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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평안의 나날 원문보기 글쓴이: 람미
***간증: 1046. [역경의 열매] 임순철 (1-10) 1952년 제주 한 고아원서 시작된 ‘구원의 삶’
참으로 지독한 아픔과 슬픔을 안고 살았다. 너무 감당하기 어려워 떨쳐내려고 발버둥을 쳐봤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나 자신의 미약함만 확인했다. 어쩔 수 없이 숙명 같은 아픔과 슬픔에 울부짖으며 살아야 했다.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욥 5:7)고 하지만 내 인생은 너무나 처절한 고난의 길이었다.
하지만 언젠가 그 덫에서 벗어났다. 소리 없이 찾아와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사랑으로 지옥과도 같던 그 덫을 걷어냈다. 그분의 피 묻은 손이 나를 만져주심으로써 구원을 받았다. 지금도 주위에서 간혹 내 길을 고난으로 여기지만 그렇지 않다. 그분이 나를 대신해 죽으셨다는 걸 알고 난 뒤부터 내 길은 오히려 영광의 길이 됐다. 참으로 고마운 그분을 위해 살고 있다. 나는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나의 가장 오래 된 기억은 제주도의 한 고아원에서 지내던 시절이다. 언제나 허기진 배를 채울 만한 것을 찾아 여기저기 어슬렁거리던 어릴 때의 내 모습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옷인지 넝마 조각인지 구분할 수 없는 차림에 누런 콧물을 질질 흘리며 해골 같은 모습은 거지 중에서도 상거지였다.
누구나 짐작하겠지만 한국전쟁이 막 끝난 그때는 참으로 먹고 살기 힘든 시절이었다. 일반 가정도 그럴진대 고아원에서야 어떻겠는가. 구제품이 들어온다곤 하지만 고아원 원생들이 나눠 먹고 쓰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나의 출생에 관해서는 1952년 제주도의 어디에서 태어났다는 사실밖에 모른다. 훗날 들은 이야기로는 낡은 포대기에 싸인 채 길거리에 버려진 핏덩이를 누군가가 주워서 고아원에 맡겼다고 했다. 고아원에서 여기저기 젖동냥을 해서 겨우 생명을 이어가긴 했지만,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먹을 게 없나 이리저리 살피며 논둑길을 걷고 있는데 큼지막한 시루떡 덩어리가 눈에 띄었다. 말 그대로 웬 떡인가 싶었다. 앞뒤 잴 필요 없이 달려가 떡을 주워 들고 맛있게 먹었다. 지금 생각하니 무속인들이 굿을 하고 나서 버린 고사떡이었던 같다. 다행히 아무 탈이 나지 않았다.
고아원에서 나는 원생들 사이에서 따돌림을 당했다. 요즘 말로 하면 왕따였다. 유난히 병치레가 잦은데다 울보였던 나를 그들은 만만하게 보았던 것이다. 한 번은 아이들과 숨바꼭질을 하다가 몇 명이 합세해 나를 아득한 낭떠러지 밑으로 밀어버렸다. 다행히 죽진 않았지만 팔이 부러지고 온 몸이 찢어지는 중상을 입었다.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어린 시절이었다. 내 눈에는 눈물 마를 날이 없었다.
하지만 그 고단한 삶마저도 내게 허락된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어떤 이유였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불시에 그 고아원을 떠나야만 했다.
다섯 살 쯤 됐을 때였던 것 같다. 나는 찐빵 만드는 집의 수양아들로 들어가게 됐다. 주위에서 “찐빵을 많이 먹겠다”며 부러워했고, 나 자신도 배고픔을 면하겠다는 생각에 좋아했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고 오산이었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 어린 아이가 감당하기엔 너무 벅찬 노동이었다. 입양 들어가는 첫 날부터 수양아버지는 바닷가에 가서 해초를 걷어 오라고 시켰다. 이튿날부터 내가 그 집에서 해야 하는 일은 크고 작거나, 어렵고 쉽거나를 가리지 않았다. 소똥을 주워서 바위에 말려 땔감으로 만드는 일도 했고, 어부들이 쉬어가는 하숙집을 드나들며 잔심부름도 했다. 한 마디로 어린 노예였다. 그렇다고 먹는 게 나아진 것도 아니었다. 고아원에 있을 때 못지않게 항상 굶주림에 시달렸다.
정리=정수익 선임기자 sagu@kmib.co.kr
* [역경의 열매] 임순철 (1) 1952년 제주 한 고아원서 시작된 '구원의 삶'
* [역경의 열매] 임순철 (2) 고난 속 등대가 된 할머니의 찬송과 성경 이야기
* [역경의 열매] 임순철 (3) 아버지 찾아 日 밀항… 그러나 야쿠자의 세계로
* [역경의 열매] 임순철 (4) 18세 야쿠자서 살인미수범까지 ‘고난의 굴레’
* [역경의 열매] 임순철 (5) 사라봉에서의 자살 미수 “그래, 주님 품에 안기자”
* [역경의 열매] 임순철 (6) 시련의 신학대 “주만 따르는 길 누가 막으리까”
* [역경의 열매] 임순철 (7) 클래스메이트 신귀이, 첫 고백에 선뜻 아내가 되다
* [역경의 열매] 임순철 (8) 안양천 뚝방 천막교회…그곳에도 성령임재 축복이
* [역경의 열매] 임순철 (9) 야쿠자·살인미수… 목회자 되어 다시 일본으로
* [역경의 열매] 임순철 (10·끝) 주님의 大명령 “땅끝까지 복음, 땅끝까지 사랑”
◇임순철 목사=1952년 제주도 출생, 예장 통합 제주성서신학원 졸업, 백석대 신대원 졸업, 일본 선교사, 서울 고척동 비전명성교회 담임
***[역경의 열매] 임순철 (2) 고난 속 등대가 된 할머니의 찬송과 성경 이야기
나는 지금도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몸서리가 쳐진다. 아무리 잊으려 해도 도저히 잊을 수가 없다. 한창 부모의 보살핌 속에서 자라야 할 시기에 굶주림은 기본이고 온갖 폭력에 시달렸다. 특히 내 수양아버지라는 사람은 하루가 멀다 하고 주먹이나 몽둥이로 사정없이 때려 내 몸은 성할 날이 없었다. 나는 밤마다 악몽에 시달렸다.
그러면서 그 사람은 혹여 동네에 소문이라도 날까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하지만 계속 감출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동네 사람들 사이에서 내가 매질에다 감금까지 당한다는 입소문이 번졌다. 급기야 그 소문은 고아원 원장의 귀에까지 들어가 다시 고아원으로 되돌아갔다. 그때부터 나는 어른들만 보면 공포에 질려 피했다. 어른들에게 강한 적대감과 증오심을 표출하기도 했다. 고아원 선생님들이 나의 상처 입은 마음을 달래주기 위해 노력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나는 육신의 성장을 멈추고 감기와 천식, 영양실조에 시달렸다.
어느덧 초등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됐다. 다행히 학교를 다니면서 마음의 상처가 조금씩 아물어갔다. 하지만 배고픔의 고통은 오히려 더해지는 것 같았다. 우리 원생들은 온종일 굶주린 이리떼처럼 벌건 눈으로 쓰레기통을 뒤지고 다녔다. 주로 곰팡이 핀 식빵이나 미군들이 사냥을 해서 안 먹고 버린 꿩 날개와 목을 주워서 구워 먹었다.
가끔 길거리에 버려진 사과껍질이라도 있으면 서로 주워 먹으려고 피 터지게 싸웠다. 그때 우리는 죽더라도 배 터지게 먹다 죽는 게 소원이었다.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었던 우리는 저마다 살아남기 위해 서로 싸웠다. 또래들보다 힘이 약했던 나는 그야말로 죽을 각오로 싸웠다. 그러면서 반드시 싸워서 이겨야 한다는 걸 마음 깊이 새겼다.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내 친할머니가 인근에 생존해 계시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고아원 측에서는 안 그래도 왕따에다 문제투성이였던 나를 여든 살이 넘은 가난한 할머니에게 맡겼다. 졸지에 손자를 얻은 노약한 할머니는 나를 정성껏 보살폈다. 지팡이를 짚고 산으로 가 삭정이를 주워 불을 때 밥을 해 먹이고, 버려진 헌옷을 구해다가 수선해 입히셨다.
할머니를 생각하면 빠뜨릴 수 없는 추억이 있다. 추운 겨울 밤 나를 꼭 껴안고 찬송가를 불러주시고 성경 이야기를 들려주신 것이다. 노아의 방주 이야기며 아기 예수의 탄생 이야기 등은 지금도 또렷이 기억난다. ‘예수 사랑하심은’ 등 몇몇 찬송가는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하지만 내 얄궂은 운명은 가만있지 않았다. 할머니와 오순도순 살아가는 행복을 묵과하지 않은 것이다. 어느 날 할머니는 내게 손발을 씻겨 달라고 하셨다. 수건을 물에 적셔 대충 보이는 부분만 닦아드리고 나니 이번엔 죽을 좀 달라고 하시기에 갖다 드렸다. 죽 그릇을 깨끗이 비우신 할머니는 “내가 이제 하늘나라로 갈 시간이 됐는데 어린 너를 두고 가는 발걸음이 무겁구나” 하시고는 “너는 앞으로 큰 인물이 될 거다” 라며 축복 말씀을 하신 다음 숨을 몰아쉬시며 운명하셨다.
나는 다시 외톨이가 됐다. 그리고 거지가 됐다. 이제 막 초등학교를 마칠 나이에 여기저기 거리를 헤매고 다니다 밤이 되면 다리 밑에서 가마니를 덮고 잠을 청했다. 이대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곤 했다. 그러던 중 서귀포로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 내가 있던 모슬포에서 70리 길을 걸어갔다. 낮에는 구두닦이 똘마니로, 밤에는 메밀묵과 찹쌀떡 장사를 했다.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가끔 나쁜 사람들이 그럴 듯하게 나쁜 길로 유혹을 했지만 돌아가신 할머니를 생각해 참았다. 서러움이 밀려들면 할머니와 함께 부르던 노래를 부르며 달랬다. “보일 듯이 보일 듯이 보이지 않는 따옥따옥 따옥 소리 처량한 소리…”
***[역경의 열매] 임순철 (3) 아버지 찾아 日 밀항… 그러나 야쿠자의 세계로
1년 넘게 서귀포 시내를 떠돌던 나는 남의 집 머슴살이를 시작했다. 열서너 살 나이의 나에게 주어진 일은 어른들도 힘겨워 할 만한 것들이었다. 밭일에서부터 들에서 꼴베기, 오물통 지어나르기 등 닥치는 대로 해야만 했다. 똥지게를 지고 가다 자빠져 똥물로 목욕을 한 적도 있었다. 잠은 헛간에서 자고, 옷을 한 번 입으면 1년 내내 갈아입지 못했다. 식사 때도 항상 눈칫밥을 먹어야 했다. 너무 고통스러운 나날이었다. 허약해진 탓인지 밤이면 악몽에 시달렸고, 가끔 자다가 오줌을 지리기도 했다. 도망가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지만 갈 데가 없었다.
그런 차에 구세주 같은 한 할머니를 만났다. 고구마 종자를 구입하려고 찾아온 할머니가 내 몰골을 보고는 너무 안쓰러웠던지 주인을 설득해 나를 데리고 나왔다. 그 할머니를 졸래졸래 따라가 보니 예전 친할머니와 살던 그 동네였다.
그 할머니와 두어 달 그럭저럭 지냈을까, 나는 생각지도 않게 일본으로 가게 됐다. 할머니가 일본에 있는 아들에게 내 이야기를 하자 일본에 보내라고 한 것이다. 그러면서 내 상황을 찬찬히 알아본 그 할머니의 아들은 일본에 내 친아버지가 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꿈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었다.
1966년 늦가을로 기억된다. 나는 밀항선을 탔다. 부산 제3부두에서 광석을 싣고 가는 화물선의 물탱크 속에 숨어서 일본의 어딘가로 출발했다. 나처럼 몰래 일본으로 들어가는 사람 30여 명이 한 평 남짓한 물탱크 안에 뒤엉켜서 5일 동안 견뎌야 했다. 서로 밀치고 싸우면서 대소변도 그 속에서 해결했다. 생지옥이 따로 없었다.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싶은 생각을 수없이 하는 동안 마침내 일본의 고베에 도착했다. 너나 할 것 없이 온 몸이 피부병에 멍투성이였다. 배에서 내리자 건장한 체격의 아저씨가 기다리고 있다가 감정없이 “내가 네 아버지다”라고 했다. ‘저 사람이 정말로 내 아버지인가’ 싶었다. 그를 따라 교토의 집으로 갔다.
집에 들어서자 난리가 났다. 새어머니와 네 명의 아이들이 거지 차림의 나를 보자 질색을 하며 아버지를 향해 일본말로 악다구니를 해댔다. 결국 집에서는 대판 싸움이 벌어졌고, 나를 향해서도 당장 나가라고 소리를 쳤다. 결국 나는 그 집에서 며칠도 못 지내고 나와야 했다. 아버지라고 하는 사람은 나를 한 철공소로 데려가 맡겨놓고는 도망치듯 떠났다. 그곳에서 일하는 5명의 직원들은 내가 들어가는 날부터 온갖 행패를 부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조센징 빠가야로’라는 말을 입에 달고서 수시로 발길질을 해대는가 하면 심심하면 담뱃불로 내 몸을 지졌다. 낯선 타국에서 도망도 갈 수 없는 처지의 서러운 삶이었다. 하기야 낳아준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자식이 남들에게 무슨 대접을 받겠는가. 철공소에서도 오래 있을 수 없었다. 작업 중 쇳조각이 눈에 튀면서 눈을 크게 다쳐 일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다시 아버지 집으로 들어가자 엄청난 핍박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당한 고초는 이루 표현할 수 없다. 지금도 그때 생각을 하면 두려움이 엄습한다.
어느 날 나는 교토에서 오사카로 가는 밤 열차에 몸을 실었다. 제주도가 고향인 하야시 겜보라는 사람이 그곳에 있다는 말만 듣고 무작정 그를 찾아갔다. 우여곡절 끝에 기어코 그를 만났는데, 이건 또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그는 야마구치파 야쿠자의 중간 보스였다. 자연스럽게, 아니 그의 꾐에 의해 나는 야쿠자의 일원이 됐다. 내 인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아니, 이는 정녕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을 것이다.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바꾸어 욕되게 하며 헛된 일을 좋아하고 거짓을 구하려 하는가.”(시 4:2)
***[역경의 열매] 임순철 (4) 18세 야쿠자서 살인미수범까지 ‘고난의 굴레’
많은 사람들은 책이나 영화 등을 통해 일본의 야쿠자에 대해 알고 있을 것이다. 하나의 목표를 정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달성하는 폭력조직이다. 나는 18세에 당시 최연소 야쿠자 조직원이 돼 온갖 몹쓸 짓을 했다. 때로는 험악하고 잔인한 행동도 불사했다. 조직 안에서 살아남으려면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도 부끄럽고 한심한 나의 아픈 과거다. 여기서는 세세하게 그 이야기를 하지 않겠다.
야쿠자의 말단 조직원 생활을 하면 감옥소를 드나들기 십상이다. 나도 얼마간 활동을 하던 중 오사카 경찰에 잡혀 들어갔다. 수갑에 채워져 여기저기 끌려 다니던 나는 나가사키의 오므라 수용소로 보내졌다. 한국 국적의 나는 강제송환 결정을 받았다. 일본의 순시선을 타고 부산으로 실려간 나는 부산소년원을 거쳐 풀려났다.
막상 갈 곳이 없었다. 한동안 부랑아처럼 부산시내 거리를 떠돌았다. 내가 갈 곳은 역시 고향인 제주도밖에 없었다. 주머니에 땡전 한 푼 없는 상태에서 몰래 여객선을 탔다. 제주항에 도착해 들통이 나는 바람에 나는 매로 배삯을 대신한 다음 배 청소를 하고서야 배에서 내렸다.
이때부터 내 인생은 한동안 공백기를 맞았다. 마땅히 하는 일 없이 여기저기 떠돌다 배가 고프면 아무 일이나 하면서 허기를 메우며 지냈다. 그런 가운데서 일본에서 당한 일들이 새록새록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특히 나를 심하게 구박한 새어머니를 생각하면 강한 복수심이 일어나며 몸에 전율이 일었다. 그때 누군가로부터 군에 가면 먹고 자고 하는 건 해결된다는 말을 듣고 공군에 지원해 군생활을 마쳤다.
군에서 제대하자 나도 어느덧 20대 중반의 청년이 돼 있었다. 계속 길거리를 떠돌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뭔가 일을 해야 했다. 하지만 배운 것도, 특별한 기술도 없는 내가 할 일은 없었다. 그렇다고 사방을 둘러봐도 어느 누구 상의할 만한 사람도 없었다. 그런 중에 배를 타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풍문을 접했다. 여기저기 수소문을 해서 원양어선을 탈 수 있게 됐다. 그러면서 속으로 이상한 생각을 품었다. ‘만약 일본에 가게 되면 새어머니를 찾아가 보복을 해야지.’
30개월 계약으로 나는 인도양으로 나갔다. 배에서 지내는 생활은 말 그대로 이판사판, 죽기 아니면 살기였다. 가끔 폭풍우라도 치는 날이면 사투를 벌여야 했다. 거기다 거친 선원들 사이에서 살벌한 싸움도 더러 일어났다. 가끔 선상에서 죽는 사람도 나왔다. 알고 보니 육지에서 사고를 치고 도피하기 위해 배를 탄 이들이 더러 있었다. 그런 건 아니더라도 갈 데까지 간, 그야말로 인생 막장까지 간 이들이 많았다.
적어도 15개국의 항구를 거치면서 참치잡이를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뱃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 벌어졌다. 배에 화재가 난 것이다. 우리는 항해 중 배에 불이 나면 거의 죽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불을 끄기 위해 한 바탕 소동이 벌어진 가운데 갑자기 뭔가가 생각났다. 출항하기 전 제주도에서 아는 할머니가 꼭 품고 가라고 전해준 포켓성경이었다. 나는 선실에 던져놓은 작은 성경책을 찾아 들고 갑판으로 올라가 하늘을 향해 무의식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하나님, 살려주세요!”
하나님의 응답이었다. 그땐 아무 생각 없이 넘겼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건 하나님의 응답이었다. 어렵사리 불길을 잡아 승무원 전원이 무사했다. 우리를 태운 배는 수리를 하기 위해 일본 후쿠오카 스미스항에 정박했다.
나는 배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도쿄로 가 신칸센을 타고 교토로 갔다. 전혀 뜻밖에 찾아온 나를 보자 새어머니는 겁에 질렸다. 그리고는 방 안으로 들어가 방문을 잠그고 경찰에 알렸다. 그런데 그 일이 나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상흔을 남기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졸지에 내가 살인미수범이 된 것이다.
***[역경의 열매] 임순철 (5) 사라봉에서의 자살 미수 “그래, 주님 품에 안기자”
1976년 6월, 원양어선 선원 생활을 하던 나는 일본 교토의 새어머니를 만나러 갔다가 졸지에 범죄자로 전락했다. 일본의 수용소를 거쳐 한국으로 송환된 나는 구치소에 갇힌 채 수사를 받았다. 수사관들은 갖은 가혹행위와 언어폭력을 행사하며 하지도 않은 일을 한 것으로 강요했다. 나중엔 그들이 쓴 내용을 그대로 베껴 쓰라고 하고선 강제로 손도장을 찍게 했다. 그때 당한 고문 후유증으로 나는 오랫동안 대인기피증에 시달렸다.
구치소에서 국선변호사를 소개해 주었지만 그는 내게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결국 나는 1심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고 항소해 2심에서 밀항법 위반죄로 3년형을 받았다. 상고까지 했지만 기각 당했다.
교도소로 이감된 나는 억울함에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세상을 향한 한탄과 원망에다 끝없이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달랠 길 없었다. 거기다 교도소 안에서 자행되는 갖은 핍박은 내 심령을 철저히 황폐화시켰다. 당시 재소자들을 상대로 시행된 순화교육은 안 그래도 성치 않은 내 육신에 골병을 들였다.
그때 나는 참 많이 울었다. 대놓고 울 수도 없는 처지였던 나는 속으로 끝없이 울었다. 지독하게 모진 내 인생을 생각하면 울지 않고는 못 배겼다. 하지만 그 처절했던 순간에 나는 한 줄기 빛을 보았다. 재소자들을 교화하고 위로한다고 찾아온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의 말이 내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특히 하나님은 나같이 피폐하고 쓸모없는 사람에게 더 관심을 기울이고 사랑하신다는 그의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당시 내 마음이 왜 그렇게 움직였는지 모르겠다. 그 분은 부산 이사벨여고 유금종 이사장님이다.
나는 예수를 영접했다. 교도소에서 죽을 수도 있는 몸, 예수나 믿고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부터 나는 여러모로 달라졌다. 성경을 읽으면 힘이 나는 듯했다. 교도소 안에서의 기독교 모임에 빠짐없이 참석해 찬송하고 기도했다.
모범 재소자로 지목돼 가끔 교도소 밖으로 나와 일을 하거나 봉사활동을 하기도 했다. 병든 몸이 한결 회복되는 것 같았다. 하나님의 위로를 느끼자 교도소 생활이 예전처럼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 하지만 워낙 깊이 병든 몸이라서인지 밤마다 통증과 신경쇠약으로 신음과 헛소리를 했다.
1980년 10월 2일, 3년의 형기를 마치고 출소했다. 다시 고향인 제주도로 향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예전에 알던 사람을 몇 명 만났는데, 반기기커녕 못 볼 걸 본 것처럼 불쾌한 기색으로 피하기 바빴다. 안 그래도 밑바닥을 헤맨 내가 전과자까지 됐다는 소문이 난 마당에 어쩌면 당연할지도 몰랐다.
“하나님! 저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 저 좀 도와주시면 안 되나요!” 가끔 인적이 없는 해변을 찾아 하늘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래도 거세게 밀려드는 소외감과 우울증을 떨쳐내지 못했다.
‘그래, 죽자. 나 같은 놈은 살 가치도 이유도 없어.’ 자살을 결심한 나는 사라봉으로 갔다. 많은 사람들이 거기서 자살을 결행한 듯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는 글귀가 새겨진 팻말이 세워져 있었다. 하지만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생각으로 두 눈을 꼭 감고 밑으로 뛰어내렸다.
얼마간 시간이 지났을까, 나는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온 몸이 결리고 아팠지만 나는 생생하게 살아서 자살방지용 스티로폼 위에 누워 있었다. 참으로 끈질긴 생명이었다. 죽는 것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너무나 기구한 운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한편으로 절대자 하나님의 뜻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근만근인 몸을 질질 끌고 어릴 때 살았던 고아원을 향했다. 그런 중에 자연스럽게 ‘그래 교회에 가서 제대로 신앙생활을 해보자’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역경의 열매] 임순철 (6) 시련의 신학대 “주만 따르는 길 누가 막으리까”
‘이제는 죽기 아니면 살기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기대보자.’ 나는 제주도의 한 교회를 찾아갔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겠다는 다짐을 하고 또 했다. 나름대로 열심히 성경을 읽고 기도했다. 그리고 주어지는 대로 교회 일을 했다. 교회학교와 청년부에서 봉사하면서 오히려 내가 많은 걸 배웠다. 그런 중 어릴 때 고아원에서 같이 지내던 친구를 만나 골재공장에서 일을 할 수 있게 됐다. 틈틈이 중등학교 공부도 열심히 했다.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 43:1)
한번은 기도를 하고 있는데, 계속 이 구절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상하다 싶어서 장로님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장로님이 “사명자로 부름 받은 것 같다”고 하셨다. 믿기지 않았다. 아무래도 상식적으로 맞지 않았다. 의식주도 간신히 해결하는 입장에서, 배운 것도 없는 내가 무슨 목사가 된다는 말인가. 한데 그날 밤 잠자리에서 비몽사몽간에 무슨 소리가 들렸다. 또 그 구절이었다.
그날 이후 내 마음속에는 강한 확신이 들어찼다. 하나님의 명령이기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장로님에게 내 각오를 전하고 신학을 공부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그런 중에 생각지도 않은 제안이 들어왔다. 고아원을 나온 이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선배가 찾아와선 큰 돈을 벌 수 있는 아이템이 있는데, 같이 일을 하자고 했다. 순간적으로 사탄의 역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히 ‘노 생큐’였다.
1981년 12월 26일, 나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제주노회에 소속된 제주성서신학원에 입학했다. 아니나 다를까, 주위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거지와 다를 바 없는 사람이 무슨 신학을 하느냐는 것이었다. 내 면전에서 대놓고 부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충분히 이해됐다. 내가 그들이라도 충분히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하나님의 역사는 아무도 말릴 수 없었다. 등록금을 내지 못해 쩔쩔매고 있는 상황에서 누군가가 대신 내주는가 하면 어려운 상황이 생길 때마다 절묘하게 해결됐다. 하지만 정말 견디기 힘든 게 있었다. 내가 전과자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아야 하는 것이었다. 차라리 육체적으로 힘든 건 견디겠는데, 정신적으로 시달리는 건 정말 고역이었다. 또 다시 죽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때 제주성안교회 손영호 목사님이 내 상황을 알아차리시고는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목사님이 나를 교회에 데려가선 내 손을 잡고 기도해주시면서 “너는 반드시 훌륭한 목자가 될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은 영원히 잊을 수 없다. 참으로 고마우신 분이다.
83년 1월 20일, 나는 50명의 동기생 중에서 20명밖에 남지 않은 졸업생에 끼였다. 입학 때 어느 누구도 내가 졸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지 않았지만 나는 해내고 말았다. 자신감이 생겼다. 서울에 가서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작정 상경을 단행했다. 주위에서 만류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나는 과감하게 차비만 들고 서울로 올라갔다. 제주도에서 정보를 얻은 대로 방배동의 백석신학대를 지원했다. 대학 측에서 내 차림새를 보고 등록금을 댈 수 있냐고 물었지만, 나는 걱정 없다고 장담했다. 하지만 자신감으로 해결되는 게 아니었다. 등록금 미납자 명단에 내 이름은 항상 빠지지 않았다.
등록금도 문제지만 숙식을 해결하지 못해 막막했다. 기도에 매달리고 있던 중 다른 학생으로부터 소개를 받아 학교 인근의 고물상에 머무를 수 있게 됐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등록금과 생계유지를 위해 고물을 주우러 다녔다.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주만 따라 가오리니 어느 누가 막으리까…”
***[역경의 열매] 임순철 (7) 클래스메이트 신귀이, 첫 고백에 선뜻 아내가 되다
어렵게 학업을 이어가고 있던 중 같은 과에서 공부하는 한 여학생이 자꾸 눈에 들어왔다. 여학생 사귈 만한 형편도 못됐지만, 서너 명의 여학생 중 유독 그녀에게 자꾸 마음이 끌리는 걸 나 자신 어쩌지 못했다. 알고 보니 신귀이라는 이름의 그녀를 마음에 두고 있는 다른 남학생도 몇 명 있었다. 그런 중 한 번은 어지러운 마음을 정리하고자 삼각산에 올라가 하루 종일 금식하며 기도를 했다. 그런데 기도를 하면 할수록 “앞뒤 재지 말고 자신있게 청혼하라”는 마음이 자꾸만 들었다.
며칠 동안 뜸을 들이다 그 여학생에게 데이트 신청을 했다. “내가 꼭 할 말이 있는데 같이 식사라도 합시다.” 혹시 거절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뜻밖에도 그녀는 순순히 응했다. 같이 밥을 먹으면서 ‘다음에 본론을 꺼낼까, 아니면 오늘 바로 대시할까’ 고민하다 용기를 냈다. “저, 당신하고 결혼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뺨이라도 한 대 맞을 각오를 했는데 “글쎄요”라면서 상당히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나는 내 거처인 고물상에 그녀를 데리고 갔다. 거지와 다름없는 내 실상을 솔직히 보여줬다. 그런데도 그녀는 별로 놀라는 눈치가 아니었다. 일반적 여자라면 질겁하고 달아났을 터였다. 알고 보니 그녀가 기도를 하면 계속 십자가 앞에 누더기를 입은 남자가 엎드려 있는 모습이 보였다는 것이다.
우리 둘은 결혼을 약속했다. 누가 봐도 이상했다. 나야 그렇다 치더라도 그녀의 결정은 이상함을 넘어 무모했다. 도대체 뭘 해서 먹고 살며, 거기다 신학교까지 다니는 형편이지 않은가. 역시 결혼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처가 부모의 반대가 대단했다. 딸의 고생길이 훤히 보이는데, 어느 부모가 받아들이겠는가. 끈질기게 부모님을 설득했지만 도저히 먹히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서울 구로동의 조그만 교회에서 목사님의 주례로 결혼식을 하고 보증금 20만원에 월세 5만원짜리 쪽방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맨손으로 시작한 결혼생활은 팍팍하기 짝이 없었다. 아내와 같이 아르바이트를 해서 학비를 벌고 살림살이를 이어가다 보니 몸은 항상 녹초가 돼 있었다. 그래도 마음만은 부요하고 행복했다. 아내는 언제나 내 의견을 존중하고 내 편이 돼주었다. 특히 결혼 후에도 핍박을 계속하는 처가 부모에게 아내는 “하나님께 크게 쓰일 사위이니 두고 보라”고 말하곤 했다. 그리고 아내는 나의 모난 성격을 고칠 수 있도록 매사에 신경을 기울였다. 아내의 노력이 헛되지 않게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나는 결혼 1년 정도 지나면서 누가 봐도 온화하고 부드러운 사람으로 바뀌었다.
게다가 결혼하고 2년 정도 지나서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그토록 나를 못마땅해 하던 처가 부모의 태도가 완전히 달라져 나를 자랑스러운 사위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그리곤 불교와 유교가 뒤섞인 이상한 신앙을 가졌던 두 분이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도 나갔다. 지금도 두 분은 우리 부부에게 든든한 힘이 돼주고 계신다.
그런 가운데 나의 기구한 과거의 삶이 주위에 조금씩 알려지면서 간증을 요청하는 교회가 나왔다. 그러면 나는 하나님께 모든 영광이 돌아갈 수 있도록 정성껏 기도로 준비해서 최대한 진솔하게 하려고 노력했다. 한 번은 인천 숭의감리교회 금요철야예배 때 1만여 명의 성도들 앞에서 성령의 감동에 도취돼 2시간 넘게 간증해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그 당시 지독한 생활고를 겪으면서 우리 부부가 유난히 좋아했던 찬양이 ‘내일 일은 난 몰라요’였다. 쓰러질 정도로 힘들다고 느낄 때마다 우리는 손을 잡고 이 찬양을 불렀다.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하루 살아요/ 불행이나 요행함도 내 뜻대로 못해요/ 험한 이 길 가고 가도 끝은 없고 곤해요/ 우리 주님 팔 내미사 내 손 잡아 주옵소서”
***[역경의 열매] 임순철 (8) 안양천 뚝방 천막교회…그곳에도 성령임재 축복이
신학교를 졸업하고 전도사로 간 나의 첫 사역지는 경북 경주시 내남면의 오지에 있는 박달교회였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작은 마을의 교회에는 청장년은 거의 없고 어린이들만 몇 명 있었다. 나는 집집마다 돌며 집안 일손을 돕느라 교회에 나오지 못하는 아이들을 교회에 보내 달라고 호소하면서 그들의 농사일을 돕기도 했다.
나름대로 보람을 얻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곳에 오래 있지 못했다. 교회에 딸린 밭의 농사를 직접 지어야 하는데, 농사짓는 방법을 몰랐던 내가 고추 농사를 망쳐버린 게 화근이었다. 그런 곳에서 사역을 하려면 거의 농사꾼이 돼야 했다.
다시 서울로 올라올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박달리 주민들이 이삿짐을 서울로 실어다 주었다. 막막한 심정으로 지내다 신학교 동료 전도사에게 전화를 했더니 서울 신정동에 보증금 10만원에 월세 3만원짜리 쪽방을 소개해 주었다. 누우면 다리가 밖으로 나와 문을 닫을 수 없는 방이었지만 눈비를 피할 수 있는 게 감사했다.
그런 방의 월세조차 내지 못해 보증금이 거의 바닥이 났다. 워낙에 변변찮은 인물이다 보니 어디 사역지를 부탁해볼 데도 없었다. 아내에게 볼 낯이 없어 혼자서 속앓이를 하다 하루는 밤늦게 오목교 안양천변에 나가 날이 새도록 하나님을 찾으며 울었다. 그런데 그 시각 하나님께서는 내 울음소리를 들으셨다. 이름 없는 천사가 집 주인에게 거금 300만원을 맡겨두었다는 연락을 해왔다. 너무나 감사했다.
그 돈으로 인근에 보증금 150만원에 월세 10만원짜리 방을 얻었다. 물론 같은 쪽방이지만 이전에 살던 곳에 비하면 훌륭했다. 그 즈음 아내가 임신을 했다. 허다한 사람들이 다 가는 산부인과에 한 번 가지 못한 아내가 출산일을 넘겨서 난산을 하다 위험한 지경에 처했다. 부랴부랴 산부인과에 갔지만 산모와 아기의 생명이 위험했다. 한동안 사투를 벌이다 겨우 목숨을 건졌지만 이번엔 병원비가 문제였다. 그런 차에 강서제일교회 담임목사님이 소문을 듣고 달려와 병원비를 해결해주셨다. 이후 아내는 출산후유증으로 결핵을 앓아 다시 사경을 헤맸다. 이번에는 다른 목사님이 오셔서 치료할 수 있게 해주셨다. 그분들께 평생 그 무엇으로도 갚을 수 없는 빚을 졌다. 우리 가족의 생명을 구해주신 은인들이다.
그분들께도 감사하지만 내가 진정 감사를 드리는 분은 따로 있다. 바로 나의 주님이신 하나님이다. 내 인생 고비 때마다 알게 모르게 도와주신 그분의 은혜를 생각하면 그저 감격할 뿐이다. 그분을 위해서라면 언제라도 기꺼이 목숨을 내드려도 조금도 아깝지 않다.
더 이상 머뭇거릴 수 없었다. 마음속에 큰 바위처럼 버티고 있는 짐을 덜어내야 했다.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까지 된 내가 본연의 일을 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벗어나야 했다. 1989년 서울 오목교 안양천 뚝방길 위에 천막을 치고 교회 팻말도 붙이지 못한 채 예배를 드렸다. 전기 넣을 형편이 되지 못해 가로등에 의지해 저녁예배도 드렸다.
갖은 고생을 하며 기도로 1년 정도 이어가자 매일 예배에 참여하는 10여 명의 붙박이 성도가 생겼다.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기도에 매진하자 우리 사이에서는 너도 나도 강력한 성령의 임재를 느꼈다. 점차 기도의 불이 뜨거워지면서 병 고침을 비롯한 갖가지 문제 해결이 일어났다. 그러면서 교회당을 마련하자는 공감대가 생겨났다. 파출부로 힘들게 번 돈을 모아온 여자 성도가 통장째 가져오는가 하면 한 집사님은 은행 대출까지 내왔다. 아내의 친구들은 무이자로 제법 많은 돈을 빌려주겠다고 하기도 했다.
이듬해 한 건물 지하를 빌려 영광교회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나와 성도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목회자와 가장으로서의 책무를 감당하는 일이 여전히 쉽지 않았다.
***[역경의 열매] 임순철 (9) 야쿠자·살인미수… 목회자 되어 다시 일본으로
개척교회에서 가난한 성도 10여명과 함께 신앙공동체를 운영하는 일은 참으로 어려웠다. 내 힘으로 교회당 월세 40만원에 우리 세 가족의 생계를 해결해야만 했다. 하나님께 매달렸지만 일단 눈앞의 현실적 문제를 해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직접 돈을 벌기 위해 나서기로 했다. 새벽기도를 끝내면 바로 직업소개소로 가서 현장을 배정받아 닥치는 대로 소위 ‘노가다’ 일을 시작했다. 생전 해보지 않은 일을, 게다가 성하지 않은 몸으로 해나가기가 생각보다 힘들었다. 온 몸에는 항상 파스를 덕지덕지 붙여야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기도를 마치고 작업복을 넣은 배낭을 지고 나가는 모습을 한 젊은 성도에게 들켰다. 한 눈에 일하러 나가는 모습을 알아차린 그 청년은 나를 붙들고 교회당 월세는 자기가 책임질 테니 일하러 나가지 말라고 눈물로 애원했다. 그 청년은 자신의 월급 70만원을 거의 교회에 헌금하고는 교회 안에서 우리 가족과 함께 생활했다. 그는 교회의 자질구레한 일도 도맡아 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 청년의 예쁜 마음을 받아들이셨다. 전혀 뜻하지 않게 예쁘고 능력 있는 처녀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된 것이다. 사연인즉 이랬다. 교회에 처음 전도돼 나온 한 할머니가 찬양을 인도하는 그 청년에게 호감을 가지더니 자신의 손녀딸과 맺어주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그리고선 실제로 둘을 만나게 해서 결혼까지 하게 했다. 대학을 나오고 좋은 직장을 갖고 있던 할머니의 손녀는 가난한 청년의 부족한 점들을 감싸 안기로 했다. 우리 부부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축하를 해줬다.
그 일 이후로 교회도 아연 활기를 띠었다. 부르짖는 기도마다 하나님의 응답이 이뤄지는 교회로 소문이 나서 성도들이 급격히 늘어났다. 덕분에 지하를 벗어나 건물 2층과 3층을 한꺼번에 임대했다. 그때 몇몇 성도가 좀 무리를 해서라도 자체 교회당을 건축하자고 했지만 나는 좀더 기도하면서 여유를 갖자고 미뤘다. 요즘 나는 만약 그때 교회당을 지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해본다.
그러던 중 나에게 정말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겼다. 우연히 일본 단기선교를 갔다가 오사카의 한 교회를 맡아 달라는 제안을 받게 된 것이다. 그 순간 속으로 ‘아, 하나님이 내 마음을 읽으셨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내색을 하진 않았지만 나는 오래 전부터 일본에서 복음을 전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2000년 9월, 우리 부부는 교회를 아는 목사님에게 맡기고 일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일본에 도착하자 만감이 교차했다. 무엇보다도 기억 속에서 지워진 줄 알았던 일본 땅에서의 아픈 추억들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아버지와 새어머니에게서 극심한 구박을 받으며 고생했던 일, 야쿠자의 조직원으로서 저질렀던 온갖 악행들이 생각났다. 나는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리고 한국에서 가져온 전 재산 1700만원을 헌금해 성물과 성구를 구입하고 교회당을 보수했다.
그때부터 내게는 목사에다 선교사라는 칭호도 함께 붙었다. 나는 몇 명 되지 않는 성도들과 함께 노방전도를 다니면서 불러주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서 간증집회를 했다. 아픈 과거를 가진 내가 하나님을 만나 새롭게 태어난 이야기를 할 때면 수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쏟아냈다.
일본에서 내가 강점을 가진 건 노숙인들에게 복음 전하기였다. 그들을 만나 위로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능력을 말하면 그들은 금세 친밀감을 보였다. 눈물을 흘리며 내게 다가와 악수를 하고 입을 맞추는 이들도 많았다. 그들에게서 풍기는 고약한 냄새가 내겐 주님의 향기 같았다. 나는 그들과 함께 뒹굴고 위로하면서 기뻐했다. 하지만 후원 한 푼 없이 그런 사역을 이어가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역경의 열매] 임순철 (10·끝) 주님의 大명령 “땅끝까지 복음, 땅끝까지 사랑”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나로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나의 원수로 나를 이기어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시 25:2)
2005년 나는 빈손으로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일본 땅에서 정말 주님의 사역을 제대로 해보려고 5년여 동안 각고의 노력을 했으나 하나님은 나를 다시 고국 땅으로 이끄셨다. ‘밑바닥 선교’에 진력하는 내 사역을 고깝게 여긴 이들로 인해 장기선교사 비자를 받을 수 없게 됐다.
한국에서의 목회 사역은 또 다시 고난과 시련의 길이었다. 빈민 사역을 위해 서울 봉천동 18평 지하에서 개척한 성실교회를 제법 부흥시키던 중 건물에 문제가 생겨 떠나야 하는 등 거듭 장애물을 맞았다. 그러자 주위에서는 이제 지칠 때도 되지 않았냐며 목회를 포기하라고 권하는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지만, 이내 나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는 사명이 있다는 주님의 말씀이 들렸다. 그러던 중 사고로 크게 부상을 당해 석 달 넘게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병상에서 이젠 정말 사역을 그만둘까 하다 욥기를 읽으면서 다시금 각오를 다졌다. 나중에 생각하니 그 또한 영적으로 충전하면서 내가 할 일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였다.
주위에는 내가 도와주고 보호해야 할 사람들이 많다. 나는 누구보다 많이 아파 보았기에 그들의 아픔을 잘 알고, 누구보다 굶주려 보았기에 그들의 배고픔을 잘 안다. 그런 입장에서 그들을 외면할 수 없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 힘차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그래서 나는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속을 새카맣게 태우면서 주님께 호소하며 기도한다.
이곳저곳 교회당을 쫓겨 다니던 중 2009년 현재의 고척시장 앞 허름한 건물 한 층을 빌려 비전명성교회를 개척했다. 물론 열악한 형편이야 이루 다 말할 수 없지만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인근의 교도소에도 가끔 들러 재소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다.
현재 교회에서 함께 예배드리고 있는 20여 영혼들 어느 누구 소중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저마다 지치고 상한 심령을 가진 이들은 누구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다. 병으로 침대에 누워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 이도 있고, 다른 사람의 손길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이도 있다. 알코올중독자 남편을 보살피는 젊은 집사는 충남 태안에서 주일예배를 드리기 위해 먼 길을 오간다.
세상에서 겪은 절망과 좌절을 극복하기 위해 기도로 힘쓰는 이들을 보면 내 가슴이 찡해진다. 나는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고자 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담기 위해 기도한다. 얼마 전 아내로부터 섬기는 기쁨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공감을 얻었다. 말없이 주님과 사람들을 섬기는 비밀스러운 기쁨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그럴 때마다 현실은 밑바닥이지만 주님 안에서 부자 마음이 되는 걸 느낀다.
나는 참으로 기구하고도 처절한 인생길을 헤쳐 왔다. 태어나면서부터 부모로부터 버려져 온갖 구박과 천대 속에서 자랐다. 살아남기 위해 나쁜 일도 숱하게 저질렀다. 너무나 인생이 억울해서 죽으려고도 해봤다. 하지만 어느 날 나에게 찾아오신 주님은 나를 변화시켰다. 그리고는 강권적으로 주님의 일을 하도록 이끄셨다. 처음엔 거부하기도 했으나 그분이 하시고자 하면 반드시 따라야 한다는 걸 알았다. 이제 나는 그걸 나의 사명이라고 여긴다.
나는 한국교회에 아가페적인 사랑이 넘쳐나기를 기도한다. 성도들이 성숙하고 수준높은 믿음으로 주님의 뜻을 받들고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의 대 명령에 순종하기를 기도한다. 나는 주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변하지 않는 믿음으로 주님의 신실한 종으로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