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그녀 / 봄바다
내가 질풍노도의 시기라는 중2 시절을 별다른 증상 없이 보낸 건 요즘 많이 회자되는 호모 루덴스(Homo Ludens), 즉 노는 인간의 전형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기운 가세는 회복될 기미가 없었고 어머니의 고된 노동으로 겨우 이어가는 중이어서,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가봐야 나를 반기는 건 싸늘한 냉기뿐이었다. 한창 이성에 눈 뜰 나이였건만, 몸으로 부대끼며 노는 우리 무리에게는 먼 나라 이야기였다. 수업이 끝나기가 무섭게 우리들은 하얀 칼라에 긴 플레어 스커트가 무색하게 나뭇가지로 대충 그린 오징어와 십자가 위를 누비며 목이 터져라 소리까지 질러대서 지나가는 아이들이 질색하였다.
노는 데 정신이 빠져 선생님이 시킨 심부름을 까먹었다가 퍼뜩 생각이 미치면, 교복이 문제였다. 이름표는 덜렁덜렁, 실로 가볍게 시침질로 고정시켜 놓은 하얀 카라는 이미 떨어져서 가방에 던져둔 채라 손 쓸 수가 없다. 그 꼴로는 교무실에 갈 수가 없어 무리들 중, 가장 성한 교복으로 바꿔 입고 태연하게 교무실로 들어서지만 한 두 번이 아니라 선생님은 금방 알아채고 “오늘은 ㅇ으로 변신?”이라며 꿀밤을 한 대 때리거나 소리내어 웃으셨다. 이러니 차분하게 공부할 시간이 별로 없었다. 겨우 수업시간에 집중하는 걸로 명맥을 유지하기는 매우 힘들었다.
무리들과 소리 지르고 뛰어놀다 가는 길에 튀김이며 오뎅까지 입에 넣으면 세상 바랄 게 없었다. 집에 가면 곧 의기소침해지지만 부러울 게 없는 나날이었다. 하지만 2학년이 되자, 바로 옆 반의 전교 1등 ㅅ이 나를 자극했다. 그녀는 공부만 해서 그런지 티 하나 없는 하얀 얼굴에 키도 크고 조용했다. 같은 초등학교는 아니었지만, 초등학교 시절 ‘고전 읽기 경시대회’에서 자주 본 적이 있는지라 1학년부터 서로 알고 지내기는 했지만, 옆 반이라 더 신경이 쓰였다. 벼락공부로 외우는 건 잘할 수 있었지만, 수학은 한꺼번에 하기가 힘들었다. 저녁에 하다하다 안 되는 것은 체크해 두었다 학교 가자마자 옆 반의 문을 열고 ㅅ에게 달려갔다. 시험을 앞둔 그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 시간인가? 하지만 ㅅ은 한 번도 싫은 내색을 한 적이 없다. 내가 못 푼 데가 어딘지 물어 핵심을 짚어 설명해 주면 머리에 쑥쑥 들어와, 시험지를 받아들면 쉽게 풀어 내려가니 재미가 붙었다. 어려운 문제가 있어도 걱정거리가 없으니 수업시간만 끝나면 또 신나게 놀았다.
친구들과 노느라 세상 부러울 게 없었지만 덜렁대는 나를 동생 대하듯, 모르는 걸 자세하게 묻고 핵심을 짚어 가르쳐 주는 그녀가 부러웠다. 어떤 일이 있어도 동요하지 않고 차분한 그녀의 목소리마저 좋았다. 한 번도 같은 반이 되지 않았고, 우리 놀이에도 참여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누구보다 내 친한 친구처럼 여겨졌다. 수학을 놓지 않고 그래도 상위의 성적을 유지한 건 순전히 그녀 덕분이었다. 그녀는 내 든든한 수학 교사였다. 그렇게 중학시절을 보내고 그녀는 다른 고등학교로 진학해서 서로의 안부를 모르고 지냈지만, 나는 그녀가 ㅅ대에 진학했다는 것을 물어서 알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2년 전, 서울에서 교편을 잡다 명예퇴직을 하고 목포가 그리워서 왔노라며 전화를 걸어왔다. 여기저기 인사 다니고 돌아가는 길에 갑자기 내가 생각나서 수소문해 근무지를 알아봤다며 못 보고 가는 게 아쉽다 했다. 시간이 더 주어졌더라면 어떻게 변했는지 보고 싶었다며 그간의 간단한 이야기를 나누고 전화번호를 주고받았다. 착한 그녀답게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느라 서둘러 돌아가야 했다. 카톡의 사진으로 그녀가 대충 어떻게 사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여전히 깔금하고 차분한 그녀의 손길이 집 곳곳을 빛내고 있었다. 귀찮게만 한 것 같은데, 그녀는 자기표현이 확실하고 거리낌 없이 노는 내가 부러웠다니. 다들 채워지지 않는 자기만의 빈 구석이 있나 보다. 그렇게 완벽한 그녀가 나를 부러워했다니.
첫댓글 겉으로 보기에 다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그런 사람도 자기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부러워하더라구요. 그래야 사람 아닐까요?
선배님, 사람의 정의 좋습니다.
왜 그렇게 우리 주변에는 완벽한 그녀(그)가 많은지요?
우리가 조금 융통성이 있어서라고 위안을 삼아 볼까요? 하하하.
선배님, 이건 반칙이예요. 전 꼴등이랍니다.
착오로 월요일 아침에 쓴 글이니 꼴등이랍니다. 변함 없으니 걱정 마세요오. 하하하
하하하,
봄바다님의 어린 시절이 눈에 아른거립니다. 골목을 울리는 목소리에 귀가 쨍쨍합니다. 그리 건강히 놀아서 당당하신가 봅니다. 그 당당함이 좋은 친구를 만들고요.
당연히 부럽지요.^^
우아한 선배님은 치마 입고? 아마 절대로 흉내도 못 내실걸요.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서로 달라 더 그리워하시겠어요
말괄량이 선생님을 상상하기 힘들지만 글에서 그 당시의 즐거움이 뚝뚝 떨어집니다.
교장 선생님 어린 시절이 저랑 비슷한 것 같아서 더 정겹습니다. 저도 노는 데 최선을...
선생님은 너무 미래력적이세요.
인기 많은셨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