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0월 18일 토요일
포항에서 대구 가는 길에 안강에 있는 흥덕왕릉 들렀다 가기로 한다. 학전리에서 28번 국도와 갈라져 31번 국도를 따라 서쪽으로 가면 달성네거리가 나오고 여기서 왼쪽으로 68번 지방도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면 경주 안강 육통리에 흥덕왕릉 입구 표시가 나온다. 들판은 잘 익은 벼가 빚어내는 황금빛이 가득하다.
왕릉은 울창한 소나무 숲속에 숨어 있다.
서로 얽힌 소나무들을 보면 흥덕왕과 사랑했던 왕비 장화부인(章和夫人) 사이를 나타내는 것 같다. 장화부인은 흥덕왕이 왕위에 오른 해에 죽는다. 흥덕왕은 다른 왕비를 맞이하지 않고 부인을 그리다가 10년 뒤에 함께 묻히게 된다.
소나무 숲속 어둠을 지나면 밝게 트인 공간과 함께 무덤이 보이기 시작한다. 세오녀는 소풍 오기 좋은 장소라고 한다.
팔각형으로 된 화표석(華表石)이 좌우에 하나씩 서 있다. 팔각 기둥에 무슨 글씨나 그림이라도 있는가 살펴보았지만 그냥 빈 공간으로 서 있다. 화표석은 무덤의 경계를 나타낸다. 불교 팔정도에서 온 것일까, 여덟 개의 팔을 가진 힌두교 비슈누 신과 관련된 것일까 잠시 생각해 본다.
화표석 다음으로 무인석과 문인석 한 쌍이 무덤을 지키고 있다. 덩치 큰 무인은 서역 사람들처럼 코가 매부리코이고 머리는 끈으로 질끈 묶은 상태다.
서역(西域)이 어디인지 찬이가 묻는다. 한 나라 이후에 나온 말로 중국의 서쪽이니까 인도,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등을 말하는데 로마까지 폭넓게 부르는 이름이다. 그냥 외국인이라고 하면 되겠다.
장화부인이 죽은 게 826년이고, 흥덕왕은 836년에 함께 묻혔다. 이로 미루어 9세기 신라 사회에는 서역 사람들이 활동하고 있었다고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 서역인은 흥덕왕릉뿐만아니라 괘릉 무인석이나 황성동 돌방무덤에서 나온 토용에서도 나타난다.
돌사자 네 마리. 꼬리가 잘 빠졌다. 캄보디아 앙코르 유적지에서 흔히 만나는 사자를 연상케 한다.
오른쪽 사자는 너무 잘 생겨서 과연 당시 만들어진 것일까 의구심이 든다.
흥덕왕릉은 봉분을 보호하는 둘레돌[호석(護石)]이 있고, 그 둘레돌에 십이지신상이 새겨져 있다.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 子(쥐)丑(소)寅(호랑이)卯(토끼)辰(용)巳(뱀)午(말)未(양)申(원숭이)酉(닭)戌(개)亥(돼지)
십이지는 중국에서 비롯된 것으로, 당나라 이후 동물과 결합하여 무덤을 지키는 수호신 역할로 둘레돌에 새겼다.
십이지는 방향과 시간을 나타내는 역할을 한다. 쥐[자]가 새겨진 곳이 북쪽이고,
말[오]이 있는 곳이 남쪽이다.
넓은 잔디밭은 소풍 와서 놀기에 적합하지만, 주변 농가 축사에서 풍기는 냄새 때문에 오래 놀기는 적합하지 않다.
찬이가 갑자기 질문한다. 왜 흥덕왕릉이 경주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에 있는가? 정말 왜 그렇지. 갑자기 적당한 답이 생각나지 않는다. 며칠 생각도 하고 인터넷 자료를 찾으면서 내린 결론.
1. 장화부인을 먼저 묻었고 흥덕왕은 나중에 합장하느라
2. 신라 하대에 들어서면서 경주 중심 지역에 무덤을 쓸 공간이 없어서...
흥덕왕릉은 신라 중심부인 첨성대로부터 무려 20km 떨어져 있어 경주 지역 왕릉 중 가장 먼 곳에 자리 잡고 있다. 태종무열왕릉 이후 왕릉이 평지에서 산지로 이동하면서 외곽으로 갔다. 임원현 연구에서 신라 왕릉 분포의 규칙성을 밝혀내기도 했다. 하지만, 42대 흥덕왕 이후 왕릉은 더 안 쪽에 배치되고 흥덕왕릉이 바깥으로 간 것을 설명하기 곤란해진다.
첫댓글 아빠, 엄마와 아들아이가 함께 신라 왕릉을 답사하고 묻고 답하고 생각하는 모습이 참 아름답습니다. 12지 상은 시공간의 수호신이겠고, 무인석상은 아라비아(아랍) 사람으로, 당시 바그다드를 수도로 한 아바스왕조의 바닷길로 당, 신라에 왔던 이슬람 상인들이지요. 신밧드의 모험 이야기에 나오는 그런 사람들. 물이 졸졸 흐르고 숲이 있고 새가 울고 황금과 옥과 진주가 넘치고, 비단 옷을 입은 어진 사람들이 사는 신라땅 경주는 곧 쿠란에서 묘사하는 지상의 2곳 천국의 한 곳이었고, 아바스왕조의 옛 문헌, 지도에도 신라가 등장하지요. 정수일 교수 같은 분의 연구를 참조. 흥덕왕릉비문에 '무역지인' 이라 표현된 청해진 장보고가
당, 신라, 일본 삼국간 해상무역을 장악했고, 이슬람상인들과도 거래를 하였지요. 일본 큐슈 다자이후(태재부) 박물관에 가면 아바스왕조의 도자기 등의 유물, 무역로, 모형 선박 등을 볼 수가 있고, 국제무역항구 울산을 통해 경주로 들어온 아랍인들 중엔 처용처럼 신라여인과 결혼해 정착해 살며, 왕의 호위 군대로도 활약을 하였지요. 장보고 시대의 왕 흥덕왕, 경주의 괘릉(원성왕) 왕릉에 아랍인 무인 석상이 이렇게 남아 있는데, 당시의 처용같은 이슬람 사람이 금방이라도 눈을 부릅뜨고 큰 소리 치며 달려들 것 같지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