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올림픽 메달 김성집, 첫 월드컵 이끈 홍덕영,‘더반의 기적’쓴 홍수환, 가난에 찌든 국민에게 그들은 희망이자 용기였다. 황영조·박찬호·이상화… 잠재력 꽃피운 후배들, 세계 무대를 주름잡으며 대한민국을 각인시킨 손기정부터 김연아까지… 이들이 있어 우린 행복했다. 1947년 4월, 보스턴 마라톤에서 우승한 서윤복이 시상대에 섰다. 그의 유니폼 가슴에는‘KOREA’란 글자와 태극기 문양이 선명했다. 광복 2년 만에 맞은 쾌거였다. 이날 많은 한국인이 손기정을 떠올렸다. 1948년 런던올림픽에서 대한민국은 사상 처음으로 올림픽 메달을 땄다. 동메달을 나란히 획득한 역도의 김성집과 복싱의 한수안이었다. 지금은 12시간 남짓 비행기를 타면 되는 길을 9개국 12개 도시를 거쳐 21일 만에 도착했다. 김성집은 런던에서 대한민국 1호 메달을 딴 데 이어 1952년 헬싱키올림픽에서도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수안은 투혼의 상징이었다. 왼쪽 고막이 터지는 부상을 당하고도 8강전에서 승리했고 준결승에서도 우세한 경기를 펼쳤지만 편파 판정으로 금메달이 아닌 동메달을 땄다. 1998년 IMF 위기 시절에도 스포츠는 희망을 주는 존재였다. 박세리가‘맨발의 투혼’으로 US여자오픈 골프대회 우승컵을 들어 올렸고, 미국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투수 박찬호는 시원한 스트라이크로 출근길 시민들을 대형 화면 앞으로 불러 모았다. 노력하면 세계 정상에 오를 수 있는 한국인들이었다. 2002년 홍명보가 월드컵 4강을 이루는 페널티킥을 성공시키자 길거리 응원에 나섰던 수백만 인파의 환호로 나라가 들썩였다. 한국인 최초로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 진출한 박지성은 세계적인 명문 클럽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활약하며 한국과 세계 축구의 간격을 좁혔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박태환은 한국 최초의 수영 금메달을 땄고, 역도의 장미란은 세계신기록을 들어 올렸다. 2010년 밴쿠버 동계 올림픽에서 한국 스포츠는 새로운 희열을 맛봤다. 피겨 스케이팅 불모지에서 피어난 김연아는 사상 가장 아름다운 연기로 여왕이 됐다. 스피드 스케이팅의 이상화와 모태범·이승훈은 거침없는 질주로‘스피드 코리아’의 이름을 높였다.‘빙속여제’이상화는 2010년 밴쿠버 금메달, 2014년 소치올림픽 금메달에 이어‘안방’평창올림픽에서 빛나는 은메달로 올림픽 3회 연속 메달 위업을 썼다. 여자 골프의 박인비는 2013년 메이저대회 3연승을 이루고, 메이저 대회 3연패와 커리어 그랜드슬램을 이루며 전설이 됐다. 손기정에서 김연아까지 스포츠는 한국인의 가능성을 세계무대에서 꽃피우며 자신감을 갖게 하는 존재였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스포츠는 사회를 반영하기에 스포츠 공간 역시 종종 투쟁의 공간으로 면모한다. 스포츠를 통해 억압하기도 하고 또 스포츠를 정치 도구로 활용하면서 도구들과 통합을 가장하기에 체육인을 저항한다. 알리는 ‘나는 당신들이 하라는 대로 하는 사람 아니다’라고 했고, 랜드 암스트롱은 ‘나는 내 삶의 스타일에서나 옷을 입을 때나 사회에 순응하지 않는 편’이라고 했다. 물론 마이클 조던처럼 백인들의 품에 안겨 “백인 같은 흑인”, “백인이 원하는 흑인”이 된 이도 있다. 그러나 어느 나라든, 어느 인종이든, 어느 종목이든 주변을 돌아보고, 명정기죄하며, 사회 정의를 추구하고, 때론 희생까지도 감내하는 체육인들이 있어왔다.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게 보이는 여자 마라톤도 수십 년 간 여자선수들이 가부장제에 저항하고 투쟁한 결과물이다. 스포츠 선수들은 또한 체제에 저항하기도 한다. 테니스의 여왕 마르티나 나브라틸로바는 조국 체코의 사회주의 정권이 맞섰다. 당연한 것에 도전하기도 하고 포기를 거부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사실 이 모든 게 이러한 표상과는 단절시킨 채 운동만 시킨 우리 선수들 문제이긴 하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스포츠는 바뀌어야 한다. 더 자유로워야 하고 더 발랄해져야 한다. 그리고 세상을 둘러볼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자신의 소신과 신념에 따른 자신의 발언을 해야 한다. 조직이 원하는‘국기’를 깨고 나와야 한다. 아직까지 운동 밖에 모르는‘운동기계’보다는 다양한 방면에 관심과 재능을 가진 스포츠 스타가 인기를 끌고 있다. 런던 올림픽 개인 혼영 400m에서 금메달을 따낸 미국의 라이언 록티는 기량뿐만 아니라 독특한 캐릭터로 눈길을 끌었다. 30을 바라보는 나이에‘만년 20’이라는 꼬리표를 떼어내고 현역에서 은퇴하면 패션 디자이너가 되겠다는 당찬 꿈을 갖고 있다. 신발만 130켤레를 가지고 있고 유명 모델 에이전시와 전속계약을 맺기도 했다. ‘다이몬드 그릴’로 불리는 마우느피느는 그의 스타일을 대표하는 트레이드마크다. 국내에 록티같은 스타가 있다면 그의 이름 앞에‘기행(奇行)’이라는 수식어가 붙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