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의 뒷골목에서 광장을 꿈꾸는 어릿광대
- 이남순의 신작들 -
정용국 (시인)
관수동을 가 보셨는지. 아니 관수동이 서울에 있는 동인지 알기는 하신지. 서울에 수십 년을 살아도 잘 모르는 동네가 제법 많다. 관수동은 서울 하고도 종로3가 한 복판 서울극장 뒤편, 저자거리 이면에 자리하고 있는 동네다. 인사동과 관철동은 잘 알려져 있지만 어깨를 맞대고 있어도 뭇사람들은 그냥 국일관 나이트 뒤라거나 지하철 1호선 종로3가역 15번 출구 옆 상패가게들이 들어차 있는 곳이라 해야 더 잘 알아듣는다. 종로통 왕복 12차선 도로와 청계천이 관수동을 끼고 간선도로를 이루며 번잡하지만 골목으로 한 발짝만 발을 들여놓아도 돼지머리를 삶고 삼치를 굽는 아낙들의 바쁜 손길과 냄새가 골목을 진동하는 곳이다. 이곳에는 그저 서너 평 쯤 되는 작은 가게들이 즐비한데 어깨를 부딪혀야 비켜 갈 수 있는 좁디좁은 골목들이 거미줄처럼 엮여 있다. 여기에 사단법인 한국시조시인협회 사무실이 있는데 그곳이 이남순 시인의 회사이다.
골목은 인체의 실핏줄과 같은 역할을 한다. 정제된 혈액이 온몸 구석구석으로 배달 될 수 있는 것은 실핏줄이 가늘고 길게 인체에 퍼져 있기 때문이다. 물론 관상동맥이나 대동맥이 튼실해야 하겠지만 실핏줄이 부실하면 그 부위는 패혈증을 일으킬 것이고 특히 그 부위가 뇌라도 될라치면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상황을 면키 어려울 것이다. 서민들의 삶은 대개 골목에서 꾸려지게 마련이다. 회사나 시장, 아파트 단지 내의 상가 등 공간적인 면에서도 그러하지만 인간관계가 설정된 모든 사람들 사이에도 다양하고 내밀한 골목들로 빼곡하다. 부부만의 통로, 연인들 사이의 은밀한 미로, 고부간의 갈등, 직장에서의 상하 관계 등 이 모든 소통은 아주 세세한 골목에서의 일들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골목에서의 소통이 막히게 되면 인체처럼 가정과 회사 국가 등의 조직들이 제 역할을 못하고 궤멸하는 지경에 이를 수도 있다.
인간은 광장에 나서지 않고는 살지 못한다. 표범의 가죽으로 만든 징이 울리는 원시인의 광장으로부터 한 사회에 살면서 끝내 동료인 줄도 모르고 생활하는 현대적 산업구조의 미로에 이르기까지 시대와 공간을 달리하는 수많은 광장이 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인간은 밀실로 물러서지 않고는 살지 못하는 동물이다. 혈거인의 동굴로부터 정신병원의 격리실에 이르기까지 시대와 공간을 달리하는 수많은 밀실이 있다./ 사람이 자기의 밀실로부터 광장으로 나오는 골목은 저마다 다르다. 광장에 이르는 골목은 무수히 많다. 그 곳에 이르는 길에서 거상의 자결을 목도한 사람도 있고 민들레 씨앗의 행방을 쫒으면서 온 사람도 있다.
- 최인훈의 『광장』 1961년판 서문 중에서 -
난 데 없이 최인훈의 소설 『광장』 서문이 나온 이유는 이남순의 작품에 골목이라는 단어가 유난히 눈에 띄었는데 곰곰 생각해 보니 그곳이 그의 삶터였기 때문이었고 또한 소설가는 광장을 그려 냈지만 그 과정은 수없이 많고 각각인 골목에서의 이야기였다는 늦은 자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니까 골목은 광장으로 나가기 위해 인간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도정이며 그곳에서의 부대끼고 절며, 까마득하게 좌절하고 다시 일어서는 부침의 궤적은 문학 그 자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자, 이곳 이름도 낯선 서울의 한 복판 관수동 골목에 아직은 여리지만 눈 맑은 시인 한 사람이 쪄낸 골목의 이야기에 주목해 보자.
남은 한 집마저 겨울비에 문 닫았다
북적대던 발길들이 뚝 끊어진 먹자골목
큰길가 유리대문만 밤낮으로 번뜩이는
응달에 늘 빙판이던 햇살 들 일 없는 나날
내리다 만 셔터 아래 나뒹구는 고지서들
추스릴 마음도 없다, 진눈깨비 치고 가는
끝끝내 떠나지 못한 너테 위에 비닐지붕
불황의 안개 속에 미등처럼 흔들린다
우리네 가눌 수 없는 그림자만 기어드는
- 이남순 「골목풍경」 전문 -
이번 신작 이전에도 우리는 이남순의 작품 「관수동 낙엽」에서 도심의 뒷골목 이야기를 전해들은 바 있다. “추루한 진창길을 끌고 밀고 당긴 터에/ 오토바이 퀵 서비스 겹겹이 진을 치니/ 떨어져 구르는 낙엽 쓴웃음만 흘리네” 이렇게 끝난 둘째 수 뒤로 “노을은 가만 내려와 굽은 등을 다독이네”라는 셋째 수 종장을 읽다가 코끝이 찡하게 울려오는 팍팍한 삶들의 모습을 느낀 적이 있었다. 낙엽마저 “쓴웃음”을 흘려야 하는 골목의 삶이 이어진 신작에는 더욱 힘이 부친 삶들이 얼비친다. 이 골목에 살을 부비며 복작대는 이들은 어떤 광장을 꿈꾸고 있는 것일까. ‘巨象의 자결을 목도한 사람도 있고 민들레 씨앗의 행방을 쫒으면서 온 사람도 있다’는 최인훈의 풍문대로라면 아마 온전치는 않더라도 후자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그저 소소한 일상과 생활의 고달픔으로 가득한 하루를 겨우겨우 넘어가는 우리들의 초상일 것이다. 그런데 골목 안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겨울비’ ‘응달’ ‘빙판’ ‘진눈깨비’ ‘너테’ ‘미등’ ‘그림자’ ‘기어드는’등 세 수 전체에 비관적이고 음습한 시어들이 무참하게 나뒹굴고 있는 모습은 마치 전쟁이 휩쓸고 간 뒤의 모습을 방불케 하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남은 한 집마저 겨울비에 문 닫았다” “북적대던 발길들이 뚝 끊어진 먹자골목” “내리다 만 셔터 아래 나뒹구는 고지서들”로 미루어 보아 가게가 문을 닫은 모양이다. 각종 세금과 요금고지서들은 주인도 찾지 못하고 진눈깨비에 밟힌다. 그 다음에는 어쩌면 경매가 들어와 그나마 굴리던 인쇄기나 기계들마저 들어내 갈 것이다. 골목의 상황은 더 나빠졌는데「관수동 낙엽」에서 등을 두드려주던 ‘노을’도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안개 속에 미등처럼 흔들린다” “우리네 가눌 수 없는 그림자만 기어드는” 살풍경이다. 위안이 무색한 골목의 나날에 아마 시인도 가슴이 너무 아파 순대국에 소주 한 잔 놓고 눈물 찔끔거리는가 보다. 무언의 위안으로 외려 더 큰 울림을 자아내긴 했어도 위무조차 버거울 관수동 골목의 이웃에게 시인은 내내 마음이 무거웠을 것이다.
식구들도 손님들도 편안히 안아주던
푹신한 가죽소파에 중년남자 모로 누워
해종일 한마디 없이 리모컨을 돌립니다
한 때의 붉은 홰는 창문마다 힘찼지만
지금은 휴일아침 늦잠처럼 밀쳐두고
한 번도 울어주지 않는 핸드폰이 야속합니다
삼각관계 막장 불륜 채널을 좇아가다
제풀에 심드렁해 졸다 깨다 가는 하루
동업자 강아지 녀석만 옆에 와 엎드립니다
*드라마에 빠진 중년 아저씨 신조어
- 이남순 「드라저씨」 전문 -
골목의 전쟁에서 패퇴한 “중년남자“는 백수가 되었나 보다. 백수가 되었다는 말은 곧 광장으로 나갈 수 있는 추진력과 실탄을 잃었다는 면에서 위험증후군에 해당한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직업에 대해 자부심과 전문성을 인정받고 싶어 하고 더구나 남자인 경우는 그것이 마지막 남은 자존심일 수도 있다. 이 자존심이 만인이 보는 앞에서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면 얼마나 큰 충격과 좌절 속을 헤매고 다녔을 것인가. 「드라저씨」의 분위기는 평온하고 태연한 듯 보여도 사뭇 무겁고 참을 수 없는 무기력감으로 독자의 정서를 자극하는 시다. 더구나 존칭으로 기술된 조용하고 나긋나긋한 종결형 어미들은 오히려 ”중년남자“의 들끓는 의중을 다독여주기나 하듯이 따듯하게 한 장 담요를 덮어 주는 효과를 유발하고 있다. 소품으로 등장하는 ”리모콘“ ”핸드폰“ ”강아지“도 나름대로 각 수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작품의 유기적 긴밀성은 높은 편이 아니지만 세 가지 소품이 등장하는 각 수의 종장은 마치 심저를 관통하여 흐르는 팽팽한 의식의 끈처럼 작품을 일관되게 유도해 나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언뜻 종장들이 압축성과 긴장감이 부족해 보이는 것 같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늘어놓은 것 같아 너무 단순한 종장들은 사실 주인공의 가장 핵심적인 의식상태를 태연하게 대변해 주고 있는 특이한 양상을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제3자가 지문을 읽어 나가 듯 건조하고 사소한 종장의 존칭형 종결어미들을 배치한 작가의 기획을 독자가 놓쳐서는 안 될 또 하나의 재미일 수도 있다.
신작 몇 편을 이해하는데 작가의 사생활을 거론하기에는 조금 섣부른 일일지도 모르지만 그의 시가 드러내놓는 속살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이해하면 지나친 일은 아니다. 이남순의 활동영역은 두 가지로 대분된다. 사업자로서 회사를 운영하는 주체가 하나이고 가정으로 돌아가면 주부로서의 일반적이고 사소한 일들이 놓여 있을 것이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 보탠다면 구순이 되신 부모님을 봉양하는 자식으로서의 자리가 적지 않게 그의 일상에 자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고향 함안에 계신 부모님의 이야기는 그의 시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얼마 전 이태순의 시「협립양산」을 읽다가 어머니와 딸 사이에 흐르는 작지만 끈끈하면서도 애절한 동류의식을 들여다본 적이 있었는데 이번 이남순의 작품에도 그 절절함이 그대로 묻어나고 있다.
병원에 모셔놓고 장롱 서랍 열어보니
시큰한 눈물처럼 대장엄 사리밭처럼
울 엄니 베잠방이에 살구꽃이 만발했다
줄줄이 딸만 다섯 첫 봉급 받아들고
젤 먼저 사다드린 울엄니 삼각 빤쓰
장농 속 깊은 곳에다 꽃밭을 만드셨다
꽃샘잎샘 이겨내고 햇살 환한 봄날에도
가슴속에 깊이 묻고 꾹꾹 쟁여 숨겨왔을
아직도 뜯지 못한 울혈, 꽃빛으로 환하다
- 이남순 「꽃빛 만발」 전문 -
낙상이라도 하셨는지 어머니는 병원에 계시다. 서울과 함안이 지척이 아닌데 그는 수시로 그 먼 거리를 왕복하고 있는 듯하다. 작품 속에는 “줄줄이 딸만 다섯”이라 했으니 당시로는 아들타령으로 구박이 만만치 않았을 테지만 외려 요즘 세태로는 아들 다섯 키운 집보다 부모님은 더 편히 계실 것으로 보인다. 입원 수속을 끝내고 속옷을 챙기기 위해 고향집 어머니 장롱서랍을 열어보니 시인의 앞에 “대장엄 사리밭”이 펼쳐졌다. 딸들이 사다드린 예쁜 속옷을 꽃밭 가꾸듯 개켜 둔 사리밭이었다. “장롱 속 깊은 곳에다 꽃밭을 만드셨다” “살구꽃“으로 만발한 모습은 그야말로 ‘대장엄‘이 아니었겠는가. 아마 시인은 그 앞에서 진한 눈물을 쏟았을 것이다. 어느 시인일지라도 ‘삼각빤스’라는 말을 시에 넣기로 했을 때에는 많이 망설였을 것이다. 그러나 구순의 어머니가 구사하는 ‘빤스’라는 단어는 그저 베잠방이 이하도 이상도 아닐 것이다. 여기에 어떤 불순한 의도와 추한 너스레와 성적 모멸감 같은 의미가 들어갈 틈은 이미 없어져 버리고 비릿한 어머니의 체취만 남아 있는 다정한 모어로 남아 편안하게 독자에게 다가온다. 아마 어머니의 속옷이 차곡차곡 개여 있는 장롱서랍은 어머니 비장의 곳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남새를 내다 팔아 만든 잔돈 몇 푼이거나 자식들이 주고 간 적지 않은 용돈들도 꼬깃꼬깃 그 속옷 밑에 숨겨져 있었을 것이니 그것을 발견한 딸의 눈에 읽힌 것들이 “대장엄 사리밭”이 따로 없었을 것이었다. 이 작은 장롱에는 오랜 세월 딸자식 다섯과 지아비를 공경한 우리들의 어머니 모습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뜯지 못한 울혈”도 이제는 모두 용서하고 책갈피에 잦아들어 접힌 한 장의 예쁜 ‘마른 꽃‘이 되었을 것이다. 힘겹고 축축했던 슬픈 기억들은 다 사라지고 오롯이 고운 색감과 섬세한 꽃술만 남아 있는 식물 표본 같은 그림이 선연하게 펼쳐진 작품이다.
동태 살 저미다가 손가락을 베었다
믿어온 칼날마저 느닷없이 앵돌아져
무뎌진 주방살이에 뒤통수를 맞았다
샘 바람 잘못짚어 허청한 날 비웃으며
으르렁 비바람소리 호령으로 드높더니
한순간 의뭉스럽게 내 자리를 밀친다
넘어지면 밟고 가는 세상사 길모퉁이
지천명 눈으로도 한치 앞을 가늠 못해
뜰 안쪽 화초들까지 베인 상처 저리 깊다
*15호 태풍
- 이남순 「볼라벤* 지난 자리」 전문 -
한반도를 휩쓸고 지나갔던 태풍 볼라벤은 막대한 피해를 남기고 갔다. 시제는 태풍의 이름을 썼지만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은 뒤에 숨겨 둔 채 능청을 떨고 있다. 첫 수에서는 엉뚱하게 “동태살을 저미다가 손가락을 베었다”로 운을 뗀다. 그리고 둘째 수에서야 “으르렁 비바람소리 호령으로 드높더니”라며 태풍 이야기를 넌지시 던진다. 그러나 사실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은 마지막 수에 와서야 그 모습을 드러낸다. ‘볼라벤’의 위력과 피해를 이미 다 알고 있는 독자들로 하여금 “넘어지면 밟고 가는 도심의 길모퉁이” 세태가 ‘볼라벤’보다 더 크고 깊다는 것을 환기시키기 위해 세 수를 적절하게 병치해 둔 것이다. 이남순의 이야기는 다시 ‘골목’으로 돌아 와 있다. 고만고만한 동업자들이 조밀하게 개업하고 있는 관수동 골목은 경쟁사회의 축소판이다. 타사의 발전은 나의 불황이요, 뺏기고 빼앗아야 하는 주문들은 바로 “넘어지면 밟고 가는” 세태여서 곧 엄청난 바람과 폭우를 동반하고 “한 순간 의뭉스러운 내 자리를 밀치”는 태풍처럼 원초적인 우리의 삶을 초토화시킬 수 있다는 ‘골목의 몸부림’으로 읽을 수 있다. 또한 “믿어온 칼날마저 느닷없이 앵돌아져” “뒤통수”를 때린다는 첫 수는 작품 전체의 분위기를 은근히 내비치며 방향을 제시하였고 볼라벤을 시제로 사용하여 주제의 무게를 배가하게 조율한 장치는 ‘복선’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며 자칫 엇나갈 수도 있었을 세 수의 관계를 굳세게 끌어안고 있다.
더듬이로 가늠하며 한껏 밀고 가는 길에
안개 밭 휘 가르며 저녁 산에 먼저 오른
발치에 드리운 등불 앞서거니 길을 잡네
저를 지핀 그 마음 환하게 밝힌 자리
가시밭길 구비마다 더운 손 내밀어도
몰랐네, 제 속을 태워 감싸주는 불씨인줄
강물에 다가서면 에돌아 길을 내고
술에 젖어 상한 날도 거두어 준 아늑한 품
내 반생 어둠을 사르고 이지러지네, 저렇듯!
- 이남순「하현달처럼」 전문 -
이남순 시인이 보내 준 다섯 편의 작품을 읽으며 작품의 배열을 어떻게 할 것인지 필자 나름대로 순서를 매겨 보았다. 그런데 이 작품을 맨 뒤에 두는 것이 좋을 듯했다. ‘골목’에서 시작하여 ‘백수’의 이야기로, 그리고 ‘엄마’를 거쳐 다시 골목으로 돌아와 ‘태풍’을 만나 지친 시인이 자연에 회귀하도록 나열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에 두기로 한 작품은 가끔씩 아수라장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신성한 삶터에서 조금 벗어나는 여유를 가지고 있는 작품으로 보인다. 회사일로 가사로 바빴을 시인은 모처럼 삶을 내려놓고 “하현달”을 보며 “어둠을 사르고 이지러지는”달의 모습에서 “가시밭길 구비마다 더운 손 내밀어”주고 “제 속을 태워 감싸주는 불씨”라는 자각에 이르러 달의 엄청난 “아늑한 품”을 실감하게 된다. 자연은 늘 그냥 그 자리에 있지만 그것을 느끼고 감화의 대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정서의 힘이라 할 수 있겠다. 이렇게 이남순의 가슴에 자리한 하현달은 늘 그가 곤경에 처했을 때 큰 등불로 다가올 수 있는 것이리라. 「하현달처럼」에서 내려다보는 관수동 골목은 평온하기 그지없는 모습으로 떠오른다. 비정한 경쟁도 다툼도 살포시 잠이 들고 작업을 끝낸 동업자들끼리 대폿잔이라도 부딪히는 살가운 모습들로 가득하다. 삶이 팍팍하고 무겁다 하여도 이렇게 잠시 잠깐 에둘러 가는 것이 진정한 사람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모두에 언급했던 최인훈의 소설 「광장」에서 전쟁포로인 주인공 이명준은 남과 북을 마다하고 중립국으로 향하는 타고르호에서 실종되며 생을 마감한다. 최인훈은 다시 1973년판 서문을 통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12년 전, 이명준이란 잠수부를 상상의 공간에서 제작해서, 삶의 바다 속에 내려 보냈다. 그는 <이데올로기>와 <사랑>이라는 숨은 바위에 걸려 다시는 떠오르지 않았다./ 여러 사람이 나를 탓하였다. 그 두 가지 숨은바위에 대한 충분한 가르침도 없이 그런 위험한 깊이에 내려 보내서, 앞길이 창창한 젊은이를 세상 버리게 한 것을 나무랐다. 사람들은 옳다. 그러나 숨은바위에 대해 알고 있었다면 누가 잠수부를 내려 보낼 것인가. 우리가 인생을 모르면서 인생을 시작해야 하는 것처럼 (중략) 이명준은 그 암초를 피하지는 못했지만, 거기까지 이르는 사이의 바다 밑 지리며 심도에 대해서는 송신해 주었다.
최인훈의 말대로 광장에 이르는 골목은 무수히 많다. 이명준이 숨 가쁘게 헤맸던 심해의 미로도 그의 골목이었으리라. 이남순의 골목에는 관수동 수많은 삶들이 그대로 살아 춤추며, 넘어지고 미끄러지는 모습들까지 밀도 있게 독자들에게 전해지고 있다. 그가 수시로 만나 부딪히며 헤쳐 나가야 하는 골목 안의 암초들은 시인에게 강력한 항생제가 되어 줄 것이다. 그리하여 섣불리 주저앉지 않고 웬만한 바이러스에는 꿈쩍도 하지 않는 심지 굳은 내성을 만들어 그를 광장으로 이끌고 가리라. 골목의 군상들이 꿈꾸는 광장은 바로 길 건너 종로의 왕복 12차선일 수도 있고 청계천의 흐르는 물일 수도 있겠지만 시인의 꿈은 그 위를 나는 새일지도 모른다. 수많은 사슬을 끊어 내고 훌쩍 날고 싶은 새는 아직 문단의 말석이고 목소리는 드높다. 시상의 골짜기는 넓기만 하고 깊이는 훤히 들여다보이는 부족함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막이 오르기 전에 분위기를 잡거나 막간의 시간을 채우는 어릿광대도 반드시 그 자리를 거쳐서 말 그대로 넓고 큰 廣大가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듯이, 골목의 정담들을 밀도 있게 곱씹어 올리는 그의 저력을 보며 힘찬 발걸음으로 활기차게 광장에 다다를 것을 의심치 않는 소이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정용국 : 경기 양주 생. 2001년 계간 『시조세계』로 등단. 이호우,가람시조문학상 신인상 수상.
시집『명왕성은 있다』외. 오늘의시조시인회의 사무처장.
<<시와문화>> 2013년 여름호
첫댓글 자신의 상처를 아프지 않은 듯 풀어놓고 오늘 앞에 당당하게 서 있는 시인이 아름답습니다.
그 아픈 시간들 속에서 한 음보의 뜨거운 구절을 갈구할 수 있었던 힘은 뭘까..
아직까지도 상처를 양지 쪽으로 내놓지 못하고
맨땅에 머리를 박는 고통은 감내하면서도 치열하지는 못했던 나를 반성해봅니다.
솔잎이 버썩하니 가랑잎이 할 말이 없습니다. 쉽게 아물지 않는 신선한 상처는 희망이고 밑천입니다
저도 인사동은 가봤는데 관수동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어두운 과거를 스스로 치유하면서 늘 열정적으로 살아가시는 이남순샘, 응원합니다. 그리고 한결같이 유유자적 한듯하면서 때론 날카롭게 때로는 따뜻하게 평을 하시는 정용국샘의 인간적인 면을 좋아합니다.
임태진 선생님! 고맙습니다 선생님의 격려와 응원에 한 번 더 힘이 솟습니다. 인사동에서 관수동은 10분이내 거리입니다 인사동 오시면 꼭 연락하이소 ~
관수동에 뼈를 묻을 각오로...
그렇게 사랑하시다 가시것소...
관수동에 뼈를 묻을 각오라면
쓸쩍쓸쩍
우리 이야기도 한 삽 떠 넣소...
그래야 지도 관수동을 사랑할 것 같소...
여기서도 로맨스를.. ㅎㅎ
여기서도 질투를...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