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처선(?-1505)은 내시이다. 연산군은 그가 간할 적마다 노여웠으나 겉으로 나타내지는 않았다. 한번은 궁중에서 연산군이 처용 놀이를 하며 음란하게 춤을 추고 있었다. 김처선이 집안 식구에게 말하기를, "오늘 내가 반드시 죽을 것이다" 하고, 들어가서 거리낌없이 극력 간하였다. "늙은 놈이 네 임금을 섬겼고, 경서를 대강 통했지만, 고금을 통해 상감처럼 하신 분은 없습니다" 연산군이 크게 노하여 활을 한껏 당겨 김처선의 갈빗대를 쏘아 맞추자, 김처선은 말하였다. "늙은 내시가 어찌 감히 죽음을 아끼겠습니까. 다만, 상감께서 오래도록 임금 노릇을 하실 수 없는 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연산군은 화살 하나를 또 김처선에게 쏘아 맞히고 나서 그 다리를 잘라 버리고, 일어나 걸으라고 하였다. 김처선이 연산군을 쳐다보면서 말하였다. "상감은 다리가 잘려지고서도 다닐 수 있으십니까?" 연산군이 그 혀를 잘라 버리고 친히 그 배를 갈라 창자를 끄집어내고 그 시체를 범에게 먹이로 주었다. 그리고 조정과 민간에 명령을 내려 '처선' 두 글자를 입에 담지 못하게 하였다. 연산군 10년에 갑자정시에 충정공 권벌이 책문시험에 합격하였는데, 얼마 뒤에 시관이 시권 안에 '처'자가 있음을 깨닫고 아뢰어 삭제해 버렸다. 그후 한 내시가 금강산에 놀러 갔다가 절에서 잤는데, 밤중에 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깜짝 놀라 일어서자 한 늙은 내시가 고개를 들고 들어오는데, 자세히 보니 곧 김처선이었다. 놀랍고 두려워서 연유를 물었더니, 김처선이 말하였다. "내가 원통하게 죽은 뒤로부터 혼백이 죽지 아니하여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이 산에 붙어 노닐고 있다. 갑자사화와 무오사화 때의 제현이 모두 억울함을 풀었으나, 홀로 나에 대해서는 충심을 밝힐 수 없어 아직까지 신설되는 은혜를 입지 못하니, 그대는 이를 어여삐 여겨 주게" 그 내시가 조정에 돌아와서 임금에게 아뢰어 중종 2년(1507)에 정려를 세워 표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