하며 주제의식을 추출한다. ②의 문장에 이르러 온기로 채워졌던 밥상의 의미는 자식들이 잘 살기를 바라는 염원이자 어머니의 헌신의 상징으로 구체화된다. 가족을 위한 어머니의 헌신의 증표는 대가족을 불러들인 두리반에도 남아있다. 어머니의 생애는 작가에게도 비켜가지 않았다. 결혼 후 세 개나 되는 상의 물기가 마를 날 없었다. 빈번한 손님맞이 덕분에 장한 며느리라는 별명을 얻었으나, 상은 언제부턴가 자취를 감추었다.
한동안 손길이 닿지 않았다고 툴툴거리는 소반을 한 번 쓸어내리고 일어서는데 어머니와 늘 함께하던 부엌이 자꾸 말을 걸어온다. 밥상 위 밑반찬처럼 기본으로 깔리는 귀에 익은 소리 “푹푹 떠서 든든하게 먹어라”라는 어머니 목소리가 귀울음처럼 나를 울린다. 왜 아니겠는가. 한 여자의 서사가 시작되던 기막힌 자리. 평생 밥상만 차리던 어머니 인생 서사의 가장 큰 줄기를 담당하던 공간이었으니 부엌에 서면 어머니가 더 그립고 소반을 보면 목이 멘다. 평생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것을 낙으로 여기신 어머니가 너무 보고 싶다.
작가는 어머니의 유품인 소반을 단순한 그리움의 정서 표출을 위한 소재로 한정하지 않았다. 어머니와 작가의 삶과 애환이 담긴 사사를 통한 소재의 의미화와 주제의식을 구체화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