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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초대교회 당시에는 부활에 관해 많은 논란이 있었다. 부활을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논쟁, 그리고 부활이 “육체적 생존인가, 영적 생존”인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서, 예수의 시체가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었다고 믿는 자들이 많다. 그러나 예수님의 시체는 안식일에 하나님이 가져가신 것이다. 하나님이 시체를 없애버렸다.
요한복음 3장 13절『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잘못된 번역을 헬라어 성경을 통해, 다시 하면, 『하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 밖으로 나오지 않으면 아무도 하늘로 들어갈 자가 없다』인자외에 아무도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자가 없었다. 인자는 첫사람 아담으로 가장 먼저 하늘을 나온 자이다. 에베소서 1장 15절에서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두번째 부활로 에녹이 하늘에 올라갔다. 에녹의 죽음을 아무도 보지 못했다. 에녹은 첫사람아담 이후 여덟번째 자손 새창조 부활을 상징한다. 하브리서 11장 5 절에서『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에녹은 몸이 부활했으며(변했으며) 아무도 죽음을 보지 않았으므로 그를 찾을 수 없었다, 그 이유는 그가 변형 전에 하나님이 옮겨셨기 때문이다.
모세의 죽음도 아무도 보지 못했다. 그는 120세에 죽었다. 율법의 완성자로 죽었다. 모세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이다. 결국 둘다 죽었지만 아무도 시체를 보지 못했다 그리고 부활하여 하늘로 올라갔다. 예수 그리스도는 마지막 아담이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었으며, 그리스도는 부활하였고, 부활전에 이미 시체는 사라졌다.
금요일에 예수의 시체를 장사하고 무덤에 넣었는데, 하나님이 토요일(안식일에)에 시체를 치워버리고, 그리스도는 영의 몸으로 일요일에 부활하셨다.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시체를 십자가에 두지 않으려 했다. 민수기 19장 11-22절에서 시체는 부정한 것으로 간주된다. 안식은 히브리어로 네파쉬라고 하는데, 네페쉬와 어근이 같다. 네페쉬는 살아있는 생명체를 의미하고, 네파쉬는 호흡 생기 생명를 의미한다. 따라서 시체와 안식은 의미가 다른 것이다. 안식은 시체를 치워버리고 생명으로 대체해야 하는 의미를 갖는 것이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셨다. 마태복음12장 9-13절에서 안식일에 손마른 자를 고쳐주시고, 누가복음 13-14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몸이 꼬부라진 여자를 고쳐주셨으며, 수종병이 든 사람을 고쳐주셨고, 38년 된 병자를 고치셨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귀신들리고 병든 자를 고쳐 주셨다. 이는 안식일에 죽음을 제거하는 모습이다. 죄를 제거하는 모습이다.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에서 이삭을 까먹었다. 이삭을 까야 속이 드러난다 부활의 열매를 먹는 것을 상징한다.
그런데, 안식일을 범하는 자는 돌로 쳐 죽였다. 이것은 출애굽기의 안식일 규정에서 유래한다(출 31:14-15; 35:2). 하나님은 안식일을 범한 자를 죽이라고 하신 것이다. 거기서 하나님은 죽이라는 말을 두 번 거듭 말씀하신다. 출애굽기 31장 15절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누구든지 반드시 죽일지니라(죽고 죽으리라)』죽이고 죽이라는 것이다. 물세례와 불세례를 상징한다. 안식일을 범하는 것은 불순종이며 십자가의 죽음이다. 안식일에 시체가 있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범하는 것으로 없애야 하는 것이다. (죽고 또 죽고)시체가 되는 것은 죄에 대해서 죽는 것(물세례), 시체를 없애는 것은 옷을 제거하는 것(불세례)이다.
성도의 심령 속에도 옛사람의 시체를 없애버려야 한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일곱족속을 죽이듯 성도 역시 심령 속의 육적 자아를 죽여야 한다. 육적자아는 일곱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안식일은 일곱째 날로 창조를 완성하는 날로서, 이 날은 생명을 의미한다. 안식일 무덤 안이 생명으로 바뀌려면 시체(옛사람)를 치워야 하는데, 옛사람을 치우면 새사람이 등장하는 것이다. 에베소서 4장 22-24절『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옛사람의 옷을 벗고(사라지고) 새사람을 입는다 (등장)
세상은 무덤이지만 그리스도로 인해 천국으로 바뀌는 것이다. 그래서 옛성전이 무너져야 한다. 창세기 2장 1절 일곱째 날 하늘의 군대와 땅의 군대가 편성되었다. 한글 개역개정은 잘못 번역된 것이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에서 만물은 군대(챠바)를 의미한다. 그래서 일곱째 날에 하늘의 군대(천사)와 땅의 군대(사람:악한 천사의 영)가 통일 되는 것이 안식이 되는 것이다. 무덤은 땅을 의미하며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되려면 땅을 상징하는 무덤이 열려야 한다. 마태복음 27장 52절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안식일 다음 날 그리스도는 부활하셨다. 마태복음 27장 53절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사람들은 아무도 예수의 시체를 찾을 수 없었다. 다만 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된 몸을 찾았다. 왜 시체가 신령한 몸으로 변화했다고 믿는가? 그들은 죽어야 할 육체가 너무나 소중한 것이다. 육체는 죄의 몸인데,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은 죄의 몸이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활은 시체와 상관없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대부분 육체의 부활을 가르치고 믿는다. 거짓선지자들이 얼마나 큰 죄인가 라고 말을 하면, 유다가 지적하듯이 노아의 홍수와 소돔과 고모라에서 불심판과 같은 죄라는 말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가장 먼저 막달라 마리아를 만나게 된다. 막달라 마리아는 제자들이 집으로 돌아간 후에도 계속 무덤에 남아있었던 것이다. 요한복음 20장 17절에서는『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핲투)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핲투는 붙들어서 끌어안지 말라는 것이다. 다시는 예수님을 놓치지 않으려고 하는 모습이다. 그리스도께서 아직 아버지 집으로 아직 가지 않으므로 붙잡지 말라는 것이다. 당분간 마리아와 제자들과 세상에 함께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두 제자를 만나서 대화를 했지만, 예수님은 처음에는 자신의 부활의 몸을 보여주지는 않았다. 그리고 요한복음 20장 19-20절에서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제자들이 마리아의 말을 듣고 부활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지 않았으나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놀란 것이다. 분명히 문을 닫았는데 예수님이 벽을 뚫고 제자들에게 들어오신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체는 이 세상의 육체와는 다른 몸인 것이다.
요한복음 20장 24-25절에서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도마는 예수의 부활을 믿지 않았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에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자리에 없었다. 다른 제자들이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고 말하였지만, 자명하게 십자가에 못박혀 돌 무덤에 묻힌 죽은 이가 눈 앞에 나타났다는 동료들의 말을 도마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요한복음 20장 26-27절에서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라고 했다. 그런데, 누가복음 24장 38절에서는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라고 되어 있다.
이를 헬라어 성경으로 보면,『αὐτός ψηλαφήσατέ με καὶ ἴδετε ὅτι πνεῦμα σάρκα καὶ ὀστέα οὐκ ἔχει καθὼς ἐμὲ θεωρεῖτε θεωρεῖτε ἔχοντα』다시 번역해 보면, 『그는 나를 만지고 영의 몸이라는 것을 보았고, 나는 뼈를 가진 너를 보듯이 뼈가 없다.』 도마가 본 것은 예수님의 죽은 상태에서 있었던 못자국과 창자국이 아니라, 그 자국들이 변신하는 모습을 보고 놀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제자들도 놀라고 기뻐한 것은 도마와 같이 그런 부활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한글 개역개정은 마치 예수님이 살이 있고 뼈가 있는 것처럼 번역이 되어서, 이전의 몸으로 돌아갔구나 라고 착각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몸은 영의 몸(πνεῦμα σάρκα 프뉴마 사르카)이다. 그리고 뼈가 없다는 것이다. 즉 이 세상에서 사람이 움직이기 위해 뼈가 필요하듯이 그런 몸이 아니라는 말이다.
예수님이 죽기 전의 육체의 몸은 죽어야 할 사람의 몸이다. 죽어야 할 사람의 몸을 성경은 죄의 몸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이는 첫사람 아담의 몸이기 때문이다.
로마서 6장 6절『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죄의 몸은 거룩한 몸으로 될 수 없다. 죄의 몸은 죽어야 하고, 새생명인 영의 몸이 태어나는 것이다. 새생명은 부활생명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하늘로 부터 난다. 하늘로부터 난 자를 거룩한 자라고 베드로는 말을 하는 것이다.
베드로전서 1장 16절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διότι γέγραπται · ἅγιοι ἔσεσθε, ὅτι ἐγὼ ἅγιος.) γενεσθε(게네스데)는 γίγνομαι(기그노마이:태어나다, 생산되다 라는 의미)의 2인칭 수동태로서 『거룩으로 태어나라』는 것이다. 이를 다시 번역하면,『나는 거룩이니, 너희들은 거룩으로 태어나라(거듭나라)』는 의미다.
로마서 6장 8절『 만일(에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아페다노멘)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쉬제소멘)을 믿노니(피스튜오멘πιστεύομεν)』εἰ δὲ ἀπεθάνομεν σὺν Χριστῷ, πιστεύομεν ὅτι καὶ συζήσομεν αὐτῷ,(헬라어 성경)
에이(εἰ)는 가정법 접속사이다. 어떤 사실이 일어난 것으로 간주하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라는 것이다. 아페다노멘(ἀπεθάνομεν)은 아오리스트 시제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순간적으로 죽었다는 말이다. 쉬제소멘(συζήσομεν)은 우리가 함께 새생명이 된다 라는 미래시제다. 쉬(함께)와 자오(살다)의 합성어다. 성도가 그리스도의 생명을 공유한 존재(공생관계)가 된다. 성령을 받을 때 순간적으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성도 역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로 태어나 거룩한 존재가 된다는 말이다. 비록 죽어야 할 육신이 있어도 영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다.
성도들에게 현재적 부활이 이루어지는 모습
고린도전서 15장 51-52절『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코이메데소메다)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ἐν ἀτόμῳ, ἐν ῥιπῇ ὀφθαλμοῦ)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호 네크로이)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코이메데소메다(κοιμηθησόμεθα)는 영적으로 죽은 자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호 네크로이(οἱ νεκροὶ)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자들이다. 그런데, 이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홀연히 변화를 받아서 영적으로 일어난다는 말이다. 홀연히(ἐν ἀτόμῳ, ἐν ῥιπῇ ὀφθαλμοῦ) 라고 번역했는데, (엔 아토모 엔 리페 옾달무)는 “눈 깜빡하는 순간에” 라는 말이다.
눈깜빡 하는 순간에 성도의 심령 속에 새성전이 들어서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옛성전은 죽고, 새성전이 들어서는 것이다. 육적 주체에서 영적 주체로 바뀌는 순간이다. 새성전이 심령 속에 들어서도 옛성전의 파괴된 모습은 그대로 남아있다. 완전 파괴될때까지 육적자아와 싸워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일곱 족속과 싸운 것과 같은 이치다.
베드로후서 3장 10절에서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후 우라노이)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파렐류손타이) 물질(스토이케이아)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휴레데세타이)』 주의 날은 마지막 심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의 마음 속에 새성전이 들어오는 것을 의미한다. 성도의 심령 속에 들어오는 날이 어떤 사람은 빨리 어떤 사람은 늦게 찾아온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함께 죽은 자의 심령으로 재림하여 들어와 하나님 나라(천국)이 임재하는 것이다. 후 우라노이(οἱ οὐρανοὶ)는 마음 속에서의 하나님 나라를 의미한다. 파렐류손타이(παρελεύσονται)는 파라(옆에서) 류손타이(오다)의 합성어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가 임재(파루시안)하는 것이다.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간다고 번역했는데, 아마도 예수님의 재림을 염두에 두고 번역한 것으로 보여진다.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는 것은 육적 몸(옛사람)이 죽는 것을 의미하며, 그래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스토이케이아(στοιχεῖα)는 원소(물질)라는 의미다. 휴레데세타이(εὑρεθήσεται)는 드러나다 라는 의미다.
현재적으로 살고 있는 성도들은 육적 몸(혼)이 죽고, 하늘로부터 영의 몸으로 태어나, 호 로고스(말씀이신 그리스도)를 영접(파루시안(παρουσίαν 임재)하게 된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공중(심령 속의 하늘 나라)에서 주를 영접할 것이다(카타베세타이καταβήσεται.)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18절『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이 성경 귀절로 인하여 많은 오해가 있는데, 신도들이 예수님의 재림시에 들림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이 종말이 되어가고 자신들은 휴거 준비를 하자 라는 황당한 말들을 하고 있는 것이다.
4장 16절의 강림인 카타베세타이(재림)는 성도들의 심령 속에 세워진 새성전에 그리스도가 재림하여 들어가는 것이다. 성도들의 부활의 몸(새성전)에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인해서 성도의 심령 속의 하나님 나라가 되는 것이다. 성도에게는 이미 그리스도께서 재림해 들어오신 것이다. 그래서 성전이 되고 하나님 나라가 된다. 그래서 파루시안이 되는 것이다. 예수를 믿지 않는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언제 이루어질지 모르지만, 심판주로 오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