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요약》 류성룡, 『징비록』, 홍익출판사, 2019.
= 임진왜란을 떠올리면 이순신 장군이 생각나지만, 사실은 류성룡이 없었다면 이순신과 권율도 없었습니다. 류성룡은 비겁하게 도망간 선조를 섬긴 재상으로 임진왜란을 진두지휘하고 파직 후 “미리 준비하여 후환을 대비한다”는 징비(懲毖)록을 저술하였습니다.
'징비록'이라는 이름은 《시경》 소비편(小毖篇)에 적혀 있는 "내가 지난 잘못을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予其懲而毖後患)"는 구절을 인용한 것으로 스스로의 반성을 중심으로 저술하였습니다. 임진왜란을 가장 처절하게 겪은 사람으로서 잘못을 반성하고 훗날 또다시 닥칠지 모르는 환란을 경계하고자 한 것입니다.
- 류성룡은 당대의 유학자이자 문장가였던 만큼《징비록》은 자세한 상황과 무기 및 방어체계까지 기술해서 당대에 극비로 취급돼 국외반출이 금지됐을 뿐만 아니라 현재에는 국보132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징비록 1권에서는 전쟁전 조선의 정치상황과 한양을 임금은 한양을 내주고 피난길에 오르고, 명나라의 참전과 평양을 왜적에게 빼앗긴 내용과 이순신이 바다에서 왜적을 물리치게 된 이야기와 경주를 되찾은 이야기 등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2권은 평양성을 되찾은 이야기로 시작해서 폐허가 된 서울을 되찾은 이야기, 강화를 맺으려 했던 명나라의 상황, 강화협상 결렬로 인한 정유재란의 이야기와 함께 이순신장군의 백의종군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잡록은 특별한 순서나 형식이 없이 간첩 김순량을 잡은 일이라든가 스스로의 우국충정, 명나라 측 인물들을 상대하느라 겪었던 고충 등을 기록과,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여러 가지 조짐과 병법과 무기에 관련한 사항, 여러 인물들에 대한 평가 등이 실려 있습니다.
= 1] 전쟁일 일어난 요인 ① 임진왜란은 조선이 일본에 대해서 계속 알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했다. 신숙주는 일본의 호전적인 속성을 꿰뜷어 보고《해동제국》에서 경계를 주장하였다. 나라가 안정적일 때인 세종대왕 때부터 연산군까지 60회 사절단을 파견했으나 비슷한 기간은 연산군부터 선조 때 까지는 겨우 5회만 파견했을 뿐이다. 일본은 조총을 만들어서 구식무기로는 상대할 수 없는 현실을 무방비상태로 대처했다. 반대로 일본은 승려등을 통해서 조선의 상황을 자세히 파악하고 있었고, 충격적인 내용은 조선에는 군대가 없다는 보고이다.
류성룡은 전쟁이 일어나기 5년 전 일본국 사신으로 조선에 온 다치바나 야스히로의 태도와 그가 가지고 온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국서내용이 매우 거만한 것을 보고 전쟁을 감지하였다.
② 정치적으로 분당의 발생과 붕당 청치의 심화 때문이다. 선조 초기부터 발생한 동서 분당으로 동인과 서인의 갈등이 심화 되어서 건전한 비판과 견제 의식은 점차 사라졌으며, 인재의 고른 등용은 요원한 일로, 국방과 민생의 현안은 뒷전이 되고 말았다.
통신사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나고 돌아온 동인 김성일과 서인 황윤길은 정반대의 보고를 하였다. 황윤길은 반드시 전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였고, 김성일은 ‘신은 그러한 정황을 보지 못하였습니다’고 정 반대로 보고하였다. 후에 김성일이 황윤길의 말이 지나쳐 일부러 반대로 말했다'고 했다고 실토하였다. 류성룡은 퇴계 이황의 문인이며, 김성일과 동문수학한 사이이고, 10만 양병설을 주장한 류성룡은 김성일의 침략이 없을 것이라고 주장한 말을 지지하였다.
③ 200년 동안의 평화로 국방력신장을 키우지 않았다. 조선은 왜의 침략을 우려하여 변방의 사정을 잘 아는 신하를 뽑아 충청, 경상, 전라도를 순찰하고 방비하게 하였다. 그러나 오랫동안 평화로운 시절이 지속되어 편안함에 익숙해져 있어서 노역하는 것을 꺼려하며 원망하는 소리가 길을 가득 메웠다.
= 2] 7년 전쟁 후 일본이 퇴각한 이유: ① 류성룡이 어려서부터 절친인 이순신을 발탁하여 전라 좌도 수군절도사에 임명하였기 때문이다. 이순신은 북방 지역에 변란이 잦을 때도 지략과 활로 수십명의 적을 맞추어 말에서 떨어트려 여진족이 도망가자 추격하여 약탈한 물건을 모두 찾아왔다. 무과에 급제한지 10년이 되도록 걸맞는 지위에 오르지 못하다가 비로서 정읍현감이 되었다.
② 식량보급이 차단되었기 때문이다. 일본군이 부산에서 충주로 한양을 거쳐서 평양을 점령하였으나 군량비 보급을 위해서 배로 이용하는 것이 간편했지만 바다를 이순신이 막고 있었다. 또한 육지는 의병과 노비, 승려들이 낫, 곡갱이등으로 막아서 보급로가 차단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