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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진 * 어느 여교수의 회고록 _ 그런데도 못 다한 말
피천득 선생님 (1/2)
1958년 11월 5일, 졸업을 서너 달 앞두고 우리는 결혼을 했다. 주례는 친정아버지가 모셔온 이병도 선생이 서주셨고, 축사는 피천득 선생님이 과 교수들을 대표해서 맡아주셨다.
바로 얼마 전까지 교실에서 강의를 듣던 분의 축사를 듣는 기분은 묘했다. 우선 축사의 내용이 객관적으로 재미가 있어서 그랬는지, 선생의 음성이 하도 낭랑해서 그랬는지, 이상하게 귀에 쏙쏙 들어왔다. 나는 마치 다른 사람의 결혼식에서 축사를 듣는 기분으로 듣고 있었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영국에서 있었던 일인데, 어느 파티에서 지능은 좀 모자라지만 미모만큼은 대단한 당대의 유명한 여배우(무용가 이사도라 던컨Isadora Duncan이었다는 설도 있다)가 버나드 쇼Bernard Shaw에게 이런 말을 불쑥 건넸다. “선생님의 그 좋은 두뇌와 나의 미모가 합쳐진다면 아마 우리 사이에서는 최고로 잘생긴 천재가 태어날 거예요.”
이 말을 들은 독설가 쇼는 이 여배우가 뚱딴지같이 내뱉은 말에 기분이 상했지만 다음과 같이 정중하게 대답을 해주었다고 한다. “당신 말도 일리는 있지만, 만약에 당신의 두뇌와 못생긴 내 얼굴이 합쳐지면 참으로 큰일이지요.” 피 선생님은 지금 여기 서 있는 신랑 신부의 자녀는 어느 쪽의 두뇌와, 어느 쪽의 얼굴을 어떻게 닮아도 상관이 없다고 하면서 축사를 마무리했다.
물론 축사의 내용도 인상적이었지만 축사에 임하는 자세가 더 감동적이었다. 수많은 제자 중의 한 쌍에 불과하고, 뭐가 그리 급했던지 졸업도 하기 전에 결혼하겠다고 나선 이 철부지 애송이들에게 그리도 진지하게 축사를 하는 태도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교실에서 주로 영시를 가르치면서 “고 옆땡이 번역해봐” 하면서 우리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고 가던 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새 옷이 아닌 게 역력한 낡은 양복을 단정하게 차려입고, 그야말로 진정성이 느껴지는 축사를 하셨다. 제자의 행사에 임하는 자세는 모름지기 저래야 하는구나 하는 큰 가르침을 받았다.
그리고 여담이지만 선생이 서울대에 재직하고 있을 때에는 봉급이 거의 기본 생활이 되지 않을 정도로 박봉이었다. 영어 단어 가운데 ‘threadbare(올이 보일 정도로 낡은)’이라는 단어가 있다. 선생은 때로는 이런 양복도 입으셨던 것 같다. 그 양복을 보면서는 왠지 ‘맑은 가난’, ‘자발적 가난’ 혹은 ‘기품 있는 가난’이라는 표현이 떠오르면서, 참으로 아름답고 숭고하기까지 하다는 생각이 들었지 초라하다는 느낌은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선생님이 늘 이렇게 궁핍하지만은 않았다. 여유가 생기면 조선호텔에 가서 고급 양복을 맞춰 입기도 했다. 장안의 소문난 부잣집 자손의 호기를 부리는 것이었다. 게다가 멋을 아는 분이라 코트, 셔츠, 스웨터를 비롯해서 선생에게는 멋진 소품도 많았다. 그러나 선생님의 멋, 애교, 기분 전환, 아니면 사치는 여기가 끝이었다. 이 선은 절대 넘지 않고 사셨다. 그러니까 탐욕과 같은 단어는 이분 사전에는 아예 없다.
이때로부터 긴 세월이 흐른 후에 이때의 느낌을 다시 받은 적이 있다. 모교인 이화여고에서 가르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이화에서는 『거울』 이라는 소식지가 매주 발간되고 있었다. 이 소식지에 고정 칼럼을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다른 장르의 글을 쓰는 것보다는 얼마 전까지 선생과 교실에서 함께 읽은 시들을 한 수씩, 중고교생이 이해하기 쉽도록 주석을 달고, 번역을 하고, 시인 약력을 곁들여 실으면 영어 공부도 되고 좋겠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다 보니까 시가 꽤 많이 모였는데, 한 출판사에서 작은 책자로 묶어 내자는 제의를 해왔다. 책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빈약한, 겨우 145쪽짜리의 소책자가 『영미 명시선』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출판사에서는 선생님의 추천서나 서문을 싣기를 원했고, 또 사실 이 책자는 선생님의 말하자면 강의 노트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어서 어렵지만 부탁을 드려보았다.
흔쾌히 수락해준 것은 물론이려니와 짧은 서문이지만 이 시집의 성격에 알맞은 내용을 이번에도 정성껏 써주셨다. 그 후 나는 이화를 떠나고 이 책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수 십 년이 지난 후 어느 날 서울대 제자가 이화여대 교문 앞에서 이 책을 수북이 쌓아 놓고 팔고 있더라고 해서 적이 놀랐다.
인세를 챙겨 받겠다는 생각 같은 것은 추호도 없었고, 단지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소중한 사람을 만나는 것 같은 설렘이 있을 뿐이었다. 출판사에 전화를 했더니 몹시 당황해하면서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내가 원하는 것은 혹시 재고가 있으면 몇 권 갖고 싶은 것뿐이라고 말했더니 긴가민가하면서 보내와 지금 몇 권 가지고 있다.
1961년 5월 1일에 발행된 것으로 되어 있는 이 책의 정가는 250원이고 출판사는 ‘향학사’라는 곳으로 되어 있다. 선생의 서문은 다음과 같다.
서문
영국이 인류에게 공헌한 것 중에 가장 큰 것은 문학이요, 그 문학의 주체가 되는 것은 시가입니다. 이 시들 속에서 우리는 고귀한 사상과 감정에 부딪힐 수 있는 것입니다.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사조의 변천이 있기는 하지마는 영시의 본질에는 다름이 없습니다. 그것은 자연 찬미, 이성과 가정 그리고 나라에 대한 사랑, 영혼에 대한 신념, 이런 것들입니다.
이 사화집에 담긴 시편들은 수백 년 동안 배출된 위대한 시인의 작품 중에서도 사람들이 아끼고 사랑해 온 아름다운 것들입니다.
이 사화집은 어떤 여왕의 보석 상자보다도 찬란하고 황홀합니다.
어학에 정통하고 시인적 정서를 아울러가진 박 희진 씨가 이 시들에 정확한 주석을 붙이고, 섬세하고 재치 있는 필치로 번역하여 주신 것은 다행한 일입니다. 이 사화집은 읽는 사람의 마음을 한없이 풍부하게 할 것입니다.
피천득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축사와 서문만 잘 쓰시는 게 아니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유난히 가무를 즐기는 편이라 몇 사람만 모여도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고, 예서 그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도 노래를 부르라고 강요하곤 한다. 선생 노릇하면서 괴로웠던 기억이 시도 때도 없이 노래를 시키는 것과, 한 말씀 하라는 것이었다. 선생님은 이 난관을 특유의 기지로 해결했다.
그것이 다름 아닌 선생님의 18번, 그 유명한 「밀밭에서」라 는 노래이다.
밀밭에서 나왔다고 왜들 야단야?
키스 한 번 했기로서니 웃긴 왜 웃어?
누군 없나 다들 있지, 정든 님 하나.
누군 없나 다들 있지, 정든 님 하나.
영국의 시인 번즈Robert Burns가 1782년에 쓴 「밀밭에서 Comin’ Thro' the Rye」를 번안한 것이다. 이 노래를 부르게 된 사연은 잘 모르겠지만 이 노래는 참으로 탁월한 선택이다. 음의 오르내림이 심하지 않아 부르기도 수월하고, 가사 때문에 모두들 배를 잡고 웃느라 노래를 잘 부르고 못 부르고는 문제가 되지 않으니 말이다.
이와 유사한 종류의 기지 발현에 움찔했던 기억이 있다. 내가 서울대를 졸업할 때 선생님은 당시 초등학교 6학년이던 딸 서영이를 데리고 와서 잔디밭에 편한 자세로 앉아 계셨다. 내가 대통령상을 받게 되어 기자들이 와서 인터뷰를 하고는 선생에게로 몰려갔다. 제자가 이런 상을 받는데 기분이 어떠냐고 물었던 것 같다.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예의 그 낭랑한 목소리로 “이런 재미에 교수하지요” 하며 밝게 웃었다. 대단한 순발력이다. 참 짤막하지만 센스 있게 답하신다고 생각했다.
선생님과의 인연은 이보다 더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내가 대학에 입학했을 때는 그때만 해도 옛날이라 여학생인 내가 입학시험에서 최고 득점(사범대학)을 한 사실이 모두들 조금은 신기했던 모양이었다. 수업에 들어오는 교수마다 “박희진 거기 번역해봐” 하거나 “박희진이 일어나봐” 하곤 했다.
이때 선생님은 하버드 대학에 교환교수로 나가서 한국에 안 계셨다. 학기 도중에 귀국했는데 그때 연세가 지금 계산해 보니까 마흔을 조금 넘긴 나이였는데 연세보다 조금 더 연로해 보였다. 그 후로는 영문학사나 영시와 같은 주요 과목을 가르치셨기 때문에 과 교수들 가운데서 우리 학년과의 유대가 가장 깊었다.
그 당시는 여학생들이 한복을 많이 입었다. 나도 어머니가 마련해준 고운 한복을 가끔 입었다. 하루는 선생님이 잔뜩 화가 난 사람처럼 “박희진이 한복 입은 거 예쁘다구. 괜히 하는 소리 아니야” 라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분명히 좋은 이야기인데 왜 저렇게 화난 사람처럼 말할까 나는 의아해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 연세에도 조금 멋쩍으셨나 부다. 내 몸매가 특별히 좋은 편은 결코 아니지만 어깨가 조붓하고, 어머니가 좋은 감으로 예쁘게 지어주어서 선생님 눈에 예뻐 보였나 부다.
평소에는 무서웠지만 사적으로는 달랐다. 내가 아파서 결석하면 카스텔라 상자를 들고 친정으로 병문안을 오셨다. 또 결혼 초 명절 때 찾아뵈면 늘 남편에게 부인한테 잘하라고 하도 야단을 쳐서 남편이 “나는 장인어른 두 분 모시고 산다”고 투덜거렸다. 그러나 그 후에는 남편을 무척 아꼈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는 이화여중고, 남편은 경기고교에 교사로 채용되었다. 대학을 졸업하고서는 남편만 대학원에 진학했다. 남편은 경기고에서 4년 봉직한 후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받아 미국 콜롬비아 대학으로 유학의 길을 떠났다. 떠나기 전에 아무 불평 없이 두 아이 잘 키우며 이화여고 교사 생활을 하고 있는 나에게 남편은 뜬금없이 서울대 대학원에 진학할 것을 강하게 권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래도 남편이 없으면 여자가 할 일이 줄어드니까 자기가 유학 간 동안에 대학원에 다니라는 것이었다. 나는 극구 반대했다. 대학을 졸업한 지도 꽤 한참 되어서 이제 와 새삼스럽게 제2 외국어, 그리고 전공 등을 공부해서 시험을 치르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남편은 막무가내였다. 퇴근하면 애들이 보고 싶어 미치겠는데 애들은 자기가 잘 보고 있으니 프랑스어 학원에 가서 공부하고 오라고 했다. 눈물을 흘리면서 다방(옛날식)에 앉아 공부를 하다가 학원에서 강의를 듣고 늦게 귀가했다.
결국 시험을 치렀는데 운명의 장난인지 합격했다. 대학원에 진학하는 것을 이화에서 양해를 받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신봉조 교장 선생 철학이 ‘고인 물은 썩으니까 부단히 정진해야한다’였기 때문에. 이때부터 이화여고와 대학원을 오가는 고달픈 생활이 시작되었다.
고3 수업 4시간을 오전에 몰아서 하고 서둘러 택시를 타고 혜화동에 있는 대학원으로 갔다. ‘학림다방’ 소파에 앉으면 몸이 그대로 땅속으로 잦아드는 것 같았다. 커피 한 잔에 토스트를 시켜 점심을 때웠다. 3시부터 수업이 시작되는데 강의실은 음습했다. 영국인 레이너Rainer 교수는 그 당시 조이스James Joyce에 심취해 있었는지 『율리시스Ulysses』의 주석을 칠판에 계속 써내려갔다. 어떤 때는 밤 8시까지 수업이 끝나지 않았던 날도 있었다.
첫댓글 평소에는 무서웠지만 사적으로는 달랐다. 내가 아파서 결석하면 카스텔라 상자를 들고 친정으로 병문안을 오셨다. 또 결혼 초 명절 때 찾아뵈면 늘 남편에게 부인한테 잘하라고 하도 야단을 쳐서 남편이 “나는 장인어른 두 분 모시고 산다”고 투덜거렸다. 그러나 그 후에는 남편을 무척 아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