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편 1절-6절: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3절: 시절은 봄 여름 가을 겨울. 봄은 어린아이의 마음과 같다. 여름은 청년들의 마음과 같다. 가을은 장년들의 마음과 같다. 겨울은 노년의 마음과 같다. 저번 주에 인생의 나이와 함께 마음을 생각해 봤다.
시냇가에 심긴 나무는 그 가지가 쭉쭉 잘 뻗어나간다. 그 가지 끝의 잎사귀들은 많이 매달려 있어도 마르지 않고 싱싱하여 열매를 얻기 위한 동화작용이 얼마나 활발하게 진행이 되는지? 어디에 심겨져 있기 때문에? 물이 흐르는 시냇가에.
우리가 많이 볼 수가 있는데, 물이 늘 흐르는 시냇가에 심긴 나무가 늘 청청했는데 그 시내가 마르니까 바닥에 자갈이 드러나고 그 나무는 메말라 들어간다. 이런 것을 그냥 보지 말아라. 왜냐하면 그것이 다 우리에게 영적인 신앙의 이치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나무는 시냇가에서 점점 멀어질수록 메마른다. 물에서 점점 벗어날수록 메마른다. 그러나 사막에 나무가 있더라도 그 뿌리가 물을 찾아서 그리로 뻗으면 그 나무는 청청하다. 우리가 교회에 다니는 것도 같은 이치다. 자기가 교회에서 점점 멀어질수록 교회에 나가기는 그만큼 힘들어진다. 교회가 먼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면 아무렴 한두 번이라도 교회에 덜 오게 되고, 교통이 두절되거나 하면 교회에 못 오게 되고, 비가 오면 못 오고, 길이 미끄러우면 못 오는 상황이 생기는 거다. 너무나도 잘 알 수 있는 일반이치다.
우리가 일반이치던 영적인 이치던 모든 면에서 이치를 어기면 자기에게는 그만큼 고통이다. 그 고통을 누가 당하느냐? 자기가 당한다. 왜? 자기 스스로가 이치를 어기고 있으니까. 우리가 일반적인 측면에서 물질이치를 잘 활용하면 자기 생활에 그만큼 윤택하고, 일반이치를 활용을 못하면 그만큼 자기에게는 고통이 오게 돼 있다. 모든 면에서 그렇다. 교회로 말한다면 옳은 교회라면 각 성도마다의 활동은 이룰구원 면에서 성화구원이 이뤄지는 거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이 세상이라고 하는 세상은 교회들의 신앙실력을 키우는 훈련장소다. 훈련장소에서 편안하게 살려고 하지 말아라. 누리려고 하지 말아라. 제 마음대로 하려고 하지 말아라. 군대의 훈련장소에서 제 마음대로 하면 몽둥이가 들어간다. 훈련장소에서는 정해진 법대로 살아야 한다. 규칙대로 살아야 한다.
또 군인들의 훈련장소에는 여러 가지 훈련을 할 수 있는 기구와 함정을 만들어 놓는다. 이 세상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어 놨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믿으면 세상에서 모든 면에서 만사형통이 될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 그게 아니다. 성경은 전혀 다른 각도다. 뭐니 뭐니 해도, 누가 뭐라고 해도 이 세상은 성도의 훈련장소다. 그러니까 자기가 자다가도 누가 쿡 찌르면 벌떡 일어나면서 ‘이 세상은 성도의 훈련장소다’ 할 정도가 돼야 한다. 군대에서 ‘기상’ 하면 후다닥 하면서 벌떡 일어난다. 안 그러면 누운 채로 밟힌다. 상관들이 지나가면서 ‘너’ 하면 관등성명부터 댄다. 자다가도 누가 부르면 벌떡 일어나서 관등성명부터 댄다. 어리벙하면 그냥 얻어맞는다.
교회라 하면 성도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다. 교회들의 영인성장, 영능의 실력을 키우기 위해서 이 세상에 사단 마귀도, 귀신도, 악령도 다 필요하고, 거짓 종들도 다 필요하다. 세상의 물질도, 인간들도, 전쟁도, 빈곤도, 환난풍파도, 미움도, 고움도, 사랑도 다 훈련에 필요한 것들이다. 어쨌든 우리 성도는 이런 세상에 살면서 하늘나라의 정신으로 정신을 바싹 차리고 있어야 한다.
성도들의 영인성장의 실력을 위해서 만능의 창조주 하나님께서 이런 것 저런 것, 싫은 것 좋은 것을 다 가져와서 시험을 친다. 대립이 되는 것, 눈에 안 보이는 것, 또 제 눈에 보기 좋은 것을 가져와서 시험을 치게 한다. 그러나 결국은 이런 것들은 다 지나간다. 좋은 것도 지나가고 나쁜 것도 다 지나간다. 좋은 것이라고 해서 우리가 잡을 수가 없다. 끝내는 안 잡힌다. 잡혔느냐? 아니다. 그건 잡힌 게 아니다. 그것 때문에 자기에게 고통이 오고, 시험이 오고, 때로는 그것 때문에 죽고, 그것 때문에 죄를 짓고 한다. 그런데 그런 걸 늘 보면서도 속고 있으니 얼마나 어리석은가?
이 세상은 다 지나간다. 이 세상은 좋던 나쁘던 다 지나간다. 그러니까 세상에 있는 동안에 부지런히 깨달으라 그 말이다. 그렇지 않고 좋은 것이라고 거기에 빠져버린다면 이 사람은 자기에게 나쁜 것이 올 때는 필연적으로 원망이 나오게 돼 있다. 또 나쁠 때 원망이 나오는 사람은 자기 보기에 좋은 환경이 오면 그 환경에 자동적으로 빠지게 돼 있다. 이치가 그렇다.
우리는 개개인마다 인간 자기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아차리고, 나를 왜 이 세상에 만들어 내놨는지를 바로 알아차리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붙잡고 사건 환경을 통과하면서 신앙정조를 팔지 않고 영능의 실력, 영인의 성장을 잘 해 나가는 것이 만사형통이다. 뭐가 만사형통이라? 세상 일이 뭐든지 잘된다는 뜻에서 만사형통이냐, 어떤 사건 환경이 오더라도 그걸 통과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이 입어지는 것이 만사형통이냐? 후자다.
그런데 지식적으로는 후자인 줄을 아는데 자기에게 사건 환경이 지나고 나면 꼭 후회를 한다. 이건 왜 그럴까? 그것은 ‘믿음이 없어서’ 그렇게 표현들을 하지만 사실은 자기 속에 순간순간마다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무장이 안 돼 있어서 그런 것이다. 자기 속에 무장이 돼 있다면, 다시 말하면 인격적인 면으로 자기 사상이 진리에 바로 서 있다면 적지적소에서 사건 환경을 잘 이용하고 활용을 하게 된다.
사건 환경이 올 때 그것이 내 속에 진하게 감염이 돼버리면 나는 고통이 심해진다. 이것을 차단하고 이겨나갈 수 있는 것은 자기 속에 진리이치의 말씀의 깨달음이 풍부하게 되는 것 이상은 없다. 깨달음이 풍부할수록 사건 환경을 통해 깨닫는 지혜력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고단수다. 그러니 상대를 요리를 하고 들어가게 된다.
이런 상태가 아니라면 이 사람은 외부의 환경이 오면 그로인해 그만큼 고통을 겪게 된다. 사람으로 인해 자기에게 고통이 오면 ‘네가 왜 나에게 고통을 주느냐’ 하게 되고, 이러면 항상 짜증이 나고, 평소에 잘 믿지도 않았으면서 예수를 믿으면 뭔가가 편안해지고 행복해진다고 하는 물질적 축복의 개념과 물질성적 사고방식으로 ‘예수를 믿어도 별 볼일이 없구나’ 하는 말을 하게 된다.
예수를 바로 믿으면 모든 면에서 바로 돼 들어가는 거다. 그런데 여기에다 ‘예수 믿으면 물질적으로 복을 받는다’ 하는 건 해석을 할 필요가 없다. 의례히 되어지는 면을 해석으로 들어가 버리면 그걸 듣는 사람들이 그게 그만 해석의 중심인 줄 알고 은근히 육으로 돌아가 버리게 된다. 영적인 면으로 말을 하는데도 자꾸 육으로 넘어가려고 하는 판에 육적인 면을 곁들여서 얘기를 해 놓으면 그것을 듣는 사람들이 그만 육으로 푹 빠져버린다. 우리 마음이 육으로 빠지는 면에 얼마나 예민한지?
예수 잘 믿으면 복 받느냐? 어떤 면의 복이냐? 영적인 면? 그러면 육적인 면은 망하는 거냐?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은 훈련장소라. 그러니까 예수를 잘 믿어도 마귀의 시험이 있을 수 있고, 그런가 하면 예수를 잘 믿으니까 생활면에서 펴지는 것도 있고, 사람에 따라서 어떤 때는 이렇게 됐다가 어떤 때는 저렇게 됐다가 한다. 그럼에도 예수 잘 믿는 것과 물질적인 복을 받는 것을 연결을 시키면 이건 육이지 영은 아니다.
그러면 예수를 안 믿으면 이것도 저것도 없는 거냐? 예수를 안 믿어도 이것도 저것도 다 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를 믿으면 물질적인 복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렇게 돼도 빠지고 저렇게 돼도 빠진다. 아예 빠져있는 거다. 그 일을 당하나 안 당하나 자기의 생각이 이미 세상에 빠져있는 거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이런 문제로 마음속에서 얼마나 충돌과 마찰과 대립을 일으키는지 모른다.
그리고 ‘만사형통’이라고 할 때 영적인 뜻을 모르는 사람들은 예수를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나 이방 우상 미신을 믿는 사람들과 똑같은 사고방식으로 생각을 해서 예수 믿으면 무엇을 하든지, 무슨 사업을 하든지 하나님께서 만능의 능력으로 도우셔서 인간 자기가 요구하는 대로 세상살이가 척척 잘 돼 나가는 것을 만사형통이라고 생각을 하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교회도 많다. 큰일 날 일이다.
이방 미신을 믿는 사람들은 자기가 믿는 신에게 열심히 구했음에도 만사형통이 안 되면 액운이 끼었다고 굿판을 벌인다. 굿 한 판을 하려면 돈이 얼마나 드느냐? 그러다가 무당에게 돈 뺏기고, 속고, 시간 빼앗기고, 노력 빼앗기고 하게 된다. 그런데 그렇게 다 도둑을 맞고서도 도둑을 맞은 줄을 모른다. 제 손으로 다 갖다 주고도 모른다. 예수를 믿어도 영적인 면에서 모르면 어떻게 보면 짐승보다도 더 미련하다. 세상 속화된 교회에는 무당파가 많다. 그러니까 ‘예수 믿은 지 3년이 돼도 부자가 안 되면 믿음이 없다느니, 신앙이 없다느니’ 그런 말을 한다. 이건 사기꾼이고, 거짓 종들이고, 이게 다 악령들의 역사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 사람들 중에 세상에 대한 물질욕심이 많은 사람들, 또 영의 눈이 어두워서 분별을 못하는 사람들, 또 자기 속에 육의 생각과 영의 생각, 또는 옛사람이 주격인지 새사람이 주격인지 분별을 못하는 사람들, 또 참 종 거짓 종들의 가르침을 분별을 못하는 사람들이 무조건 자기의 소원을 만사형통되게 해달라고, 세상 사는 조건이 좋도록 해달라고 떼를 쓴다. 이건 전부가 비신앙이다. 이건 예수를 믿는다고 해도 성질적으로 이질적인 신앙이고, 육의 신앙이고, 인본주의 신앙이고, 몹쓸 것들이다. 그렇게 나가면 그런 면으로 더욱 굳어지면서 깡깡해져 버린다.
주님을 온전하게 닮는 것이란 지혜지식적으로 닮아지고, 선 사랑 거룩 진실인 도덕성적으로 닮아지고, 또한 하나님의 옳은 것으로 의와 주권적으로 닮아지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온전 속에는 이런 게 있는 거다. 이게 없으면 안 된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고 지혜지식적인 면에서 옳은 것을 가지면 능력자요, 도덕성적으로 영원히 변치 않는 것을 가지고 있으면 능력자요, 이러면 그 사람은 주권이 있는 거다. 성경에서 ‘왕’이라고 할 때는 이런 사람을 말하는 거다.
누가 이런 사람을 넘어뜨릴 수 있겠느냐? 못 넘긴다. 그 사상을 넘길 수가 없다. 인격적으로 바로 된 사람은 환경이 어떻게 바뀔지라도 시간에 따라서 장소에 따라서 적지적소마다 잘 적용해 나간다. 이런 사람은 시원시원하고 화통하고 거짓이 없고 밝고 명랑하다. 얼마나 값진 사람인지 모른다. 이런 사람이 돼야 사회를 이끌어 나갈 수가 있다.
라디오에서 들으니까 여성들의 문제를 상담해주는 기관에 상담을 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진다고 하는데, 가정문제나 성폭력이나 차별 등에 대해 상담을 하는 여성분들이 많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 분들에게 그런 일들을 대처할 수 있는 말을 해주는데, 그러면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을 말해주는 대로 하면 해결이 되느냐? 안 된다. 임시적으로는 해결이 될 런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나 사건은 이미 벌어진 후이기 때문에 그만큼 고통이 돼버린 거다. 우리의 교훈은 그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그런 일을 예방할 수 있는 지혜지식이 들어가는 거다. 이러면 그런 일은 안 벌어진다. 왜? 모두가 소원 목적이 하나님의 의사단일성으로 똑같아지면 일이 벌어질 리가 없는 거다.
세상은 고쳐가면서 사는 곳인데, 모든 사람이 전부는 네 탓으로 들어간다. 그러니 고쳐지지를 않는다. 한 집안 식구라도 다 제 말대로 되기를 바라고 있으니 세상이 편할 수가 있겠느냐? 별 도리가 없는 거다. 그러니 처녀총각들이 시집장가를 가려면 최악의 상황을 생각을 하고 가라. 처음에는 ‘오 나의 태양, 오 나의 사랑’ 했는데 나중에 가서 ‘죽일 놈, 살릴 놈, 원수 놈’ 한다면 이게 누구 탓이냐? 자기들이 좋아서 만나놓고서 나중에 ‘죽일 놈, 살릴 놈’ 하고 있으니 그게 뭐하는 짓이냐? 이유야 어찌 됐건 서로가 그러고 있다면 둘 다 고통을 당하는 것은 당연한 거다.
둘이서 좋아해서 만나서 살았다면 둘이서 책임을 져라. 그리고 자기가 아내를 취할 줄도 모르고 남편을 취할 줄도 몰라서 중매로 만났어도 서로가 원망을 말아라. 왜? 서로 좋아서 만났건 중매로 통해서 만났건 처음 만날 때 애당초 싫다고 했으면 그렇게까지 안 될 게 아니냐? 그런데 서로 좋아할 때는 서로의 단점이 안 보이는 모양이다. 하나님께서 이상하게 인간을 그렇게 만들어 놨다.
개인이던 교회이던 진리본질의 신앙이 아니라면 물질적으로 아무리 부요하게 되더라도 전부는 만사형통이 아니라 영원히 심판 받을 만사불통이다. 그러니까 이건 사망성공이다. 사망성공도 있는 거다. 세상은 망하면 성공이라고 하지를 않지만 신앙의 정신면으로 볼 때는 사망성공이 있는 거다. 예를 들면 공부를 잘해서 일등을 하면 ‘아, 저 사람 일등 했다’ 하는 소문이 나간다. 이건 건설적인 성공이다. 꼴찌를 했을 때도 그 소문이 나갈 테니 이건 비건설적인 면으로 성공이다.
4절: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겨는 무엇이냐? 겨는 곡식을 도정할 때 알곡에서 분리가 된 껍데기를 말하는 것이다. 또는 곡식이 가을 추수 때까지 알곡으로 여물지 않은 것을 겨라고 할 수 있다. 알갱이가 안 든 껍데기로만 돼 있는 거.
이 겨는 바람에 잘 불려간다. 왜냐하면 알곡으로 여물지를 않아서 속이 비어있기 때문이다. 바람이 안 불면 알곡처럼 가만히 있다. 바람이 불면 날아가려고 벌떡거리기 시작을 하다가 좀 더 세게 불면 그만 그 바람에 날려가 버리고 만다. 그러니까 바람이 이리 불면 이리 날아가고 저리 불면 저리 날아간다. 회오리바람이 불면 빙빙 돈다. 이런 인생을 볼 줄 알아야 한다.
겨는 바람이 불면 표시가 나고, 또한 곡식을 절구통에 넣어서 찧어보면 알곡과 껍데기는 완전히 표시가 난다. 그리고 곡식을 키로 까불 적마다 알곡은 주인의 품 안으로 자꾸 들어오지만 껍데기는 자꾸 밖으로 나간다. 까불면 까불수록 알곡은 자꾸 주인의 품 안으로 들어오지만 껍데기는 까불릴수록 자꾸 주인의 품에서 멀어져 버린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가서는 그 까불림에 키 밖으로 휙 나가버린다. 바람에 날려간 겨는 모아서 불에 태워지고, 알곡은 곡간으로 들어간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무엇을 보여주느냐? 세상은 바람 부는 곳이다. 바람이 불면 파도가 치는 곳이다. 세상은 그렇다고 하는 것을 전제를 하고 살아라. 바람은 시대를 초월하고, 지역을 초월하고, 사람의 빈부귀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다 분다. 바람은 인간의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 인간이 조심하지 않으면 당하고 만다. 파도도 마찬가지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자기가 조심하지 않으면 바람 따라 너울거리는 파도에 휩쓸리고 마는 거다.
바람은 하나님께서 자연법칙적으로 만들어 놓은 것인데, 해를 중심해서 지구가 어떻게 기울어지느냐? 또는 지구 편에서 보면 해가 어떻게 기울어지느냐에 따라 더운 바람, 찬 바람, 훈훈한 바람, 눈 바람, 습한 바람, 시원한 바람 등등으로 바뀐다. 여름이 되면 해가 위쪽으로 뜬다. 그런데 겨울이 되면 해가 옆으로 해서 넘어간다. 그러니까 해가 떠있는 시간이 짧다. 그러니 밤이 길고 추위가 찾아온다. 이건 신앙 면에서 지혜적으로 우리에게 말해주는 거다. 이런 면을 우리가 진리 신앙 면에서 느낄 줄 알아야 한다. 자기의 신앙의 성질이 봄인지, 여름인지, 가을인지, 겨울인지? 겨울과 같은 환경을 만났어도 신앙 면에서는 봄을 만난 듯 사는 사람도 있다.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정해놓은 법칙대로 돌아간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바뀌는 것도 하나님께서 법칙적으로 정해놓은 것이다. 그러니까 자연 법칙적으로 정해놓은 시대적 연령적인 이런 면을 신앙사상적인 면으로 ‘이렇게 됐을 때는 이런 상황이 온다. 이렇게 됐을 때는 이런 상황이 온다. 그러니 네가 준비를 하라’ 하는 깨달음이 그 안에 들어있는 거다. 그러니 우리는 자연법칙을 보고 자기의 신앙 면에 이용을 할 줄 알아야 한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걸 모른다.
일반 자연 법칙적으로 생태계를 보면 개미의 활동이 언제 제일 활발하냐? 여름이다. 왜 그런 거냐? 어느 때를 준비하는 거냐? 겨울을 준비하는 거다. 그러니까 젊었을 때, 청년 때에 미래를 준비를 하라는 것이다. 노년이 되고 나이가 들면 겨울이다. 겨울에 들어가서 여름처럼 준비를 하려고 하면 되겠느냐? 안 된다.
어린애들 때는 노는 것이 재미가 있어서 ‘이 밤이 안 갔으면’ 했는데 지금은 너무 빨리 가서 자고나면 대낮이다. 그나마도 늦게까지 자고 일어나면 하루해가 그냥 넘어가 버린다. 너무나도 빠르다. 이렇게 빠른 세월 속에서 옳은 진리를 언제 다 깨닫고 가느냐? 그러니까 성경에도 있듯이 인생의 나이를 생각을 하면서 살아라. 법칙은 움직일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듯이 우리의 구원을 위한 영리의 법칙은 절대적이니 그 법칙을 알고 신앙을 바로 잡고 큰 믿음을 가지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미리 예견을 하고 준비를 하라 그 말이다.
자기는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은 그런 걸 전혀 생각을 못하고 눈에 보이는 면으로 좇아가고 달리다가 시간이 다 가버리고 실질적 신앙의 깨달음은 별로 없다. 돈 버는 데로 시간을 많이 투자하며 그것을 잡으려고 허덕거리다 보니 마음에 안식이 없다. 우리 기독자들은 외부적으로 환경이 막 밀어붙이고 돈바람이 막 밀어붙이고 세상이 자기를 막 밀어붙일 때 사는 면에 조금 손해가 나더라도 신앙 면에서 안식을 찾아라. 그러면 사람이 여유가 생긴다.
‘사건 환경 가운데서 마음에 여유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데 따라 자기의 여유성이 달라진다. ‘남는 시간이 있으니 여유가 있다’ 그렇게 생각만 하지 말고 기쁨이 그 사람의 여유다. 아무리 시간이 남아 돌아도 그 사람 속에 기쁨이 없으면 그건 여유가 아니다. 이렇게 되면 도둑에게 쫓긴다거나 고통에게 쫓긴다거나 그렇게 된다. 이유는 없다.
이 세상은 성도들의 훈련장소다. 부지런히 자기를 진리 자체화 사상화 시켜라. 세상은 자기 마음에 맞도록 만들어진 곳이 아니니까 그러는 수밖에 없다. 어쩔 도리가 없다. 훈련을 안 받겠다고 달아나면 붙잡혀서 얻어맞게 된다. 군대에서 훈련을 받다가 탈영을 하면 그 뒤로 헌병을 보낸다. 붙잡히면 독방신세가 되고 도망간 날짜만큼 또 훈련을 받는다. 그러니까 아무리 힘들어도 훈련은 받아야 한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