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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인의 죄 (롬 2:17~29)
하용조 목사
17.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18.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
19.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20.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21.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
22.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전 물건을 도둑질하느냐
23.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24.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25. 네가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하면 네 할례는 무할례가 되느니라
26.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규례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27. 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율법 조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겠느냐
28.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29.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 거짓이 없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로마서의 핵심 구절은 1장 16-17절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것이 로마서의 중심이요 주제입니다. 이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로마서가 쓰여진 것입니다. 이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서 롬 1:18절의 말씀이 있습니다. 18절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언하는 아주 중요한 것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롬 1:18)”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는 거짓이 없습니다. 반드시 불의로 진리를 막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이 심판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 세 종류의 사람들
세 종류의 사람들에게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두 종류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나타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 믿기를 거부하면서 노골적으로 눈에 띠는 죄를 짓는 무리들에 대해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계심을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거부하는 사람들입니다. 몰라서 거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과 진노와 심판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죄를 짓는 무리들입니다. 썩어질 우상을 썩지 아니할 하나님의 영광과 바꾸어 버린 그런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하늘로부터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종류의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나타납니다. 그들은 누구입니까?
드러난 죄를 짓는 사람들을 심판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비교적 흠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자신이 착하고 선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도 나는 너보다 낫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은 임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겉으로만 죄를 짓지 않았을 뿐이고 들키지 않았을 뿐이지 마음속으로는 이미 죄를 지었고 짓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가 드러나지 않는가 드러났는가를 상관하지 않으십니다. 들켰는가 들키지 않았는가도 상관이 없습니다. 세상에서는 죄가 드러나기 전까지는 그 사람을 죄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죄가 드러났건 드러나지 않았건 똑같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죄가 드러나지 않는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은 똑같이 용서 없이, 타협 없이 그대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죄가 드러나지 않는 사람들은 위선과 허위라는 죄를 또 하나 더 가지고 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죄는 드러나는 것이 속이 더 편합니다. 누가 제일 속편한 줄 아십니까? 감옥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이미 죄가 드러났고 심판을 받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속이 더 편합니다. 누가 불편합니까? 죄가 안 드러난 사람입니다. 언제 들킬지 항상 불안합니다.
여러분,죄가 드러나지 않았다고 괜찮습니까?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남을 심판하는 사람, 비판하는 사람아, 남을 정죄하는 사람아, 너는 누구냐?’ 하십니다. ‘너는 똑같은 죄를 짓지 않았는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돌 던질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요즘 우리 사회에서는 비자금 문제 때문에 모두가 충격을 받았습니다. 여러 가지 충격을 받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충격을 받은 것은 우리 모두가 공범자가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돌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누구입니까? 액수의 크고 작은 차이만 있을 뿐이지 비슷한 유형의 죄들을 다 짓고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 비슷합니다. 그러니까 욕을 하면서도 우리가 다 불안합니다. 모두 다 겁을 내고 있습니다. 욕을 하면서 놀라고 욕을 먹으면서 놀라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다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세 번째 사람이 오늘 주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는 죄가 드러난 사람에게도, 드러나지 않는 사람에게도 있습니다. 죄가 숨겨진 사람이라고 죄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죄를 감추는 기술을 배웠습니다. 인내라는 것이 바로 죄를 감추는 기술입니다. 그렇지않은 척하는 것입니다.
▶ 세 번째 심판받은 자는 종교적인 사람
하나님의 세 번째 심판자는 종교적인 사람입니다. 종교가 직업인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특별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나는 특별히 구별되고 선택 받았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독점했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을 독점했다는 자부심이 있습니다. 사실 이런 종교적인 사람들 때문에 사람들이 하나님께 쉽게 접근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 ‘하나님을 믿으려면 저렇게 살아야 하는가 보다’ 그래서 겁이 납니다. 이 사람이 너무나 종교적인 열심과 율법과 완벽주의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려면 금식해야 되고 철야해야 되고 뭐해야 하고 뭐해야 하고 하는 것을 생각하다 보니 질리는 것입니다.
두 번째 방해가 되는 이유는 ‘별것 없다’는 것입니다. 저렇게 해도 내용은 보니까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종교에 억압되어서 참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합니까?
사단은 두 가지 조직을 가지고 세상을 지배합니다. 첫째는 국가 조직이요 또 하나는 종교와 우상숭배입니다.
이 지상에는 얼마나 다양한 종교가 있습니까? 토속 종교로부터 비롯하여 많은 종교들이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종교에 억압되어서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고 그 율법 안에서 절망하고 삽니까?
▶ 하나님보다 율법· 형식· 조직에 익숙한 자들
로마서 2장 17-18절을 보겠습니다.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사도 바울은 유대인이면서 유대주의에 깊이 빠졌던 사람이며 누구보다도 유대인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입니다. 그는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했던 사람입니다. 율법에 있어서는 그 이상의 전문가가 없습니다. 그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유대인이라고 칭하는 네가”
유대인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종교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이방인과 달리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은 종교인들, 종교 전문가들은 악인가 선인가 하는 것은 별로 생각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역설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선택받았다는 것입니다. 선택받은 사람인 자신은 선하고 의롭다고 생각합니다. 선택받지 못한 사람은 악하고 죄인이라고 봅니다. 따라서 선택받은 유대인들은 아무리 나쁜 짓을 했을지라도 그는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선택받지 못한 이방인들은 아무리 착한 일을 했어도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고 단정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율법을 소유하는 것이며 할례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종교인입니다.
하나님 보다도 율법과 어떤 형식과 조직에 익숙한 것입니다. 많은 종교인들은 하나님보다는 그들이 속한 조직에 익숙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생각하는 것입니다.
▶ 17절 이하에 보면 종교적인 사람들이 갖는 몇 가지 특징들이 있습니다.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이들은 율법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고 하나님을 자랑합니다. 율법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율법을 달달 외웁니다. 율법의 뜻이라면 너무나 예민합니다. 유대인들이 그렇게 했습니다.
십계명을 하나님이 주셨는데 그냥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받지 않고 너무나 세분화해서 생각합니다. 안식일을 지키라고 십계명이 말하면 그들은 안식일에 바느질 몇 번하면 죄가 아니고 몇 번하면 죄가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글자를 한꺼번에 읽으면 노동이고 따로따로 읽으면 노동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얼마까지 걸어가면 노동이 아니고 얼마 이상까지 걸어가면 죄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종류의 물건을 들을 때 얼마까지의 무게는 죄가 아니고 얼마까지의 무게는 죄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까지 그들은 율법을 지키려고 했고 율법을 소유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마치 구원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생활이 피곤했던 것입니다. 그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자랑했습니다. 하나님이라면 그 이상 더 높은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정말 하나님을 사랑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 하나님을 자랑하는 경우, 이용하는 경우
여러분, 하나님을 자랑한다는 말은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을 자랑하는 경우와 이용하려는 경우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자랑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금식을 하고 헌금과 십일조를 내고 그들은 모든 종교 활동을 다함으로써 하나님을 자랑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의 특징은 율법을 소유하려 하고 하나님을 소유하려고 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내 편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소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자기만이 독점했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종교인들입니다.
마치 이것은 내가 부유층이나 유명한 인사나 권력을 가진 사람을 아는 것과 같습니다. 괜히 그런 말을 흘립니다. 자신이 그런 종류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자랑하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말이라면 당장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가리켜 종교인이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 때문에 사람들이 하나님께 접근을 쉽게 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종교라는 껍질을 뒤집어쓰고 그 안에서 숨쉬고 삽니다.
▶ 지고의 선을 추구하는 그들
이 사람들의 두 번째 특징을 18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율법의 교훈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그들은 지고의 선을 추구합니다. 이런 사람일수록 얼마나 자신이 위대한가에 대해 감격해 있습니다. 종교인들은 자기가 자신에게 감격합니다. 여러분, 십일조를 처음하면 가장 먼저 놀라는 사람은 누구인지 아십니까? 스스로가 가장 놀랍니다.
종교인들은 자신이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나만큼 성경 읽는 사람은 없다. 나만큼 기도하는 사람은 없고 나만큼 봉사하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모습에 도취됩니다. 스스로 지고의 선을 추구합니다.
이상한 착각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글을 쓰면 글을 쓴 대로의 모습이 자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인공이 자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가장 착각을 잘하는 사람이 글 쓰는 직업과 말하는 직업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이 설교하면 그 설교가 자기 인줄 압니다. 그렇게 환상 속에 삽니다. 그러나 현실은 다릅니다.
신경질도 내고 욕심도 있고 야망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두 가지가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항상 자신이 쓴 글로 도망갑니다. 그 글이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 자신이 당신입니다. 신경질 내고 화내고 못 참는, 바로 그 모습이 나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착각을 합니다. 그것이 자기인 줄 압니다. 글 쓴 대로 자기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설교 한대로 나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을 오늘 성경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너는 그런 모습이다. 종교의 형식과 틀과 그런 습관 속에 들어갔다고 네가 그런 사람인가?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위선자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19-20절까지 보겠습니다.
“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써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종교적인 틀을 가진 사람은 자신이야말로 율법의 지식과 진리를 통달한 그야말로 규모를 가진 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길 잃은 소경들을 진리로 인도하는 자라고 스스로 생각합니다. 나는 어둠 속에서 방황하는 사람들의 빛이요 어리석은 자들을 위한 교사요, 어린아이들의 선생이라고 생각합니다. 20절 마지막 부분에 무어라고 이야기합니까?
“스스로 믿으니”
자기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가증스럽습니까? 정말 여러분이 어두움을 밝히는 빛이십니까? 소경을 인도하는 사람들입니까? 어리석고 무지몽매한 사람들에게 도를 깨우쳐 주는 사람들입니까? 그런 것처럼 보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기도를 많이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게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 종교인들에게 묻는 하나님의 질문?
그러나 성경은 21~23절에서 이런 도전을 합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하지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 물건을 도적질하느냐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하므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이것은 종교인들에게 묻는 하나님의 질문입니다. 종교 전문가들, 종교로 밥을 먹고 사는 사람들, 하나님을 독점하는 사람들, 교회를 독점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질문입니다.
다섯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도적질하는 문제, 가르치는 문제, 간음하는 문제, 우상숭배할 때 재물의 문제, 율법을 자랑하는 문제들입니다. 이런 것들을 가지고 종교 전문가들이 살아왔습니다.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나를 좀 봐주신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절대로 봐주는 것이 없습니다. 죄가 드러났거나 죄를 숨겼거나 종교적인 전문가가 됐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봐주는 것이 없습니다. 오직 봐주는 것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종교적인 특권을 가진 자들의 일반적인 문제점은 스스로 착하고 선하다고 그렇게 주장하지만 바로 그 말을 가르치고 난 다음에 자신이 그 죄를 짓는다는 것입니다.
도적질하면 안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말이 끝나자마자 그는 도적질합니다. 간음하면 안된다고 설교합니다. 그 다음에 바로 간음합니다. 우상숭배의 물건은 더럽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말을 하면서 그 물건에 눈독을 들이고 있습니다. 그 말 끝나자마자 그 물건을 몰래 빼내서 몰래 챙깁니다. 그 사람이 종교인입니다.
그는 율법을 자랑하지마는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사람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차라리 솔직하게 죄(罪)짓는 것이 낫습니다. 단계적으로 보면 종교인들의 죄가 가장 더럽습니다. 종교 전문가들의 죄는 추악하고 가증스럽습니다. 그가 가장 거룩한 말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무리 성직자요 하나님의 일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봐주실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은 예외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죄가 드러난 자에게도 심판이 있고 죄를 숨긴 사람에게도 심판이 있습니다. 성직자라고 하더라도 예외가 아닙니다.
오늘의 말씀의 전부입니다.
죄인으로 교회에 오십시오.
여러분, 종교적으로 교회 오지 마십시오. 종교적인 틀을 가지고 교회에 오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봐주지 않습니다. 찬송하고 기도한다고 하나님이 봐주시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 씻음을 받고(고전 6:11) 구원을 얻은 자만이 하나님께서 그 죄를 용서합니다.
여러분의 행위 때문에 용서받는 것이 아닙니다. 구제하고 십일조하고 선교 봉사하고 새벽기도하고 금식했다고 하나님이 구원 주는 것이 아니며 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죄가 없어지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못 박혀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그것 밖에 없습니다. 죄가 드러난 사람도 눈물을 흘리며 겸손히 나와야 합니다. 죄가 드러나지 않은 사람도 똑같이 겸허한 마음으로 통회하고 자복하고(시 51:17) ‘오 주님 내 죄가 이렇게 붉습니다. 내 죄가 이렇게 추악합니다. 사람들은 그 죄를 모르고 나를 좋은 사람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나와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목사로 오지 마십시오. 장로로 오지 마십시오. 선교사로 오지도 마십시오. 죄인으로 오십시오. 교회는 죄인이 오는 곳입니다.
나는 목사가 아니라 죄인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없으면 한 순간도 살 수 없는 죄인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했다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빌리 그래함이 이야기했습니다. “내가 구원받은 것은 내가 수십만 명을 주님 앞에 인도했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죄인(罪人)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구원받았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내놓을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신학을 했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박사가 되었다고 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안 봐줍니다. 세상의 지위가 높다고 봐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이 봐주시는 것은 하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행 4:12, 요 14:6).
그를 영접하고(요 1:12) 그 안에서 죄 씻음을 받은 사람만 구원을 주시는 것입니다.
24절을 보십시오.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믿는다고 자랑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교회 얼마동안 다녔는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믿느냐가 중요합니다. 교인이라고 안심하지 마십시오. 정말 예수를 믿고 계십니까?
예수님을 영접하셨습니까? 예수님이 여러분의 구주이십니까?
지난주 이야기한 대로 구원받은 사람, 용서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허물에 대해서는 비판하지 않습니다. 정죄하지 않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러나 구원받지 않고 의롭다고 한사람들은 자기보다 조금 못한 사람들을 막 징계합니다. 아주 혼을 냅니다. 혼은 하나님이 내는 것입니다. 나도 죄인인데 누가 누구를 욕하고 징계합니까?
'나도 똑같은 죄인입니다' 라는 겸손함이 있습니다. 이런 온유함이 있습니다. 마음에 가난함이 있고 의에 대한 갈망이 그 사람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용서받은 사람입니다. 교회 올 때에는 죄인으로 오십시오.
나는 죽어 마땅한 죄인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교회 오시고 기도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십시오. 나는 이 성전을 향하여 눈을 뜰 수 없는 사람입니다. 나는 주장할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그 사람을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그 사람을 하나님이 축복해 주십니다.
종교적인 사람은 이방인들에게 오히려 이야기 거리가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종교적인 사람들이 되었을 때 이방인들에게 잡혀가서 수치를 당했습니다. 여러분과 나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사람이면서도 하나님께 모독을 줄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입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안심하지 마십시오. 성경공부, 제자훈련 많이 한다고 안심하지 마십시오. 종교적인 것들에 익숙하다고 안심하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안심이 됩니다. 그런 것이 아무리 있다고 하더라도 예수님과 상관이 없다고 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우리의 종교성이 우리를 구원 못해 예수님과 관계를 가지십시오. 여러분의 죄를 십자가에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용서받고 구원받으십시오. 그것이 전부입니다. 겉으로 나타난 할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25절입니다.
“네가 율법을 행한 즉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한즉 네 할례가 무할례가 되었느니라”
그렇습니다. 할례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율법을 지키지 못하면 그것은 무할례와 같은 것입니다.
26절은 그 반대입니다.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제도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비록 무할례자라고 할지라도 율법을 제대로 지켰다면 그것은 할례 받은 것과 같은 것이 아니냐하는 것입니다.
28절을 보십시오.
대저 “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유대인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나 할례를 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종교성이 우리를 구원해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교인들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종교성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익숙하면 구원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계속 나오면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주일날 계속나오다 보면 어느 날 예수를 믿게 됩니다.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매일 나왔다는 것 자체가 구원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예수님이 구원입니다. 이 사실이 불분명한 사람은 오늘 다시 한번 이 문제를 가지고 기도하셔야 합니다.
29절입니다.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그렇습니다. 참된 구원은 네가 유대인이냐 아니냐 할례를 받았느냐 아니냐에 있지 않습니다. 행위가 의롭고 선하고 착한가에 있지도 않습니다. 29절의 말씀대로 구원은 문자가 아닙니다. 영입니다.
참된 축복과 칭찬은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축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 마음에 베푸는 할례란 무엇인가? (롬 2:29 ; 신 30:6)
'할례'는 남성 생식기의 포피를 베어 내는 일종의 시술 행위인데, 하나님은 이것으로써 언약의 징표를 삼으셨다(창 17:11).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 할례는 하나님께 대해 온전한 헌신을 나타내는 거룩한 종교 의식이 되었다. '마음의 할례'는 이같은 할례의 근본 정신을 충실히 살리는 것을 뜻하는 표현으로서, 곧 언약 백성으로서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언약 백성(약속의 자녀)이라는 의미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하여 보증으로 성령으로 인침 받은 자로서 죄에서 구원받고 진실로 하나님의 자녀로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을 말합니다.
★ 로마서 3:23-24.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저는 여러분에게 권면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 자신에게 속지 마십시오.
제일 속기 쉬운 것이 자기 자신입니다. 자신의 논리가 맞다고 생각합니다.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남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다고 해서 여러분이 의로운 사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의로운 사람이 됩니다.
종교적인 사람에게 속지 마십시오. 그럴듯한 사람들, 굉장히 그럴듯한 사람들에게 속지 마십시오. 거기에 구원이 있지 않습니다.
행위와 전통과 익숙함에 구원이 있지 않습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그 분을 믿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 씻음을 받고 중생을 경험하십시오(요 3:3).
그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써 천국으로 우리의 생애가 이어질 줄로 믿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허물을 보게 하여 주옵시고
우리의 내면을 보게 하여 주옵소서
십자가를 붙들고 나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에베소서 1: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救贖)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 구속(救贖)의 뜻
https://m.cafe.daum.net/tinycafe.daum.net/fGjd/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