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령宜寧은 낙동강과 남강이 합류하는 곳으로, 두 강과 그 지류의 유역에는 지석묘·입석 등 청동기 시대의 유적이 각지에 분포돼 있다. 신석기 시대의 유적은 아직 발견된 바 없으나 청동기 시대에는 이미 상당한 인구가 이 지방 전역에 살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삼국시대에는 함안의 아라가야阿羅伽倻나 창녕의 비사벌比斯伐 영역으로 의령과 신반新反 지방이 정치 중심지 가운데 한 곳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신라가 아라가야와 비사벌을 차례로 병합해 지금의 창녕에 하주下州를 설치한 555년(진흥왕 16)까지는 이 지방도 신라의 세력권에 들어갔을 것으로 짐작된다.
의령 죽전리 고분군
해발 약 80~100m의 산줄기를 따라 수백여 기의 옛 무덤이 모여 있다. 죽전리 고분군의 동쪽에는 호미산성이 자리 잡고 있고, 남쪽에는 남강이 흐른다. 2009년과 2010년에 각각 서쪽 산줄기에 대한 부분적인 조사가 이루어졌고, 6세기에 만들어진 앞트기식 돌방무덤(橫口式石室墓‧가족 구성원이 숨을 거둘 때마다 추가로 묻을 수 있도록 만든 무덤) 3기와 구덩식 돌덧널무덤(竪穴式石槨墓‧시신을 위에서 수직으로 넣도록 옆으로 트인 입구 없이 돌로 네 벽을 싼 무덤) 등 8기가 확인됐다.
무덤 안에서는 대가야계 토기와 아라가야계 토기, 소가야계 토기, 신라 후기 양식 토기 등이 함께 나왔다. 이처럼 하나의 무덤에서 다양한 지역의 토기가 함께 발견되는 것은 의령 지역 가야 유적의 특징이며, 죽전리 고분군은 가야 무덤에 대한 연구뿐 아니라 삼국 시대 당시 의령 지역의 사회상을 연구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의령 호미산성
호미산성은 호미산虎尾山의 정상을 따라 쌓은 둘레 약 438m의 테뫼식(산 정상부의 능선을 따라 테를 두르듯이 쌓은 성) 산성이다. 성은 해발 약 80~100m에 걸쳐 쌓았으며, 성벽의 위쪽으로 폭 5~8m의 순찰 길을 만들었다. 2009년 조사 결과 호미산성은 삼국 시대 처음 만들어졌으며 통일신라 시대에 성을 수리해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호미산성은 돌로 쌓은 성벽 뒤에 흙벽을 다시 쌓은 토석혼축土石混築 산성이다. 특히 흙벽에서는 벽을 단단하게 다져 쌓기 위해 나무 기둥을 세운 흔적도 발견됐다. 성벽은 죽전리 고분의 조성 방법과 비슷한데, 돌로 쌓은 벽은 큰 돌을 다듬은 후 중간중간 작은 돌을 끼워 수평을 맞췄다. 호미산은 산의 모양이 호랑이 꼬리처럼 생겼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며, 망우당 곽재우가 임진왜란 당시 이곳에 의병을 배치했다는 기록이 있다.
탑바위
탑바위(塔巖)는 남강변의 깎아지른 벼랑 위에 1946년에 창건한 불양암佛陽庵과 남강을 지켜보고 있는 탑 모양의 바위로 의령 9경 중 6경이다. 이 바윗돌이 생긴 시기는 분명히 알 수 없지만 원래는 쌍탑으로 암탑, 쑥탑(수탑)이라 불렸고 지금은 수탑만 남아 있다. 그 모양을 보면 약 20톤가량의 커다란 바위가 아랫부분을 받치고 그 위로 높이 8m가량의 작은 바위가 마치 탑층을 이루듯 충을 이루고 있어 매우 진기한 자연의 조화라 하겠다.
아래로는 남강의 맑은 물이 굽이쳐 흐르고 있으며, 강 건너에 넓은 들판이 활짝 펼쳐진 이곳은 임진왜란 당시 곽재우 장군의 전승지로도 널리 알려진 곳이다. 의령은 임진왜란 때 의병의 전승지가 아닌 곳이 한군데도 없을 정도라 하겠지만 특히, 이 탑바위는 곽재우 장군이 의병들의 거점으로 삼았던 유곡면 세간리와 가까운 거리에 있고, 남강변에 총총히 복병을 매복해 두었다가 왜군의 내습에 대비했던 기록들로 미루어 이곳 탑바위의 싸움도 그 규모를 능히 짐작하게 해 준다.
지금은 기묘한 모양에서 풍겨지는 기이한 기운을 통해 가족의 무병장수와 무사태평을 기원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또한 암탑의 부서져 버린 애틋함이 수탑에게 향하고 있어 청춘남녀들이 기원을 하면 애틋한 마음이 서로에게 전달된다는 사연이 있다. 그리고 솥바위의 부자 기운이 탑바위를 거쳐 이병철 생가로 이어져 있어 탑바위에서 기원을 하면 그 기운을 받아 풍족한 삶을 살 수 있다는 설이 있다.
불양암
비구니 암자로, 오래된 절집은 아니다. 탑바위를 보고 내려가 이 암자의 본당을 보면 그 위에 탑바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남강변의 절벽 1분의 3 지점, 관음전과 요사채 건물 모두 아찔한 절벽 위에 지어져 있다. 아주 좁은 공간이다. 관음전 아래로 내려가면 바로 남강이다. 창건 당시 금강암이라 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불양암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지붕 위로 솟은 소나무다.
의령 부잣길
예로부터 부자 마을이 많고 인심까지 넉넉해 살기 좋은 고장으로 소문 난 고장이 경남 의령이다. 의령에 알부자가 많은 이유를 남강 솥바위, 즉 정암鼎巖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이 지방 사람들은 이 바위를 보물처럼 여긴다. 솥은 예로부터 곡식, 즉 재물을 뜻하고 솥바위 아래 세 개의 큰 기둥은 삼정승을 뜻하여 사방 20리 안쪽에 정승에 버금가는 세 명의 큰 부자가 태어날 것이라는 전설이 이 지방에 전해져 왔다. 솥바위에서 8km 정도 떨어진 중교리에서 이병철 전 삼성그룹 회장이 태어나 성장했고, LG그룹 창업자 구인회 회장은 7km, 효성그룹을 창업한 조홍제 회장은 5km 정도 떨어진 곳에서 태어났다.
망개떡
멥쌀로 만든 반죽을 망개나무 잎으로 싸서 찐 망개떡은 경남 의령군의 향토식품이다. 망개잎으로 떡을 싸서 쪘기 때문에 서로 달라붙지 않고 오랫동안 보관해도 잘 쉬지 않아 특히 여름철에도 보관 부담이 덜하다. 제대로 만든 망개떡은 잎을 벗겨내도 떡 자체에 망개나무 잎 특유의 독특한 맛과 향이 배어 있다. 흔치 않은 망개잎을 따로 구해야 하고 떡맛에 호불호가 있기 때문인지 일반적인 떡집에선 거의 팔지 않고 망개떡 전문점이나 특화된 떡집에서만 판매한다. 아직까지도 특유의 망개떡~을 외치며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예로부터 망개떡을 선물하는 것은 나쁜 액운을 쫓아내고 좋은 일만 가득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됐다. 가야 시대부터 시작된 망개떡의 나이는 약 1400년이 넘는다. 제일 유명한 유래는 임진왜란으로 거슬러 오른다. 당시 산속으로 피해 다니면서 먹었던 떡이 망개떡이다. 망개잎으로 싸면 흙이나 먼지가 묻지 않고 쉽게 상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유래로는 가야 여성들이 백제로 시집을 갈 때 싸 갔던 음식이라는 것이다. 신선이 먹는 음식이라 하여 선유량仙遺糧이라 불리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