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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제자(6) - 바돌로매 / 요 1:43-51
한소년이 슈퍼에서 시간제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소년은 일하러 가는 길에, 종종 약국 안에 있는 공중전화에서 어디론가 전화를 걸곤 했습니다. ‘거기 혹시 일할 사람 필요하지 않습니까?’ ‘예, 그래요, 그러면 지금 일하고 있는 자는 마음에 드십니까?’ 자기가 일하고 있는 슈퍼에 전화를 하는것입니다. 약국 주인은 참으로 궁금했습니다. 전화내용을 보아 분명 일자리를 거절당한 것 같은데, 그 소년의 얼굴에는 기쁨이 가득한 것이었습니다. 약국 주인이 소년에게 묻습니다. ‘일자리를 거절당했는데 무엇이 그리도 기뻐서 그렇게 싱글벙글 하냐?’ 소년이 대답합니다. ‘사실은 제가 그 슈퍼에서 지금 일하거든요, 주인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확인 전화 한 겁니다.’ 우리는 이처럼 누구인가로부터 인정받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받는다는 것은,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는 일이기 때문에 행복하게 해 줍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이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자신이 인정받고 있다는 자존감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남편은 집에서 아내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자녀들에게 가장으로 아버지로 인정받지 못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무시당하고, 자녀들에게 무시당하고, 자녀들은 부모에게 인정받지 못합니다. 직장에서는 상사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학교에서는 선생님에게 인정받지 못합니다. 이렇게 인정받지 못해서 상처받은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남자는 자신을 인정해 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여자는 자신을 사랑해 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에게는 인정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정말 살맛을 느끼고, 공부할 맛을 느끼고, 일할 맛을 느낄 때가 언제입니까? 다른 사람으로부터, 특히 사랑받고 싶은 사람으로부터 인정받을 때입니다. 성경에 보면 주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아시고, 그들의 헌신과 진심을, 그들의 인격을 인정해 주시는 장면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누가 예수님께 인정받았습니까? 어떻게 하면 예수님께 인정받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제자가 열둘이라는 것은 다 압니다. 별 믿음이 없는 사람도, 교회를 출입하는 사람이라면 압니다. 열둘이란 숫자는 알지만, 그 중 알고 있는 제자에 대해 말해보라고 하면, 제대로 말하는 사람 몇 명 되지 않습니다. 핵심 제자 3인방이나, A팀에 속한 네 명에 더해, 의심의 상징 도마나, 배신의 상징 가룟 유다 정도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바돌로매는, 더더욱 생소한 제자입니다. 성경에 그가 활동한 내용이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그의 자리가, B팀의 두 번째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A팀 B팀 C팀을 구분하는 기준이, 예수님과 가까운 정도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자리가 B팀의 두 번째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활발하게 그리스도를 따랐을 거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 추정입니다.
열두제자 명단이, 성경에서 네 군데 나옵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 그리고 사도행전입니다. 각 책마다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그 중에서 마가복음의 순서를 따르고 있습니다. 막 3:16-19절 ‘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또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다대오와 가나나인 시몬이며, 또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더라.’ 요한복음에는 열두제자 명단이 없는 대신, 이색적인 정보를 줍니다. 요 21:1-2절 ‘그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부활하신 예수님이, 갈릴리 호수에 있던 일곱 제자에게, 자신을 나타내 보이신 것입니다. 이때 일곱 제자 명단 중에, 눈에 띄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입니다. 바돌로매가 들어가 있어야 할 자리에, 나다나엘이 들어가 있습니다.
학자들은 바돌로매의 본명을 나다나엘로 봅니다. 바돌로매는 ‘돌로매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의 아버지가 꽤 이름이 있는 사람이었던 거 같습니다. ‘돌로매의 아들’ 하면, 누구나 알 정도로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본명보다는, 돌로매의 아들로 불리었던 것입니다. 혹 어떤 학자들은, 나다나엘을 본명이 아닌 별명으로 보기도 합니다. 마치 예수님이 시몬에게 베드로란 별명을 붙이셨듯이, 바돌로매에게도 나다나엘이란 별명을 지어주셨을 거라고 봅니다. 나다나엘이 본명인지 별명인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지만, 나다나엘이 바돌로매와 동일인물이라는 데는 대체적으로 일치합니다. 나다나엘이란 이름의 뜻은 ‘하나님께서 주셨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물’이란 뜻으로, 폭넓게 이해하기도 합니다. 부모님은 나다나엘을 낳고서, ‘이 아들은 하나님이 주셨다.’ ‘하나님이 우리 부부에게 선물로 주신 아들이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러면 나다나엘만 그럴까요? 우리는 우리 가정에 보내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 자녀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중 누구도 우연히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어쩌다 실수로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각 사람은 각 가정에 하나님이 보내신 특별한 선물입니다.
나다나엘의 고향은 가나입니다. 지금도 가나에는 나다나엘 기념교회가 있습니다. 성경에는 세 곳의 가나가 나옵니다. 먼저는 여호수아에 나오는 가나 시내인데,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의 경계선에 위치합니다. 현재의 와디 가나와 동일시되는 이곳은 사마리아 지역에 속합니다. 다음은 역시 여호수아에 나오는데, 가나 성읍으로 아셀 지파에게 분배되었고, 현재는 레바논 땅에 위치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익히 잘 아는 바, 예수님이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입니다. 다른 가나와 구별하기 위해서, 또한 갈릴리 여러 동네 중 하나이기에, 통상 갈릴리 가나로 부릅니다. 가나는 갈릴리 지방의 고원 지대에 위치해 있고, 가버나움으로 가기 위해서는 내려와야 했습니다.
나다나엘에게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자기 동네가 아닌 옆 동네에 살고 있습니다. 그 친구 이름은 빌립입니다. 빌립이 먼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요 1:43-44절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한 동네에 사는 안드레의 영향을 크게 받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먼저 예수님을 만났던 안드레가, 동네 친구인 빌립에게 말했을 거고, 그로 인해 빌립에게 예수님에 대한 긍정적인 기대가 있었던 차에, 예수님의 “나를 따르라”는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빌립은 두 말하지 않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안드레가 빌립이 예수님을 따를 수 있도록, 마음의 옥토화 작업을 잘해 놓은 덕분이었습니다. 물론 친구 형인 베드로도 한 몫 거들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빌립이 친구 안드레와 함께 예수님을 따르면서, 또 다른 친구가 생각났습니다. 그 친구도 함께 하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옆 동네에 살긴 하지만, 그 역시 절친한 친구였습니다. 그래서 빌립이 그 친구를 찾아갔다는 거 아닙니까?
45절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친구 좋다는 게 뭔가요? 친구란 가장 좋은 것을 나누고 싶은 대상입니다. 좋은 것이 있을 때 숨기고 싶다? 그러면 친구 아닙니다. 설령 친구라고 해도, 가까운 친구 이른바 절친은 아닙니다. 모든 좋은 것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다면,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빌립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친구를 둔 덕에,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좋은 예수님을 소개할, 친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빌립은 친구 나다나엘을 찾아가서, 자신이 만난 예수님을 소개했습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빌립의 확신이 묻어나는 말입니다. 얼마나 확신이 들었으면, 이렇게까지 말할 수 있었을까요? 빌립은 신중한 사람입니다. 쉽게 흥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과장하거나 떠벌리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계산이 딱 맞아 떨어질 때, 그때 가서야 믿는 사람입니다. 그런 빌립이 흥분하여 말합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나다나엘도 차분하기로 둘째가라면 서운한 사람입니다. 46절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빌립의 말을 듣고, 나다나엘의 반응은 시큰둥했습니다. 41-42절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안드레의 말에, 베드로가 보인 반응과 상반됩니다. 베드로는 바로 안드레를 따라 예수님께로 나아왔습니다. 여기서 분명한 성격 차가 드러납니다.
또한 메시지를 전할 때, 단순명료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안드레는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단순명료 했습니다. 빌립은 같은 내용인데, 설명이 길었습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빌립의 말 중, 나다나엘의 귀에 거슬리는 말이 있었습니다. 나사렛이란 말입니다. 나다나엘은 나사렛을 잘 압니다. 가나와 나사렛이 거리 상 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학자들에 따르면, 가나는 나사렛 북동쪽 7-8km 지점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럼 20리 남짓한 거리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옆 동네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옆 동네는 자기 동네보다 어딘지 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가나나 나사렛이나 거기서 거기인 거 같은데, 나다나엘은 달리 생각했습니다. 전통적으로 예루살렘 사람들은, 갈릴리 사람들을 멸시했습니다. 심지어 갈릴리 지역 내에서도, 편견을 갖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은근히 편견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편견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빌립이 만났다고 하는 예수가 예루살렘 출신이라고 했으면, 나다나엘의 반응이 달랐을지 모릅니다. 아무래도 인물은 예루살렘에서 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또 베들레헴이라고 했다면 반응이 달랐을지 모릅니다. 베들레헴은 다윗의 동네니까요. 그런데 갈릴리라고 했습니다. 자기 동네보다 별반 나을 거 없는 옆 동네 사람이라고 하니, 나다나엘이 그렇게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나다나엘은 자신의 평소 생각을 말했을 것입니다. 나다나엘이 나사렛을 그렇게 평가한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보기엔 그건 명백한 편견입니다.
편견의 사전적 정의는 ‘공정하지 못하고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입니다. 유의어로 “색안경”이 있습니다.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것이 편견입니다. 색안경을 끼고 보면, 아무리 자세히 봐도 편견입니다. 색안경을 끼고 보면, 몇 번을 보고 또 봐도 편견입니다. 색안경을 끼고 있는 한, 편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럼 색안경 벗으면 되지라고 할지 모르지만, 색안경을 벗는 게 쉽지 않다는 게 문제입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자신이 색안경을 끼고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나다나엘도 예수님을 직접 만나기 전에는, 자신이 색안경을 끼고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평생을 끼고 살았던 색안경이었는데,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벗겨졌습니다. 맞습니다. 자기가 벗은 것이 아니라 벗겨진 것입니다. 색안경을 자기가 벗어던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나고 자기도 모르게 벗겨진 것입니다. 편견을 가진 친구의 말에, 빌립은 한 마디로 답했습니다. “와서 보라.” 이번에는 길게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와서 보라” 외마디 외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효과가 있었습니다. 나다나엘의 마음이 움직인 것입니다. 물론 빌립의 확신에 찬 초청에, 성령님께서 역사하신 것입니다.
행 16장에 바울이 루디아를 전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행 16:13-14절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할 곳이 있을까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는데,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이게 성경이 말하는 전도의 공식입니다. 우리가 말한다고, 무조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주께서 마음을 열어주셔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말하지도 않는데, 주께서 마음부터 열어주시는 법은 없습니다.
47절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나다나엘이 친구의 손에 이끌려,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그를 알아보셨습니다.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를, 다른 번역 성경으로도 읽겠습니다. 새번역 “그에게는 거짓이 없다.” 공동번역 “그에게는 거짓이 조금도 없다.” 더 간단하게 말하면 ‘그는 진실하다’입니다. 예수님은 그가 진짜 이스라엘 사람이고, 진실한 사람인 것을, 단번에 알아보신 것입니다. 좀 의아한 면이 있습니다. 분명히 나다나엘은 나사렛에 대한 편견을 가진 사람입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공동번역 “나자렛에서 무슨 신통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 이런 편견을 가진 나다나엘인데, 예수님이 참 이스라엘 사람으로 진실한 사람으로 인정을 해주셨습니다. 물론 편견을 가진 것 자체를 칭찬하신 건 아닐 것입니다. 또한 편견을 가진들 문제될 게 없다는 말도 아닐 것입니다. 심령을 꿰뚫어보시는 주님이, 그의 속마음을 읽으신 것입니다. 그의 속은 진실하다는 것입니다. 그의 속에는 거짓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의 속에는 간사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48절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나다나엘은 자신의 속마음까지 읽어내시는, 예수님 앞에 무너졌습니다. 자신을 한 번도 본적이 없는 분이, 자기의 심령까지 꿰뚫어보니,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처음 만나자말자 예수님께 칭찬을 들었습니다. 나다나엘이라고 왜 꾸중들을 일이 없었겠습니까? 다른 마을도 아닌 예수님의 고향이나 다름없는 동네를, 편견을 가지고 비하했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나자렛에서 무슨 신통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 그런데 예수님은 그를 참된 이스라엘 사람으로, 진실한 사람으로 칭찬해 주셨습니다. 그 스스로도 자신이 예수님의 칭찬에 미치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자신이 예수님께 과분한 칭찬을 받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 앞에서 나다나엘의 편견이 녹아 내렸습니다. 그럼에도 나다나엘은 정말이지 궁금했습니다.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이 충격이었습니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예수님이 이전부터 자신을 지켜보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나다나엘은 예수님께 관심이 없었습니다. 절친인 빌립이 예수님에 대해 말할 때에도, 나사렛 예수란 말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을 쭉 지켜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초면에, 과한 립서비스를 한 게 아니었던 것입니다. 무화과나무 아래 있었다는 말은, 무화과나무는 잎이 커서 그 아래는 시원한 그늘입니다. 그래서 경건한 유대인들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말씀 묵상을 즐겼습니다. 나다나엘도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성경을 읽으며, 개인 기도를 했던 것입니다. 나다나엘의 이런 모습을, 예수님이 매 번 목격하셨던 것입니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는 말씀 앞에서, 잠깐 멈춰 서서 생각해보겠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보겠습니다. “네가 교회 오기 전,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보았노라.” “네가 예배 드리러 오기 전에, 누구와 무엇을 했는지를 보았노라.” 오늘 우리가 다 나다나엘 같은 말을 들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습니다. 그럼 우리는 경건한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 예배는 이미 하나님이 받으신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49절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예수님께 인정을 받은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신 앞에 서 있는 예수님이, 바로 자신이 기다려왔던 분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예수님을 랍비로 부르는 것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이스라엘 임금으로 고백했습니다. 그렇게도 대망해온 메시야로 인정한 것입니다. 빌립의 말을 듣고,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대꾸했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웠습니다. 빌립이 결코 허튼 소리를 한 게 아니었음을,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나다나엘의 고백을 듣고, 예수님도 기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만큼이나 기뻐한 사람이 있었으니,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을 소개한 친구 빌립이었습니다. 빌립은 평소 나다나엘이 경건하고 영적 센스가 있는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그가 예수님과 말 몇 마디 나누더니, 바로 예수님을 알아보는 게 아닙니까? 그러니 빌립은 더 없이 기뻤을 것입니다.
50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그런데 예수님은 기쁜 표정을 애써 감추며 말씀하셨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베드로가 고백할 때와는 사뭇 다른 반응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얼마나 기뻐하셨습니까? 예수님이 그만큼 기뻐하는 모습을 일찍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나다나엘의 고백이 베드로의 고백보다 부족하지 않음에도, 왠지 모르게 기쁨의 표현을 자제하시는 모양새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이어가십니다.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렇게 놀라느냐’는 것입니다. ‘놀라기는 아직 이르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살아오면서 나다나엘에게, 이보다 더 큰 일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앞으로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하셨습니다.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는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이 한 말씀을 더하셨습니다.
51절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복음서에 나오는 하늘이라는 단어를, 우주 공간으로서의 하늘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2천 년 전 사람들의 세계관을 배경에 두고 읽어야 합니다. 옛날에는 남편을 지아비나 바깥양반이라고도 말했으나, 요즘은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 않는 것처럼, 언어는 그 시대의 표상으로 읽어야 합니다. 성경 시대 당시 사람들에게, 하늘은 비밀이 가득한 곳이었습니다. 그곳에 생명의 근원이 놓여 있었습니다. 하늘이 열린다는 말은, 비밀 가득한 생명 세계가 열린다는 뜻입니다. 만약 땅에 사는 사람이나 생명체가, 하늘과 관련 없이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면, 굳이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다고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날도 생명의 비밀은 여전합니다. 그 비밀에 관심이 가지 않으면, 성경이 말하는 하늘을 이해할 수 없고, 하나님을 실질적으로 믿을 수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살아가면서 생명이 얼마나 신비로운지 절실하게 느끼실 겁니다.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리라.”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편견으로 마음이 닫혀있을 때는, 하늘문도 닫혀 있었습니다. 무화과나무 아래 있었지만, 하늘에서 내려온 자 예수님을 몰라봤습니다. 친구의 도움을 받아, 예수님을 만났을 때, 편견이 녹아 내렸고, 하늘이 열렸습니다.
하늘이 닫혀 있다고 불평할 일이 아닙니다. 내 마음이 열려 있는지부터 성찰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편견으로 내 마음이 닫혀 있는지를 먼저 돌아보아야 합니다. 내 마음을 닫고 있으면, 무슨 말도 귀에 안 들어옵니다. 어떤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왜 하늘이 닫혀 있는지 불평하지 말고, 어떻게 하늘 문을 열 수 있을까 고민하지 말고, 먼저 자신의 마음 문을 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 마음문 밖에서 노크하고 계십니다. 계 3:20절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온갖 좋은 것이 예수님께 있습니다. 진짜 좋은 것은, 다 위로부터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옵니다. 굳게 닫힌 내 마음의 돌문을 열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을 향해, 교회를 향해, 가족을 향해, 타인을 향해 마음을 열기를 바랍니다.
나다나엘은 어떤 사역을 했는지, 성경 기록에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또한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도, 대부분의 제자들처럼 알기 어렵습니다. 다만 전해져 내려오는 교회의 전승에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을 떠나 소아시아로 가서, 부르기아, 라오디게아, 골로새, 히에라볼리 주변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히에라볼리에 머무는 동안, 빌립과 함께, 그 지역 로마 총독의 부인의 병을 고쳐주었고, 그 부인이 그리스도인 되었습니다. 그러자 남편인 로마 총독은, 빌립과 나다나엘을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명령하였습니다. 이 일로 빌립은 순교하였고, 나다나엘은 특별사면을 받아 죽음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후 인도를 거쳐, 아르메니아에까지 진출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오늘날 아제르바이잔 지역에서 전도하다가 붙잡혀서, 산 채로 살가죽이 벗겨진 채 순교를 당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루하루 변화되어 가는 일상 속에서, 주님과 함께 길을 가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확신이 생기고, 증언의 자리에도 서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은 미래로 열려 있습니다. 과거의 경험 속에 닫혀 있지 않고, 현재에 머물러 있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도상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곳에 와서, 함께 예배하며, 주님께 나아갑니다. 주님의 손을 붙잡고, 주님과 함께 미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바로 그곳에 기적이 일어나고, 치유가 일어나고, 놀라운 역사들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우리가 여기 함께 모여 예배하는 이유이고, 우리가 주님을 믿는 이유입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의 제자가 된 나다나엘이, 처음으로 경험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기적을 함께 보고 경험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이후로부터 그는, 예수님이 하시는 놀라운 사역의 자리에 함께했을 것입니다. 그것을 보며 주님이 누구이신지를, 더욱더 확신해 갔을 것입니다. 이후 주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도, 나다나엘은 함께 있었습니다. 끝까지 주님과 함께한 나다나엘은, 주님의 죽으심, 부활하심, 승천하심을 바라보며, 하늘의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그가 누린 은혜입니다. 나다나엘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루에도 수백 번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는 또한 말씀묵상의 사람이었습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게 그가 끝까지 간사한 것이 없는, 진실한 제자로 살아갈 수 있었던 원동력입니다. 기도와 말씀이 기본입니다. 신앙의 위기, 교회 위기의 시대입니다. 위기 시대일수록, 기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다시 기도의 자리를 찾고, 말씀의 자리를 지키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사변과 생각의 구조 속에 머무는 종교가 아니라, 주님을 역동적으로 만나는 경험이 저희들에게 열리게 하옵소서. 이미 나의 과거를 아시는 주님, 우리 마음속 깊은 곳까지도 꿰뚫고 계시는 주님, 그럼에도 사랑스러운 눈으로 오늘도 우리를 바라보시며 내밀어 주시는 손을 붙잡게 하옵소서. 우리는 하나님께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그러기 전에 우리는 과연 하나님을 우리의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있는지,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시고, 우리의 주인이라고 인정하고 있는지 한번 자신을 돌아보게 하옵소서. 우리는 일주일에 한번 교회 올 때만 꺼내보는 성경책처럼, 우리가 필요할 때, 우리가 아쉬울 때만 찾는, 하나님은 아니었는지 돌아보게 하옵소서. 하나님을 말씀으로 사모하며, 그분을 알기를 더욱 원하고, 그분을 찬양하게 하옵소서.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인정하셨습니다. 죄인인 우리를 자녀로 인정해주셨습니다. 죄인인 우리를 의인으로 인정해주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을 인정할 차례입니다. 나다니엘이 예수님을 인정하고 고백했던 것처럼, 이제는 우리가 고백할 차례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형제들을 인정하고, 이웃들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인정할 차례입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우리를 향한 믿음이 가득하게 하옵소서. 그 사랑을 온 세상에 전파하는 성도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