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8월 30일
연중22주일 설교, '교회 너머의 발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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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우 여러분.
건강이 궁금한 시기입니다. 모두 평안하십니까.
오랜만의 휴가 잘 쉬었습니다. 가족들과 친구들을 만나면서 목회자가 된 후의 근황과 최근에 벌어지고 있는 교회의 일들이 주관심사였습니다. 교회를 걱정하고 욕할때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참 난감했습니다. 아무래도 교회에 묶여 있는 몸이다 보니 교회를 떠나 멀리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지탄받고 있는 한국 교회를 보며 앞으로 교우들과 저의 신앙과 삶의 길 또한 결코 쉽지 않을 것을 생각하니 가슴 한켠이 먹먹했습니다.
신천지때는 이단과 일부 대형교회를 비난했던것에 비해 코로나19 재확산으로 이제는 교회 모두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많아졌습니다. 몇일 전 교회 교단 대표들과 대통령과의 만남을 뉴스로 보면서 모두들 참담했을 것으로 압니다. 내부적으로 더 다양한 이야기가 있었지만, 언론은 국민들의 안전보다는 예배만을 중시하는 반사회적인 집단으로 교회를 낙인찍었습니다. 사실 국민의 생명을 우선하는 교단이 많았기 때문에 억울한 측면이 있지만, 그동안 교회가 사회에 끼친 문제점을 더 이상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사람들의 마음, 그것만큼은 받아들여야 할것 같습니다. 한국 교회의 현실 말입니다.
십자가의 길이 생명의 길임을 온몸으로 보여주셨던 예수님이라면. 고통과 비난을 무릅쓰며 오로지 하느님만을 향했던 예수님이라면. 우리들의 이러한 숱한 질문과 되돌아봄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따라 살겠다는 교회 공동체가 처해진 현실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현재 이 땅 이 곳, 교회와 우리 대신 그 참혹한 십자가를 다시 짊어지고 온갖 비난을 받으며 걸어가시는 예수님이 있는 것만 같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어떨까 상상하기조차 힘겨운 시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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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마태오 복음서는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것도 평소와는 다르게 베드로를 심하게 책망하면서 제자들에게 단호하게 명령하는 내용입니다. 염치 불구하고 오늘도 우리는 이천년 전 갈릴리에 계신 예수님 곁으로 다가가 당신의 마음을 따라가는 순례의 여정을 떠납니다.
지금 이 시간, 그동안 갈릴리에서 기적을 보여주며 복음을 선포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첫 발을 내딛는 순간입니다.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은 하느님 나라를 향한 생명의 길일 뿐만 아니라 십자가를 향한 죽음의 길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십니다. 비장한 시간이자 깊은 고뇌의 시간입니다. 제자들을 향한 애처로움과 간절함이 당신의 단호하고 명확한 목소리에 깊이 묻어 있는 이유입니다.
오늘 이야기 바로 직전, 예수님은 반석 위에 당신의 교회를 세워주고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고 베드로를 뜨겁게 격려하면서 응원해 주셨었습니다. 그러던 예수님께서 당신이 걸어가야 할 십자가의 길을 반대하는 베드로에게 느닺없이 추상같이 화를 냅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구나.’
사실 당신의 교회를 세워주고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신다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베드로는 수많은 교회 위에 우뚝 서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부패한 정치 권력을 뒤집어버릴 예수님 곁에서, 큰 힘을 가지고 서있는 자신의 모습을 꿈꾸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의 욕망에 찬물을 끼얹듯 당신을 따르는 진정한 제자는 모든 것을 버려야 된다고 명령합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늘 염려하고 걱정했던 것은 하느님의 백성들이 고통받고 상처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을 외면하는 예루살렘 성전의 대사제들, 율법학자들, 원로들이 얼마나 미웠겠습니까. 힘들고 지친 이들의 언덕이 되어야 할 하느님의 성전이 강도의 소굴로 된 당시의 현실이 얼마나 안타까웠겠습니까.
그들로부터 죽임을 당할 것을 알면서도 담대하고 당당하게 걸어갈 수 있었던 예수님의 걸음을 제자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습니다. 제자들이 꿈꾸었던 것은 예수님이 만들어낼 세상의 왕국에서 누릴 그들의 행복이자 기쁨이자 평화였습니다. 정도만 달랐지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이 원하고 누리는 것들과 크게 다를 것 없는 베드로의 마음을 읽으신 예수님께서 단단히 화가 나셨을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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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일동안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다시 읽습니다. 오늘의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임진왜란 당시 군인들에게 했던 이순신의 군령이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살고자 하는 자 여기 있는가? 목숨에 기대지 마라.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 죽음을 넘어설 수 있는 그의 담대함과 용기의 근원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무엇이 그 많은 부하들을 움직이게 했을까 궁금했습니다.
난중일기 끝 부분에 다다라서야 그 마음을 조금은 헤아릴것 같습니다. 마지막 전투였던 노량해전을 앞둔 어느날 밤, 돌산 앞바다 북동쪽 조금 떨어진 곳, 달빛에 비친 바다를 바라보며 백성들을 향한 마음을 써내려 갑니다. 죽음을 예상이라도 하는 듯 ‘악한 관리를 숙청함에는 풀 베듯 아니할 수 없고, 어진 이를 잘 대한다면 훗날 꽃이 피어나리라. 옛 곡조 높게 산과 바다와 강 먼 곳까지 퍼지도록, 거대한 파도와 같은 노래 그대들을 위해 부르노라, 쓸쓸히 비바람 부는 밤, 근심 걱정에 잠 못 이루고, 쓸개가 찢기는 듯한 슬픔, 살을 에듯 가슴이 쓰라린다.’ 죽음을 넘어섰던 그의 담대함의 깊은 곳에는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백성들의 고통에 대한 연민이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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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재확산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또 다시 학생들은 학교를 갈 수 없고, 상인들은 장사를 할 수 없고, 사람들은 만남을 꺼리게 되었습니다. 그 논란의 중심에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라고 말하는 한국의 교회와 예배가 있습니다.
물론 기독교에서 예배는 매우 소중합니다. 쉽게 말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과 은혜를 우리 눈에 보이도록 하는 성스러운 예식이 예배입니다. 특히 우리 기독교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깨닫기 위해, 살아계셨던 예수님의 삶과 신앙을 기억할수 있도록 예배를 풍부하게 발전시켜 왔습니다. 공동체가 그 예배 의무를 다하면서 교회의 권위 또한 성장한 것입니다.
당연히 우리들의 삶에서도 예배는 매우 소중합니다. 치열한 삶의 한가운데서 살아가는 우리네 평범한 사람들에게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배를 통해 예수님의 삶과 신앙을 다시 한 번 기억하며, 하느님 앞에서 스스로의 삶을 되돌아보는 것입니다. 바로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를 우리들의 삶 속에서 얼마만큼 잘 실천하며 살아가게 하느냐가 예배의 핵심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가 소중하다고 이야기할 때는 세상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이 고귀하고 위대하다고 여기게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들의 삶과 사랑을 고귀하고 위대하게 만들어내는 곳이 교회라고 선언해야 하는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코로나19 재확산으로 교회와 예배를 향한 사람들의 시선은 싸늘합니다. 더이상 교회는 문명사적인 대변화와 현대인들의 큰 아픔에 대해 대안을 마련할 수 없습니다. 더이상 세상 사람들은 어떠한것도 교회에 기대하지 않을만큼 교회 내부의 병폐는 고질적입니다. 쏟아지는 비난에 참담하지만 할말이 없습니다. 통렬한 비판에 고통스럽지만 방법이 없습니다. 나름 건강하고 개혁적이라고 여기는 성공회 또한 세상의 평가로부터 결코 자유롭거나 예외일 수만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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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로마서에서 전한 예수님의 마음을 나눕니다.
‘사랑은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악을 미워하고 꾸준히 선한 일을 하십시오. 희망을 가지고 기뻐하며 환난 속에서 참으며 꾸준히 기도하십시오. 성도들의 딱한 사정을 돌봐 주고 나그네를 후히 대접하십시오. 오만한 생각을 버리고 천한 사람들과 사귀십시오. 그리고 잘난 체하지 마십시오.’
모두들 힘든 시간이어서 설교를 준비하는 내내 주님의 위로와 격려가 들리기를 바랬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단호한 목소리만이 들리는 것 또한 지금 교회의 현실인 듯합니다. 솔직히 교회는 힘이 듭니다. 그렇게 말해야 합니다. 솔직히 교회는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게 선언해야 합니다. 가라앉는 난파선에 타 있는 듯합니다. 오늘 복음서의 베드로처럼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에서 생명을 보지 못하고 죽음만을 보는 듯도 합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이었다면 이 아수라장같은 현실에서도 하느님만을 향해 묵묵히 걸어갔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담대하고 당당하게 걸어갔을 당신. 당신의 걸음은 지금 우리들이 만들어낸 교회 너머에서 다시 시작하려는 듯합니다. 무너진 교회의 폐허에서 새롭게 걸어가시려는 듯합니다. 세상의 아픔과 고통을 부여잡고 가시는 예수님의 발걸음을 발견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당신의 길에 초대되는 교우들과 저이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주님의 은총이 교회 안에 가득하기를 소망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