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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불이의 공전보(共戰譜)
소설《신·인간혁명》과 함께 걷는다
제18회 나가노(長野) ①
은사의 생애와 정신을 후세에 올바르게 전하고자
불이(不二)의 제자는 1957년 8월,
나가노에서 은사의 전기 소설을 집필하겠다고 결의했다.
은사의 정신을 미래에 영원히 전하기 위해 ‘제자의 길’을 써서 남기겠다고
불이의 제자는 1993년 8월,
나가노에서 새로운 집필 투쟁을 시작했다.
그리고 2018년 8월, 나가노에서 이 ‘민중 승리의 대서사시’를 탈고했다.
나가노에는 소설 《인간혁명》, 《신·인간혁명》과
함께 걷는 긍지와 서원이 맥동한다.
평화만큼 존귀한 것은 없다
평화만큼 행복한 것은 없다
집필을 시작한 날
대화가 막바지에 접어들 무렵이었다. 이케다 다이사쿠(池田大作) 선생님은 원고지 한 장을 손에 들고 회담 상대인 인도 간디기념관 관장(당시) 라다크리슈난 박사에게 이렇게 물었다.
“박사님, 제가 무엇을 썼는지 아십니까?”
통역이 그 내용을 박사에게 전했다. 그 내용은 소설 《신·인간혁명》의 첫 구절이었다.
“평화만큼 존귀한 것은 없다.
평화만큼 행복한 것은 없다.
평화야말로 인류가 나아가야 할 근본의 제일보이지 않으면 안 된다.”
이때 박사의 솔직한 느낌은 ‘이케다 선생님은 스승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살아가는 지도자’라는 것이었다.
1993년 8월 6일 오후, 나가노연수도량에서 선생님과 박사의 회담이 이루어졌다. 선생님이 소설 《신·인간혁명》을 집필하기 시작한 날은 바로 그날 아침이었다. 8월 6일은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날이다.
“굳이 말하자면 그것은 ‘원폭의 날’에 자신에게 평화를 위한 투쟁을 선언한 것이었다.”(‘수필 신·인간혁명’)
라다크리슈난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핵무기 폐기는 선생님의 스승인 도다(戶田) 선생님의 소원이었습니다. 이 소설에는 스승의 꿈을 실현하려는 제자의 각오와 항구평화를 구축하려는 제자의 서원이 맥동하고 있습니다.”(<화광신문> 2018년 10월 5일자)
선생님은 소설의 ‘들어가는 글’에서, 30권으로 완결할 예정이라고 밝히고, “집필은 한정된 생명의 시간과 장절한 투쟁이 될 것이 분명하다.”고 썼다.
당시 선생님은 예순 다섯이었는데 괴테와 위고 그리고 톨스토이가 여든이 넘어서도 계속 펜을 잡은 사실을 언급하고 ‘나는 아직 젊다.’며 도전의 불꽃을 태웠다.
‘수필 신·인간혁명’에도 집필에 대한 신념이 씌어 있다.
“나도 권력의 마성이 준동하는 현대의 ‘축생도(畜生道)’와 투쟁하기 위해 홀로 인간주의의 언론전을 용감하게 일으켰다. 스승의 마음을 가슴에 품고, ‘언론의 고장’이자 추억이 깊이 새겨진 나가노의 땅에서!”
은사의 꿈을 실현하려는 제자의 각오와 진정한 평화를 구축하겠다는 서원, 그 혼백은 나가노에 남아 있다.
스승의 정의를 선양하는 것은
제자의 책무다
마지막 여름의 서원
나가노는 이케다 선생님이 소설 《인간혁명》의 집필을 결의한 땅이기도 하다. 그 원점의 장면이 소설 《신·인간혁명》 제30권(상) ‘자복(雌伏)’에 묘사되어 있다.
야마모토 신이치는 도다 선생님이 서거하기 한해 전인 1957년 8월, 가루이자와를 방문했다. 요양 중인 도다 선생님이 오사카사건으로 부당하게 체포된 신이치를 격려하고자 가루이자와로 불렀다. 가루이자와는 도다 선생님이 마지막 여름을 보낸 곳이다.
사제가 나눈 대화는 도다 선생님이 ‘묘오공(妙悟空)’이라는 필명으로 집필한 소설 《인간혁명》에 이르렀다. <세이쿄신문> 창간호(1951년 4월 20일자)부터 연재된 이 소설은 가루이자와에서 대화하기 한달 전에 단행본으로 발간되었다.
이 소설에는 주인공 ‘간(嚴) 씨’가 인간혁명하는 발자취를 주축으로 묘사하면서, 광선유포를 위해 홀로 일어선 스승 ‘마키타 조사부로(牧田城三郞, 마키구치 쓰네사부로<牧口常三郞>의 가명, 훗날 출판할 때는 본명으로 바꿈)’가 사신홍법(死身弘法)을 실천한 모습을 그렸다. 소설의 마지막은 도다 선생님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간 씨’가 감옥에서 생애 광선유포를 위해 끝까지 살아가겠다고 결의하는 장면에서 끝난다.
도다 선생님은 불이의 제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마키구치 선생님에 대해서는 쓸 수 있어도 나에 대해 일일이 글로 표현하려니 부끄러워서 할 수 없더군.”
그리고 도다 선생님과 소설 《인간혁명》을 주제로 대화를 나눈 신이치의 심정을 밝혔다.
“스승의 정의를 끝까지 선양하는 일이야말로 제자에게 주어진 책무 그 자체다.”
“옥사한 스승 마키구치 쓰네사부로의 유지(遺志)를 이어받은 도다는 1945년 7월 3일, 살아서 옥문을 나온다. 그리고 그 뒤, 도다가 실제로 무엇을 이루고 어떻게 일본광선유포의 기반을 구축했는가? ― 신이치는 ‘그 진실을 글로 남기지 않으면 스승의 위업을 선양할 수도 없고, 마키구치와 도다에게 일관하여 흐르는 창가(創價)의 사제정신을 후세에 전할 수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신이치는 이렇게 자각했다.
‘선생님의 진실을 쓸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또 그것이야말로 선생님이 내게 보내신 기대이고, 제자로서 해야 할 내 사명이다.’
이때 신이치는 이제까지 몇 번이고 생각해왔던 ‘도다가 쓴 《인간혁명》의 속편이라도 해야 할 전기 소설(傳記小說)을 집필하자.’는 확고부동한 결의를 세웠다.”
그리고 선생님은 계속해서 이렇게 썼다.
“나가노현은 ‘창가의 사제정신을 영원히 남기겠다.’는 맹세의 천지가 되었다.”
이날 8월 14일은 도다 선생님과 이케다 선생님이 만난 지 정확히 10년이 되는 때를 새기는 날이었다.
인생의 봄은 반드시 온다
지지 말고 열심히 노력하자
마쓰모토에서 펼친 격려행
소설 《신·인간혁명》에 그려진 나가노 동지와 써 내려간 ‘황금의 대서사시’를 살펴보고자 한다.
1960년 11월, 이케다 선생님은 제3대 회장에 취임한 뒤, 나가노의 첫 지도를 위해 떠났다. 이 모습은 제2권 ‘용무’에 씌어 있다.
10일, 신이치는 나가노현 마쓰모토시를 방문했다. 마쓰모토역에 도착한 신이치는 마중 나온 동지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 여자부의 지부 중심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잘 싸워 주었습니다.”
여자부의 지부 중심자는 2년 전에 당시 총무인 신이치가 스와를 방문했을 때 격려한 다케모토 기미코라는 여자부원이었다.
1958년 8월, 난신(南信) 방면대회를 마치고, 신이치는 가까운 여관을 빌려 간부지도회를 열었다. 여자부 조장(당시 최소 단위 조직의 리더)인 다케모토는 ‘멤버들이 야마모토 총무와 만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멤버 여섯 명을 데리고 여관으로 갔다. 그 멤버들은 대부분 집에서 홀로 신심하는 멤버로 모두 고민을 안고 있었다.
회합장소는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신이치가 참석자의 질문에 답변하고, 다음 질문을 받으려고 하자 뒤쪽에서 다케모토가 ‘야마모토 선생님!’ 하고 외쳤다. 멤버들과 함께 왔다는 말을 들은 신이치는 그들을 앞쪽으로 불렀다.
다케모토는 멤버들을 소개하기 시작하자 가슴이 벅차 목이 메였다. 다른 멤버들도 기뻐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신이치는 다정하게 말을 건네고 여자부 간부에게 ‘인생의 가로수길’을 부르게 했다. 모두 함께 불렀다. 그리고 ‘고추잠자리’ 등 여러 곡을 잇따라 합창했다. 그 진심 어린 노랫소리는 여자부들의 가슴에 희망을 비추는 선율이었다.
노래가 끝나자 신이치는 이렇게 말했다.
“이윽고 인생의 봄은 반드시 옵니다. 지금 아무리 괴롭고 힘들어도 지지 않고 열심히 노력하는 것입니다. 나는 당신들의 성장을 언제까지나 지켜보며 기원해 가겠습니다.”
이 격려로부터 약 2년이 지난 11월 10일, 다케모토는 마쓰모토지부의 여자부 중심자로 성장해 마쓰모토역에 신이치를 마중하러 나온 것이다. 마찬가지로 2년 전에 격려한 가쓰타 겐지라는 멤버도 남자부 중심자가 되어 역에 모습을 보였다. 신이치는 무엇보다도 청년의 성장이 기뻤다.
오후 5시가 지나 마쓰모토지부의 결성대회가 시작되었다. 신이치는, 학회는 어본존 근본이라는 점을 이야기하고 공덕으로 빛나는 생활의 모습이 바로 불법(佛法)의 위대함을 증명한다고 강조했다.
나가노지부 결성대회
이튿날 11일, 신이치는 마쓰모토에서 나가노로 북상했다. 나가노역에 도착한 신이치는 역장실에 가서 인사하고 나가노지부의 결성대회에 참석했다. 전진의 숨결이 맥동하는 회합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남자부 행사진행요원으로 참석한 시미즈 미쓰오 씨(나가노중앙권 부지역장)는 당시를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결성대회가 끝나자 이케다 선생님은 제2 회합장소를 가득 메운 멤버를 격려하려고 제1 회합장소에서 나오셨습니다. 밖은 이미 어두웠습니다. 자갈길이어서 걷기도 어려워 제가 손전등으로 선생님 앞을 비추었습니다. 선생님은 ‘자, 가볼까요!’라며 서둘러 제2 회합장소로 가셨습니다. 선생님의 걸음이 빨라 저는 필사적으로 따라갔습니다. ‘조금이라도 빨리 동지를 격려하고 싶다.’는 스승의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제2 회합장소에 모습을 나타낸 선생님을 보고 멤버들은 환희했다. 많은 동지가 선생님에게 직접 지도를 받고 결의에 넘쳤다.
시미즈 씨는 감사와 결의를 이렇게 말했다.
“이날부터 절복의 기세가 속도를 더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도 ‘스승을 필사적으로 따라가자.’ ‘스승을 구도해 끝까지 걷자.’고 서원해 모든 고난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때 꿈을 꿀 정도로 나가노지부의 결성대회 날은 커다란 원점입니다.”
진심 어린 생명 촉발의 여행
결성대회가 끝나고 숙소로 이동한 신이치는 자신을 찾아온 지부 간부들과 간담하는 자리를 마련해 한 사람 한사람에게 격려를 보냈다.
남자부 간부가 “저는 학력이 없습니다. 간부로서 지휘할 수 있을지 불안합니다.” 하고 질문하자 신이치는 이렇게 말했다.
“학력이 없다 하여 비굴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답게 자신이 있는 장소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생에 승리하는 길입니다.
나도 도다 선생님 슬하에서, 야간 학교를 도중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학력이 없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배우지 않는 것은 저속하다. 공부하지 않는 것이 수치이다. 나도 매일 공부하고 있다. 하루에 20분이라도 좋고 30분이라도 좋다. 틈을 내어 독서하고 공부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지속하면 힘이 된다.”
그리고 신이치의 제안으로 ‘다바루자카(田原坂)’를 합창했다. 노래가 끝나자 신이치는 다시 청년을 응시했다.
“자네도 위대한 사명을 가진 중요한 인재이다. 소중한 몸이다. 그러니 병에 걸리면 안 된다. 건강에 유의하고 몸을 단련해 가는 것이다.”
청년은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신이치는 지부 결성 대회 여행의 모든 것을 격려로 채색하고 있었다. 그것은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고, 있는 그대로의 인간으로서 눈부시게 빛나는 행복의 길을 가르치는, 진심 어린 생명 촉발의 여행이었다 해도 좋다.”(제2권 ‘용무’)
제목을 끝까지 부르며 학회와 함께 살아가자
민중에게 희망과 행복을
제4권 ‘입정안국’에는 1961년 7월 29일과 30일 이틀간, 기리가미네고원에서 실시한 남녀 청년부 인재그룹 ‘수호회’ ‘화양회’의 야외연수가 그려져 있다.
제8권 ‘청류’에는 2년 뒤인 1963년 7월 30일에 개최한 주부 제2본부 간부회의 모습이 자세히 씌어 있다.
당시 조직적으로는 주부 제2본부에 고신과 호쿠리쿠 지방에 있는 각 지부가 소속되어 있었다. 회합장소인 나가노시민회관에는 각지의 멤버들이 용약하며 모였다.
간부회에서 인사한 신이치는 ‘무의왈신(無疑曰信, 의심이 없음을 신이라고 함)’의 신심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갓난아기는 아무런 의심 없이 어머니 젖을 먹고 성장합니다. 그러나 젖을 먹지 못하면 성장도 늦어지고 병에도 걸리기 쉽습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어본존을 믿고 평생 동안 제목을 끝까지 불러 간다면, 틀림없이 부처의 생명을 용현하고 생활에서도 절대적 행복 경애의 모습을 보일 수 있게 됩니다.
아무쪼록 어본존을 의심하는 일 없이 끝까지 제목을 부르며, 광선유포의 단체인 학회와 함께 살아갑시다. 그리하여 이 인생을 최고로 의의 있고 최고로 행복하게, 또 최고로 장엄하게 장식해 갑시다.”
끝으로 신이치의 지휘에 맞춰 모든 참석자가 ‘신세기의 노래’를 합창하고 간부회를 마쳤다. 그 뒤, 신이치는 강당에 들어오지 못해 밖에 있는 멤버들을 격려하고 지부간부 지도회에 참석했다. 그리고 회관을 건설할 부지를 시찰하고 나서 지구부장회에서 있는 힘을 다해 거듭 지도하고 저녁에는 총지부 간부와 협의했다.
모든 행사가 끝났을 때는 피로가 쌓여 몸이 뻐근해 안마사를 불러 피로를 풀기로 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초로의 안마사는 학회원이었다. 하지만 안마사는 손님이 신이치라는 사실을 몰랐고, 신이치도 자신이 회장이라고 말할 기회를 놓쳤다.
안마사는 야마모토 회장이 나가노를 방문한다는 말을 듣고 만나고 싶다고 기원했지만 일 때문에 회합에 가지 못했다고 말했다. 신이치는 왠지 모르게 어깨가 더욱 뭉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랬었군요…. 하지만 진지하게 기원해 가면 원하는 모든 일이 어본존에게 통한다는 지도를 들으셨겠지요.
괜찮습니다. 그런 마음이라면 반드시 기원이 이루어질 테니까요.”
신이치는 안마를 받으면서 안마사의 이야기를 듣고 따뜻하게 감싸듯이 대답했다. 어느 쪽이 ‘치유를 받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나중에 안마사는 그 손님이 신이치였다는 사실을 알고 기원의 힘을 실감했다.
이 에피소드에도 나타나 있듯 이케다 선생님은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회원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마음을 나누며 격려를 보냈다. 눈앞에 있는 한 사람을 위한 격려를 되풀이하는 행동이 광선유포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청류’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광선유포란 민중의 마음에 희망과 행복이라는 꽃을 피워 가는 작업이다.”
광선유포란 민중의 마음에
희망의 꽃을 피우는 작업이다
마쓰시로 군발지진
1965년 8월, 마쓰시로에서 군발지진이 시작됐다. 마쓰시로는 나가노시 동남부에 있는 곳으로 주민들은 수년 동안 지진에 시달렸다.
불안과 모진 고생 속에서 창가의 동지가 스승에게 격려를 받고 분투하는 모습이 제12권 ‘애향’에 씌어 있다.
마쓰시로지진은 처음에는 체감하지 못하는 지진이었지만 점점 활발해져 9월에 접어들자 떨림을 느낄 수 있는 지진이 200회를 넘어섰다.
10월 1일에는 처음으로 진도 3의 지진을 기록했다. 지진 횟수는 늘어 ‘대지진이 오는 것은 아닐까.’라는 공포가 주민들의 마음에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11월에는 진도 4의 지진도 일어났다.
신이치는 마쓰시로의 지진이 신문에 보도되자 간부에게 동지를 격려하고 상황을 상세히 보고하도록 부탁했다. 마쓰시로로 떠나는 간부에게 신이치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지금에야 비로소 마쓰시로라는 지역이 안고 있는 고뇌의 역사를 바꾸어, 숙명전환할 때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모든 회원이 힘을 합쳐, 지역 사람들이 단결할 수 있도록 그 핵이 되어 군발지진을 극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전 일본으로 행복을 발신하는 광선유포의 일대 거점을 마쓰시로에 만들어야 합니다.”
“마쓰시로 동지들은 강한 애향심과 깊고 큰 사명이 있습니다. 반드시 변독위약(變毒爲藥)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 한사람이 주민들에게 힘이 되고 지역을 끝까지 지켜야 합니다. 고난의 비바람이 몰아치는 지금이 바로 크게 비상(飛翔)할 때입니다. 승부를 낼 때입니다.”
11월 11일, 마쓰시로에 도착한 간부는 마쓰시로를 생각하는 신이치의 뜨거운 마음을 동지에게 전하고자 열심히 호소했다. 멤버들은 스승의 진심을 느끼고 결의에 차 눈물을 글썽였다. 그리고 용감하게 홍교를 위해 달렸다.
당시 동지들의 분투하는 모습이 ‘애향’에 이렇게 씌어 있다.
“멤버들은 흔들리는 대지 위를 경쾌하게 뛰어다니며 포교했다. 어떤 사람은 학회라는 말만 듣고도 현관문을 꽝 닫아 버리거나 쫓아 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좌절하지 않았다. 활기차게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사명에 살아가는 투혼과 환희가 솟아올랐다. 학회가를 부르면서 논두렁이나 둑 위를 걸으며 의기양양하게 포교를 추진했다.
학회원들의 이런 발랄한 모습과 확신에 찬 밝은 얼굴이 지진에 대한 불안과 공포에 떠는 마쓰시로 주민들에게 얼마나 큰 용기를 북돋아 주었던가. 불안과 공포가 전염되듯 용기도 또한 전파된다.”
고난의 비바람이 몰아치는
지금이 바로 크게 비상할 때다
회관 개관
1966년이 되어도 지진활동은 가라앉지 않았다.
4월 17일에는 24시간 사이에 무려 6780회의 지진이 기록되었다. 그 중 체감할 수 있는 지진은 661회로 진도 5의 지진이 세 차례나 있었다.
신이치는 현지에서 열심히 노력하는 동지를 응원하고자 마쓰시로에 회관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모두 찬성하여 마쓰시로 간부에게 그 소식을 전하고, 6월 10일자 <세이쿄신문>에도 발표했다. 멤버들은 기쁜 나머지 몇 배로 기세를 더하며 한층 더 대화에 힘썼다.
회관에 걸맞은 건물도 찾아내 개축공사도 무사히 마쳤다. 그리고 8월 24일, 마쓰시로회관의 개관식을 열였다.
이듬해 1967년 1월, 염원하던 마쓰시로지부가 결성되자, 벗은 더욱 투지를 불태웠다. ‘지진이 계속되는 속에서도 활기차게 활동하는 우리를 봐 주셨으면’ 하고, 신이치의 마쓰시로 방문을 기원하며 홍교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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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