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μεριμναω(merimnao)
마태복음 6장 25절 , 31-34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念慮 μεριμναω )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μεριμναω ( meromnao 염려 念慮 )는 헬라어 μερίζω + νοῦς의 형태로서 μερίζω(merizo) 즉 쪼개지다는 의미로 쓰이고 νοῦς(nus)는 지성(知性)라는 의미에서 온 합성어다.
살면서 염려 불안 걱정 없이 살 수 있는가? 하여 성경에서 이 문제를 다루는 주옥같은 말씀을 찾는다.
마태복음 6장 31절 "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 그런데 이 구절을 일고 나면 희망보다는 좌절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믿음이 부족해서 그럴거야 . 그래도 60여 년을 신앙생활을 해 왔는데 믿음이 조금은 부족해서 그럴거야 라고 스스로 위안을 받기도 한다. 우리 중 정말로 일상 생활 중에 염려 없이 사는가?
믿음이 있는 것 같은데도 계속 걱정 불안 근심에 시달리는 경험을 하게 되다 보면 신앙연조가 더 오랠수록, 혹은 진실되게 살고자 하는 사람일수록 더 믿음이 부족하거나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어떨 때는 제대로 믿고 있지 않다는 생각에 , 불필요한 영적 부족감이나 약간의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기도 하다.
자세히 구절을 살펴보자 마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본문을 포함하여 구절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하여 성경을 몇가지 관점에서 탐구하여보자
본문에서는 우리가 우리의 일을 이루지 못한 이유가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하지 않아서 그의 의를 구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나름 그의 나라 즉 천국을 사모하고 불철주야 그리스도의 의를 따라가기 위해 나름 노력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교인들은 “모든 것”은 고사하고 "어떤 것"도 주시지 않았다고 느낀다 . 그래서 실망하기도 한다.
그러면 그대로 실망하고 낙담할 것인가? 아니면 혹시 내가 이 성경에 대하여 무언가 잘못 알고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닐까? 아니면 깨닫지 못한 어떤 것이 있는가라고의심해 본다.
그래서 다시 자세히 성경을 상고해 보니 아직 깨닫지 못 한 것이 몇가지 있는듯하다.
첫 번째는 염려를 해결하는 일 중에 "염려를 제거하는 비결(knowhow)" 을 찾음으로 인해 발생한 것임을 발견한다.
성경 구절에서 "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이라는 조건 절을 읽고, 아 ! 염려를 해결 못하는 데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지 않음에서 왔구나 . 내가 이 비결(knowhow)을 몰랐서 생긴 일이구나 하고 스스로 위안한다. 염려하지 않고 살수 있는 비결은 "먼저 그의 나라를와 그의 의를 구"하여 해결함을 알았다고 기뻐한다.
분명 성경의 말씀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곡해하지 말자. 자세히 살펴 보고 말씀을 한 번 더 상고하자. 그러면 여기서 놀랍게도 "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주시리라"가 아니라 "더하시리라" 는 문장을 발견하게 된다..
"더하다"는 헬라어로 "프로스메오"(Prosmeo)로서 프로스는 나중에 영어의 pros- 의 원어 형태로 되었으며 "..로 향하여" 라는 의미로 쓰고 "meo"는 헬라어 접미사 형태로 "..로 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여기서는 결국에는 그렇게 될 것이다는 의미로 쓴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것은 더하시는" . 더한다는 의미를 깊이 상고하자. 유리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모습에서 보이는 신앙은 세상에서 실면서 꾸준하게 단련하고 연습하여 얻은 품성의 결과물을 내는 삶을 살아내는자에게 주시는 "더해 주심의 선물이다" "행하기만 하면 결국에 그렇게 될 것"임을 말한다.
즉 은혜로 주시는 결과로서의 염려하지 않음이다.
31절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구약의 예를 한 번 보자 병든 히스기야가 있다 "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심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께서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 하옵소서”(왕상 19:25)라고 기도했더니" 네가 삼일 안에 병에서 나음을 얻을 것이요 앗시리아는 포위를 풀고 제 나라로 돌아갈 것이며" 라고 기도에 응답받아 병이 나았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던 한 병든 재림교인이 있었다. 그는 병고침을 간절히 갈망하여 내 병이 나을까 비결을 찾던 중 성경의 히스기야가 이야기에서 희망을 찾았다. 히스기야가 살려 달라고 기도하였다. 그래서 그는 히스기야처럼 구하면 될 것이야라고 결론을 내린다.
말씀대로 여리고 성이 무너진 것을 보면서. 교회부흥에 노심초사하던 어느 개척교회의 목사가, 마침 근처에 있던 하나님과 반대될 법한 무당집을 보면서 땅밟기를 시전한다. 그것도 모자라 절집, 천주교회, 심지어 재림교회를 일곱 바퀴 씩 도는 땅 밟기 방법을 쓰다가, 무례하고 무지하다고 지탄받았다. 분명 그 목사는 믿음으로 여리고의 순종을 따라했다 그리고 한치의 의심없이 그대로 된다고 믿었고 그대로 실천했다. 그 목사는 분명 교회의 부흥이 비결을 성서적으로 찾았다. 그리고 행동에 옮겼다. 그는 비결(Knowhow)을 찾았고 믿음대로 실천했다.
그런데 그 병이 나았고 개척교회가 부흥이 되었던가? 히스기야와 여리고성의 사건은 하나님의 능력의 비결( Knowhow)을 보여 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줄 사건이라면 구태어 백성들이 수고롭게 도는 방법이 아니고 하나님이 직접 하실 것이다. 홍해를 건널 때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시46:1-11)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출14:13.14) 가만히 있어도 될 것은 된다.
이 두 사건은 분명 순종의 한 방법이었고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성경에 단 한 번 일어났던 특별한 사건이었다. 보편적인 사건이 아니라 특별한 것이었도 보편적인 것에 적용된 사례도 아니다. 순종의 한 예를 나타낸 것 뿐이다.
특별한 경험을 일반화시키는 경향에서 탈출해야 한다. " 내가 이런 은혜를 받았으니까 당신도 이렇게 하면 은혜를 받는다". "내 기도가 이렇게 해서 응답되었으니까 당신도 이렇게 하면 응답을 받는다"하는 종류의 비결신앙이다.
은퇴를 앞 두고 있는 영남합회의 한 친구 목사가, 목회 직전에 장가를 들기 위해 열과 성을 다해 기도했다. 그 친구의 유일한 약점은 매사에 진지한 것이다. 하루는 결심을 하고 어느 날 오얏봉에서 특별기도를 했다. "하나님 지금 배우자를 주세요 기도 후 첫 번째 내 눈에 보이는 여자와 결혼하겠습니다" 눈 떠 보니 한 아가씨가 있는데 자기와 대판 싸운 분이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우여곡절 끝에 그 분과 결혼해서 잘 살아 지금까지 왔다
이후에 그 목사는 "결혼을 앞둔 모든 젊은이들 나같이 기도하시오 그러면 될 것이요" 라고 설교할 수 있을까. 보편적인 일일까?
두 번째로 이 구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생활속의 성(聖)과 속(俗)의 문제에 대한 구별이다 .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교회와 종교에 관계된 것은 거룩게 여겨 행동하고 세상적인 일이나 일상사는 속되어도 된다고 간주한다. 그래서 이 구절을 “먼저 하나님의 일을 하면 그러면 하나님은 나머지 것을 잘 해결해 주신다”라고 이해를 한다. 그래서 교회와 교회 밖 종교적인 것과 비 종교적인 것을 나누어서 성과 속으로 습관적으로 구별하려고 한다. 그래서 “먼저 그의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을. 먼저 교회에서 예배를 잘 드렸더니, 먼저 봉사를 했더니, 먼저 헌금을 드렸더니, “주시더라”라고 이해한다면 심각한 이원화의 오류에 빠지는 것이다.
몇 해 전 우리교회에 다니다가 지방으로 이주하신 집사님이 있었다. 그는 당시 재림교회 장로님이 운영하는 한 업체에 다녔는데 하루는 나와 상담이 상담하기를 원헀다. 그의 고민은 그 장로님은 직장에서 세상 사람보다 더 폭압적이고 비양심적이다. 그리고 거룩하지 않게 생활한다. 도저히 그의 일상 상활에서 이방인보다 더 못하다고 고민하였다. 결국 그 집사님은 직장에서 나왔다. 장로님의 행동은 어쩌면 일상의 우리네 직장에서 흔히 만나는 일반적인 상사지만 집사님은 그가 장로였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교회에서는 거룩하니 직장에서도 거룩하다라는 일반적성경원리는 잘 지켜지지 않고 또 현실적이지도 않다.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여 호구지책으로 직장에 다니지만 그 직장의 장로는 나보다 더한 염려증 환자임을 알고 절망하지만 나는 "그럴 필요가 없다. 교회에서 장로로서 충실한 삶을 살았고 직장에서도 일개 자연인으로서 충성한 삶을 살았을 뿐이다" 라고 위로를 주았다. 물론 양쪽 일에 한결 같으면 좋았겠지만 이런 일로 신앙 생활에 염려를 더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 성경은 교회생활에서만 해당되고 거룩한 것에 국한된 사항은 아니다.
두번 째로 본문과 같이, 성경 중에 어느 난해한 구절을 이해하는 방법 중 어떤 것은, 성경이 주는 의미를 반대로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래서 이 말씀의 참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선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 가를 연구하기 전에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지 않는 가”를 반대로 생각해 보자.
우선 이 말씀이 의미하지 않는 바는 태만함이나 무책임함을 권장하는 삶은 분명 아니다. 한번 생각해 보자. 보통사람들이 염려하는 것 중 대부분은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책임감을 완수하지 못하거나 충분히 이행하지 못할 까 보아서 오는 것이다. 부모로서 자식에게 좋는 교육을 시키려는 책임감에서 생기는 염려 . 목사로서 교회부흥을 위해 염려하는 것 등은 당연하다. 그런 의미에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적어도 나태함이나 책임감 등으로부터 자유하라는 말씀은 아님이 틀림 없다.
세 번째로 이 구절을 이해하려면 마태복음 6장 전체의 맥락을 보아야 한다. 6장 앞단에서 예수님은 외식(外飾)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즉 염려와 외식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다. 즉 종교적 행위에 있어서의 외식이다. 이방인과 달리 유대인이들에게 이웃에게 자신의 경건한 신앙의 결과물은 보여 주는 가장 좋은 방법은 기도 금식 구제였다. 마태복음 6:6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하시면서 시장어귀나 회당에서 사람에게 보이려고 기도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셨다. 금식에 관해서는 “ 너희가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마 6;17) 이유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함이라“고 하셨다. 또 ”구제할 때는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마 6:2)고 기록했다.
여기 세 가지에서 동일한 주제는 하나님을 향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사람만 의식했다는 것이다.
성경을 더 자세히 살펴보면 " 보이려고"라는 구절이 나온다 1절 "사람에게 보이려고" 4절 "은밀한 중에 보시는" 5절 "사람에게 보이려고 " 16절 " 금식할 때에 슬픈기색을 보이지 말라" 18절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은밀한 네 하나님께 보이게 하라"
외식이 죄인 이유는 " 보이려고" 즉 "사람에게 보이려고 했다"는 것이다 . 보이려고를 추가로 해석하자면 성경에 단 한마디로 이렇게 정의한다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6:2절
사람에게 보이려고의 반대말은 사람에게 안 보이게 즉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 겸손하게 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것 대신 하나님에게 정직하게 보여 하나님이 영광을 받도록 “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외식(外飾)이다. 우리의 행위 중 사람의 눈에 잘 보이게 종교적 행위를 하는 것은 외식이라고 표현한다.
이어서 마태복음의 본문은 외식을 종결하기 위한 치료의 방법으로 주기도문이 이어지고, 다음 구절부터 바로 외식의 또 다른 형태의 변형되고 위장된 잘못된 신앙의 형태를 설명된다. 본문에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위선(僞善)이다. 잘못된 신앙행태가 인간에게 보여지는 형태로 나타나는 것을 외식(外飾) 이라 한다면 남에게 잘 보이지 않지만 은밀한 중에 계시는 하나님에게만 들키고 어떤 때는 자신도 잘못되었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아는 잘못된 신앙의 형태가 위선(僞善)이다.
이 위선을 설명하는 뚜렷한 네 성경절이 주 기도문 다음에 연속해서 나타난다.
"너희를 위하여"19.20절 하는 행위를 한다 구체적으로는
" 목숨을 위하여" 25절 " 몸을 위하여" 25절 " 의복을 위하여" 28절 " 내일 일을 위하여" 33절
그래서 외식과 위선은 이란성 쌍둥이다.
위선에 대해 24절에 분명히 지적한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 이라는 말씀은, 위선이라는 단어를 풀어 쓴 것이다. 위선은 때때로 다 할 능력이 되지 않으면서 두 가지를 다하려는 형태로 나타난다. 또 위선의 나타나는 형태가 이방인처럼 "위하여" 사는 사람이다. 목숨을 위하여 몸을 위하여 의복을 위하여 내일 일을 위하여 .. . 사람은 누구나 "위하여"산다. 나를 위하여든 하나님을 위하여든 둘 중 하나이다. 중립은 없다. 전술(前述)의 네가지 "위하여"의 형태는 인간사의 모든 것이 자신에 위하는 것을 주의하라는 기별이다.
모든 주권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잊고 사는 그리스도인을 위한 권면의 기별이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잘 먹고 잘 입고 잘 먹는 행위가 자신의 능력으로부터 왔다는 이방인의 관점에서 행동하지 말라는 것이다.
염려의 사전적 의미는 "앞일에 대하여 여러가지로 마음을 써서 걱정함" 으로 되어 있다. 염려한다는 것은 내가 주체가 되어서 미래의 욕구를 채우고자 할때 생기는 마음이라는 의미다.. 즉 과거나 현재가 아니라 앞으로 생기거나 생길지도 모르는 미래의 일에 대하여, 내가 스스로 통제하려는 마음의 욕구를 가지므로 생겨나는 것이다.
염려는 미래에 자신이 잘 되기를 원하는 것에서 온다. 그러면 다가올 미래의 일은 잘 된다는 보장이 있는가?
정리하면 염려의 탄생은 1. 자신의 행복을 추구함 2.추구하는 미래의 일이 잘 되기를 원함 3.그럼에도 그 매래가 잘 된다는 보장이 없다
(자신이 주인이 되어 자신의 미래를 자신이 통치하여 자신이 행복해져 자신이 최고가 되려는 추구)
사람은 누구나 다 행복해지고 싶고 행복이 지속적으로 이어지길 원한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말씀에서 말씀하시는 행복은 미래가 아닌 현재에 행해야 한다고 제자들에게 가르친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가? 그런데 사람의 생각은 현재가 아니라 미래에 있음으로 불행이 생긴다. 만일에 지금 백만장자인데 내일 죽는다면 행복할까? 행복은 미래에 있다고 착각함에서 염려가 생긴다.
대부분의 교인들은 예배당에 와서는 분명 이렇게 고백한다. “하나님의 우리를 창조하셨고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내 삶의 주인이시다” 라고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노래하고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찬양한다. 하지만 정작 밖의 일상생활로 돌아가서는 하나님이 내 먹고 마시는 삶을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일부러 그랬든지 부지 중에서든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고 이것이 심각한 영적인 외식행위 즉 위선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시는 말씀이다.
외식과 위선은 죄의 한 형태다. 그러므로 염려의 문제는 감정이나 가치관의 문제가 아니라 죄의 문제다. 죄의 문제의 해결책은 인간에게 없다. 우리는 염려가 인간의 가치관이나 감정에서 오는 것이니 내가 스스로 제어하기만 하면 해결할수 있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죄에서 오는 것이라면 죄의 유일한 해결책은 누구인가? 바로 예수그리스도이시다. 그분만이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
그러므로 염려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이다.즉 하나님을 신뢰하지 는다는 것이다.
“내 삶이 내가 주인이다.”라고 상각하는 것은 심각한 위선이다. 먹고 마시는 행위는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는 가치관을 버리고, 먹고 마시는 행위부터 신앙의 문제의 시작이라고 이제부터 생각을 바꾸자.
“ 먼저 하나님의 다스림을 구하라” 그리하면 먹고 마시는 문제들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해결이 있다는 말씀이다.
베드로전서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마태복음 6:31. 33.34 "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마지막으로 결론을 내 보자 마태복음 6: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이 문장의 해석을 흔히"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면 되지 뭘 미리 오늘 당겨서 염려하느냐"라고 한다 하지만 이 해석을 틀렸다. 여기서 앞 문장의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의 주어는 "내일 일"이 아니라 "내일"이다. 즉 "내일이 나를 염려해 줄 것이고"
그리고 다음 문장 " 한날의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는 "내가 괴로움을 당하는 것은 오늘 하루로 족하다"라고 해석하는데 이것도 틀렸다. 이 문장의 주어는 "괴로움"이 아니라 "today's troble" 즉 오늘의 고난이 주어다. "오늘의 괴로움의 족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라는 의미다."
그러므로 이 구절의 올바른 해석은 이렇다. "즉 내일을 염려하는 것은 내일이지 내가 아니다. 반대로 지금의 괴로움은 오늘을 감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는 염려와 아무 상관이 없는 존재다"라고 초청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행복이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존재이어야한다.
믿음을 다 써버려 종착역까지 간 사람의 결과물이 염려다.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는 이 말씀에서 깨달아야 할 또 하나의 진리는 예수님의 명령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행간을 자세히 살펴보면 명령이 아니라 위로다. 생활고 중에 닥치는 고난 중에도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권면은 염려하는 것이 죄가 된다고 책망하시는 것이 아니라 “염려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위로하시는 하나님 나를 조금 더 생각하면 좋을 것이라는 위로의 말씀이다. “들의 백합화와 공중의 새도 .. 내가 먹이시”는데 하물며 너는 내 아들이 아니냐“ 라고 위로 한다. 네 부담도 주관하시겠다. “염려하지 말라”라고 읽고 “내가 대신 염려하겠다”고 해석하자 .