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만춘-
그는 보장왕 때의 안시성(安市城) 성주이다. 그의 이름은 역사서에는 보이지 않고 ‘안시성 성주’로만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송준길(宋浚吉)의 《동춘당선생별집 同春堂先生別集》과 박지원(朴趾源)의 《열하일기 熱河日記》에 의하면 양만춘(梁萬春) 또는 양만춘(楊萬春)으로 밝히고 있다.
어떻든 그는 지금의 만주 봉천성(奉天省) 해성(海城)의 동남방에 위치한 영성자산성(英城子山城)으로 추정되는 안시성의 성주였다. 안시성은 지리적으로 험한 곳에 소재한 전략적 요충지일 뿐 아니라 군사들 또한 정예한 것으로 정평이 난 바 있다.
그는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정변에 의한 정권장악에도 불구하고, 집권자인 연개소문에게 복종하지 않았으므로 연개소문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안시성을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그에 따라 연개소문은 결국 안시성 성주의 직책을 그대로 맡겼다. 이는 그가 용기와 소신있는 인물이었음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 당나라 태종과의 공방과 일화
645년(보장왕 4) 당나라 태종은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당나라군대의 주력부대의 침공을 받은 요동지역에 있던 개모성(蓋牟城:撫順부근)과 비사성(卑沙城: 大連灣 北岸)이 함락되었다.
이어 당나라 태종의 독전(督戰)으로 요동성(遼東城: 遼陽)과 백암성(白巖城:遼陽 동남)도 당나라군대에 함락되었다. 당나라군대는 다음 공격목표를 놓고 수뇌부 사이에 이견이 있었으나, 이세적(李世勣)의 건의가 채택되어 안시성 공격을 시도하였다.
이때 고구려는 당나라군대에 포위된 안시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15만 병력이 출동하였으나 안시성 근처 8리 지점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그렇게 되자 고립무원의 상황에 처한 안시성은 그를 비롯한 병사와 주민들이 하나로 뭉쳐 완강히 저항하였다.
안시성 공격이 여의치 않자 당나라군대는 공격목표를 그보다 훨씬 동남쪽에 있는 오골성(烏骨城:만주 鳳凰 남쪽의 高麗山城)으로 변경할 것을 논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안시성을 계속 공격하기로 의견이 모아져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당나라군대는 연인원 50만명이 동원되어 60여일 걸려서 높은 흙산을 쌓아, 이를 발판으로 성을 공격하였다.
당시 당나라군대는 하루에도 6·7회의 공격을 가하고 마지막 3일 동안은 전력을 다하여 총공세로 나왔으나 끝내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마침 9월에 접어들어 요동의 기후가 추워지기 시작하였고, 군량 또한 다하였으므로 당나라 태종은 포위를 풀고 철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그는 성루에 올라 송별의 예(禮)를 하니, 당나라 태종은 그의 용전을 높이 평가하여 비단 100필을 주면서 왕에 대한 충성을 격려하였다.
고려 후기의 학자인 이색(李穡)의 〈정관음 貞觀吟〉이라는 시와 이곡(李穀)의 《가정집 稼亭集》에 의하면 당나라 태종이 눈에 화살을 맞아 부상을 입고 회군한 것으로 적고 있다.
고구려 멸망 뒤 당나라에 반대하여 끝까지 저항한 11성(城) 가운데 안시성이 포함된 것을 생각할 때, 그의 생존여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기백과 용기가 고구려 부흥운동으로 계승되었음을 알려 준다.
-을지문덕-
고구려 영양왕대의 장군으로 수나라의 침공에 맞서 살수에서 훌륭한 전과를 올린 인물이다. 그런데 '을지'라는 성에 대하여 몇가지 다른 해석이 존재한다. 우선, '을지'가 고구려 관위명(官位名)의 하나인 우태(于台)와 같이 연장자·가부장(家父長)을 뜻한다고 보는 입장이 있는 반면, '을'만이 성고요 '지'는 존대를 뜻하는 접미사라 보기도 한다. 또한, '을지'가 선비족(鮮卑族)계통의 성인 '울지(尉遲)'씨와 같은 것으로 보아 을지문덕을 선비족계통의 귀화인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 한편,『자치통감』에는 이 인물을 위지문덕(尉支文德)이라 표기하였으며 『삼국사기』 을지문덕전에서는 그의 세계(世系)를 알 수 없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해동명장전(海東名將傳)』에는 "을지문덕은 평양 석다산(石多山)사람이다."라고 하였다.
▶ 영양왕 23년인 612년에 수나라 양제(煬帝)가 대규모 병력으로 고구려를 침공하였는데, 이 때에 육군은 요동성(遼東城)을 공격하고, 우중문(于仲文)·우문술(宇文述) 등이 이끄는 30만 별동부대는 해군과 함께 평양성을 공격하고자 하였다. 별동대가 압록강 서쪽에 집결하였을 때, 을지문덕은 왕명을 받들어 거짓항복을 청하여 적진으로 들어갔다. 그 곳에서 수나라군의 군량이 부족한 것을 파악하고 돌아와 수나라군의 군사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작전을 폈다. 그래서, 수나라군과 충돌 때마다 패해 달아나는 척하면서 평양성 부근까지 이들을 유인하여 매우 지치게 하였다.
▶ 결국, 전의를 잃고 후퇴할 만한 구실을 찾던 수나라의 우중문에게 다음과 같은 칭송의 시 를 보내었다. "신통한 계책은 천문을 헤아리며 묘한 꾀는 지리를 꿰뚫는구나. 싸움마다 이겨 공이 이미 높았으니 족한 줄 알아서 그만둠이 어떠하리(神策究天文 妙算窮地理 戰勝功旣高 知足願云止).”이처럼 수나라군을 조롱하는 시를 보낸 후, 거짓항복을 청하여 퇴각의 구실을 만들어주고는 일대 반격전을 펼쳤다. 그래서, 살수(薩水:지금의 청천강)를 건너는 수나라군을 배후에서 공격하니 수장 신세웅(辛世雄)이 이 싸움에서 전사하고 고작 2700명만을 살아 돌아가는 대단한 전승을 거두었다. 이를 '살수대첩'이라 한다.
2. 영양왕
영양왕의 생애
▶ 이름은 원(元) 또는 대원(大元)이며 평양왕(平陽王)이라고도 한다. 평원왕의 맏아들로 풍채가 준수하고 제세안민(濟世安民)의 뜻을 가졌다고 한다. 평원왕 7년인 565년에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평원왕이 죽은 뒤 왕위를 계승하였다.
▶ 영양왕이 즉위하기 얼마 전인 589년에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였다. 영양왕은 즉위와 함께 수나라 문제(文帝)로부터 상개부의동삼사(上開府儀同三司)라는 지위를 인정받았고, 또한 부왕이 가지고 있던 요동군공(遼東郡公)이라는 작위를 계승하였다. 또한, 조공을 통하여 수나라와 외교적인 관계를 모색하면서도 동시에 국경수비를 강화하고 말갈족·거란족들을 고구려편에 편입시키고 돌궐족과도 제휴를 꾀하였다.
▶ 그러던 중 영양왕은은 598년에 말갈의 군사를 이끌고 요서(遼西)를 선제공격하였다. 그러자 수나라 문제는 국력을 총집결하여 고구려를 침공하였으며 수나라와 고구려의 전쟁의 모두 4차례에 걸쳐 계속되었다. 고구려군이 요서를 공격한 것에 대한 대응으로 시작된 수나라의 1차 침입에서는 30만의 수나라 군사가 쳐들어왔으나 기근·질병·장마 등을 겪으며 스스로 물러가고 말았다.
▶ 612년에 수 양제(煬帝)는 130만 대군을 이끌고 수륙 양면에서 공격을 시작하였으니 이것이 제 2차 침입이다. 이 전쟁에서 고구려는 요동성(遼東城)에서 지구전을 펴 수군을 막아내고, 대동강에서 수군을 대파하였다. 그러자 수나라는 별동대를 구성하여 평양성 가까이 진격하였으나 군량이 부족해 지자 후퇴할 수 밖에 없었고 이 과정에서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지휘한 살수(薩水)에서 크게 패한 후 총퇴각하였다.
▶ 수의 3차 침입은 613년에 있었으나 요동성·신성(新城) 등에서 고구려군이 이들을 잘 막아내었으며, 이 때 수에서 양현감(楊玄感)의 반란이 일어나자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4차 침입은 614년에 있었는데, 수나라 내부의 혼란과 함께 때맞춰 고구려가 평화교섭을 시도하자 철군하였다. 그리고, 고구려와의 오랜 전쟁에서 큰 피해를 입은 수나라는 곧 멸망하고 말았다. 또한, 고구려 역시 수와의 전쟁을 치루며 적지않은 타격을 입었다.
▶ 한편, 영양왕은 한반도 방면으로는 신라에게 빼앗긴 한강유역을 되찾기 위해 온달(溫達)이 아단성(阿旦城)을 공격하였고, 603년과 608년에는 북한산성을 공격하였다. 그러자 백제와 고구려로부터 압박을 받고 있던 신라가 적극적으로 수나라와의 교섭을 시도하기에 이르렀다.
▶ 또한, 수나라와 접근하려고 하던 백제에 대해서도 598년과 607년에 이를 공격하여 응징하였고, 동시에 수나라와의 대결을 염두에 두어 한편으로는 관계 개선에도 힘썼다.
▶ 영양왕대에는 일본과의 교류도 활발하였다. 그래서, 595년에는 일본 쇼토쿠태자(聖德太子)의 스승이 된 혜자(惠慈)가 일본으로 건너갔으며, 610년에는 담징(曇徵) 등을 파견하여 일본에 많은 문화적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600년에는 태학박사 이문진(李文眞)을 시켜 『유기(留記)』 100권을 정리하여 『신집(新集)』 5권이라는 역사서를 편찬하였다.
이처럼 수와의 전쟁을 치루며 수를 멸망에 이르게 하고 국력을 신장하며 여러 업적을 남긴 영양왕은 618년 9월에 세상을 떠났으며 자식을 남기지 않았다고 전한다.
3.살수대첩
수나라와의 전쟁
▶ 영양왕이 즉위하기 몇 해 전인 581년에 북주의 외척인 양견이 북주의 왕실을 폐하고 수나라를 건국했으며 수는 꾸준히 그 세력을 확대해 나가다가 589년에 강남 동쪽 지방을 차지하고 있던 남조의 진을 멸망시키고 중국을 통일하였다.
중국을 통일한 양견은 북쪽으로 시선을 돌려 돌궐과 고구려에게 압박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즉, 양견은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어 영토를 염탐하고 지형을 익히도록 하였다.
그러자, 영양왕 역시 수의 장안에 사신을 보내 그 동태를 살피게 하였으며 양견이 고구려를 치기 위해 비밀리에 수륙군 30만을 양성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는 598년에 말갈병 1만을 동원하여 요서를 공격하였다.
▶ 고구려군이 요서를 공격하자 수나라의 영주 총관 위층이 수성전을 펼치며 양견에게 지원병을 요청하였다. 그러자 양견은 같은 해 6월에 한왕 양과 왕세적을 대원수로 임명하고 수륙군 30만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치도록 하였으니 이것이 제 1차 침입이었다. 그러나 제1차 침입에서 수나라 군사는 기근·질병·장마 등으로 인해 스스로 물러나고 말았다.
▶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시도한 고구려 침입에서 실패한 양견은 전쟁에 참가했던 장수들을 잡아들여 죽이거나 감옥에 가두고 다시 고구려를 침입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신하들이 장마 중에 전쟁을 벌이는 것이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이유를 들어 말리자 고구려 침략계획이 잠시 중단되었다. 이 같은 상황을 파악한 영양왕은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제안하였으며 마지못해 수나라는 이 화친제의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런데 이 즈음 백제에서는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자신들이 고구려로 가는 길을 잘 알고 있으니 수나라의 고구려 공격을 돕겠다는 제안을 하였다. 그러나, 백제의 이같은 요청 역시 수나라 조정의 거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 이 소식을 들은 영양왕은 곧바로 군사를 일으켜 백제를 공격하였으며 이로써 평원왕 이후 한동안 중단하였던 백제와 신라에 대한 압박을 다시 시작하였다. 이는 수나라의 침략에 대비하여 한반도쪽 변방을 강화해야한다는 전략적 판단하에서 백제와 신라에게 고구려의 군사력을 과시하게 위해 추진된 일이었다.
수나라의 양제(煬帝)는 612년에 130만 대군을 이끌고 수륙 양면의 고구려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것이 제 2차 침입이다. 이 침공에 대해 고구려는 요동성(遼東城)에서 지구전을 펴 수나라군사를 막아내고, 대동강에서는 해군에 맞서 싸워 이를 막아내었다. 그러자, 수나라는 별동대를 구성하여 평양성 가까이까지 진격하였으나 군량이 부족해지자 후퇴하던 중에 명장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지휘하는 고구려군에 의해 살수(薩水)에서 참패를 당하여 총퇴각하였다.
▶ 수의 3차 침입은 613년에 있었으나 요동성·신성(新城) 등에서 고구려군이 이들을 잘 막아내었으며, 이 때 수에서 양현감(楊玄感)의 반란이 일어나자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4차 침입은 614년에 있었는데, 수나라 내부의 혼란과 함께 때맞춰 고구려가 평화교섭을 시도하자 철군하였다. 그리고, 고구려와의 오랜 전쟁에서 큰 피해를 입은 수나라는 곧 멸망하고 말았다. 또한, 고구려 역시 수와의 전쟁을 치루며 적지않은 타격을 입었다.
-법흥왕-
■ ?∼540
■ 신라 제23대왕
■ 재위 514∼540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원종(原宗). 지증왕의 원자이며, 어머니는 연제부인 박씨(延帝夫人朴氏)이고, 왕비는 보도부인 박씨(保刀夫人朴氏)이다. 신장이 7척이나 되고 도량이 넓으며 남을 사랑하였다고 한다.
1. 병부 설치
법흥왕은 지증왕 때 일련의 개혁정치를 계승하여 중앙집권적인 고대국가로서의 통치체제를 완비하였다. 이같은 점에서 먼저 주목되는 것은 517년에 설치한 중앙관부로서 병부(兵部)의 존재이다.
신라에서 중앙관부로서는 병부가 제일 먼저 설치되었는데, 이것은 중앙집권적 고대국가체제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군사권을 왕이 직접 장악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할 수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즉, 517년에 비로소 설치된 병부는 눌지왕 이후에 등장하여 왕의 직속으로 군사권을 장악하고 있던 장군과 같은 직책을 중앙관부로 흡수하여 재편성한 것이다.
2. 율령제정
520년에는 율령을 반포하고 백관공복을 제정하였는데, 이때에 반포된 율령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17관등과 골품제도 등에 관한 규정이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율령제정의 역사적 의의는 매우 크다. 왜냐하면 율령에 의하여 신라내로 통합된 이질적 요소들이 파악됨으로써 통치가 보다 쉽게 이루어질 수 있었으며, 법에 의한 이질적 요소의 강제적 해소는 상대적으로 왕을 정점으로 하는 국가권력의 강화를 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3. 상대등 설치
그리고 이러한 국가권력, 즉 왕권의 강화를 단적으로 나타낸 제도가 바로 법흥왕대에 비로소 설치된 상대등이다. 상대등은 수상과 같은 존재로서 531년에 이찬(伊飡) 철부(哲夫)가 최초로 상대등에 임명되었다. 상대등은 신라의 최고관직으로서 대등으로 구성되는 귀족회의의 주재자였다.
이러한 상대등이 설치된 배경은 왕권이 점차 강화되어 왕이 귀족회의 주재자로서의 성격을 탈피하게 되자 왕 밑에서 귀족들을 장악할 새로운 관직이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4. 외교관계
법흥왕은 이와 같이 대내적으로 체제를 정비하여 왕권을 강화하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영역확장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522년에 백제의 적극적인 진출에 반발한 대가야가 법흥왕에게 사신을 보내어 결혼을 요청하므로 왕은 이 제의를 받아들여 이찬 비조부(比助夫)의 누이동생을 보내어 동맹을 맺었다.
그 뒤 법흥왕은 적극적인 남진정책을 추진하여 524년에는 남쪽의 국경지방을 순수(巡狩)하고 영토를 개척하였다.
이때 본가야의 왕이 와서 법흥왕과 회견하였는데, 아마도 투항 조건을 타진한 것으로 짐작된다.
이 본가야는 532년에 금관국주(金官國主) 김구해(金仇亥)가 세 아들과 함께 신라에 항복해옴으로써 정식으로 합병되었다.
본가야의 투항은 신라로 하여금 낙동강과 남해안의 교통상의 요지인 김해를 발판으로 가야의 여러 나라를 정복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이밖에 대아찬 이등(伊登)을 사벌주군주(沙伐州軍主)로 임명하여 서북방면의 점령지를 관리하게 하였다.
5. 연호사용
왕권강화와 영역확장 등에 힘입어서 국력이 신장된 신라는 536년에 비로소 독자적 연호인 건원(建元)을 사용하였다. 이로써 법흥왕 이래 신라 중고왕실(中古王室)의 거의 모든 왕들은 자기의 독자적인 연호를 가지게 되었다.
동아시아의 전통사회에서 중국의 주변국가가 중국 연호를 사용하지 않고 자기연호를 사용하였다는 것은 일단 중국과 대등한 입장에서의 국가임을 자각한 자주의식의 표현이라는 데 역사적 의미가 있다.
또한 521년에는 종래의 외교노선에서 탈피하여 위진남북조시대(魏晉南北朝時代)의 북조 대신에 남조인 양(梁)에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이것은 백제의 안내를 받고 실현된 것으로 보인다.
6. 불교수용
그리고 이때 신라에 사신으로 온 양나라의 승려 원표(元表)가 불교를 신라왕실에 전해준 것이 불교수용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불교가 신라에 처음 들어온 것은 5세기
초 아마도 눌지왕 때이거나 혹은 그보다 조금 이른 시기일 것으로 보인다.
불교전래의 경로는 고구려를 통한 것이었다. 초기의 전도자(傳道者), 즉 신라불교 개척자로서의 명예를 지니게 된 것은 아도(阿道)였다. 그는 인도의 승려로서 묵호자(墨胡子)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으며 고구려로부터 일선군(一善郡) 모례(毛禮)의 집에 숨어서 민간의 전도에 힘썼다.
민간에 전파된 불교는 신라귀족으로부터 동두이복(童頭異服), 의론기궤(議論奇詭)의 사교로
비난 받았으나 신라와 중국과의 외교적 교섭이 열림에 따라 마침내 신라왕실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법흥왕은 불교를 크게 일으키려 하였으나 귀족들의 반대를 받아 고민하던 중 527년에 이차돈(異次頓)의 순교를 계기로 국가적 공인이 이루어졌다.
법흥왕에 의하여 국가종교로 수용된 불교는 왕권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고대국가 형성에 있어서 이념적 기초를 제공하여 왕실과 매우 밀접한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관계는 법흥왕이 말년에 승려가 되어 법호를 법공(法空)이라 한 데서 잘 나타나고 있다. 재위 27년 만에 죽자 시호를 법흥(法興)이라 하고 애공사(哀公寺)에 장사지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